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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4 : 고구려 역사 27 (제22대 안장왕) 본문
한국의 역사 44 : 고구려 역사 27 (제22대 안장왕)
제22대 안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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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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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왕(安臧王, ?~531년, 재위 : 519년~531년)은 고구려의 제22대 군주이다. 휘는 흥안(興安)이고, 문자명왕의 맏아들이다.
기원전 37년 ~ 668년
476년 고구려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졸본 (기원전 37년 ~ 3년)
국내성 (3년 ~ 427년)
평양성 (427년 ~ 668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8년69만호 (약 3,500,000명)
성립
기원전 37년
멸망
668년
초대 군주
동명성왕
기원전 37년 ~ 기원전 18년
최후 군주
보장왕
642년 ~ 668년
성립 이전
부여
해체 이후
발해, 신라
.
생애
문자명왕 재위 7년인 498년에 태자가 되었고, 519년에 문자명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재위 5년인 523년에 음력 8월에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침공하였다.
재위 11년인 529년에 음력 10월에 오곡(五谷)에서 백제와 싸워서 이기고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재위 13년인 531년에 음력 5월에 왕이 죽었는데 귀족들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안장왕이 태자 시절 백제와의 전쟁 준비를 위한 정보 수집차 백제에 들어갔을 때, 만난 한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동시대 백제, 신라
고구려 왕 계보도 (삼국사기에 의거)
해모수═╤═유화부인(하백의 딸)
│
소서노═╤═ 1.추모(bc37~19)═╤═예씨부인
│ │
┌┴┐ 2.유리명왕(bc19~ad18)═╤═송양왕의 딸
비류 온조 │
┌─┬─────┬────---┬────-┼─────------┐
도절 해명 3.대무신왕(무휼) 여진 4.민중왕(해색주) 재사═╤═부여태후
(ad 19~ 44) (44~48) │
갈사국왕녀═╣ ╠═ 원비 ┌──────┼─────---┐
호동 5.모본왕(? ? ? ). 6.태조왕(궁) 7.차대왕(수성) 8.신대왕(백고)
(49~53) (54~146) (146~165) (165 ~ 179)
┌┴┐ │ │
막덕 막근 추안 ㅣ
┌────────---┬───────────┬────────────── ┴─--┐
9.고국천왕(이이모) 발기 ╔═10.산상왕(연우)═╤═후녀(주통부인) 계수
(179~197)║ ║ (197~227) │
╚ 우씨왕후(우소의 딸)═══=====╝ 11.동천왕(교체)(227~248)
┌────────────────────--┼──┐
관나부인(장발미녀)══12.중천왕(연불)(248~270) ═╤═연씨왕후 예물 사구
│
┌───────┬───────────────------┴───┬──┬──l
(??) 13.서천왕(약로)(270~292) ═╤═우씨왕후(우수의 딸) 달가 일우 소발 공주(?)══명림홀도
┌──────────--┴───-─┐ (부마도위)
14.봉상왕(상부)(292~300) 돌고
┌┴┐ │
(?) (?) 15.미천왕(을불)(301~331)
├───────────┐
16.고국원왕(사유)(331~371) 무
┌────────┴────┐
17.소수림왕(구부)(371~384) 18.고국양왕(이련)(384~391)
│
19.광개토대왕(담덕)(391~412)
│
20.장수왕(거련)(413~491)
├──────┐
조다 승천
│
21. 문자왕(나운)(491~519)
┌──────────────────┴─────┐
22.안장왕(흥안)(519~531)══한씨미녀 23.안원왕(보연)(531~545)
│
24.양원왕(평성)(545~559)
│
25.평원왕(양성)(559~590)
┌────────────┼───────────┬──┐
26.영양왕(원)(590~618) 27.영류왕(건무)(618~642) 태양 평강공주═온달
│ │ (부마도위)
환권 28.보장왕(보장)(642~668)
┌──┬──┼──┬──┐
복남 임무 덕남 덕무 안승
자살,타살 등 일찍 죽은 왕자 타살된 왕, ══ 부부관계 |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는 2대 유리왕의 아들이자, 6대 태조왕의 생부입니다.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固, ?~293)는 13대 서천왕의 차남으로 형인 14대 봉상왕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 15대 미천왕의 생부입니다.
