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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5 : 고구려 역사 28 (제23대 안원왕) 본문
한국의 역사 45 : 고구려 역사 28 (제23대 안원왕)
제23대 안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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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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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7년 ~ 668년
476년 고구려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졸본 (기원전 37년 ~ 3년)
국내성 (3년 ~ 427년)
평양성 (427년 ~ 668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8년69만호 (약 3,500,000명)
성립
기원전 37년
멸망
668년
초대 군주
동명성왕
기원전 37년 ~ 기원전 18년
최후 군주
보장왕
642년 ~ 668년
성립 이전
부여
해체 이후
발해, 신라
안원왕(安原王, 501년~545년, 재위 : 531년~545년)은 고구려의 제23대 군주이다. 휘는 보연(寶延)으로, 안장왕의 동생이다. 키가 크고 도량이 넓었다고 한다.
생애
안장왕이 531년에 후사 없이 죽자 즉위하였다.
재위 3년인 533년에 왕자 평성(平成)을 태자로 삼았다.
재위 10년인 540년에 음력 9월에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하였으나 기병 5천 명을 보내 싸워서 물리쳤다.
재위 15년인 545년 음력 3월에 죽었다.
자연재해
536년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으므로, 사신들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위무하고 구제하였다. 음력 8월에 누리(;우박의 옛말임)의 재해가 있었다.
542년 음력 3월에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왓장이 날아갔다. 음력 4월에 우박이 내렸다.
동시대 백제, 신라
고구려 왕 계보도 (삼국사기에 의거)
해모수═╤═유화부인(하백의 딸)
│
소서노═╤═ 1.추모(bc37~19)═╤═예씨부인
│ │
┌┴┐ 2.유리명왕(bc19~ad18)═╤═송양왕의 딸
비류 온조 │
┌─┬─────┬────---┬────-┼─────------┐
도절 해명 3.대무신왕(무휼) 여진 4.민중왕(해색주) 재사═╤═부여태후
(ad 19~ 44) (44~48) │
갈사국왕녀═╣ ╠═ 원비 ┌──────┼─────---┐
호동 5.모본왕(? ? ? ). 6.태조왕(궁) 7.차대왕(수성) 8.신대왕(백고)
(49~53) (54~146) (146~165) (165 ~ 179)
┌┴┐ │ │
막덕 막근 추안 ㅣ
┌────────---┬───────────┬────────────── ┴─--┐
9.고국천왕(이이모) 발기 ╔═10.산상왕(연우)═╤═후녀(주통부인) 계수
(179~197)║ ║ (197~227) │
╚ 우씨왕후(우소의 딸)═══=====╝ 11.동천왕(교체)(227~248)
┌────────────────────--┼──┐
관나부인(장발미녀)══12.중천왕(연불)(248~270) ═╤═연씨왕후 예물 사구
│
┌───────┬───────────────------┴───┬──┬──l
(??) 13.서천왕(약로)(270~292) ═╤═우씨왕후(우수의 딸) 달가 일우 소발 공주(?)══명림홀도
┌──────────--┴───-─┐ (부마도위)
14.봉상왕(상부)(292~300) 돌고
┌┴┐ │
(?) (?) 15.미천왕(을불)(301~331)
├───────────┐
16.고국원왕(사유)(331~371) 무
┌────────┴────┐
17.소수림왕(구부)(371~384) 18.고국양왕(이련)(384~391)
│
19.광개토대왕(담덕)(391~412)
│
20.장수왕(거련)(413~491)
├──────┐
조다 승천
│
21. 문자왕(나운)(491~519)
┌──────────────────┴─────┐
22.안장왕(흥안)(519~531)══한씨미녀 23.안원왕(보연)(531~545)
│
24.양원왕(평성)(545~559)
│
25.평원왕(양성)(559~590)
┌────────────┼───────────┬──┐
26.영양왕(원)(590~618) 27.영류왕(건무)(618~642) 태양 평강공주═온달
│ │ (부마도위)
환권 28.보장왕(보장)(642~668)
┌──┬──┼──┬──┐
복남 임무 덕남 덕무 안승
자살,타살 등 일찍 죽은 왕자 타살된 왕, ══ 부부관계 |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는 2대 유리왕의 아들이자, 6대 태조왕의 생부입니다.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固, ?~293)는 13대 서천왕의 차남으로 형인 14대 봉상왕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 15대 미천왕의 생부입니다.
