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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0 : 고구려 역사 23 (광개토왕릉비와 그 내용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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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0 : 고구려 역사 23 (광개토왕릉비와 그 내용1)

두바퀴인생 2010. 10. 14. 01:01

 

 

한국의 역사 40 : 고구려 역사 23 (광개토왕릉비와 그 내용1) 

 

광개토왕릉비와 그 내용 1

 



 

                                          

     광개토태왕릉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광개토왕릉비의 정확한 명칭은 '국강상 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이다. 이 비석은 광개토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선왕의 공적을 기리고 묘지를 지키는 연호(烟戶,일종의 관노비)들에 대한 규정을 남기기 위해 서기 414년에 능의 동쪽에 건립한 것이다.

 

 

이 비석의 모양은 아래와 위가 넓고 가운데가 좁은 형태이다. 높이는 6.39미터이고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미터. 제2면이 1.35미터, 제3면이 2미터,제4면이 1.46미터이다. 또 아랫부분을 받치고 있는 좌단은 화강암으로 길이는 3.35미터,너비는 2.7미터로 불규칙한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좌단의 두께는 고르지 못하여 동남측이 0.16미터,서북측이 0.68미터이다.

 

이 비에는 사방으로 비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비문의 글자 총수는 원래 1,775자였으나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141자이다. 그리고 141자 중 앞뒤 문맥으로 추측 가능한 글자가 9자이므로 현재 132자에 대한 판독은 불가한 실정이다.

 

이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첯째 부분은 고구려 건국과 관련하여 추모(주몽),유류(유리),대주류(대무신왕) 등 3대의 왕위 계승에 대한 것과 광개토왕의 즉위에 대한 내용이다.

둘째 부분은 광개토왕의 치적을 적은 것으로, 여기서는 백제정벌, 신라구원, 부여정벌 등에 대한 내용들이 쓰여 있다.

셋째 부분은 광개토왕이 생시에 내린 교시에 근거한 묘비와 연호의 규정을 적고 있다.

 

이같은 비문의 내용은 그 어느 사서에서도 찿아볼 수 없는 귀중한 사료로서 고구려 및 그 주변 국가의 역사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내용의 일부가 훼손되어 판독이 불가하거나 확인되는 글자 중에도 판독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 때문에 해석 문제를 놓고 학자들간에 심각한 대립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여기서는 능비의 발견과정과 탁본과정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비문의 내용 중 광개토왕의 치적과 관련된 부분의 번역본을 옮긴다.

 

 


 



  

발견과정

광개토왕릉비는 현재 중국 길림성 통화전구 집안현 태왕촌 대비가에 있다. 이 곳 집안은 압록강 중류 만포진에서 마주 보이는 곳이며, 그 주변에서 고구려의 고분과 유적지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 능비는 장수왕에 의해 414년에 건립된 이래 발해 때까지 제대로 보전되다가, 발해가 망하고 요를 세운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곳을 차지하면서 세인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갔다. 그리고 요를 멸망시킨 만주족이 금을 세운 후에는 광개토왕릉비가 금 왕조의 능비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집안은 후대인들에게는 금의 왕성으로 인식되었고, 명대를 거치면서 그 같은 인식은 더욱 굳어졌다.

 

그리고 명을 멸망시킨 만주족이 청을 세우면서 그 곳을 자기나라의 발상지라 하여 세인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이 때문에 조선의 학자들은 당연히 이 능비를 금 왕조의 묘비로 여겼고, 이광수 같은 학자는 '지봉유설'에서 금나라 시조의 비라고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무렵 비각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미 지상에서 사라지고 능비는 땅속에 묻힌 상태였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러 청은 집안에 대한 봉금 명령을 풀고 그 곳에 회현현을 설치했다. 이에 따라 민가가 들어서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1880년경에 땅을 개간하던 농부 한 사람이 이 비석을 발견하여 관아에 신고함으로써 능비는 다시금 빛을 보게 되었다. 