. 장수왕의 아들인 조다(助多)는 생부인 20대 장수왕이 413~491년 오래 재위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먼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21대 문자왕(文咨王/?~519)으로 즉위하였습니다.
현재 고구려의 영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과대포장한 것에서 부터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표현한 것까지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고구려 전성기
BC 2333년 고조선 건국
BC 108년 고조선 멸망.
BC 37년 부여의 왕족 주몽, 남하하여 졸본에서 고구려건국
BC 18년 주몽의 아들 온조(소서노와의 아들) 백제건국
003년 유리왕(주몽의 첫째부인 아들) 압록강 국내성으로 천도.
022년 고구려, 부여 공격 대소왕 전사.
242년 고구려, 요동의 서안평 공격
313년 고구려, 낙랑군 멸망시킴
391년 광개토왕 즉위, 백제공격
400년 광개토왕, 비려 후연 부여 말갈 정복. 내몽고까지 진출. 신라침범 왜구 격퇴.
414년 장수왕 즉위
427년 평양천도, 한강유역 정복
433년 백제-신라 동맹
475년 고구려, 백제공격 백제 웅진천도
554년 백제-신라 동맹 결렬
590년 고구려 온달장군 아차성에서 전사
598년 수나라와 1차전쟁 승리, 고구려 강이식 요서선제공격, 수문제 30만 대군궤멸.
612년 수나라와 2차전쟁 승리, 수양제 요동성,평양성,살수대첩에서 을지문덕에 패퇴
613년 수나라와 3차전쟁 승리
618년 수나라와 4차전쟁 승리, 수나라 멸망시킴
618년 이세민 당나라 건국, 고구려-당 우호관계맺음
630년 부여성-발해에 이르는 천리장성 축조
642년 연개소문 고건무 죽이고 쿠데타, 대당 강경노선으로 급선회.
642년 연개소문, 신라 김춘추를 사로잡아 감금하고 신라공격.
645년 당나라와 1차전쟁 승리, 요동성전투 연개소문. 안시성전투 양만춘.
647년 당나라와 2차전쟁 승리, 연개소문.
648년 당나라와 3차전쟁 승리, 연개소문.
648년 신라-당나라 연합
660년 신라-당나라 연합군 백제 멸망시킴
661년 당나라군 평양성 포위했으나 패퇴.
666년 연개소문 병사. 세아들 내분. 남생 당에 투항, 남건 설인귀에 대패.
668년 당나라군, 안시성 부여성 함락. 신라 문무왕 평양성 함락. 고구려 패망.
669년 압록강 이북 32개성 당나라와 계속 전쟁 - 검모잠등
676년 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 말갈과 연합 고구려부흥운동 실패.
696년 거란 이진충 반란, 북경포위 측천무후와 전투끝에 패퇴.
696년 걸사비우,대걸중상,대조영 이해고의 당나라군과 격전, 요동에서 당축출. 걸사비우 전사.
698년 대조영, 진국이라 칭하고 건국. 송화강 연해주까지 정벌.
713년 당나라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칭하며 화친 제의, 대조영은 고려국왕 연호사용
719년 대조영 죽음.
732년 고려국(발해) 무왕 당나라 산동반도 공격.
733년 신라-당 연합군 고려국(발해)공격, 발해-돌궐-일본과 동맹. 나-당에 대항.
907년 당나라 멸망.
926년 고려국(발해) 멸망.
935년 신라 멸망.
제22대 안장왕 실록
(?~531, 재위: 서기 519년 모월-531년 5월, 약12년)
안장왕의 치세와 국제정세의 변화
안장왕은 문자명왕의 장남이며, 이름은 흥안이다. 모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태어난 년도도 알 수 없다. 서기 498년(문자명왕 7년) 7월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519년 문자명왕이 죽자 고구려 제22대 왕에 올랐다.
