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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07 : 조선의 역사 149 (선조실록 14)

두바퀴인생 2012. 6. 5. 01:26

 

 

 

 

한국의 역사 607 : 조선의 역사 149 (선조실록 14)

                                                                         

                                                                              정발 첨사 사당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일본의 정세

 

센고쿠 시대 통일

 1392년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남북조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전국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봉건영주세력에 대한 쇼군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의 봉건영주인 슈고다이묘들이 사분오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1467년오닌의 난을 계기로 무로마치 막부가 몰락하고 그로부터 100여 년 동안 군웅이 할거하는 센고쿠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 혼란의 시기에 지방의 신흥무사집단이 구 세력인 슈고다이묘 집단을 대신하여 자립 태세를 갖추어 센고쿠다이묘로 등장하였다.

 

그러던 중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출현하여 다수의 경쟁 세력을 굴복시키고 일본의 실질적 지배권을 장악함으로써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 갔다. 그러나 1582년 노부나가가 그의 부장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에게 피살당하는 이변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실권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인물인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에게로 돌아가고 말았다. 히데요시는 미쓰히데의 반란 세력을 토벌하고 오다 가문을 장악하여 일본 통일 사업을 계속 추진하였다.

 

1583년 히데요시는 시바타 카쓰이에(柴田勝家)와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거의 수중에 넣었다. 같은 해 음력 3월에는 수륙교통의 요지인 이시야마 혼간지 자리에 장대한 오사카 성을 쌓기 시작했으며 1584년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쓰(織田信雄)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연합군과 전쟁에 들어갔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상경하여 화의가 성립되었고, 이로써 후방을 안정시킨 히데요시는 1585년 시코쿠를 평정하고 조정으로부터 간파쿠, 다음 해에는 다이죠 다이진에 임명되고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출신 성분이 미천한 히데요시는 일본 천황의 권위를 이용하고자 했다. 간파쿠가 된 히데요시는 천황으로부터 일본 전국의 지배권을 위임받았다고 칭하며, ‘소부지(墜無事, 전국의 평화)’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이를 바탕으로 쟁란을 거듭하던 다이묘들에게 정전을 명령하고, 영토의 확정을 히데요시 자신에게 맡기도록 강요했다. 1587년에는 명령에 따르지 않던 규슈의 시마즈 세력을 정벌하고 1590년에는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오다와라 성을 함락시켰으며 도호쿠의 다이묘를 복속시키면서 전국 통일을 완성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치·경제 개혁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는 곧 강력한 정치, 경제 개혁을 시작하였다. 도요토미 정권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검지(檢地)라는 토지 제도 개혁과 가타나가리(刀狩)라는 무기 몰수 정책이었다.

 

1591년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검지장과 구니에즈(지도)를 제출하게 하여 전국 통일을 과시했다. 검지장을 토대로 토지를 측량하고 수확고를 조사하여 전국의 생산력을 쌀로 환산하는 ‘고쿠다카(石高)제’를 실시하고 다이묘에게는 고쿠다카에 상응하는 군역을 농민에게는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대신에 고쿠다카에 합당하는 연공을 징수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고의로 황무지로 이봉하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임진왜란에 불참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가타나가리는 농민들에게서 무기를 몰수하고 농민의 신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 1588년에 시행되었으며 1591년에는 ‘히토바라이(人掃)령’을 내려 신분상의 이동을 금지하고 사농공상의 신분을 확정하여 병농분리를 완성시켰다.

 

일본의 군사력

15세기 중엽의 센고쿠 시대에 이르러서 전투의 양상이 대규모의 집단 보병 전술로 전화됨에 따라 전투의 주체도 소수의 특정한 영웅이 아닌 보병의 밀집 부대로 옮겨지게 되었다.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아시가루(足經)라는 경장비보병이 출현하여 전투의 승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들은 16세기 중엽에 철포(조총)(텟포)와 화약이 전래되면서부터 철포 부대인 철포조와 궁사 부대인 궁조로 편성되어 전투 시 공격의 주역을 맡았다.