. 장수왕의 아들인 조다(助多)는 생부인 20대 장수왕이 413~491년 오래 재위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먼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21대 문자왕(文咨王/?~519)으로 즉위하였습니다.
현재 고구려의 영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과대포장한 것에서 부터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표현한 것까지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고구려 전성기
BC 2333년 고조선 건국
BC 108년 고조선 멸망.
BC 37년 부여의 왕족 주몽, 남하하여 졸본에서 고구려건국
BC 18년 주몽의 아들 온조(소서노와의 아들) 백제건국
003년 유리왕(주몽의 첫째부인 아들) 압록강 국내성으로 천도.
022년 고구려, 부여 공격 대소왕 전사.
242년 고구려, 요동의 서안평 공격
313년 고구려, 낙랑군 멸망시킴
391년 광개토왕 즉위, 백제공격
400년 광개토왕, 비려 후연 부여 말갈 정복. 내몽고까지 진출. 신라침범 왜구 격퇴.
414년 장수왕 즉위
427년 평양천도, 한강유역 정복
433년 백제-신라 동맹
475년 고구려, 백제공격 백제 웅진천도
554년 백제-신라 동맹 결렬
590년 고구려 온달장군 아차성에서 전사
598년 수나라와 1차전쟁 승리, 고구려 강이식 요서선제공격, 수문제 30만 대군궤멸.
612년 수나라와 2차전쟁 승리, 수양제 요동성,평양성,살수대첩에서 을지문덕에 패퇴
613년 수나라와 3차전쟁 승리
618년 수나라와 4차전쟁 승리, 수나라 멸망시킴
618년 이세민 당나라 건국, 고구려-당 우호관계맺음
630년 부여성-발해에 이르는 천리장성 축조
642년 연개소문 고건무 죽이고 쿠데타, 대당 강경노선으로 급선회.
642년 연개소문, 신라 김춘추를 사로잡아 감금하고 신라공격.
645년 당나라와 1차전쟁 승리, 요동성전투 연개소문. 안시성전투 양만춘.
647년 당나라와 2차전쟁 승리, 연개소문.
648년 당나라와 3차전쟁 승리, 연개소문.
648년 신라-당나라 연합
660년 신라-당나라 연합군 백제 멸망시킴
661년 당나라군 평양성 포위했으나 패퇴.
666년 연개소문 병사. 세아들 내분. 남생 당에 투항, 남건 설인귀에 대패.
668년 당나라군, 안시성 부여성 함락. 신라 문무왕 평양성 함락. 고구려 패망.
669년 압록강 이북 32개성 당나라와 계속 전쟁 - 검모잠등
676년 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 말갈과 연합 고구려부흥운동 실패.
696년 거란 이진충 반란, 북경포위 측천무후와 전투끝에 패퇴.
696년 걸사비우,대걸중상,대조영 이해고의 당나라군과 격전, 요동에서 당축출. 걸사비우 전사.
698년 대조영, 진국이라 칭하고 건국. 송화강 연해주까지 정벌.
713년 당나라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칭하며 화친 제의, 대조영은 고려국왕 연호사용
719년 대조영 죽음.
732년 고려국(발해) 무왕 당나라 산동반도 공격.
733년 신라-당 연합군 고려국(발해)공격, 발해-돌궐-일본과 동맹. 나-당에 대항.
907년 당나라 멸망.
926년 고려국(발해) 멸망.
935년 신라 멸망.
제23대 안원왕실록
(재위;서기 531년 5월-545년 3월, 13년 10개월)
계속되는 천재지변과 안원왕의 복구노력
안원왕은 문자명왕의 차남이며, 안장왕의 아우로 이름은 보연이다. 안장왕은 아들을 낳지 못하여 보연을 자주 궁으로 불렀다. 보연은 키가 7척 5촌이나 될 정도로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인품 또한 뛰어나 세인의 존경을 받았다. 이런 까닭에 형인 안장왕은 그를 무척 총애했고, 결국 계승자로 삼기에 이른다. 그리고 531년 5월에 안장왕이 죽자 보연은 고구려 제23대 왕에 올랐다.
