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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1 : 고구려 역사 24 (광개토왕릉비와 그 내용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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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1 : 고구려 역사 24 (광개토왕릉비와 그 내용 2)

두바퀴인생 2010. 10. 15. 00:46

 

 

 

한국의 역사 41 : 고구려 역사 24 (광개토왕릉비와 그 내용 2) 

 

광개토왕릉비와 그 내용 2

 



 

                                          

     광개토태왕릉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타난 최초의 패수에 대한 기록

'조선의 왕 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가 번성하였을 때는 진번과 조선을 공략하여 예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요새를 건축하였으나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자 그들을 요동의 바깥 요새에 예속시켰다. 한나라가 일어나서 그 땅이 너무 멀어 지키기가 어려운 곳이라 판단하여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까지 경계로 하여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나라 왕 노관이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니, 위만이 망명하여 무리 1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달아나 변방을 벗어나서 다시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땅이 있는 위쪽과 아랫쪽의 요새에 거처하였다. 그리고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 옛 연나라와 제나라 망명자들을 지배하여 그들의 왕 노릇을 하며 왕험(왕검)에 도읍하였다.

 

천하가 안정되자 요동 태수가 위만과 약속하여 그를 외신으로 삼았으며, 그로 하여금 변방 밖의 만이들이 변방을 도적질하는 일이 없도록 지키게 하였다. 또한 여러 만이의 우두머리들이 입국하여 천자를 만나고자 하여 이를 가로막지 못하게 하였다. 이 일을 아뢰니 천자께서 하락하였으며, 그런 까닭에 위만은 군대의 위세와 재물을 얻어 주변의 작은 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 등이 와서 복속하여 땅이 사방 수 천 리나 되었다.

 

위만이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에 이르니 꾀어낸 한나라의 도망자들이 더욱 늘어났으며, 또한 그때까지 천자를 배알하지 않았다. 게다가 진번 등의 인근 여러 나라가 글을 올리고 천자를 뵙고자 하면 그들을 가로막아 통교하지 못하게 하였다.

 

 

                   

                   

                 

 

원봉 2년(서기 109년)에 한나라가 섭하를 보내 우거를 꾸짖어 깨닫도록 하였으나 우거는 여전히 천자의 조서를 받들지 않았다. 섭하가 돌아오며 국경의 패수에 이르러 수하로 하여금 조선의 비왕 장을 찔러 죽이고 곧 패수를 건너 말을 달려 요새로 들어와 버렸으며, 마침내 돌아와서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천자께서 그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꾸짖지 않고 섭하를 요동 동부도위로 삼았다. 하지만 조선이 섭하에게 원한을 품고 병사를 동원하여 불시에 공격하여 섭하를 죽였다.

 

천자가 죄인을 소집하여 조선을 공격토록 하였다. 그해 가을에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나라 지역에서 발해로 배를 띄워 바다를 건너게 하였으며, 군사 5만을 이끌고 좌장군 순제가 요동을 출발하여 우거를 토벌하였다. 우거는 군사를 출병시켜 험준한 곳에서 자리 잡아 대항하였다.'(<사기>115권 <조선열전 제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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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에 따르면 패수는 연나라와 조선의 경계였다. 또한 연나라가 한에 멸망된 뒤에는 패수가 한과 조선의 경계였다.  그리고 한나라가 조선을 치기 위해서 제나라 지역, 즉 산동반도 지역에서 발해로 배를 띄워야 했으며, 그후 요동을 지나 조선의 수도로 향해 갔다. 발해는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로 산동반도에서 배를 띄웠다면 목적지는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지역이어야 한다. 만약 목적지가 한반도였다면 그들은 발해로 배를 띄우는게 아니라 동해(황해)로 배를 띄워야 했다. 따라서 연나라와 조선의 경계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사이에 있어야 하며, 패수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나라 시대의 요동은 황하 동쪽 또는 난하 동쪽에 비정될 수가 있다. 그리고 요동과 조선은 패수를 경계로 했기에 패수는 황하 또는 난하 동쪽과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어떤 강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학계 일부의 주장대로 요동이 랴오허 동쪽을 가리킨다손 치더라도 패수는 요동반도와 랴오허 사이에 있아야 한다. 말하자면 그 어떤 경우에도 패수가 한반도에 설정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또한 요동반도와 랴오허 사이에는 경계로 정할 만큼 큰 강이 없다. 따라서 패수는 적어도 랴오허와 남하 사이 또는 랴오허와 황하 사이에 설정되어야 옳다.