 

탁본과 판독

농부에 의해 능비가 발견되자 그곳 수령이던 장월이라는 관리가 금석학에 조예가 있던 부하 관월산을 시켜 처음으로 탁본 작업을 시도했다. 그리고 부분적인 탁본이 만들어져 북경의 금석학계에 소개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부터 능비는 금석학계에 비상한 관심거리가 되기에 이른다.

 

그 후 중국의 금석학계는 정교한 탁본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공을 기울였으나 쉽게 성취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중국을 여행하던 일본군 밀정 하나가 능비를 발견하고 탁본을 떴다. '사카와'라는 이 육군 중위는 탁본작업을 하면서 일부글자를 변조했는데, 이 탁본을 기초로 하여 이른바 '쌍구가묵본'이 마련된다. 일본은 이 쌍구가묵본을 입수하자 군의 참모부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판독작업을 시작하여, 1889년에 판독내용을 세상에 공포하였다.

 

한편, 중국에서도 1885년부터 비문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하였고, 일본도 1889년에 비문내용을 공포하자 양국이 경쟁적으로 탁본 작업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탁본 값어치를 올리려는 일부 모리꾼들과 좀 더 값비싸고 정교한 탁본을 얻으려는 노력이 가속되는 가운데 비면에 석회칠이 되는 등 변조가 이뤄진다. 이런 까닭에 비문은 오독되고, 비면은 마모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최초의 탁본부터 1890년대 이전의 탁본이 모두 사라지는 데 그 이유는 내용 중 상당 부분이 중국과 일본에 역사적으로 불리한 내용들로 두 나라가 사장시켰을 것으로 판단되며, 그 후 능비 연구에 막대한 차질을 초래하게 된다. 러.일 전쟁 승리 이후 자유롭게 능비에 접근이 가능해진 일본에 의해 능비 연구는 물론 능비 주변의 유적지 연구를 독점하게 된다. 이에 따라 비문과 유적에 대한 해석은 일본의 시각에 한정되는 경향을 띠게 된다.

 

그로부터 오랜 공백기를 거쳐 1957년에 이르러 중국학자들에 의해 능비 주변의 유적지 연구가 새롭게 시작되었고, 1963년에는 박시형 등의 북한 학자들이 거기에 가담함으로써 능비 연구는 전환점을 맏이한다. 그러나 1882년 사카와가 비문의 일부를 변조한 까닭에 아직까지 그 내용을 정확하게 판독하지 못하고,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광개토왕릉비의 비문내용과 주요전쟁

 

전술한 바와 같이 비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동명성왕, 유리명왕, 대무신왕 등의 이야기로부터 광개토왕에 이르는 과정 및 비의 건립 경위를 간단하게 기술한 첯째 부분은 묘비 제1면 1행에서 6행에 해당한다. 둘째 부분은 광개토왕의 정복전쟁을 기술한 부분으로 제1면 7행에서 제3면 8행에 걸쳐 있으며, 묘비 및 연호에 관한 내용을 다룬 셋째 부분은 제3면 제8행에서 제4면 9행에 해당한다.

 

이 세 부분 중 첯째 부분은 표현상의 차이가 다소 있으나 '삼국사기'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고, 셋째 부분은 고구려사 연구의 사료적 가치는 있으나 별도 언급을 요구하지 않는 내용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둘째 부분인 광개토왕의 정복에 관한 기록은 해석의 접근방법에 따라 많은 논란이 될 수 있으며, 사료적인 가치도 가장 높다. 여기서는 번역문을 옮겨 적는다.

 

광개토왕이 확장한 대부분의 영토는 백제로부터 빼았은 것이었다.

 

광개토왕은 즉위 초부터 지속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였고,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 내기 위해 왜와 연합하여 대항한다. 하지만 백제는 번번이 싸움에서 패배한다. 이 때문에 광개토왕 말기에 이르러서는 백제의 영토가 산동반도 일부와 한반도 남쪽 서부 지역으로 축소되기에 이른다.

