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605 : 조선의 역사 147 (선조실록 12) 본문
한국의 역사 605 : 조선의 역사 147 (선조실록 12)
정발 첨사 사당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조선의 정세
조선의 정치 상황
조선 왕조는 개국 후 100여 년 동안 창업을 주도했던 개국공신과 이후 세조의 집권을 도왔던 공신 집단과 그 후손들로 형성된 훈구파 세력과 더불어 왕조의 안정과 융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훈구파는 정권이 안정됨에 따라 그 부패가 심해졌고, 이런 변화 속에서 이른바 사림파 세력이 등장하여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치, 사회 질서의 재정립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 결과 신진 사림 세력과 기존의 훈구파 세력과 마찰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이러한 마찰은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들을 삼사의 청요직에 등용하면서 표면화되었다.
그 결과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엽에 이르는 근 반세기 동안에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네 차례에 걸친 사화가 일어나 사림파 신진 세력들은 큰 타격을 받고 정국은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 영향으로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나 신분 제도와 군역 제도가 무너지면서 권문세도가에 의한 농장의 확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공납 제도도 문란해지는 등 사회 전반이 동요의 기미를 보였다. 이러한 와중에 조정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썬 왕실 척신들의 정권 쟁탈전이라 할 수 있는 을사사화가 발생하였으며 사림 역시 내부 분쟁으로 인해 상호 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명종이 모후의 대리 정치로 인해 외척 세력이 정치의 중심으로 권력개편 되면서 부패가 극심 하였다.
그 이후 선조 대에 사림파 집권 이후 사림파는 학맥, 인맥에 따라 동인, 서인으로, 동인은 다시 남인, 북인으로, 북인은 다시 대북, 소북으로, 대북은 다시 골북, 육북, 중북으로 계속 분열되며 끝없는 권력투쟁의 대립을 거듭함으로써 국력과 국방은 물론 국정의 효율적 운용에 치명적인 장애를 끼쳤다.
조선의 대외관계
일본과의 관계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를 기본적으로 교린(交隣) 정책을 유지하였다. 고려 말기부터 번번이 왜구는 한반도의 해안 지대를 침범, 약탈하였다. 이에 조선 시대에 와서는 수군의 군사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성능이 뛰어난 대포와 전함 등을 대량 생산하는 등 왜구 소탕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이를 강력히 응징하기 위하여 1419년(세종 1년), 조선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했다.(대마도 정벌) 이에 따라 약탈이 어려워진 일본이 평화적인 무역 관계를 요청해 오자, 조선은 부산, 울산 등 일부 항구만을 제한적으로 개방하는 통상 교류를 하였다. 이후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며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명과의 관계
조선과 명나라 간의 관계는 ‘책봉-조공 체제’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조선 전기에는 기본적으로 책봉-조공 체제에 기반한 사대 관계를 바탕으로 조선이 명나라를 섬기는 상황이었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는 형식적으로 군신·상하 관계가 성립되고 조선은 제후국으로써 예와 명분에 합당한 불평등한 국가 지위를 감수해야 했다. 구체적으로는 명나라 황제에 의한 조선 국왕 책봉의 수용, 명나라 연호의 사용, 정례적인 조공 등 제후로서의 의무 등이 부과되었다.
하지만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은 거의 없었으며, 초기에는 태조의 조선 국왕 인정 문제와 여진족 문제, 조공 문제 등으로 양국간에 크고 작은 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특히 태조와 정도전이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의도로 요동 정벌을 계획하면서 명나라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15세기에는 이처럼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표방하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명나라와 대결을 시도할 정도로 주체적 움직임이 있었으나 16세기에는 사대주의를 옹호하는 사림파가 전면에 등장하여 명나라에 대한 사대가 당연시되면서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는 15세기 이래의 기조를 유지하였다.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양국 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조선은 명나라와 약속한 ‘1년 3공’의 규정을 넘어서까지 명나라와의 교섭에 적극성을 보였고 그를 통해 명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려 했다. 16세기 이후 양국 관계에서 중요해진 측면은 경제적 관계였다. 15세기 이래 조선은 책봉-조공체제 아래 규정된 당초의 조공 부담을 줄이는 데 주력하여 금과 은을 조공 품목에서 제외받는 성과를 얻었다.
양국 사이의 통상은 그리 원활치 못한 상황이었으나 15세기 말부터 조선 내부의 농업 경제력 향상과 함께 중국산 견직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명나라로부터 대량의 비단과 원사가 유입되었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무역 관계의 진전은 조선의 은광 개발과 일본으로부터의 은 유입을 가속화했으며 궁극에는 은을 매개로 조·명·일 삼국 사이의 무역 구조가 정착되는 단초가 되었다.