 

패수의 위치가 이렇게 설정되면 광개토왕 시대에 백제와 고구려가 누차에 걸쳐 싸움을 벌였던 패수는 결코 예성강을 비롯한 한반도 안에 있는 강이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랴오허와 황하 사이에 있던 이 패수 지역에서 백제와 고구려가 싸움을 벌였다는 것은 광개토왕이 백제로부터 뺏은 땅이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증명된다. 그리고 이는 곧 대륙백제가 광개토왕 때부터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패수싸움은 이처럼 대륙백제의 위치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이며, 광개토왕이 넓힌 고구려 영토의 한계를 파악할 수 있는 시금석인 셈이다. 게다가 패수는 한수(漢水)보다 북쪽에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한수가 곧 하수(河水,황하)이며, 백제의 첯 도읍지인 하남(河南)은 하수 남쪽을 의미하고, 백제가 개척한 진평군은 한수 남쪽의 산동반도에, 요서군은 하북 지역에 있었다는 주장을 가능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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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 태왕 6년(396년) 병신년 기사

<백잔(百殘, 백제를 낮춰 부른 말)과 신라는 옛날에 우리의 속민이었기에 조공을 해왔다.<그런데 신묘년 이래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을 치고 신라를 공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신묘년에 왜가 도래하자 바다를 건너 백잔을 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던 것이다.}> 6년(영락 태왕 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우리 군사가 백잔의 남쪽 국경에 도착하여 일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우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고사조성 아단성 그리성 *리성 잡미성 오리성 구*성 고모야라성 ***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농매성 비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대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누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적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종성 임성 ****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승발성 종고로성 구천성 **** 핍기국성을 공격하여 취했으며 어느듯 백잔의 도성에 근접하였다. 그러나 백잔은 의에 항복하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여 덤볐다. 왕은 위엄을 떨치며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선두부대를 백잔성으로 진격시켰다. 백잔의 병사들은 그들의 소굴로 도망쳤으나 곧 그들의 소굴을 포위했다.그러나 백잔의 군주는 방도를 구하지 못하고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고 왕 앞에 무릎을 끓고 맹세하였다. "지금부터 이후로 영원토록 노객이 되겠습니다." 이에 태왕은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여 후에도 그가 성의를 다하여 순종하는지 지켜보겠다고 하였다. 이번에 모두 백잔의 58개성, 7백개 촌을 얻었다. 백잔주의 형제와 백잔 대신 10인을 데리고 출정했던 군대를 이끌고 국도로 돌아왔다.>

 

'병신대원정'은 광개토왕 6년의 일로 패수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광개토왕이 병신년인 서기 396년(영락6년)에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 징벌에 나선 것을 일컫는다.

 

패수싸움에서 승리한 광개토왕은 백제의 대륙병력이 거의 무력화되었다는 판단에 따라 백제의 도성이 있는 한반도를 징벌하기 위해 떠난다. 이 같은 내용은 광개토왕비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상기의 비문 기록에서 백제와 신라가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는 내용은 과장된 것으로 보이며, 왜가 백제를 치고 신라를 공격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도 백제 공격을 합리화 하기 위한 서술로 판단된다.

 

백제가 고구려와 처음 부딪친 것은 책계왕 원년인 286년이었다. 그 후 한 동안 교류가 없다가 근초고왕 때 대륙정책을 수립하여 고구려와 본격적으로 부딪쳤고, 결국 371년의 평양성 싸움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케 하는 상황에 도달했다. 또한 신라는 245년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았고, 248년에 고구려에 화친을 요청했다. 하지만 신라가 고구려에 속국이 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기록은 과장된 기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왜가 백제를 치고 신라를 공격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록 역시 백제 원정을 합리화하기 위한 서술로 보인다. 여기에는 일본의 비문 조작 농간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당시 왜는 백제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동맹관계에 있었으며, 신라는 왜의 침입을 받기는 했으나 그들에게 몰락한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왜는 백제나 신라를 무너뜨릴 정도로 강한 힘을 형성하지 못한 상태이며 오히려 백제로 부터 정치.문화적으로 도움을 받고 있던 터였다.