 

광개토왕이 백제를 압박한 것은 단지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겠다는 감정적 차원이 아닌 330년 이후 지속적으로 세력이 성장한 백제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으며 371년 평양성을 공격한 백제군에 의해 고국원왕을 잃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이에 따라 고구려 조정에서는 백제 정벌론이 강하게 대두되었으나 고구려는 고국원왕 사후 쇠약해진 국력으로 백제와의 전쟁을 당장치르기는 역부족이었다.

 

이와같은 현실적인 이유로 고구려는 소수림왕과 고국양왕 재위시에는 백제에 대한 강경자세를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광개토왕이 즉위하자 왕은 영토확장에 강한 집착을 보였고, 그것은 곧 백제에 대한 정벌전쟁으로 이어진다. 이를 위해 광개토왕은 말갈을 압박하여 한반도 백제를 공략하게 하는 한편 신라와 연대하여 백제의 후방을 위협하였다.

 

이후 광개토왕은 관미성 전투, 패수싸움, 병신대원정, 경자대원정, 갑진왜란, 정미대출병 등을 치르며 즉위 초에 수립한 팽창정책의 목표를 달성해 간다.

 

관미성 전투

관미성 전투는 고구려가 백제의 요새 관미성을 함락시킨 큰 전쟁으로 고구려 광개토왕 2년, 백제 진사왕 8년에 일어났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광개토왕 원년 기사

가을 7월, 남쪽으로 백제를 공략하여 10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겨울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공략하여 점령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며 바다로 둘러싸여 왕이 일곱 방면으로 군사를 나누어 공격한 지 20여 일만에 함락시켰다.(광개토왕 원년은 광개토왕릉비의 영락 2년에 해당됨)

 

*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 8년 기사

가을 7월, 고구려왕 담덕이 4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용병에 능통하다는 말을 듣고 대항하기를 회피하였다.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을 빼았겼다. 그해 10월, 고구려가 관미성을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며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1월, 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죽었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관미성은 대륙백제의 매우 중요한 기지이며 요새였다. 지금의 산동반도 윗쪽 발해해안 돌출부에 위치한 요새로 사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또한 성 주변은 바다로 감싸여 있었다. 그런데 백제는 이 중요한 기지를 고구려에 빼았겼고, 그 때문에 한수 북쪽을 상실했다.

 

 

 

 

광개토왕은 관미성을 함락하기 앞서 4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미 대륙백제의 10개 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10개 성에서 패배한 백제군은 관미성으로 집결하여 고구려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백제군이 천혜의 요새에 진을 치고 수성전을  치렀으나 고구려 정예 4만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백제는 접전 20일 만에 관미성을 잃고 한수 이북을 고구려에 내주고 말았다.

 

이러한 대패를 거듭하는 동안에 백제의 진사왕은 적극적으로 고구려군에 대항하지 않고 광개토왕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포자기하는 행동을 보였으며 전투중에 왕은 사냥을 떠나 전쟁을 지휘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백제군은 왕의 결재를 받지 못하는 사이 조직이 와해되고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결국에는 관미성까지 잃게 된다.

 

이에 따라 진사왕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그 기회를 놓지 않고 침류왕(제15대, 진사왕의 형)의 맏아들 아신왕이 숙부인 진사왕을 사냥터에서 제거한다. 그리고 제위에 오른 아신왕은 고구려에 빼았긴 관미성을 되찿기 위해 군사를 동원한다.

 

아신왕의 관미성 수복전쟁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2년 기사>

봄 정월, 진무를 좌장으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진무는 왕의 외삼촌으로 침착하고 지략이 많았기에 사람들이 그들을 추종했다.

 

가을 8월,왕이 진무에게 "관미성은 우리의 북변 요새이다. 그 땅을 지금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다. 과인은 이것이 너무ㅡ 애통하니, 그대는 응당 여기에 노력을 기울여 땅을 빼앗긴 치욕능 갚아야 할 것이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남쪽 변경을 칠 계획을 세웠다. 진무는 병사들의 선두에 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석현 등의 다섯 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둘러싸고 굳게 방비하는 바람에 진무는 군량의 수송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야 했다.

