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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09 : 조선의 역사 151 (선조실록 16)

두바퀴인생 2012. 6. 7. 14:53

 

 

 

 

한국의 역사 609 : 조선의 역사 151 (선조실록 16)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전쟁경과 개요 

제1차 침략

 

 

동래부순절도

1

 

592년 음력 1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쓰시마 섬 도주에게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복속할 것과 명나라 정복을 위해 일본군의 길잡이를 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쓰시마 도주명나라 정복을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말로 바꾸어 조선에 교섭을 해 왔으나 조선은 들어줄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교섭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1592년 음력 4월 13일 약 20만 명의 군대를 조선으로 파견해 침략하게 하였다. 이 날 정발(鄭撥)이 지키는 부산진성송상현(宋象賢)이 지키는 동래성이 함락되었다. 음력 4월 24일 순변사 이일상주에서 일본군에서 패하고, 10일만에 경상도가 넘어갔다. 음력 4월 28일 도순변사 신립충주탄금대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 전사하였다.

 

일본군의 작전은 육군은 종래 일본 사절단이 조선에서 이용하던 세 길을 따라 북상하고, 수군은 조선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는 것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제1군은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을 거쳐 충주에 이르고, 제2군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인솔하여 울산·영천을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세하여 한양으로 진군하였으며,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의 제3군은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북상하였다. 일본군이 물밀듯이 북상해 오자 왕실과 조정은 한양을 떠나 북쪽으로 피신하였다.

 

음력 5월 2일 일본군 제1군과 제2군은 개전한 지 20일 만에 충주·여주·양근을 거쳐 조선 방어군이 도망친 한강을 도강하여 한양을 무혈 점령하여 본거지로 삼았으며, 음력 5월 17일 도원수 김명원임진강 전투에서 격파한 뒤, 다시 군을 나눠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평안도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함경도로, 각각 한반도 북부까지 쳐들어갔다. 음력 6월 13일평양이 함락되었다. 다급해진 선조의주로 피난을 떠난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400여 킬로미터를 20일 만에 주파하였다는 것은 거의 하루 20킬로미터를 쾌속 진군하였다는 의미이다. 이는 조선군이 거의 없는 무풍지대를 달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숱한 싸움을 겪었던 일본군은 전쟁 경험이 풍부하였고 잘 훈련되고 조직된 반면, 조선군은 오랜 평화기를 누린 상태에서 군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실전 경험도 없었다.

 

조선이 전쟁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책을 마련하였으나 오랜기간 평화를 누리던 남부지방에서는 심한 반발이 있었다. 결국 병사들이 일본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탈영해 버리는 사태도 빈번하였다. 일례로 왜군이 침략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의 부하 병사인 황옥현은 탈영을 감행하다가 이순신에게 적발되어 참수당하기도 했다. 또한, 대규모의 총력전을 경험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전시계획은 있었으나 그 실행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였다.

 

예를 들어 대구에는 전시계획대로 군대가 소집되었어야 했으나 일본군의 고속돌파로 인하여 조정에서 파견된 경장 이일이 도착하기도 전에 전역에 일본군이 진입하였고 백성들과 일부 수령들도 도망한 뒤였다. 이 때문에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축조한 대구읍성은 방어에 쓰이지도 못하고 버려졌으며, 이일은 자신이 지휘할 군대를 보지도 못하고 수백 명의 농민군을 모아 상주 인근 북천에서 훈련을 시키다가 왜군의 기습을 받고 싸워보기도 전에 패주했다.

 

조정의 피난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선 조정은 여러 비상대책을 강구하려 하였다. 그러나 신립의 패보는 조정은 물론 한양의 인심을 극도로 동요시키고 선조는 마침내 정신(廷臣)과 더불어 한양을 떠나 개성·평양 방면으로 향하고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게 하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왕이 한양을 나왔을 때 노비들은 그의 문적(文籍)을 알고 있는 장례원(掌隷院)과 형조를 불질렀고, 이 때문에 궁궐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군 선발대가 한양에 도착했을 때까지 궁궐이 제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며칠 뒤 후발대가 도착했을 때 불타 없어졌다는 일본 측의 기록으로 볼 때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조정에서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에게 도성의 수비를 맡겼으나, 결국 1592년 5월 3일, 일본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수비군이 모두 도망쳐버린 도성은 손쉽게 함락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성이 함락되면 성주는 할복하고 성의 주민들은 항복하여 해당지역이 평정되는 것이 전쟁의 기본 방식이었는데, 조선의 경우 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하고 각지에서는 백성들이 저항했다. 고려의 현종, 고종, 공민왕도 이러한 방식으로 불리함을 타개했으므로 우리에게는 별로 충격적이지 않았지만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당혹감을 느꼈으며 백성들이 정복자에 대해서 저항한다는 사실에도 충격을 받았다.