 

따라서 백제,신라,왜의 외교관계를 주도한 측은 백제였으며 신라는 이같은 구도에서 탈피하기 위해 광개토왕 즉위 이듬해인 392년에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맺었다. 이에 백제와 왜는 신라를 협공하려 했으며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는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때문에 왜가 백제를 치고 신라를 공격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록은 단지 고구려가 백제를 치는 데 필요한 명분을 만들기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광개토왕은 이같은 명분을 내세워 대원정에 나선다. 원정을 위해 고구려는 대선단을 형성하였고, 수군을 이용하여 한반도 아리수(한강) 북쪽 백제 땅에 상륙했다.

 

이 기록에서 광개토왕은 육군을 이용하지 않고 수군을 이용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만약 사학계 일부의 주장대로 고구려의 수도가 대동강변 평양이고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선이 예성강이었다면 굳이 고구려가 수군을 동원하여 바다를 통해 백제를 칠 이유가 없다. 해로를 이용한다는 것은 자칫 풍랑을 만나면 제대로 공격도 해보지 못하고 수장되거나 퇴각해야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군이 카르타고와 1차 포애니 전쟁시 카르타고와 전쟁에서 승리 후에 본국으로 귀환하던 로마군 수 십만 명이 풍랑을 만나 시칠리아 근해에서 거의 대부분 병력이 수장되는 참혹한 결과를 초래한 전례가 있다. 더구나 고구려군이 바닷길을 통해 상륙한 곳은 아리수(현재 한강) 북쪽이었다. 그리고 정작 아리수를 건너 백제 도성을 공격할 때는 바닷길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강폭이 좁은 예성강이나 임진강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위험성이 높은 바닷길을 이용하고, 강폭이 넓은 아리수(한강)을 건널 때는 오히려 육로를 이용한다는 것은 상식박의 행동이다. 물론 아리수를 건널 때 수군의 배를 이용하여 건너기도 하였을 것이다.

 

광개토왕이 수군을 이용하여 백제를 침입한 것은 수군을 이용하는 것이 백제 공략에 가장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즉 한반도의 백제를 치기 위해서는 바닷길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빠른 방법이었다는 것이며 고구려의 수도가 한반도 안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말하자면 고구려의 수도가 대동강변 평양이었다면 굳이 위험성이 높은 바닷길을 이용하여 백제를 칠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다.

 

당시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말갈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말갈은 신라와 고구려의 북쪽 변경지대에서 세력을 형성하여, 틈만 나면 쉴 새 없이 백제와 신라를 공략했다. 신라와 백제를 공략한 말갈은 일곱 종류의 말갈 중 백산 말갈로서 압록강변과 청천강 사이에 거점을 형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고구려에 조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백제와 신라에 압박을 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광개토왕의 백제 원정 때에는 말갈군이 동원된 흔적은 전혀 없으며, 말갈 지역을 통과한 기록도 없다. 다시 말해 고구려군은 말갈 지역을 통과하거나 말갈군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육로를 이용할 경우 말갈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광개토왕은 해로를 이용했던 것이다. 

 

이릇듯 해로를 이용하여 대원정에 나선 광개토왕은 대승을 거둔다. 이 싸움에서 58개의 성과 7백 개의 촌이 형성된 아리수 이북의 백제 땅을 모두 차지했다. 또한 아리수를 건너 남진하여 백제의 도성을 공격하여 백제 왕족과 신하 10명, 평민 1천 명 등을 포로로 잡았다. 하지만 이 때 광개토왕이 백제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노객이 되겠다는 서약을 받았다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일 것이며 남여 1천 명을 백제왕이 바쳤다는 것도 포로로 1천여 명을 잡아온 것을 과장해서 한 표현일 것이다.

 

그후 백제는 세력이 급격하게 약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고구려에 빼았긴 영토를 되찿지는 못하고 왜에 태자를 보내 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한편 광개토왕은 이리수 이북  빼았은 백제 땅에 부수도인 하평양(아래 평양)을 건설한다. 이는 능비 영락 태왕 9년 기해년조의 '백잔이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은 하평양을 순시하였다' 는 기사에서 확인된다.

