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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15 : 조선의 역사 157 (선조실록 22)

두바퀴인생 2012. 6. 13. 01:23

 

 

 

한국의 역사 615 : 조선의 역사 157 (선조실록 22)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충주 탄금대 전투

 

 4월 26일 일본군 선봉이 상주를 출발하여 함창을 거쳐 문경에 도착하였다. 이어 27일에는 문경을 출발하여 조령을 넘었고, 28일 아침에는 안보역을 지나 정오경에는 충추 남쪽 단월역에 다달아 척후로 하여금 조선군의 상황을 정찰케 하였다.

신립도 27일 정찰병들로부터 일본군이 새재를 넘었다는 정보를 들었으나, 직접 말을 타고 새재를 정찰한 결과 일본군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자, 정찰병을 허위보고죄로 참형에 처하였다.

그날 밤 충주성 안에서 신립은 작전을 계획하였는데 조선군이 훈련이 들된 오합지졸인지라 고민하다가 한신(韓信)의 고사에 따라 탄금대 부근에서 배수진을 치기로 결정하였다. 신립은 바다를 건너와 북상하는 적의 피로한 틈을 타서 이들을 평지로 끌어내어 갑자기 몰아치는 전법을 쓰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립의 전술은 결과적으로 적을 제대로 잘 몰랐던 신립의 엄청난 실책이 되고 만다.   

 

28일 아침 일찍히 신립은 기병 4천, 보병 4천 도합 군사 8,000 여 명을 거느리고 충주성을 떠나 탄금대로 출발하여, 남한강과 달천이 합치는 중간지대의 저습지에 진을 치고 적이 남쪽 산간에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탄금대 동남쪽 들판은 습지였다. 더욱이 며칠 전에 비가 와서 발이 푹푹 빠졌다. 이때 군관 이운룡이 배수진을 보고 "사지(死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고 울면서 만류하였지만, 신립은 크게 화를 내며 그에게 곤장 30대를 때렸다. 조선군의 진용은 총지휘관인 도순변사 신립 장군, 순변사 이일, 조방장 변기, 종사관 김여물, 충주목사 이종장 등이 대오를 정비하고 있었다. 신립은 패전하여 도망온 순변사 이일과 조방장 변기에게 선봉에서 공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한편 적은 정오부터 공격준비를 시작하였다. 좌익대장 마쓰우라의 3,000병력, 우익대장 종의지의 5,000병력, 중앙에는 대장 고니시(小西行長)의 직할부대 7,000 병력이 합하여 1만 5천명이 공격에 직접 참가하였고, 아리마, 오오무라, 고지마등이 거느리는 3천 7백명은 예비대로 충주성에 위치하고 있었다.

적은 좌익부터 달천 우안의 본도를 따라 전진하고 나머지 부대는 충주 본 가도를 따라 탄금대에 접근하여 삼면에서 포위 공격하려 하였다. 신립이 명령하여 진을 치던 지역의 서쪽과 북쪽은 달천과 남한강이 막고 있으며, 동쪽과 남쪽에는 지금은 달천강의 제방을 하고 관개가 되어서 옥토가 되어 있으나 당시는 늪으로 되어 있고 갈대가 우거진 갯벌이어서 군사활동이 적당치 않았으며 더욱이 기마병이 말을 타고 달리며 싸우기는 불편한 지역이었다.

신립 장군은 종사관 김여물에게 장계를 초하게 하였는데, 김여물은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전투가 준비된 복장으로 붓을 잡고 장계를 썼다고 하니 당시 상황이 급박함을 짐작하게 한다. 적이 포위망을 점점 좁혀오자 전세가 더욱 급하게 된 신립은 1차로 기병을 돌격시켰다. 일천기의 군사가 일제히 칼과 창을 들고 함성을 지르며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공격하였다. 적은 보병이라 조선군이 조금 우세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전세를 파악한 신립은 다시 2차로 1천명을 혼전하는 싸움터에 진격시켰으나, 피아의 사상자만 내고 일진일퇴하였다. 신립은 3차로 2천명의 기병을 모두 돌진시키니 말의 돌진소리, 조총소리, 인마의 고함소리가 탄금대 벌판을 뒤덮었다. 하지만 말을 타고 달려가던 조선군의 기마병은 일본 조총부대의 말 그대로 '밥'이었다.