 

일본에서 백성이란 단순히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는 영지에 따른 부속물 혹은 농노나 전리품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러한 차이를 모른 채 조선 정복지에서 보급과 급료 등의 비용을 충당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일본군의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된다.

 

한양을 떠난 선조 일행은 임진강을 건너자 왜군의 추격을 늦추기 위해 나루터를 불 태우고 배들을 가라앉혔다. 선조 일행은 왜군이 한강 이남까지 진격해 오자 다시 피난길을 떠났으며, 개성을 거쳐 평양에 이르러서는 사태의 긴박성을 고려 어쩔 수 없이 서자인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이후 왜군이 개성까지 함락하고 황해도로 북진해오자, 선조 일행은 또 다시 의주로 피난을 결심하였다. 선조는 유사시 만주땅으로 망명까지 생각하고 있었으나 조신들의 격렬한 반대로 사태를 관망하였다. 선조는 이러한 일시적인 모든 굴욕을 이겨내고 몽진에 성공함으로써 최소한 전쟁최고지휘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군의 반격

 

 

이순신의 학익진에 대해 묘사한 수조병풍도.

 

 

조정에서는 그와 함께 또 하나의 조정인 분조를 꾸렸는데, 평양에서 왕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고, 의병 부대를 국가의 정식 군대로 인정하였다. 이는 조선이 병농일치의 군사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절차였다.

 

또한, 의병장에게 관직을 주고 무과에 급제하고 현감 이상의 관직을 가진 관리의 대우를 해줬다. 하지만, 의병장에 대한 관직 제수와 우대는 기존 무과 급제를 통해 정식으로 장수가 된 자들과 알력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알력이 첨예화되어 폭발한 것 중 하나가 김덕령사건이다.

 

한편으로 공명첩으로써 군량미를 모으고 근왕군을 모집하기도 했다.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활발히 활동하는 것을 전해 들은 각지의 사대부와 백성들은 광해군을 따르고 근왕군에 참가하기 위해 찾아왔다. 광해군은 근왕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확보하였으며,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에 명나라 장수들도 광해군을 극찬하였다.

 

의병들은 곳곳에서 일본군의 무기와 식량 보급로, 통신망을 차단하여 일본군을 곤란에 빠뜨려 놓았다. 의병의 봉기로 민심은 차츰 제자리를 찾게 되었으며 조선 관군도 재기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다.

 

1592년 또한,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탁월한 전술을 앞세워 일본 수군을 음력 5월 옥포 해전, 사천 해전에서, 음력 6월 당포 해전에서, 음력 7월 한산도 대첩 등지에서 싸우는 족족 쳐부수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서해를 통해 보충 병력과 군수품 수송이 어려워져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약은 조선에 불리하였던 전세를 단숨에 뒤집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국내 각처에서는 일본군의 침략 행위에 대한 의병이 일어났다. 조헌(趙憲)은 충청도 옥천(沃川)에서 일어나 청주의 일본군을 축출하고 금산의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고, 곽재우(郭再祐)는 경상도 의령(宜寧)에서 거병하여 의령·창령(昌寧) 등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적을 격퇴하였다. 고경명(高敬命)은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하여 은진까지 북상하였다가 금산성에서 일본군과 격전 끝에 전사했으며, 김천일(金千鎰)은 호남에서 거병하여 수원을 근거지로 일본군을 추격하고 강화로 진을 옮겼다가 다음해 진주에서 전사하였다.

 

 

 

 

함경도를 수복하는 북관대첩을 그린 창의토왜도

 

정문부(鄭文孚)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鏡城)·길주(吉州) 등을 회복하는 북관대첩을 펼쳐 일본군을 몰아내어 함경도를 수복하였다. 묘향산의 노승 휴정(休靜)은 격문(檄文)을 팔도의 승려에게 발하여 그의 제자 유정(惟政)의 내원을 얻어 1700명의 승병을 이끌고 평양 탈환전에 공을 세워 도총섭(都摠攝)에 임명되었으며, 그 제자 처영(處英)도 승병을 모집하여 전라도에서 권율(權慄)의 막하로 들어가 활약하였다.