문자명왕이 즉위할 당시 중국은 남쪽엔 양 왕조, 북쪽엔 위 왕조가 서로 세력을 다투며 대립하고 있었다. 안장왕은 문자명왕의 정책을 이어받아 이들 양국관계에 직접 뛰어들지 않는 중립외교노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중립노선에 위는 불만이었는데, 위는 자신들이 먼저 생긴 국가일뿐만 아니라 지리상으로도 가깝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양나라와 외교관계를 단절할 것을 요구하곤 하였다.
그러나 안장왕은 위의 이러한 요구가 부당하다며 수용하지 않았고, 관례대로 520년 정월에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자 양나라도 그해 2월에 사신 강주성을 보내 안장왕에 의관,칼,패물을 바쳤다. 이에 위나라는 뱃길로 돌아가는 양나라 사신을 체포하기에 이른다. 이 때문에 위와 양은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고, 고구려는 그같은 상황을 적절히 이용하여 국익을 챙겼다.
당시 위는 왕실과 선비 귀족의 불화로 국론이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고, 양은 지속되는 농민봉기로 항상 내정이 불안한 상태였다. 때문에 이들 양국은 고구려와의 외교 노력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고구려는 실리적 노선에 바탕을 둔 중립외교로 일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외교적 안정은 광개토왕 이후 지속되던 백제의 압박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를 대신한 말갈과의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521년(무령왕 21년)에는 천재지변이 잇따랐다. 그해 5월에는 홍수로 많은 지역이 물에 잠기더니 8월에는 메뚜기 떼가 몰려와 그나마 남아있던 농적물마저 황폐화시켰다. 이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렸고, 이를 이기지 못한 9백여 호의 백성이 신라로 대거 이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이듬해 10월에는 지진이 발생하여 많은 가호가 무너졌다.
이처럼 천재지변이 계속되자 무령왕은 고구려와 말갈의 침입을 염려하여 523년 2월부터 15세 이상되는 장정들을 대거 징발하여 쌍현성을 중수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의 원성은 더욱 높아졌고, 그런 가운데 격무에 시달린 무령왕은 그해 5월에 죽음을 맞이했다.
고구려는 이같은 호기를 놓치지 않았다. 안장왕은 523년 8월에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의 대륙기지를 공격하였다. 안장왕은 문자명왕때 잃은 하수(황하) 이북 지역을 되찿으려 하였고, 마침내 그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패수에서 백제 장군 지충이 이끄는 1만 대군에 막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렇듯 고구려의 예봉을 꺽은 백제의 성왕은 고구려의 재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525년에 신라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다. 이에 법흥왕은 백제의 화친제의를 받아들여 사신을 교환했다. 이로써 신라와 백제는 501년 이후 단절됐던 동맹관계를 복구하였고, 삼국의 관계는 또 한 번 전기를 맞이한다.
이 무렵, 북위에서는 중대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위 왕 탁발원굉 이후 위 조정은 한족 지주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선비족과 한족의 결혼을 장려하고 선비의 성을 한족의 성으로 바꾸는 등 한족화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선비 귀족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523년에는 하북성 일대의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이후 산동,섬서,감숙성 지역에서도 대규모 군사봉기가 일어났다. 그리고 군사봉기는 수년 동안 계속되어 서부 지역의 혼란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 같은 혼란으로 북위 왕실은 마침내 무너져, 532년 서위와 동위로 분리된다.
이 상황을 이용하여 백제는 대륙기지를 확대하려는 의도를 드러냈고, 이를 눈치 챈 고구려는 529년 10월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의 대륙기지를 선제공격하였다.
안장왕은 자신이 직접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의 북변요새인 혈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렸다. 이에 백제는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됭 대륙군 3만을 전부 동원하여 고구려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양국 군사는 오곡벌판에서 대혈전을 벌였다.
