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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0 : 고구려 역사 13 (제10대 산상왕 ) 본문
한국의 역사 30 : 고구려 역사 13 (제10대 산상왕 )
제10대 산상왕
산상왕(山上王, ?~227년, 재위 197년~227년)은 고구려의 제10대 군주이다. 신대왕의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휘는 연우(延優) 또는 이이모(伊夷模)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다른 이름으로 위궁(位宮)이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지(三國志)》 등의 중국 기록에 의하면 위궁은 산상왕이 아닌 동천왕(東川王)의 이름이다.
기원전 37년 ~ 668년
476년 고구려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졸본 (기원전 37년 ~ 3년)
국내성 (3년 ~ 427년)
평양성 (427년 ~ 668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8년69만호 (약 3,500,000명)
성립
기원전 37년
멸망
668년
초대 군주
동명성왕
기원전 37년 ~ 기원전 18년
최후 군주
보장왕
642년 ~ 668년
성립 이전
부여
해체 이후
발해, 신라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고국천왕의 왕후 우씨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였다. 우 왕후는 산상왕의 아내가 되어 다시 왕후에 올랐다. 이것은 고구려의 형사취수 풍습이 남아있는 것이며, 우씨의 권력 유지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산상왕의 형이었던 발기(發岐)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3일 동안 산상왕이 농성하는 가운데 고구려 국내에서도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자 발기는 요동으로 망명하였다. 뒤이어 발기가 요동 태수 공손도(公孫度)에게 군사를 빌려 쳐들어 오니 왕은 동생 계수(罽須)를 보내 막게 하였다. 계수가 발기의 군대를 물리치자 발기는 자살하였다.
198년에 환도성(丸都城)을 쌓았고 203년에는 국상 을파소(乙巴素)가 죽어 고우루(高優婁)를 후임 국상으로 삼았다. 209년에는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208년 겨울 음력 11월에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는 일이 일어났다. 제사 담당자는 돼지의 뒤를 쫓아 주통촌(酒桶村)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후녀(后女)라는 20세 가량의 여인의 도움으로 돼지를 잡았다. 이 소식을 들은 산상왕은 후녀를 몰래 찾아가 하룻밤을 보냈다. 왕후는 이를 알고 분노하여 그 후녀를 죽이려 하였으나 후녀가 산상왕의 아들을 잉태하여 죽이지 못하였으며, 후녀는 아들 교체(郊彘)를 낳았다. 후녀는 소후(小后)로 봉해졌고 213년에는 후녀의 아들 교체가 태자에 책봉되었다.
217년에는 후한(後漢) 평주(平州)의 하요(夏瑤)가 1천여 가(家)를 거느리고 투항하였으며, 왕은 책성(柵城)에 이들을 안치하였다. 227년에 서거하니 산상릉(山上陵)에 장사지냈다.
가계
- 왕후 우씨(于氏. ? ~ 234년) : 고국천왕과 산상왕의 부인이다. 유언으로 산상왕릉 곁에 묻혔다.
- 소후 후녀(小后 后女. ? ~ ?) : 주통촌 출신의 평민 여인.
- 고우위거(高憂位居) : 동천왕이다.
섬긴 사람들
동시대 백제, 신라
고구려 왕 계보도 (삼국사기에 의거)
해모수═╤═유화부인(하백의 딸)
│
소서노═╤═ 1.추모(bc37~19)═╤═예씨부인
│ │
┌┴┐ 2.유리명왕(bc19~ad18)═╤═송양왕의 딸
비류 온조 │
┌─┬─────┬────---┬────-┼─────------┐
도절 해명 3.대무신왕(무휼) 여진 4.민중왕(해색주) 재사═╤═부여태후
(ad 19~ 44) (44~48) │
갈사국왕녀═╣ ╠═ 원비 ┌──────┼─────---┐
호동 5.모본왕(? ? ? ). 6.태조왕(궁) 7.차대왕(수성) 8.신대왕(백고)
(49~53) (54~146) (146~165) (165 ~ 179)
┌┴┐ │ │
막덕 막근 추안 ㅣ
┌────────---┬───────────┬────────────── ┴─--┐
9.고국천왕(이이모) 발기 ╔═10.산상왕(연우)═╤═후녀(주통부인) 계수
(179~197)║ ║ (197~227) │
╚ 우씨왕후(우소의 딸)═══=====╝ 11.동천왕(교체)(227~248)
┌────────────────────--┼──┐
관나부인(장발미녀)══12.중천왕(연불)(248~270) ═╤═연씨왕후 예물 사구
│
┌───────┬───────────────------┴───┬──┬──l
(??) 13.서천왕(약로)(270~292) ═╤═우씨왕후(우수의 딸) 달가 일우 소발 공주(?)══명림홀도
┌──────────--┴───-─┐ (부마도위)
14.봉상왕(상부)(292~300) 돌고
┌┴┐ │
(?) (?) 15.미천왕(을불)(301~331)
├───────────┐
16.고국원왕(사유)(331~371) 무
┌────────┴────┐
17.소수림왕(구부)(371~384) 18.고국양왕(이연)(384~391)
│
19.광개토대왕(담덕)(391~412)
│
20.장수왕(거련)(413~491)
├──────┐
조다 승천
│
21. 문자왕(나운)(491~519)
┌──────────────────┴─────┐
22.안장왕(흥안)(519~531)══한씨미녀 23.안원왕(보연)(531~545)
│
24.양원왕(평성)(545~559)
│
25.평원왕(양성)(559~590)
┌────────────┼───────────┬──┐
26.영양왕(원)(590~618) 27.영류왕(건무)(618~642) 태양 평강공주══온달
│ │ (부마도위)
환권 28.보장왕(보장)(642~668)
┌──┬──┼──┬──┐
복남 임무 덕남 덕무 안승
자살,타살 등 일찍 죽은 왕자 타살된 왕, ══ 부부관계 |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는 2대 유리왕의 아들이자, 6대 태조왕의 생부입니다.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固, ?~293)는 13대 서천왕의 차남으로 형인 14대 봉상왕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 15대 미천왕의 생부입니다.