안원왕이 즉위했을 때 중원의 최강국이던 북위는 내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은 528년에 호태후가 위 왕 탁발후를 살해하고 자신의 당질을 왕위에 앉히면서 시작됐다. 자신의 당질 원조를 왕으로 옹립한 호태후는 그때부터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권을 농단했다. 당시 선비의 귀족들은 탁발원굉에 의해 5세기 말부터 계속되던 왕실의 한족화정책에 반발하고 있던 터였는데, 호태후가 왕을 폐위하자 이를 기화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반란의 주모자는 글호족의 추장 이주영이었다. 호태후의 섭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그는 군사를 일으켜 낙양을 기습적으로 장악하고 호태후를 사로잡았다. 또한 호태후가 옹립한 원조를 익사시키고 왕족과 신하 2천여 명을 살해했다. 이 때 살해된 귀족 가운데 대부분이 한족 관리였다.
정권을 장악한 이주영은 원자유를 왕으로 세우고 조정을 농단하였다. 하지만 원자유는 그의 꼭두각시 노릇을 거부하고 기회를 엿보다가 이주영을 죽인다. 그러나 원자유는 이주영의 아들 이주조에 의해 다시 죽임을 당하고, 이주조는 종실 원공을 왕으로 세워 정권을 장악한다. 그런데 이 무렵 하북성에서 고환이 반란을 일으켜 이주조에 대항하였고, 결국 그는 이주조를 제거하고 종실 원수를 새로운 왕으로 세운다. 이로써 고환은 이주조가 제거되자 새로운 실력자로 군림하였다.
하지만 왕으로 등극한 원수는 고환을 싫어한 나머지 낙양을 탈출하여 서쪽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우문태에게 의지한다. 이에 고환은 종실 원선견을 다시 왕으로 세웠고, 그 후에 업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 무렵 서쪽 권력자 우문태는 자신을 찿아온 원수를 살해하고 원보거를 새 왕으로 옹립하여 장안에 도읍을 정한다. 그 결과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갈라지게 된다.
이들 두 나라 중 고구려에 먼저 손을 내민 쪽은 동위였다. 동위는 지리적으로 고구려에 가까울뿐 아니라 서위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업도를 도성으로 삼은 534년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고 화친을 제의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동위의 화친제의를 받아들이고 산동의 대륙백제에 대해 압력을 가해줄 것을 부탁했다.
백제의 대륙지배
백제가 대륙(산동성)에 있었다는 여러 근거가 많으나, 가장 확실한 근거로는 <삼국사기 신라국본기>로 문무왕 하편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함형 원년(670년) 7월에 이르러 입조사 김흠순 등이 와서 경계선을 그으려 하는데 지도를 검사하여, 백제의 옛 땅은 전부 돌려주라 하니 황하가 아직 띠와 같이 되지 않고 태산이 아직 숫돌과 같이 되지 아니하여 (百濟舊地 摠令割還 黃河未帶 太山未礪) 3.4년간에 한번 주고 한번 빼앗으니 신라 백성은 다 실망하고 모두 말하기를 (이하생략)” (주 太山 = 泰山)
여기서 황하와 태산이라 함은 산동성에 있는 그 유명한 황하와 태산으로 이곳이 바로 백제의 옛 땅이라고 <삼국사기>는 밝히고 있다. 이 기록 하나만 봐도 백제는 확실히 산동성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백제가 중국 대륙의 산동성에 있었다는 다른 근거로는 아래와 같이 여러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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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8대 성씨로 본 백제의 위치?