 

백제는 관미성 수복에 실패하자 이듬해인 394년 7월에 다시금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친다. 하지만 수곡성에서 광개토왕이 이끄는 고구려군 5천에  대패하여 퇴각하고 만다.

 

결국 백제는 관미성을 수복하지 못하고 그 주변 10개 성은 고구려 소유가 되고, 이 때부터 백제는 대륙에서 한수 이남으로 밀려났다.

 

[여기서 한수(漢水)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 한반도 중부 지역을 흐르는 한강으로 볼 수 없다. 당시 고구려의 남쪽 변방은 발해만 연안이었으며, 이무렵 백제는 발해만 연안의 하북과 산동에 요서군과 진평군을 건설하여 대륙진출을 확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의 중심지인 요동을 기준으로 할 때 한반도는 동쪽이지 남쪽이 아니므로 고구려가 친 남쪽의 백제는 하북과 산동에 설정될 수 있는 대륙백제의 기지를 의미한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대륙백제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고구려의 백제 침략전쟁을 모두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처럼 쓰고 있다, 하지만 광개토왕릉비에도 나타났듯이 고구려는 백제를 칠 때 해군을 이용하고 있다. 이 기록에는 고구려가 남쪽으로 진군하였다는 내용도 없으며, 한수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 광개토왕릉비에서는 지금의 한강을 '아리수'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한수를 모두 한강으로 단정할 수 없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대륙백제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의 하수(河水,황하)를 모두 한반도의 한강으로 착각했다는 결론이다.

 

따라서 광개토왕이 392년에 점령한 한수 북쪽의 11개 성은 모두 하수(황하) 북쪽에 설정될 수 있는 백제의 요서군과 진평군에 속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패수싸움(395년): 영락5년, 그때는 을미년이었다

왕은 비려가 붙잡아간 사람들을 귀환시키지 않자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토벌에 나섰다. 부산을 지나 염수의 상류에 이르러 3개의 부락 육칠백명 영(마을)을 격파하고 수없이 많은 소와 말, 그리고 양 떼를 노획하였다. 거기서 돌아오면서 양평도를 거처 동쪽으로 *성,역성,북풍에 이르렀다. 왕은 사냥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국토를 즐기며 구경도 하고 사냥도 하면서 돌아왔다.

 

                             

 

-패수싸움은 고구려 광개토왕 5년, 백제의 아신왕 4년에 있었던 전쟁으로 백제의 아신왕이 한수 이북을 회복하기 위해 벌였다. 이 전쟁에 대해 삼국사기의 고구려와 백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4년 기사>

가을 8월, 왕이 패수에서 백제와 싸웠다. 왕은 그들을 대패시키고 8천여 명을 생포하거나 목을 베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4년>

가을 8월, 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니, 고구려의 왕 담덕이 직접 군사 7천을 거느리고 패수에 진을 치고 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사망자가 8천 명이었다.

 

겨울 11월, 왕이 패수 전투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하여, 직접 군사 7천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 아래에 진을 쳤다. 그 때 큰 눈이 내려 병졸 가운데 동사자가 많이 발생하자 왕은 회군하여 한산성에 와서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패수싸움은 아신왕이 한수 이북을 회복하기 위해 좌장 진무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략토록 한 전쟁이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도 백제군은 고구려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사망자가 8천이었다고 기록한 기록한 것을 보면 동원된 백제군은 그 보다 훨씬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많은 군사가 고구려군 7천에 대패하였다. 그것도 8천 명이 전사하는 완전한 패배였다.

 

전사가 8천이면 포로는 수천 명에 달했을 것이다. 거기에다 부상자까지 합한다면 백제의 피해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군사를 지휘하던 좌장 진무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진무는 복귀한 뒤에 병관좌평으로 승진하였다. 이는 곧 패수에서 전사한 9천 명이 진무 휘하에 있던 병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이 때 전사한 8천의 군사는 출전 병력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패수에서 살아 돌아온 병력을 감안할 때 총 출전병력은 2만 내지 3만이었을 것이다. 