결과는 고구려의 대승이었다. 백제는 무려 2천의 전사자와 수천의 부상자를 내고 퇴각하였고, 고구려는 그 여세를 몰아 백제군을 궁지로 몰았다.
또한 한반도 쪽 전선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재현되었다. 고구려군이 아리수를 넘어 진군하였고, 백제군은 수성전을 펼치며 가까스로 버텼다.
두 나라의 전쟁은 2년 가까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백제군은 점점 수세에 몰렸다. 그 결과 대륙의 하수 이북 지역과 한반도의 차령산맥 이북 지역이 거의 고구려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진영에서 철수명령이 떨어진다. 그동안 백제에 대한 강력한 압박정책을 주도하던 안장왕이 531년 5월에 숨을 거뒀던 것이다.
그 결과 백제는 대륙기지에서의 기반을 대부분 상실하였고, 백제 성왕은 538년 웅진성을 버리고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겨간다. 뿐만 아니라, '백제'라는 국호를 버리고 '남부여'라는 새로운 국호를 사용하기에 이른다.
백제는 535년에 새롭게 일어난 동위의 침략을 받아 대륙의 기반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신분·나라를 초월 한주(韓珠)와 안장왕(安藏王) 사랑 이야기-고양
경기도 고양시의 고봉산은 그 옛날 고구려의 22대 임금 안장왕(安藏王)과 백제의 미인 한주(韓珠)의 극적이며 아름다운 사랑의 사연이 서린 곳이다.
서기 519년 고구려의 안장왕(安藏王)이 즉위할 무렵 오늘의 행주산성(幸州山城)과 오두산성(烏頭山城) 일대인 한강 하류의 이 전략적 요충지 고양시(高陽市)는 백제의 영토로서 개백현(皆伯縣)이라고 불렸다.
고봉의 미녀와 안장왕의 전설이 서린 곳
그 해는 백제 무령왕(武寧王) 19년. 도읍은 오늘의 충남 공주(公州)인 웅진성(熊津城)이었다. 또한 신라는 법흥왕(法興王) 6년, 중국은 북위와 양이 겨루던 남북조 시대 말기였다.
이러한 무렵에 백제 개백현에는 한씨(韓氏)라는 호족(豪族)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한주(韓珠)라는 아리따운 딸 하나가 있었다. 한은 성이니까 그녀의 이름은 우리말로 하면 구슬아씨였다. 안장왕은 장수왕(長壽王)의 손자인 문자명왕(文咨明王)의 아들로서 태자 때의 이름은 흥안(興安)이라고 했다.
이 흥안태자(興安太子)가 어느 날 부왕의 허락을 받고 상인으로 변장한 채 강을 건너 개백현(皆伯縣)으로 몰래 넘어와 적정을 살피다가 그만 백제 군사들에게 발각되어 달아나게 되었다.
정신없이 도망치던 흥안태자가 막다른 골목으로 쫓기자 다급한 나머지 어느 큰 저택의 담장을 훌쩍 타넘어 몰래 숨었는데, 그 집이 바로 한주(韓珠)의 집이었다. 그렇게 해서 흥안태자가 구슬아씨를 만나게 되었다.
천생연분(天生緣分)이었는지 씩씩하고 잘 생긴 고구려의 태자와 아리따운 백제의 처녀는 그만 첫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며칠 숨어 지내는 동안 두 청춘 남녀의 가슴에는 사랑이 싹트고 샘솟았다.
흥안태자는 그렇게 한주를 사랑의 포로로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신분을 털어놓고 이렇게 약속했다.
“나는 사실 고구려의 흥안태자라오. 언제까지나 이렇게 숨어 있을 수는 없기에 사실을 밝히고 내 나라로 돌아가기 전에 당신에게 약속을 하고 가려 하오. 내 반드시 군사들을 거느리고 돌아와 그대를 모셔가리다! 그리고 정식으로 혼인을 하여 당신을 대고구려의 황후로 맞이할 터이요!”