일본군의 대기마전술은 전국시대를 겪으면서 발전하여 왔는데, 대기마대용 목책을 세워 기병의 접근을 막은 후에 조총 사수들을 일렬로 사선(射線)에 늘어세운 후 멀리서 달려오는 적들에게 대열별로 연달아 일제사격을 퍼붓어 화망을 구성하여 한꺼번에 적을 물리치는 부대 단위 전투였다.


전세를 지켜보던 신립은 김여물을 남겨 놓고 직접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마지막 돌격을 감행하였으나, 벌떼 같이 덤벼드는 적병을 어찌할 수 없어 되돌아오니 종사관 김여물이 말을 타고 최후의 총돌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립이 웃으며 하는 말이 「그대를 이 위기에서 살려 볼까하오」하니, 김여물은 빙긋이 웃으면서 「이 사람이 어찌하여 죽음을 피하는 사람이 되오리까」하고 같이 말을 달려 총돌격의 선두에 서서 깊이 적중으로 들어가니 적진이 크게 흔들렸으나 이미 전세를 돌리기에는 늦었다. 신립과 병사들은 밀리고 밀려 상당수가 남한강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나머지 군사들은 충주목사 이종장과 조방장 변기의 지휘 아래 굳게 뭉쳐서 배수진을 끝까지 지키며 필사의 힘을 다하여 적과 싸웠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조선군의 두번째이자 사실상 가장 큰 규모의 정규군이 궤멸하였고, 사실상 한양까지의 문이 열려져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순변사 이일은 신립의 뒤에 따라 가면서 조총을 피하다가 대열이 무너지자 전장을  이탈하여 사잇길을 쫓아 산중에 들어 간 다음 적병 수 명을 만나서 활로 쏘아 죽이고 한강을 넘어 북으로 달아났다. 이일은 사람을 시켜 장계를 작성하여 급히 조정에 올리게 하니 조정에서는 비로소 충주전투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4월29일 신립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도성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일이 상주에서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부터 도성의 분위기는 이미 흉흉했다. 조정은 민심의 동요를 막으려고 도성 주민들의 피난을 금지했다. 밤이면 사대문을 닫아걸고, 나루의 배를 없앴으며, 골짜기 등을 뒤져 피난한 백성들을 색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립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위기감은 절정에 이르렀다. 대궐의 호위 군사들은 달아나고 궁궐 문엔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았으며 물시계는 시간을 알리지 않았다. 4월29일 서울의 분위기는 이미 파장 그 자체였다. 결국 선조는 비내리는 날 밤 백성과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신립 장군과 조선군 8천 기마대가 잠든  탄금대의 달천                                       

 

 

 

탄금대 전투에 대하여...

신립(申砬,1546-1592) 장군은 무장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별칭자는 입지(立之),시호는 충장(忠壯). 선조 원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도총부도사-진주판관을 거쳐, 1583년 온성부사로 보직되어 오랑케 이탕개를 격퇴시고 두만강을 건너 야인 소굴을 소탕하는 등의 무공으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게 된다. 그는 기병운용에 특출한 전술을 구사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게 된다.

 

1587년 흥양에 왜구침입으로 우병마사로 출병하였으나 왜구가 이미 철수한 뒤라 철수시 양가집 처녀를 첩으로 대려온 사실로 삼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얼마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다시 등용되어 직책을 수행 중 병사를 참살했다는 문제로 중추부동지사라는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신립이 가는 곳마다 부하들을 함부로 죽이는 성향이 강한 장수로 비난이 많았으나 한편으로는 용장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159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다시 보직되어 한성판윤에 승진되어 있을시 임진년 왜란을 맞게 되자, 1592년 삼도도순변사에 임명되어 왜군에 맞서 싸우다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전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충장공의 시호를 받게 된다.