 

학계 일각에서는 '하평양'을 '남평양'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당시의 방위 개념에서 하(下)는 남쪽, 상(上)은 북쪽을 의미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상'은 반드시 북쪽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왕이 머무는 도성을 '상(上)'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하(下)' 역시 남쪽만을 가리키는 것이 나이라 왕이 머무는 도성 이외의 모든 곳을 가리켰다. 따라서 '하평양'을 무조건 '남평양'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평양'은 말 그대로 '아래 평양'을 의미하며, 이는 곧 수도인 '평양'에 대비되는 '명칭'이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하평양'은 '작은 수도' 또는 '부수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광개토왕은 백제로부터 빼았은 아리수 이북의 영토에 부수도인 평양을 건설하여 한반도 통치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리고 이 때 건설된 하평양에 대해서 학계 일부에서는 한강 주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한강 근처에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접경 지역이었기 때문에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았다. 때문에 고구려의 부수도인 하평양이 아리수 주변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백제의 경계선에서 멀고 고구려에 가까운 대동강 북쪽에 부수도가 설치됐을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오늘날 학계 일부에서 고조선,고구려 등의 수도였다고 주장하는 대동강변의 평양은 단지 광개토왕이 건설한 부수도인 '하평양'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영락 태왕 8년(398년) 무술년 기사

<8년 무술년에 일부 군대를 백신의 토곡에 보내 순찰토록 하였다. 그결과 막사라성,가태라곡의 남녀 3백 명을 잡아왔으며, 이로부터 조공하고 정사를 보고했다.>

 

4) 양락 태왕 9년(399년) 기해년 기사

<9년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화통하였다(이에) 왕은 하평양을 순시했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아뢰기를 그 나라에는 왜인이 가득하여 성들을 모두 파괴하고, 노객(신라왕)을 천민으로 삼았으니(고구려)에 의탁하여 왕의 지시를 듣고자 한다고 하였다. 태왕은 인자하여 그 충성심을 칭찬하고, (신라)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밀계를 내렸다.>

 

5) 영락 태왕 10년(400년) 경자년 기사

<10년 경자년에 (태왕은)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그때)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인이 가득했다. 관군(고구려군)이 그곳에 이르자 왜적은 퇴각했다. 이에 우리가 왜적의 뒤를 추적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자 그 성은 즉시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고 지키게 하였다. 신라성, 간성 등에서 왜구가 크게 함락되었다. 성 안에 있던 십분의 구의 신라인은 왜를 따라가길 거부했다. 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를 두게하였다. 지금껏 신라 매금(이사금 또는 임금)은 스스로 와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하지 않았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임금은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

 

'경자대원정'은 서기 400년 경자년에 고구려가 왜의 침략을 맏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한 사건이다. 신라는 원래 백제,왜,가야 등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가 한반도 진출을 노리며 신라에 사신을 보내자 신라의 내물왕은 392년 정월에 조카 실성을 인질로 보내며 동맹을 맺었다. 이렇게 되자 백제,왜,가야 등은 연합군을 형성하여 한반도 진출을 노리는 고구려에 대항하는 한편, 신라를 압박한다. 그러다가 서기 396년에 고구려가 대원정을 실시하여 아리수 이북의 백제 땅을 차지하자 백제는 왜에 태자를 보내 원군을 요청하고 399년에 우선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신라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에 신라는 백제를 비롯한 연합군 세력에 밀려 궁지에 몰리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때마침 하평양에 내려와 있던 광개토왕을 만나 원병을 요청하게 된다. 신라의 원군 요청을 받은 광개토왕은 이듬해인 400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한다. 하지만 광개토왕이 직접 출정하지는 않았다. 직접 출정하지 않은 이유는 이 전쟁의 성격이 고구려의 정벌전쟁이 아니라 신라에 원군을 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 이 무렵 화북의 새로운 맹주로 부상한 후연과 세력 다툼을 벌이던 중이라  도성에 머물면서 중원정세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신라를 지원한 고구려 원군은 신라 전역에 가득차 있던 왜군을 몰아내고, 임나가라까지 진격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그 성을 신라에 넘겨준다. 이렇게 되자 신라는 나라를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고구려에 조공하기에 이른다. 그 후의 역사는 이러한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은혜의 나라 고구려를 멸망시킬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6) 영락 태왕 14년(404년) 갑진년 기사