<북사(北史)> 권94 열전82 백제 편과 <수서(隋書)> 권81 열전46 동이편의 백제 조에 "나라 안에 8대 성씨가 있는데, 사(沙)씨, 연(燕)씨, 리(칼刀가 셋인 글자, 또는 협 協)씨, 해(解)씨, 진(眞)씨, 국(國)씨, 목(木)씨, 묘(苗)씨 이다."라고 되어 있으며, 백제의 왕족의 성은 부여(夫餘)씨라 했다.
중국의 성씨사전에는 부여(夫餘)씨와 복(福)씨 골(骨)씨 등도 백제의 8대성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백제는 분명한 우리의 조상이기 때문에 이들 8대 성씨가 백제 멸망과 함께 모두 죽지 않은 다음에야 현재에도 그 후손이 남아 있어야만 한다. 2000년도에 발간된 대한민국 통계청의 자료를 보면,
국(國)씨가 2,182명으로 성씨 순위 154위이며, 연(燕)씨는 3,549명으로 138위, 진(眞)씨는 1,579명으로 성씨 순위 164위, 묘(苗)씨는 61명으로 성씨 순위 258위 등이며, 나머지 사(沙)씨나 리(또는 협)씨, 그리고 해(解)씨나 목(木)씨는 단 한 명도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멸망 당시 200여개의 성(城)이 있었고 호수(戶數)는 76만호로 되어 있다. 옛날은 지금과 같은 핵가족제가 아니고 대가족제도이므로 백제의 인구는 450만 ~ 550만 명 정도로 추산이 된다. 이중에 8대 성씨가 차지하는 비중은 컸을 것이다. (참고로 구당서에는 호당 인구가 5.7명 ~ 7명이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천삼백여 년이 지난 지금 남한에 살고 있는 백제 8대 성씨의 후손이 7,300명 정도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반면에 백제의 주 강역이었던 산동성, 하북성, 강소성, 하남성 일대에는 백제의 8대 성씨가 득실득실 엄청나게 살고 있다. 이는 백제의 주 강역이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 황하이남~양자강 이북 사이의 동부였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동위는 산동 지역의 일부가 백제의 영역이라는 점을 못마땅해하고 있던 터라 고구려의 부탁과 상관없이 백제를 공략했다. 이 때 백제의 대륙기지는 529년 이후 3년 동안 계속된 고구려의 침략으로 매우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위의 공략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이에 백제는 양나라에 도움을 청했지만 양나라는 고구려와 동위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이 결과 백제의 대륙기지는 붕괴되어 동위에 함락되고 말았고, 이 때부터 대륙의 기반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렇게 되자 백제의 성왕은 538년에 도읍을 사비(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꿨다. 그리고 잃은 땅을 만회하기 위해 540년에는 고구려의 우산성을 공격했다. 우산성은 고구려가 498년에 신라로부터 빼앗아 한반도 남진의 전략기지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백제는 우산성을 차지하면 고구려의 한반도 지역 공략을 저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무렵 고구려는 535년 여름 발생한 대홍수와 그해 겨울에 일어난 지진, 그리고 536년 여름에 닥친 가믐, 또 그 해 가을에 밀려온 메뚜기 떼 등에 의한 피해가 극심하였고 2년 동안 계속된 자연 재해는 백성들을 기근에 시달리게 하였고, 이 때문에 많은 유랑민이 발생하여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안원왕은 민심 이반을 막기 위해 전국을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로하였고, 한편으론 경제적 궁핍을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동위와 양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백제의 성왕은 이러한 고구려의 경제적 파탄을 놓치지 않고 우산성을 공략하였던 것이다. 백제가 우산성을 공략하자 고구려는 미쳐 손을 쓸 틈이 없이 수세에 몰렸다. 우산성이 백제군에 포위되자 안원왕은 중앙 정예기병 5천을 급히 우산성으로 파견하였고, 우산성의 고구려군은 사력을 다해 수성전을 펼치고 있던 중, 5천의 고구려 기병이 도착하여 백제군 후미를 공격하자 가까스로 성을 지킬 수가 있었다.
이처럼 백제군에게 기습을 받아 혼쭐이 난 고구려는 국내적인 경제적 어려움이 겹치는 바람에 이후에도 보복전을 전개할 수가 없었다.