 

당시의 전국 다이묘 세력 가운데서 가장 먼저 이와 같은 전술 변화를 이용하여 통일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이 바로 오다 노부나가였다. 1575년 오다 노부나가다케다 군과의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조총을 보유한 보병을 주력으로 다케다군의 기병을 격파하여 전술의 변화에 획기적인 전기를 열었다. 그 후 1582년에 이르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투 부대의 병종을 기병과 보병의 두 가지로 대별하고, 사무라이대장(侍大將)의 지휘 하에 기병, 총병, 궁병, 창검병 등의 단위대를 편성한 후에 각조의 지휘관으로 기사, 보사 등을 두었다.

 

이 무렵의 일본군은 부대를 삼진 또는 사진으로 나누어서 단계적으로 공격을 수행하는 것을 기본적인 전법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즉, 제1진의 기병이 2개 대로 전개하여 포위 태세를 갖추면 제2진의 총병이 적의 정면에서 조총을 쏘면서 돌격을 감행하고 이어서 제3진의 궁병이 진격하면 제4진의 창검병이 뒤따라 돌진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비(非)전투 요원으로서는 소인(전령 업무), 하부(수송 업무), 선두 및 수주(순박운앙 업무), 대목부(감찰 업무), 의사, 승려{부대특성에 따라 서양에서 파견된 신부가 이 임무를 담당하기도 했는데 이런 경우는 지휘관 다이묘가 그리스도교 신도일 경우에 해당되었다. 일례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에서 성직자로서의 업무를 담당한 사람 중 한 사람이 스페인의 세스페데스 신부였다.} 등이 전투 부대와 작전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도요토미는 이와 같이 변모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여 1586년 무렵부터 대규모의 건조 계획을 추진하여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이미 천여 척의 전함을 확호한 데에 이어서 종전 무렵에 이르러서는 3천여 척이라는 대규모의 선단을 보유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인 1591년에는 사이카이도(西海道), 난카이도(南海道), 산요도(山陽道), 산인도(山陰道), 기나이 및 그 동쪽의 일부 지역에 동원령을 내려서 33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 무렵의 일본군은 철포, 창, 궁시, 왜도 등 4가지의 개인 무기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주종 간의 단결력이 강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실전 경험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전쟁에서 탁월한 전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

“나는 태양의 아들…조선의 국왕이여 알현하라”

 

선승(禪僧)처럼 그려져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를 만났던 조선 통신사 일행은 그의 모습이 볼품없었다고 폄하하면서도 그의 눈빛만큼은 아주 매서웠다고 평가한 바 있다. ‘태양의 아들’을 자처하면서 대륙 정복의 망상을 펼치려 했던 그가 일으킨 침략전쟁은 동아시아 삼국에 비극을 몰고 왔다.(위) 일본에 상륙했던 포르투갈인들과 일본인들의 교류 장면을 그린 병풍.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통일 직후 명과 조선 침략을 공언하면서 선교사들을 통해 포르투갈로부터 전함과 승조원들의 원조를 받아내려고 시도했다. 오사카 천수각 특별사업위원회 편 <히데요시와 오사카성>(1988)에서 전재

 

 

예로부터 조선에서는 일본 사신을 맞이할 때는 연로의 군읍(郡邑)에서 백성들을 동원하여 창을 잡고 늘어서서 군대의 위엄을 보였다. 일본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귤강광)가 인동(仁同)을 지나다가 창을 잡고 있는 사람을 흘겨보고는 비웃기를 “너희가 가진 창의 자루가 너무 짧구나”라고 했다. 서울에 도착하니 예조판서가 잔치를 열어 접대했다. 술이 얼큰해지자 일본 사신 귤강광이 잔치판에 후추를 흩어놓았는데, 기생과 악공들이 다투어 그것을 줍느라 어지러워졌다. 그가 숙소로 돌아와 탄식하며 역관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망할 것이다. 기강이 이미 무너졌으니 어찌 망하지 않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1587년(선조 20) 9월 쓰시마가 보낸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가 조선에 왔을 때 그를 접대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담은 <징비록>의 기록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막 통일한 직후, 군사력에서 자신감이 넘치던 일본인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이 흥미롭다.

 

 

 

포르투갈 힘을 빌리는 것까지 염두에 둬

 

전국시대 통일의 초석을 놓았던 오다 노부나가는 1582년 6월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에 휘말려 최후를 맞았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뒤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그는 오다의 유업을 이어 정복사업을 계속 벌였고 그 과정에서 권력을 더욱 키워 1585년 7월 간파쿠(關白)에 취임했다. 간파쿠란 천황을 보좌하여 국정을 총괄하는 직책을 가리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어 1587년 규슈의 유력자 시마즈씨(島津氏)를 복속시킴으로써 사실상 일본의 통일을 달성한다.