<14년 갑진년에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지역을 침범하였다. (그들은) 백잔국과 연합하여 석성을 공격하였다. {늘어선 배에서 많은 적들이 몰려왔다.}왕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평양을 출발했다. 그리고 .... 봉에서 적과 만났다. 왕은 적을 막아서며 대열을 끓고 좌우에서 공격하였다. 왜군은 괘멸되었고, 죽은 적은 수없이 많았다.({}속의 낸용은 단지 '연선(連船, 늘어선 배)'이라는 문구만 확인되고,나머지 내용은 추론한 것임).>

 

왜와 백제는 경자년 패배 이후 고구려 본토를 공략하여 잃었던 영토를 회복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기회를 노리던 그들은 고구려가 402년 후연에 빼았겼던 남소와 신성을 되찿기 위해 후연의 평주를 공격하자 본격적으로 고구려 침공계획을 수립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후연에 빼았겼던 남소와 신성을 회복한 후 404년 11월에 후연의 평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 후 고구려는 여세를 몰아 유주와 후연의 도성에 대한 공격을 펼쳤다. 왜와 백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해로를 통해 고구려의 대방지역을 기습공격하였다. 이릇듯 백제와 왜의 기습을 받은 고구려는 급히 병력을 후퇴시켰고, 그 바람에 추격해온 후연군에게 쫓겨 요동성 함락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이 때 광개토왕은 중앙의 정예군을 이끌고 대방으로 출동하여 먼저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격퇴시키고 이어서 요동성을 구하게 된다.

 

당시 백제와 왜군은 수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대방지역을 공격하였다. 당시 백제는 대륙에도 기지가 있었기 때문에 왜와 백제의 연합군은 백제의 대륙기지인 산동반도에 은밀히 집결하였다가 일시에 고구려를 습격한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후연을 공격하느라 유주 지역에 주력군을 보낸 상태로 백제와 왜의 기습은 고구려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 사건으로 고구려는 점령 직전에 있던 유주 땅을 포기하고 퇴각해야 했으며, 전세가 역전되어 후연군에게 쫒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 요동 지역의 요새인 요동성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게 되자 광개토왕은 직속부대인 정예부대를 이끌고 먼저 왜와 백제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요동성을 구할 수가 있었다.

 

이처럼 갑진왜란은 고구려 팽창정책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며, 이 때문에 고구려는 다시 한 번 백제의 대륙기지를 공략한다. 말하자면 대륙의 잔존세력을 완전히 제거해야만 수도 평양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7) 영락 태왕 17년(407년) 정미년 기사

<17년 정미년에 보병, 기병 5만을 출병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은 사방 포위작전을 지시했다. 적은 대부분 궤멸되었으며, 개갑 1만여 영과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군사기계를 획득했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누성,우불성, *성,....성을 격파했다.>

 

정미대출병은 갑진왜란에 대한 보복 작전으로 서기 407년에 잇었던 사건이다. 갑진왜란으로 유주 정복 계획이 좌절되자 광개토왕은 군사 5만을 동원하여 백제의 잔여 대륙기지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그 곳에 머물고 있던 백제군과 왜군을 공격한다.

 

하지만 대륙의 백제기지를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다만 갑진왜란 이후 군기가 되살아난 백제군과 왜군의 사기를 꺽고, 사구성을 비롯한 6개 성을 빼았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고구려는 백제의 대륙군을 무력화하고자 한 본래의 목적은 어느정도 달성한 셈이다.

 

8) 영락 태왕 20년(410년) 경술년 기사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으나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군대가 부여성에 이르자 부여는 거국적으로 두려워하여 굴복했다. 그리고 ...를 바쳤다. 왕은 은덕이 모든 곳에 미치자 환국하였다. 또 그 때에 왕의 교화에 감화되어 관군을 따라 미구루압로, 타사루압로, ***압로 등이 왔다. (왕은) 일생 동안 64개 성 1천 4백 촌을 공격하여 무너뜨렸다.>

 

광개토왕은 일생을 영토확장을 위한 정복전쟁으로 고구려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역을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기록된 비문 발견으로 역사적 사실이 가장 정확하게 입증된 왕이기도 하다. 그는 일생을 영토확장전쟁으로 일관하다가 413년 10월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