 

후세 사람들은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에서 배수진을 치고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전멸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많은 문제점과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신립 장군이 8천명의 조선군으로 1만8천명의 일본군을 막아내는데 방어에 절대 유리한 문경 새재를 포기하고 탄금대에서 적과 평야전투를 벌였다는 점이다. 신립은 북방에서 야인들을 물리칠 때 처럼 자신의 주특기인 기마대를 이용하여 일본군을 한 번에 몰아치면 적의 대오가 무너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또  당시 조선군은 급조된 군대로 오합지졸이었으며 신립은 전투중 전선이탈이 뻔한 이들 병력을 효과적으로 전투에 임하여 한번의 결전으로 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 그는 탄금대로 떠나기 전 서애 유성룡을 만나 하는 대화에서 일본군의 조총에 대하여 유성룡이 묻자, "뭐, 조총이 쏘면 다 맞는답니까?' 라며 조총에 대하여 그리 대단한 무기기 아니라고 생각하며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 

 

또 조령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기에 시간적으로 너무 촉박하였으며 자신이 대리고 온 4000명의 기병대를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없다는 판단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최후의 결전을 시도하여 일본군의 예봉을 꺽을 수 있는 방법은 배수진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미 신립장군은 전쟁에 임할 당시의 심정은 준비되지 않은 전력으로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일본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판단을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왜란 당시 조선 최고의 장수로써 국가 전체를 보는 전략적 안목이 있어야 하거늘 제대로 된 군사가 없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정예 4000명의 기마부대와 일반병 4000명 도합 8000명의 정규군을 일시에 잃는다는 것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주력부대가 일시에 소멸되었다는 점은 결국 한성 방어는 물론 조정이 파천을 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을 야기한 점이다. 신립은 이점을 몰랐을까? 아마 알고 있으면서 스스로 죽음의 전술을 택한 이유는 무었일까? 우리는 여기서 의문을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전술적으로도 당시 탄금대의 지형 상황이 비가 온 뒤라 기마부대 온용에 부적합한 상태인 늪지대였다는 점, 일본군의 대기병 방책 전술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점, 기병대가 조총앞에 먹이감 밖에 되지 않는 다는 점, 당시 조선의 우수한 각종 화포를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였으며 실제 운용도 못하였다는 점 등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조선군의 문경 새재 방어전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지역 장수들이 문경 새재의 중요성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문경 새재에 주방어병력을 배치하고 장애물을 설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어야 했다. 상주전투에서 패한 이일이 적정도 모른채 허허벌판 강가에서 군대를 훈련중에 적에게 참패를 당할 바에는 문경 새재에서 벙어책을 강구했더라면 다소의 시간을 벌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8000명의 신립군이 증원되어 새재 관문에서 조직적인 전투를 벌일 수만 있었다면 적의 예봉은 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축차적인 철수로 일본군의 공격속도를 지연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 당시 조선군은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술을 펼치지 못했으며 그러한 생각을 도무지 못 한 이유가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이처럼 육전에서 동시대에 조선의 장수들이 병법을 운용함에 대부분 무능하였다는 점에 비해 이순신의 해전은 지형과 해류를 이용한 천부적인 병법의 귀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립의 기마대는 수차례 돌격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의 조총 사격 앞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게다가 주변에 논과 습지가 널려 있어 기마대가 돌격전을 계속 펼치기에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전세가 기울자 신립은 단기로 적진을 향해 돌격을 시도하다가 달천에 몸을 던져 순국한다.

 

<징비록>은 “여러 군사들도 모두 강물에 뛰어들어 시체가 강을 뒤덮었다”고 당시의 참상을 기록하고 있다. 신립은 용감했으나 무식하였고 지혜롭지 못한 장수를 만난 8천 장졸들의 죽음은 아까운 목숨을 버린 결과가 되었다. 이처럼 용감했으나 무식한 장수와 용감하면서도 지혜로운 장수의 차이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게 된다는 점을 주지해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