 

간파쿠가 된 직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넘어 바깥세계까지 넘보기 시작했다. 그는 1585년 9월 히토쓰야나기 스에야스(一柳末安)에게 보낸 글에서 명을 정복하겠다는 구상을 전했다. 이듬해 3월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류를 만났을 때도 명과 조선을 침공하겠다는 계획을 털어놓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자리에서 병력 수송을 위해 2000척의 선박이 필요하다며 성능이 뛰어난 포르투갈 선박 2척과 우수한 승조원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대륙 침략을 위해 포르투갈의 힘을 빌리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규슈를 평정하자 침략 구상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1587년 6월 하카타에서 쓰시마의 지배자 소씨(宗氏) 부자를 만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의 교섭을 명령했다. 일본이 통일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 국왕을 불러와 자신을 알현토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기한을 1588년까지로 못박았다. 불응할 경우 조선을 정벌하겠다고 협박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 쓰시마가 조선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조선과 쓰시마 관계의 본질에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혼슈를 장악하고 규슈와 시코쿠를 정벌하여 쓰시마까지 복속시킨 상황에서 조선 또한 그저 바다만 건너면 정복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쓰시마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곡을 비롯한 생필품을 조선과의 무역에 의지하여 생활하고 있던 처지에서 조선을 화나게 할 경우 생계 자체가 막막해지기 때문이었다. 또 문화적으로 자존심이 강한데다 일본을 ‘야만국’으로 여기고 있던 조선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전했다가는 관계가 파탄나기 십상이었다. 그렇다고 명령을 거부하고 몰락의 길로 갈 수도 없는 것이 쓰시마의 고민이었다.

 

 

조선 통신사 일행이 숙소로 사용했던 쓰시마의 세이잔사(西山寺). 조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이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쓰시마는 전쟁을 막아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마지못해 통신사를 보낸 조선은
일본 침략을 알아채지 못했고
나고야엔 15만 대군이 집결했다

신료나 다이묘들 가운데
누구도 침략에 반대를 안했다
태평양전쟁 전야와 비슷했다

성과 없이 돌아온 사신과 그 가족을 살해

 

 

쓰시마는 조선으로부터 거부당할 것이 뻔한 선조의 입조(入朝) 대신 인질과 공물을 요구하자고 제안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선조의 입조를 고집했다. 이런 배경에서 1587년 쓰시마가 보낸 사신이 다치바나 야스히로였다. 소씨는 그를 일본의 국왕사(國王使)로 칭하여 조선에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청토록 했다. 다치바나는 1573년(선조 6)에도 서울에 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14년 전과는 달리 조선에서 무례한 행동을 일삼았다. 더욱이 그가 소지한 서한에는 “천하가 짐의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운운하는 문구까지 있어 조선은 격분하게 된다. 조선 신료들은 ‘교화가 미치지 않는 야만국의 사신을 제대로 접대할 수는 없으며 바닷길이 험해 통신사도 보낼 수 없다’고 퇴짜를 놓았다.

 

다치바나가 아무런 성과 없이 귀국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와 그의 일족을 모두 살해했다. 그러고는 1589년 여름까지 조선 국왕을 입조시키라고 쓰시마를 다시 채근했다. 바짝 긴장한 소씨는 1589년 6월 하카타 쇼후쿠사(聖福寺)의 승려 겐소(玄蘇)와 함께 직접 조선으로 건너왔다. 조선 조정에 통신사를 파견해주도록 다시 간청한 뒤, 바닷길을 자신이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조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조선 조정은 조건을 제시했다. 본래 전라도 진도 출신으로 왜구에 투항하여 노략질에 앞장섰던 사을화동(沙乙火同)이란 인물을 잡아 보내면 통신사 파견을 고려하겠다는 것이었다. 쓰시마는 사을화동은 물론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인들까지 송환했다. 조선은 결국 1589년 9월 일본의 통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늦게나마 일본의 변화된 정세를 탐지하기 위한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통신사는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 등으로 구성되었다. 황윤길은 서인, 김성일은 남인, 허성은 북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황윤길 일행은 1590년 3월 서울을 출발하여 7월에 교토에 도착했다. 하지만 일행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가 원정에 나아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1월7일 통신사 일행을 접견했던 자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인 태도는 방약무인 그 자체였다. 그는 황윤길 일행을 자신의 전국 통일을 축하하려고 온 대등국의 사절이 아니라 속국의 사신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 통신사 일행이 가져온 선조의 국서에 대한 답서를 제때 주지 않는 무례를 저질렀다.