 

백제의 근초고왕이 371년에 평양성을 칠 당시에 총 병력은 3만이었는데, 이는 대륙에 머물던 백제 병력과 한반도에서 지원된 일부 병력이 합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평양성 싸움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끓임없이 세력 다툼을 지속했기 때문에 이 때 조성된 백제군 3만은 그대로 대륙에 남아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진무가 수장이 되어 동원한 병력은 바로 근초고왕 때에 구성된 대륙의 백제군 3만이었을 것이다.

 

이 3만의 군대는 패수싸움에서 대패하는 바람에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광개토왕은 더 이상 백제의 대륙군이 평양을 공략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백제의 근거지인 한반도에 대한 대원정을 감행한다.

 

그런데 학계 일부에서는 이 패수싸움이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패수를 예성강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단정을 바탕으로 광개토왕이 백제로부터 획득한 영토를 예성강과 한강 사이의 경기 일원에 한정시키고 있다.

 

하지만 패수를 예성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뚜렷한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이는 패수의 위치문제에 대한 여러 주장들을 살펴보면 여지없이 증명된다.

 

 

                         

 

 

패수는 패하 또는패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 시대 이후 패수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어 왔다. 하지만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예성강을 패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조선 시대 학자들 가운데 실학자 계열에 있던 사람들은 랴오허(요하) 서쪽의 대릉하, 압록강, 청천강 등을 패수라고 주장했고, 관학자들 사이에선 대동강을 패수라고 주장하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관학자들의 이같은 주장은 패수가 고조선의 수도인 평양 앞을 흘렀다는 기록에 바탕을 둔 것이며 고조선의 평양을 대동강변의 평양으로 믿고 그 남쪽을 흐르는 대동강을 패수로 생각했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일제 시대 이후에는 패수를 예성강으로 보는 견해가 대두하기 시작했다. 이는 광개토왕이 패수에서 백제군을 대파한 기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개의 학자들은 고조선 및 고구려의 평양을 대동강변의 평양으로 설정하였는데, 막상 광개토왕이 남진하여 백제군과 싸운 곳이 패수였다는 기록에 맞닥뜨리자 종전의 청천강설 및 대동강설을 스스로 뒤집고 예성강설을 내세우게 된 것이다.

 

패수를 예성강으로 내세우게 된 배경에는 평양의 위치 때문이다. 만약 청천강을 패수로 설정할 경우 평양이 패수 남쪽에 있게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백제본기 근초고왕편에서 고구려가 당시 백제 땅을 침략하여 패하(패수)에서 패배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때문에 패수는 원래 백제 영토 안에 있던 강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또한 패수를 대동강으로 설정하는 경우에도 청천강설과 같은 모순을 안게 되는데, 패수를 백제가 소유했다면 대동강변의 평양 역시 백제 땅이어야 한다. 또 설사 백제가 패수 남쪽을 점유하였다손 치더라도 고구려 수도가 접경지역인 대동강변의 평양에 위치하였다는 결론이 되어 설득력이 없다. 따라서 일군의 학자들이 패수를 예성강으로 주장하는 이유이다.

 

패수의 위치가 이렇듯 터무니없이 예성강으로 옮겨지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삼국사기의 기록을 모두 한반도 안에서 벌어진 일로 해석하려 한 일제 사학자들에 의해 주도된 이른바 한반도사관에 의거하여 모든 고대 사료를 해석하려 했던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의 역사를 축소하려는 노력은 중국.일본의 사학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진행되었고 비문에 대한 연구는 물론 원본 탁본의 손실로 많은 해석에 혼란을 야기시켜 오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은 모두 마멸시켜 판독이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며 변조와 조작으로 사실 내용을 영원히 되찿을 수 없도록 만들게 된 불행은 우리들 후손들이 나라까지 망하는 비운의 역사를 만든 결과일것이다. 결국 자신들 조상들이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세웠더라도 지지리도 못 난 후손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역사까지 잃어버리게 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패수에 관련된 많은 기록이 패수가 한반도 안에 있던 강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사마천의 사기에 나타난 패수에 대한 최초의 기록에서도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