이처럼 16세기까지 양국 관계는 대체로 우호적인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요동 정벌 문제, 여진족 문제 등 일부 현안을 놓고서 상당한 갈등을 겪었다. 조선은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고 선진 문물을 수용하려는 의도에서 사대 관계를 받아들였지만, 그 이전에는 명나라의 압력에 의해 자주성이 침해되거나 국익이 심하게 손상받는 상황에 처할 경우엔 명나라에 대한 저항도 불사하는 양면적 입장을 보였던 것이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는 명나라에 대한 굴복이라기보다는 조선에 비해 매우 강대한 국력을 가진 명나라에 대하여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 확보를 위한 자주적인 외교였고, 선진 문물을 흡수하기 위한 문화 외교인 동시에 일종의 공무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조선의 군사력
조선 초기의 국방 체계
조선의 기본적인 병역 원칙은 양인개병(良人皆兵)과 병농일치(兵農一致)제로 노비를 제외한 16세 이상 60세 이하에 이르는 양인의 정남(正男 : 장정)은 누구에게나 병역의무가 부과되었다. 이 경우 정남은 정병(正兵 : 현역 군인)으로서 실역을 마치거나, 보인(保人 : 보충역)으로서 실역 복무에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 하는 두 가지 중의 한 가지로 구분되었다.
이와 같은 원칙을 전제로 하여 군은 크게 중앙군인 경군(京軍)과 지방군인 향군(鄕軍)으로 구분 편성되었다.
중앙군은 태조 3년(1394)부터 세조 초년까지 약 60년간에 걸쳐서 여러 차례의 개혁을 거쳐 5위 체제(의흥위(義興衛), 용양위(龍?衛), 호분위(虎賁衛), 충좌위(忠佐衛), 충무위(忠武衛))의 편제가 확립되었다.
5위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중앙군은 의무병인 정병을 비롯하여 시험으로 선발된 정예부대와 왕족, 공신 및 고급관료들의 자제들로 편성된 특수병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복무 연한에 따라 품계와 녹봉을 받았다.
지방군인 향군은 육군과 수군의 두 가지 병종으로 구분되어 국방상 요지인 영(營), 진(鎭)에 주둔하면서 변방 방어에 종사하거나 일부 병력은 교대로 수도에 상경하여 도성 수비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영.진군은 주로 해안 및 북방 변경 지대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내륙 지방에는 거의 군대가 주둔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러한 병력 부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향리, 관노, 무직 백성, 공노비 등으로 구성된 예비군인 잡색군(雜色軍)을 편성하여 해당 지역의 수령 지휘하에 두었다.
지방군의 방어 개념은 각 도에 주.진으로서 병영(병마절도사가 지휘)과 수영(수군절도사가 지휘)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각 처의 요충지에 거진(첨절제사가 지휘), 진(동첨절제사가 지휘) 등 대소의 진영을 두어 유사시에 주.진 진장의 지휘하에 지역 방어에 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진을 중심으로 한 방어 체제는 신속한 병력 집결이 이루어지지지 않는 취약점이 노출되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세조 1년에 거진을 독립된 방어 편성 단위로 하고 그 아래에 군, 현의 병력으로 제진을 관할하게 하는 진관 체제가 채택되었다.
그 후 을묘왜변을 전후로 한 시기에 조선의 군사적 환경이 급변하면서부터 근 1백여 년 동안 고수해 오던 '진관 체제'는 변모를 가져와 제승방략의 분군법으로 방위 체제가 전환되었다. 분군법은 지역 수령들에게 사전에 작전 지역을 배정해 주고 유사시에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진관지역에서 작전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작전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유사시 최전방에 병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장점을 갖추고 있는 반면에 작전 지역에 집결한 병력은 중앙에서 파견되는 경장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그 지휘를 받아야 하는 시간상의 문제점이 있었다. 또한 최전방에 대한 과도한 병력 집중으로 말미암아 후방 지역이 공백화 될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방위 체제는 일본과 여진족 등 야만족들이 소규모의 노략질을 자행하던 시기에 방어 병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큰 전란을 겪지 않은 조선 조정으로서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전란 직전
조선왕조는 건국 후 2백여 년간 이렇다 할 전란을 겪지 않아 상비군 체제에서 병농일치의 예비군 체제로 전환된 상태였다. 여진족과 타툼이 빈번한 북부지방과 남부의 수군은 상비군이 유지되었지만 기타 지방에서는 문서상으로만 병력이 존재하고 실제로는 군역을 부과하지 않거나, 대역인을 세우고 군포를 납부하도록 하는 방군수포와 대역납포가 공공연히 이뤄졌다. 특히 기병의 경우에는 상비군으로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지만, 임진왜란에서 주력을 담당했던 보병의 경우에는 이러한 이유로 병력의 질이 떨어졌다.
전쟁의 조짐이 점점 분명해지자 선조는 여러면에서 군비를 강화하고 여러 무장을 발굴하고 성곽을 보수하고 해자를 파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200여 년이나 평화를 누렸으며 특히 경상도 등 남부지방은 그 이전 수백 년 전부터 전란을 입은 경험이 없었기에 많은 마찰이 있었다. 경상감사 김수와 전라감사 이광이 선조의 명을 받고 성곽을 수리하고 병장비를 정비하는 등 전쟁 준비를 서두르자 지방에서는 부역이 너무 가혹하다는 상소가 빗발쳤고 탄핵까지 받을 뻔하였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607 : 조선의 역사 149 (선조실록 14) (0) | 2012.06.05 |
---|---|
한국의 역사 606 : 조선의 역사 148 (선조실록 13) (0) | 2012.06.04 |
한국의 역사 604 : 조선의 역사 146 (선조실록 11) (0) | 2012.06.02 |
한국의 역사 603 : 조선의 역사 145 (선조실록 10) (0) | 2012.06.01 |
한국의 역사 602 : 조선의 역사 144 (선조실록 9) (0) | 2012.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