 

귀국길에 받은 답서의 내용을 본 통신사 일행은 경악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칭했는가 하면 ‘명나라로 건너가 400여 주를 정복하겠다’고 운운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선조를 ‘전하’(殿下)가 아닌 ‘각하’(閣下), 조선이 보낸 예물을 조공물을 뜻하는 ‘방물’(方物), 통신사의 일본 방문(來日)을 ‘입조’ 등으로 서술했다. 조선을 제후국으로 여기는 듯한 무례한 문구들이었다. 통신사 일행은 격분하여 수정을 요구했지만 일본 쪽은 제대로 고치지 않았다.

 

 

 

 

황윤길 일행의 엇박자… 동향 탐지에 실패하다

 

주지하듯이 일본에서 돌아온 통신사 일행의 일본 정세와 동향에 대한 보고 내용은 서로 달랐다. 특히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평가에서 의견이 갈렸다. 이렇게 된 것은 ‘당시 극심했던 조선의 당쟁 때문’이라는 것이 종래의 일반적인 평가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16세기 이후 평화가 지속되는 와중에 척신정치 등이 남긴 부정적인 영향이 더해지면서 바깥세계에 대한 관심과 감각이 상대적으로 무뎌졌던 것이다. 또 일본을 야만 속국 정도로 생각하고 그동안 왜구와 왜란을 진압하면서 일본을 앝잡아 보는 조선 조정의 경향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종대 이후 일본에 대한 사신 파견이 중단된 것이 대표적인 예였다.

 

서두에서 다치바나가 언급했던 기강 해이 문제도 오랜 평화와 내정의 파행 속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일찍이 정약용은 왜란 직전의 분위기를 가리켜 ‘변방의 사건을 말하면 허풍을 떤다고 하고 군사 일을 말하면 민심을 동요시킨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변방 문제를 걱정하면서도 겉으로는 태평시대라 걱정이 없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결국 이런 풍조 속에서 1590년에야 쓰시마의 간청에 떠밀려 마지못해 통신사를 보냈지만, 일본의 동향을 탐지하여 대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통신사가 귀국한 직후인 1591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조선 침략의 기일을 정해 통보했다. 스스로 ‘태양의 아들’을 운운하는 공명심과 허장성세와, 취약한 자신의 권력 기반을 대외 침략을 통해 확고히 하려는 의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정이었다. 이미 그는 유소년 시절부터 자신을 따라다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원정이 성공하면 명나라 땅 가운데 20주를 주겠노라고 약속한 바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모한 결정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았다. 조선과 명 침략에 몰두하는 동안 내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우려, 조선과 명의 교통로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다 수군력과 해운 능력이 취약하다는 우려, 무기나 식량 등을 조달하기가 어렵다는 우려, 결국 다이묘들을 고생시키고 백성들을 빈궁하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 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동생 히데나가를 제외하면 신료나 다이묘 가운데 누구도 드러내놓고 침략에 반대하는 자가 없었다. 전쟁 개시 이전의 이런 풍조를 가리켜 어느 일본 학자는 ‘태평양전쟁 개전 전야와 비슷한 분위기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1년 규슈의 북단 나고야(名護屋)에 조선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를 건설하는 공사에 돌입한다. 거리나 지형으로 볼 때 조선으로 가는 침략군을 실어 나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는 규슈의 다이묘들에게 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하고 가토 기요마사를 축성 책임자로 삼아 속도전을 벌였다. 1591년 10월에 시작한 공사는 두 달 남짓 만에 끝났다. 그동안 병력과 물자 수송에 필요한 큰 배를 건조하고 승조원들을 차출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작업이 병행되었다.

 

이윽고 1592년 1월부터 조선으로 건너갈 침략군의 병력들이 나고야성으로 속속 집결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거느리는 제1군 1만8000명,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제2군 2만명 등 모두 15만8000명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독단과 아집에 따라 동아시아를 뒤흔드는 참혹한 전쟁이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출처] [토요판] 한명기의 -420 임진왜란⑫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작성자 나무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