. 장수왕의 아들인 조다(助多)는 생부인 20대 장수왕이 413~491년 오래 재위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먼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21대 문자왕(文咨王/?~519)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제10대 산상왕 실록(?~227, 재위 197년 5월-227년 5월, 30년)
우왕후의 계략과 발기의 난
서기 197년 5월, 고국천왕이 생을 마감하자 그의 왕후 우씨는 권력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왕위 계승에 관해 계략을 꾸민다. 그녀는 좌가려의 난 이후 급격히 약화된 외척세력을 다시 키우는 한편 자신이 왕후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있는 방책을 강구했다.
고국천왕은 아들이 없었다. 때문에 그가 죽으면 당연히 그의 아우들 가운데 한 명이 왕위를 계승해야 했다. 그에게 세 명의 아우가 있었는데, 첯째 발기, 둘쩨 연우, 셋째 계수였다. 이들 셋 가운데 발기가 가장 연장자였기에 그가 계승하는 것은 무난했다.
하지만 우왕후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그들 형제들 가운데 그녀와 의기투합할 수 있는 사람을 왕위에 앉혀 자신을 비롯한 외척의 입김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고국천왕이 사망하자 그녀는 그 사실을 비밀로하고 은밀히 첯째 시동생인 발기를 찿아갔다. 그리고 발기에게 왕의 사망을 알리지 않고 다짜고짜로 이렇게 말했다.
"태왕께서 아들이 없으니, 이제 대군께서 왕위를 계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발기는 이 말을 듣고 왕후가 반역을 도모하려는 것으로 알았다. 왕은 이미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는 상태였고, 그들이 힘을 합치면 왕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발기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면서,
"천운은 이미 흐르는 곳이 정해져 있는 법이니 경솔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다시는 그같은 논의는 입에 담지 마십시요! 그리고 지금은 야심한 시간인데 어찌 아녀자의 몸으로 궁궐 밖을 다니십니까? 이는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니 어서 돌아가십시요!"
발기는 당호하게 왕후를 내몰았다. 우왕후는 부끄러움과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급히 발기의 집을 나와 둘째 연우 집으로 향했다.
왕후가 찿아왔다는 말을 전해들은 연우는 의관을 정제하고 대문까지 나와 그녀를 맞아들였다. 그리고 다과상을 준비하여 그녀를 환대했다. 이에 우왕후는 감복하며 말했다.
"대군! 지금부터 제 말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조금 전에 마마께서 승하하셨습니다. 그런데 태왕은 아들이 없으니 큰 대군께서 대통을 이어야 하겠으나, 그 사람은 나에게 딴 마음이 있는지 무례하고 오만하여 예절 없이 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을 나서자마자 대군 집을 찿아온 것입니다."
연우는 우왕후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우왕후를 극진히 대접하였으며 심지어 고기를 잘라주다가 손을 베이기도 하여 우왕후가 직접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 그의 다친 손가락을 감싸주었다.
이처럼 서로의 마음이 확인되자 우왕후의 환궁길에 연우가 동반했다. 궁궐에 도착하자 우왕후는 연우의 손을 잡고 자신의 처소로 데리고 갔다. 함께 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자 우왕후는 선왕의 유명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군신들로 하여금 연우를 왕으로 추대하게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발기는 노발대발하여 즉시 군사를 일으켜 궁성을 포위하고 연우를 향해 말했다.
'형이 죽으면 아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예법이거늘, 네 눔이 차례를 어기고 왕위를 찬탈했으니 이는 죽어 마땅하다. 빨리 항복하고 나오지 않으면 너의 처자를 죽이리라!"
발기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연우는 궁궐문을 열지 않았다. 이에 발기는 연우의 처와 자식들을 죽이고, 궁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궁성이 워낙 요새인 터라 전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3일이 흐르자 발기의 군대는 흩어지기 시작했고, 동조자도 줄어 들었다. 발기는 처자를 데리고 한나라 요동 태수 공손도를 찿아가 도움을 청했다.