안원왕은 재위기간 내내 이처럼 재해에 시달리며 노심초사했는데, 설상가상으로 544년 12월 자식들이 왕위 계승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장남 녹군(양원왕)과 다른 아들 세군 사이에 한바탕 전쟁이 벌어져 녹군이 세균을 죽이고, 그 가족을 몰살시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안원왕은 중병으로 누워있던 중이며, 그 사태가 벌어진 지 3개월 만인 545년 3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양원왕의 쿠테타
사기 고구려본기에서 안원왕의 위를 이은 것으로 나오는 양원왕(陽原王)은 부왕이 죽자 정상적으로 위를 이은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서기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서기 흠명기 6년 시세조에 아래와 같이 기술되어 있다.
『이 해에 고려에 대란(大亂)이 일어나 주살 당한 자가 많았다[백제본기에 이르기를 12월 갑오에 고려국의 세군(細群)과 추군(추群)이 궁문에서 더불어 싸웠다. 북을 울리면서 병을 풀지 않고 싸우기를 3일만에 세군이 져서 세군의 자손들은 잡혀 죽었다. 무술(戊戌)에 박국(박國)의 향강상왕(香岡上王)이 훙했다』
서기로 544년의 사건이다. 향강상왕은 안원왕을 가리킨다. 서기 흠명기 7년 시세조에도 같은 기사가 나온다.
『이 해에 고려에 대란이 있었다. 싸워서 죽은 자가 2천이 넘었다[백제본기에 이르기를 고려는 정월 병오에 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나이 8세였다. 박왕(박王)은 부인이 셋 있었다. 正夫人은 아들이 없었고 중부인의 소생을 세자로 했다. 그 외숙이 추군(추群)이다. 小夫人도 아들이 있었고 그 외숙이 세군(細群)이다. 박왕(박王)이 병이 심해지자 세군과 추군이 각각 그 부인의 아들을 세우려고 했다[各欲立其夫人之子]. 그 때문에 세군측 전사자가 2천이 넘었다는 것이다」』 박(개시랑변+白)
흠명기 6년조 기사와 같은 사건인데 1년 차이가 나는 서기 545년의 사건이다. 고려는 고구려고 고마[박]는 고구려를 비칭한 것이다. 고마[박]의 원래 의미는 '조선개 박[박]'이다. 고구려인들은 가야인들을 倭라고 비칭했는데 가야인들은 고구려인들을 '조선개[박]'라고 비칭한 것이다.
위의 사건은 쿠데타로 집권한 안원왕이 병사할 시점에 일어난 왕자의 난으로 보이는데 서기 544년 연말에 시작하여 545년 연초에 마무리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사건의 성격은 왕비들의 친정세력 즉 왕자들의 외숙들이 왕자를 업고 들고 일어난 권력다툼이다. "그 부인의 아들[其夫人之子]"이란 말에서 '그[其]'는 안원왕을, 부인은 왕비를 말한다.
전사자가 2천이 넘는다고 했으니 대란이라 할만하다. 일종의 내란으로서 왕실 내부의 권력다툼이다. 사기 고구려본기에 양원왕이 즉위한 해가 서기 545년으로 시점이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 역시 사기기사는 믿기 어려워 보인다. 사기 고구려본기 안원왕 몰년조에 아래와 같이 기술되어 있다.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안원왕이라 했다[이해는 양(梁) 대동(大同) 11년이고 동위(東魏) 무정(武定) 3년이다. '양서'에 "안원왕이 대청(大淸) 2년에 죽으니 그 아들을 영동장군고구려왕낙랑공(寧東將軍高句麗王樂浪公)으로 삼았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이어서 양원전기에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양원왕(또는 陽崗上好王)은 이름이 平成이고 안원왕의 장자다. 나면서부터 총혜(聰慧)하고 장성해서는 웅호(雄豪)한 것이 보통을 넘었다. 안원 재위 3년에 태자가 되었다가 15년에 왕이 죽자 즉위했다』
서기 544년 연말에 안원왕(=香岡上王)은 죽은 것으로 서기에 나오는데 사기에는 서기 545년 3월에 죽은 것으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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