그리고 나서 흥안태자는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한 번 간 태자는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러던 중 개백현 태수가 한주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청혼을 하고, 한주는 거절했다. 잡아들여 매질을 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한주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고
성주가 매일같이 혼인을 강요하며 야욕을 채우려고 하자 한주는 이런 시조를 읊어 자신의 매서운 절개를 표시했다고 한다.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든 없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우리는 이 시조가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읊었던 ‘단심가’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상고사>에서 그때 한주가 읊었다는 게 바로 이 단심가라고 했다.
이 노래를 전해들은 성주가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을 알자 한주를 아예 죽여 없애기로 작정했다. 그 며칠 뒤가 성주의 생일이었다. 성주가 한주를 불러내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노라! 너는 내 각시가 될 터인고? 만일 또다시 거절한다면 오늘이 바로 네 제삿날이 되리라!”
“하늘이 무서운 줄 아시오! 내가 죽으면 내 제삿날이 되려니와 만일 내 뜻을 꺾지 못한다면 오늘이 성주의 제삿날이 되리라!”
성주가 분기충천하여 “저 년 죽여라!” 하고 악을 쓰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와 하는 함성이 울리더니 수십 명의 장사가 창검을 들고 잔치판에 뛰어들더니 성주의 부하들을 마구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계속해서 고함쳤다.
“악독한 성주 놈을 죽여라!” “고구려 군사 수만 명이 강을 건너왔다!” “모두 항복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 후 고구려로 돌아간 흥안태자는 부왕이 세상을 뜨자 뒤를 이어 519년에 즉위했는데, 단 하루도 한주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개백현을 수복하고 한주를 구출해오는 장수에게는 천금의 상과 높은 벼슬을 내린다 하고, 중신들을 불러 계책을 논의했다.
이때 안장왕의 누이 안학공주(安鶴公主)를 사모하는 을밀선인(乙密仙人)이 앞으로 나서서 자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개백현을 수복하고 한주를 구해오겠노라고 했다. 그 대신 성공하면 안학공주와 혼인을 허락해달라고 했다. 을밀선인은 고국천왕(故國川王) 때의 명재상 을파소(乙巴素)의 후손이라고 한다.
을밀선인(乙密仙人)은 수십명의 용감한 병사들을 광대패로 변장시켜 그 전날 밤에 몰래 강을 넘어 숨어 있다가 태수는 자신의 생일에 맞춰, 한주를 옥에서 끌어내 재차 청혼했다. 이때 을밀이 이끄는 광대패들이 생일 하객으로 참석했다가 성주의 잔치판을 급습한 것이었다. 무사히 구슬아씨를 구해낸 을밀선인이 말했다.
“지금 대왕께서 저 강 건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봉화를 올리면 군사를 휘몰 아 이내 강을 건너오실 것입니다!”
한주가 그 말을 듣자 을밀선인과 그의 부하들을 안내하여 고봉산으로 올라가 봉화를 올렸다.
강 건너편에서 대군을 거느리고 있던 안장왕이 그 봉화를 보자 이내 도강작전을 개시하여 질풍노도처럼 개백현을 휩쓸고 마침내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았다. 동시에 사랑하는 한주를 구출하여 고구려의 도성 평양성으로 데려간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안장왕은 531년 재위 13년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후사가 없었으므로 아우 보연(안원왕)이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고구려 태자였던 안장왕과 백제 미녀 한주의 애틋한 사랑은 국경을 뛰어넘은 아름다운 이야기는 <삼국사기> ‘잡지’ 지리편,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그리고 단재 신채호가 <해상잡록>이란 책을 인용한 <조선상고사>에 실려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 고봉산(高峰山 208.8m)정상은 군사시설이므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일천오백년 전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은 이미 끝난 지 오래 전이지만, 이제는 남북이 바로 그 강을 사이에 두고 맞서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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