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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13 : 조선의 역사 155 (선조실록 20) 본문
한국의 역사 613 : 조선의 역사 155 (선조실록 20)
동래부사 송상현 사당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상주 전투는 전투라기보다 제승방략의 전략이 여지없이 허술한 전략이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조선군의 일방적인 패전이었다.
허술한 병무체계, 비겁한 병사, 무능한 지휘관
4월17일 경상좌수사 박홍의 장계를 통해 일본군의 침략과 북상 소식이 조정에 알려졌다.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 성응길을 경상 좌방어사, 조경을 우방어사로 삼고, 유극량과 변기를 조방장으로 임명하여 각각 죽령과 조령을 지키도록 했다. 하지만 임명된 장수들 모두 휘하에 거느릴 만한 병력이 없었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일이 데려갈 군사 300명을 차출하기 위해 병조에 보관된 병적을 점검했을 때 조정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명단에 올라 있는 사람의 태반이 서리와 유생 등 훈련을 전혀 받지 못한 백도(白徒)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일은 명령을 받은 지 사흘이 되도록 출발하지 못했고, 결국 군관 약간명만을 거느리고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른바 제승방략(制勝方略)에 입각한 병력동원체제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유사시에 각 고을의 수령이 군사를 이끌고 자신의 고을을 떠나 약속된 방어지역으로 집결하고, 중앙에서 임명된 순변사, 방어사, 도원수 등이 도착하면 그 휘하에 배속되어 지휘를 받는 체제였다. 실제 임진왜란 발생 직후 경상감사 김수는 문경 이남의 수령들에게 각 고을의 병력을 거느리고 대구로 집결하여 순변사의 도착을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순변사 이일의 도착이 늦어지고 일본군의 북상 소식이 알려지자 집결했던 수령과 병사들은 대부분 도망치고 말았다.
순변사 이일이 문경에 도착했을 때 고을은 텅텅 비어 있었다. 상주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지휘를 받아야 할 상주목사 김해는 도주했다. 이일은 할 수 없이 마을과 골짜기를 뒤져 장정들을 끌어모을 수밖에 없었다. 수백명의 병력을 모으긴 했지만 그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창졸간에 오합지졸들을 타이르고 훈련시키기에도 버거운 상황에서 적을 막을 수 있는 체계적인 대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당장 척후가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군은 이미 선산을 지나 북상하고 있었지만 이일은 척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적군이 상주 가까이 접근했다는 사실을 보고했던 사람의 목을 베었다. 유언비어로 군중을 동요시킨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이일은 병력을 거느리고 상주 북천 근처에서 진 치는 훈련을 하다가 일본군의 기습을 받는다. 일본군의 조총 사격이 시작되자 조선군 진영은 졸지에 와해되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조선군이 겁에 질려 활시위조차 힘껏 당기지 못한 채 무너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일은 조령을 넘어 충주로 도주했고 900명 남짓한 조선군 대부분은 섬멸되고 말았다.
상주전투는 임진왜란 초 조선군이 안고 있던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노출시켰다. 제승방략 체제가 지닌 병력 동원과 전개 방식의 한계, 오합지졸들을 끌어모을 수밖에 없었던 병무체계의 문제점, 지방 수령들의 무책임한 직무유기, 기본적인 척후조차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 지휘관의 무능 등이 그것이다. 요컨대 오랜 평화의 시간을 거치면서 조선의 국방 태세가 붕괴되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려 있었음을 드러냈다. 반면에 일본군은 달랐다. 그들은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가졌을 뿐 아니라 100년 가까운 전국시대를 치르면서 전투에는 이력이 난 ‘베테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합지졸’과 ‘베테랑’의 대결.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상주 전투
일본군이 부산진성과 동래성, 밀양성을 격파하며 북상을 시작하자 경상 순찰사 김수는 제승방략 체계에 따라 각 읍 군사를 모집, 정해진 위치에서 기다리라고 각 고을에 통지하였고 이에 따라 문경 이하 수령들은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로 집결했다.
