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614 : 조선의 역사 156 (선조실록 21) 본문
한국의 역사 614 : 조선의 역사 156 (선조실록 21)
문경새재의 오늘날 모습. 새재는 문경에서 충주로 이어지는 교통의 관문이다. 주변에 주흘산, 조령산 등 험한 봉우리들이 즐비하다. 명군 제독 이여송은 훗날 “신립이 새재라는 천혜의 요새를 포기했던 것이 어리석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신립이 천혜의 요새를 버리고 배수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문경시청 누리집 |
1592년 4월 부산첨사 정발은
700여척의 적선을 보고도
조공 선단으로 오인했다
침략 보름 만에 서울길이 뚫렸다
도성은 파장 그 자체였다
민심을 잡고자 피난을 금했으나
대궐 호위군사들조차 달아나
궁궐문엔 자물쇠가 걸리지 않았다
신립 장군의 오판과 만용
일본군은 침공 10여 일만에 경상도지역을 석권하고 이제 그 칼끝을 충청도로 돌려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그들의 앞에는 소백산맥이라는 험준한 천험의 장벽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당시 소백산맥에는 3곳의 관문이 있었다. 하나는 소백산과 도솔산 사이의 죽령으로 경상도 영주와 충청도 단양을 잇고 있고, 다른 한 곳은 주흘산과 백화산 사이의 조령으로 경상도 문경과 충청도 괴산-충주를, 마지막 한 곳은 또 하나의 백화산과 황학산 사이의 추풍령으로 경상도 금산과 충청도 옥천을 잇고 있었다.
소백산맥은 침공하는 일본군으로서는 큰 장벽이었지만 수비하는 조선군에게는 하늘이 준 천연의 지형이었으므로 당연히 조선군은 이 관문을 지켜야 했었다.
용장 신립의 실책, 척후병의 목을 베다
4월 26일 조선의 3도 도순변사에 임명된 신립은 부장 김여물과 80여 명의 군관을 이끌고 충주에 도착하였다. 충주목사 이종장이 충청도 군현의 군사 8,000 여 명을 모아 놓고 신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전쟁이 터진 이후 가장 규모가 큰 조선의 정규병들이었다.
신립은 충주의 단월역에 군사를 주둔시킨 후 충주 목사 이종장과 부장 몇 사람을 거느리고 조령(鳥嶺)으로 지형을 정찰하러 나갔다. 이때 종사관 김여물등이 「적군은 대병력이고 우리는 병력이 적으니 정면으로 싸우면 전세상 불리할 것 같으니 마땅히 부근의 험하고 중요한 지형을 지키고 복병을 배치하였다가 적이 협곡 안으로 들어오면 좌우에서 일제히 공격하여 격멸하고 만일 적의 공격을 당할 수가 없으면 차라리 물러가 한성으로 들어가서 지키는 것이 좋다」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충주목사 이종장 역시 「적은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우리가 넓은 평지에 있는 것은 옳지 못하고 험한 곳을 지키는 것이 제일 좋은 방책이다. 그러므로 넓은 들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하니 조령의 험한 곳에 의지하여 깃발을 많이 세우고 연기와 불로 적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적을 기습하여 승리하는 방책으로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신립은 「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에 맞아 들여 용맹한 기병으로 물리치는 것이 이기게 될 것이요, 또한 적은 이미 영 밑에 와 있다고 하니 우리가 영(嶺)위에까지 나가서 진지를 확보하기에 앞서 적과 서로 부딪치게 된다면 사세가 위태롭지 않겠소. 뿐만 아니라 우리 군사들은 모두 훈련이 미숙한 새로 뽑은 군사인데 더구나 그들은 평소에 의사가 소통되지 못하였으며 상하가 단합도 충분하지 못한 즉 이제 사지(死地)에 넣지 않으면 그 투지를 드높일 수 없을 것이요」라며 조령 방어를 포기하였다. 김여물은 신립이 새재를 포기한다는 생각이 굳어지자 「그렇다면 새재의 여러 곳에 깃발을 꼽고 허수아비를 배치하자. 그러면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킬 수 있을 것」 이라고 조언했지만 신립은 이것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훈련이 안 된 오합지졸로는 적을 어떻게 해볼 수조차 없었다”는 이일의 보고를 받은 직후 신립 진영에서는 논란이 빚어졌다. 신립의 참모 김여물은 적군보다 병력이 현저히 적은 상황을 고려하여 문경새재에 진을 치자고 건의했다. 조령의 험준한 지형을 활용하여 지키다가 역습을 펼치자는 주장이었다. 신립은 김여물의 제안을 거부하고 들판에서 싸우자고 했다. 높고 험한 곳에서는 기마병을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실제로 충주 읍내에서 5리쯤 떨어진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신립은 일찍이 북방에서 기마병을 활용하여 여진족을 물리친 경험이 있는 장수였다. 또 휘하 병력의 상당수가 오합지졸인 상황에서 그들의 마음을 다잡으려면 배수진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신립 또한 척후를 소홀히 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조령에 복병이나 척후병을 제대로 배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군은 조령 입구에 이르러 험준한 산세와 복병에 대한 우려 때문에 정찰에 몹시 신경을 썼다. 4월27일 저녁 군관 한 사람이 와서 일본군이 고개를 이미 넘었다고 보고하자 신립은 그의 목을 벤다.
4월28일 일본군은 단월역으로부터 길을 나눠 공격을 개시했다.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본사>에서 “신립이 탄금대 앞에 초승달 형태의 진을 치고 일본군의 중앙부를 향해 돌격을 시도하는 등 용맹하게 싸웠다”고 기록했다. 이 싸움에서도 조총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 때 상주에서 패한 이일이 충주 단월역 신립의 진영으로 찾아왔다.
이일은 신립에게 「적은 경오(庚午), 을묘(乙卯)때의 왜적과 다르고 북쪽 오랑캐 같이 치기 쉬운 적이 아니니 물러가서 지키는 것만 못하다」라고 건의하자, 신립은 크게 화를 내며 이일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또 다시 우리 군사까지 망쳐 놓으려는 것인가」하고 크게 책망을 하였으나, 곧 이일과 변기 두 장수를 선봉으로 삼아 지난날의 죄를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신립은 군사를 이끌고 충주성으로 들어갔다.
상주전투의 양상은 충주에서도 비슷하게 재현되었다. 충주는 사실상 서울로 향하는 적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방어 거점이었다. 그 때문에 당시 충주에는 도순변사 신립 휘하에 약 8000명의 병력이 모여 있었다. 신립은 조선 조정이 가장 높이 신뢰하고 있던 용장이었고, 실제 그가 대군을 거느리고 왔다는 소식에 충주의 사민들은 피난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616 : 조선의 역사 158 (선조실록 23) (0) | 2012.06.14 |
---|---|
한국의 역사 615 : 조선의 역사 157 (선조실록 22) (0) | 2012.06.13 |
한국의 역사 613 : 조선의 역사 155 (선조실록 20) (0) | 2012.06.11 |
한국의 역사 612 : 조선의 역사 154 (선조실록 19) (0) | 2012.06.10 |
한국의 역사 611 : 조선의 역사 153 (선조실록 18) (0) | 2012.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