 

특히, 조선군은 김시민의 제1차 진주성 전투, 권율의 이치 전투에서 왜군에게 크게 승리하여, 전라도가 온전히 보전될 수 있었다. 이는 왜군을 주춤하게 하였고 왜군의 작전에 차질을 빚게 하였다. 또한,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전국 최대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기반으로 전력을 재정비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의 수군 본진이 있던 전라 수영이 후방, 즉 육지로부터의 왜군의 내습 걱정없이 해전에 전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명군의 개입

한편, 의주로 몸을 피신한 선조는 명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의 조정에서는 일본군이 너무나 빠른 속도로 쾌속 북진하자 조선이 일본군의 앞잡이가 아닌가 의심하여 명조정내에서는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결국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의 주장으로 자국의 영토에까지 전쟁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적을 막는 것이 상책이라는 판단 아래 대규모 원병을 파견하였다. 이때 명나라는 일본의 의도가 중국을 도모함에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한편, 몇 해 전 조선의 역관이 중국인 여성을 홍등가로부터 구해준 적이 있었고 그 여성이 나중에 석성의 부인이 되었고 조선의 어려움을 듣고 부인이 석성을 설득해 조선에 명군이 파병이 되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성호 이익은 그의 저서에서 임진왜란의 최고의 공신은 석성이고 그 다음이 이순신이라고 평가했다.

 

요양부총병(療養副總兵) 조승훈(祖承訓)은 5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자 명나라에서는 심유경(沈惟敬)을 평양에 파견하여 화의를 제창하게 하는 한편 1593년 음력 1월 이여송(李如松), 송응창(宋應昌) 등이 이끄는 4만여 명군은 조선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고 일본군은 한양으로 퇴각하였다. 명군은 처음 3천여 명의 병력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10만 명 정도의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켰다.

 

명군이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명의 개입으로 전쟁이 길어진 면도 있다. 개전 1년 후 조선군은 정규군 17만5천을 운용하고 있었고 일본군은 도해 15만 중에서 7만명 이상이 전사한 상태였으며 전선도 경상도 남부로 고착되었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할 때마다 일본은 강화를 요청하였고 피해나 위험 부담없이 전쟁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명군은 조선 장수들의 공세적 요구를 묵살하고 강화에 응하곤 하였다.

 

명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대패하여 일시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한양에 집결하여 마침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의 군대와 연합하여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은 권율이 배수진을 치고 있던 곳으로 일본군을 맞아 격전 끝에 이를 무찔렀다.

 

행주산성에서의 전투는 권율의 분전도 있었지만 일본 측의 지휘관이 우키타 히데이에, 이시다 미쓰나리같이 군사적 식견이 전혀 없는 매우 무능한 다이묘였다는 것도 조선군의 승리에 일조했다. 특히 이 전투에서 우키타 히데이에는 처신을 잘못하는 바람에 조선군에게 일격을 당해 중상을 입기까지 했다. 행주산성 전투는 김시민진주성 전투, 이순신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의 하나이다.

 

강화 회담

명나라는 다시 심유경을 한양의 일본군 본진에 보내어 화의를 계속 추진하였으며, 일본군도 전황의 불리, 명군의 진주, 보급 곤란, 악역(惡疫)의 유행으로 전의를 잃고 화의에 응하여 1593년(선조 26년) 음력 4월에 전군을 남하시켜 서생포(西生浦)에서 웅천(雄川 : 창원)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 진행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화의 진행 도중 진주성에 진주대첩에 대한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니 10만의 왜병에 맞서 3천여명의 조선군이 9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의병장 김천일·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충청병사 황진(黃進) 등이 전사하고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으나 왜군에게도 심한 피해를 입혀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좌절시켰다. 이는 임진왜란 중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였다. 이것이 제2차 진주성 전투이다.

 

1593년 음력 8월 명나라는 일본과 휴전 협상을 제의했다. 양국은 3년에 걸쳐 지루한 휴전 협상을 했고 이 과정에서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