한편, 조선 조정은 북진해 오는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영남지방으로부터 조선의 내륙으로 접근하는 길목인 삼로(三路)를 방어하기 위해 순변사 이일을 중로(中路)에, 성응길을 좌방어사로 임명해 동로(東路)에, 조경을 우방어사로 임명해 서로(西路)를 각각 방어하게 함과 동시에 조령, 추풍령 요충지에는 조방장 유극량, 변기를 방어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모두 현재 소유한 병력이 없어 단지 스스로 군관(軍官)을 뽑아 대동하도록 하였다. 순변사 이일 역시 한양에서 300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생각이었지만 제대로 된 병력을 구할 수 없었다.
이일은 종사관(從事官)으로 홍문관 교리 박지, 윤섬(尹暹)을 선발하고 군관 몇 명과 사수 약 60여 명만 데리고 먼저 출발을 하였고, 군사는 별장 유옥이 모집하여 뒤따르기로 했다. (박지는 경상감사 김수의 사위였기 때문에 이일이 김수의 적극적인 협조를 위해 선발했다고 한다.)
서울지역에서 병력을 모을 수 없었던 원인에 대해선 조금 더 자료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는 제승방략에 따르면 이일이 지휘해야 하는 병력은 대구에 모여 있는 경상도 지역 병력이긴 하지만 이전까지의 제승방략에 따른 왜란의 예를 봤을 때 경군(京軍)이 함께 파견되었던 적도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서울 지역에 왜 군사자원이 없었는지는 좀 의문이다.
당시가 국가 비상상태로 이일 외에 삼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도 있고 소규모 왜란과 달리 서울지역 방어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그런 병력을 제외했기 때문에 남은 병력 자원 중에 모집할 병력이 없었던 것인지도 생각해 볼 일이긴 하다.
어쨌든 이일이 2~3일 동안 서울에서 병력을 모으려고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대구에 모여 있던 군사들이 붕괴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들은 최고 지휘관인 순변사 이일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연일 큰 비가 내리고 군량마저 바닥이 나고 일본군이 내습해 온다는 유언비어마저 돌기 시작하자 탈영을 하는 병사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들을 통제 지휘해야하는 수령(守令)들마저 도망하여 결국 이일이 문경에 도달했을 때는 군사들은 모두 흩어져 버린 상황이었다.
이때 대구에 모여 있던 병력 규모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당시 경상도 병력자원을 감안했을 때 최소 1만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이일이 이 병력을 제때 수습했다면 개전 초반 상황이 조금 바뀌었을 수도 있었지도 모른다.
이일은 문경을 거쳐 24일 상주에 도착했다. 당시 상주 목사 김해는 산 속으로 달아나 버렸고, 판관 권길이 혼자서 상주 일원을 지키고 있었다. 대구에 있던 병력이 없어져 휘하 병력이 없던 이일은 상주에서 병력을 얻어야 했기에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면서 산으로 피난을 갔던 백성들을 다시 성으로 돌아오게 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그 중 군사를 모집하여 8~9백여 명을 징발했다. 이일은 이들 농민병과 휘하에 데려온 군사 60여 명을 합하여 군을 편성했다.
(여러 기록에는 이때 이일이 서울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군사를 모아서 최대 4~6천명을 모았다는 기록도 있지만 경상도순변사인 이일이 다른 지역에서 병력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병력 규모가 너무 큰 편이라 신빙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생각된다.)
저녁에 개령에 사는 한 사람이 이일을 찾아와 일본군이 근방까지 왔다고 알려 왔으나, 이일은 이 정보를 믿지 않았고 오히려 개령 사람을 『민심을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참(斬) 할려고 했다. 이에 개령 사람은 『오늘 밤이 지난 뒤에도 일본군이 오지 않는다면 그때 죄를 인정하겠다』고 반박하였으나 듣지 않고 참형에 처했다(다음날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때 일본군 1번대는 낙동강을 도하하여 선산에 진출하여 이날 저녁 상주 남쪽 20여리 지점인 장천리에 진을 치고 상주 일대 조선군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당시 이일은 북방에서 실전 경험도 여러 차례 겪었고 [제승방략]을 저술하는 등 전략, 전술에도 능하여 신립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무장이었다. 그런 이일이 기본 중 기본이라는 척후 활동을 왜 무시했는지 의문이다. 일본군의 진격 속도가 생각 보다 빠른 탓도 있겠지만 공식적인 일본군의 진격 정보가 제대로 보고되지 않을만큼 경상도 지역이 혼란에 빠져 있었는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25일 이일은 아침부터 군사들을 상주성 북쪽 북천(北川) 강변으로 데리고 나가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당시 병력이 농민병이긴 하지만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어차피 조선의 군사제도는 양인개병제로 16~60세 모든 양인 남성은 군복무를 해야 했기 때문에 일부 직업 군인을 제외하면 농민이 곧 군사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방군수포로 대표되는 대립문제가 일반화 된 상태였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농민이 평상시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받아 봤을지가 의문이다.
하여튼 이일은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군사 훈련이 급선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문헌에 따르면 상주시 낙양, 무양, 남성, 서성 일대의 원형으로 성을 쌓았다고 한다. (현재 상주시는 북천 근방에 전적비를 세우고 당시 전투에서 전사한 이들을 기리고 있다.)
문제는 이일이 북천에서 오합지졸 농민병을 훈련시킬 동안 이때도 주변에 척후병이나 보초병을 배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군의 접근 속도를 예측 못했기 때문에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오히려 일본군은 몇 차례나 척후병을 보내 조선군의 상황을 일거수일투족까지도 정찰하고 있었다. 훈련을 받고 있던 군사 중에 정찰을 하고 있는 일본 척후병들을 발견하였지만, 죽은 개령 사람이 생각나 감히 보고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조선군이 훈련을 하고 있던 중 일본군은 상주성내로 진출하여 상주성 안 몇 군데에 불을 질렀다. 성 안에서 연기가 일자 이일은 군관 박정호(朴挺豪) 등을 보내 알아 보도록 하였는데 군관이 다리 밑을 지나가던 순간 숨어 있던 일본군이 조총으로 저격한 뒤 목을 베어 가지고 사라졌다. 잠시 후 일본군 본진이 조선군을 양 옆에서부터 포위하면서 전투가 시작됐다. 일본군은 조총을 사격하며 접근하였고 조선군은 활로 응사하였다.
이일이 『나가서 싸우라』고 독전하였으나 뛰어나가는 자는 몇 사람 되지 않고 도망치는 자가 더 많았다. 일본군은 계속해서 압박하였고 조선군은 진이 붕괴되며 점차 밀렸다. 한양에서 데려온 사수 60여 명이 분전했으나 역부적이었다. 상황이 최악으로 몰리자 이일은 산길을 타고 전장을 탈출했다.
이후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고 조선군의 피해에 대해선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등과 같은 기록을 봤을 때 대부분 전사한 것 같다.
종사관(從事官)인 홍문관 교리 박지ㆍ윤섬(尹暹),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 판관 권길(權吉)도 모두 전사했다. 순변사 이일은 그 길로 문경에 이르러 패전을 조정에 알리고 조령에 있던 조방장 변기와 충주 신립 진영으로 갔다. (병조좌랑 이경류는 조방장 변기의 종사관이었는데 변기와 떨어져 이일을 지원하러 온 것인지 변기 군 전체가 상주에서 이일군과 합류한 것인지는 확인이 안 된다. 또 난중잡록에는 박지는 이때 전사하지 않고 피신했다가 자결했다고 한다.)
이일의 패전으로 상주성은 임진년 4월 24일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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