"나는 고구려 태왕 남무의 동복 아우입니다. 며칠 전 형이 후사 없이 돌아가셨는데, 나의 아우 연우가 형수 우씨와 공모하여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는 대의와 천륜을 어긴 것이라 군사를 동원하여 응징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도움을 청하려 왔읍니다. 원컨대 제게 군사 3만을 빌려주어 연우를 치도록 도와주십시요."
그의 청을 받아들인 공손도가 군사를 내주자 발기는 후한의 요동군과 함께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이에 연우는 아우 계수에게 군사를 주어 요동군을 대적하게 하였다.
결과는 요동군의 대패였다. 그리고 발기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달아나다가 동생 계수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계수는 그를 죽이지 않고,
"연우 형님이 왕위를 사양하지 않은 것은 정의로운 일은 아니나, 형님께서 일시적인 분노로 나라를 패망시키려 한 것은 더 옳은 일이 못됩니다. 도대체 죽은 후에 선조들을 무슨 면목으로 뵈려 하십니까!"
이에 발기는 부끄러움과 자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에 칼을 찔러 자결하였다. 그러자 계수는 발기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 준비를 하고 연우는 계수를 불러 잔치를 베풀어 주며 발기의 빈소를 차린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발기가 탁구에 청병하여 국가를 침략하였으니 이보다 큰 죄는 없다. 하지만 자네는 승정하고도 그를 풀어 주었다. 그래서 그를 죽이지 않은 것만 하여도 형제의 예를 지킨 것인데, 왜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준비하는가? 자네는 내가 무도한 인간이라고 힐난하고 싶은가?"
연우의 추궁을 받자 계수는 의연한 자세로 답했다.
"저는 죽드라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왕후께서 선왕의 유명에 따라 마마를 즉위케 하였으나 이는 형제의 우애를 저버린 행동입니다. 하지만 저는 마마의 덕망을 높이고자 발기의 시신을 초빈한 것인데, 이로 말미암하 문책을 당할 줄은 몰랐습니다. 마마께서 덕망을 펼치고자 하신다면 형에 대한 상례를 갖춰 장례를 지내주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면 누가 마마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연우는 계수의 충언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해 9월에 발기의 장례를 왕례에 따라 치렀다.
이처럼 계수에 의해 가까스,로 화합을 이룬 연우였지만, 그의 한계는 분명하였다. 왕후 우씨에 의해 왕위에 오른만큼 그녀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고, 또한 외척들의 눈치도 살펴야 했다. 그래서 새로운 왕후를 맞아들이지 않고 형의 부인인 우씨를 왕후로 맞아들이는 불륜을 저지르게 된다. 그가 바로 고구려 10대 산상왕이다.
우왕후의 계략에 힘입어 왕위에 오른 산상왕은 형제간의 왕위계승전쟁을 벌이고, 자신의 형수인 우왕후와 결혼함으로써 조신과 백성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민심이 이반되어 위나암성에서 산상왕의 입지는 더욱 약화된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대혼란이 야기되어 동한 왕조는 몰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황건군 봉기 후 각지에서 군벌이 일어나면서, 환관들에 의해 외척인 하진이 살해되자, 하진과 연계된 원소가 궁성에 난입하여 환관 2천여 명을 죽이고 양주의 군벌 동탁이 다시 원소를 몰아내고 소제 유변을 폐위하고 영제의 아들 유협을 왕으로 추대하자 관동주 목사와 태수들이 관동군을 형성하여 동탁을 토벌하려 한다. 이에 각지의 명가와 군벌들이 우후죽순처럼 들고 일어나 토벌군에 합세하고, 동탁은 유협을 동반하고 낙양을 벗어나 장안으로 달아난다.
이때부터 중원은 무법천지로 변하고, 각지에서 군벌이 대두하여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된다. 동탁의 수하 사도 왕윤과 부장 여포가 동탁을 살해하자 양주군장 이각과 곽사가 동탁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왕윤을 죽이고, 다시 이각과 곽사 사이에 패권다툼이 일어나서 양주의 군벌은 공중분해 된다.
하북성 중남부 기주에는 원소, 하북성 동북부인 유주와 요동에는 공손찬과 공손도, 산동성 서남부 연주에는 조조, 강소성 북부 서주에는 여포, 감숙성 양주에는 마등과 한수, 회수 하류의 양주에는 원술, 양자강 하류 강동에는 손책, �주에는 유표, 사천성 익주에는 유언 등이 각자 군벌을 형성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여러 군벌들은 강한 군벌에 점차 병합되어 갔는데, 가장 먼저 패권을 차지한 것은 연주의 조조였다. 그는 산동성 장청의 제북에서 청주의 황건군을 대파하고 많은 호족을 병합하였으며, 196년에는 헌제 유협을 맞아들여 명실공히 황명을 근거로 세력을 넓혀갔다. 그 결과 많은 인재가 그의 수하가 되었고 화북의 맹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원소는 기주.청주.유주.병주 등을 장악하여 조조와 경쟁하였고, 남방에는 손책이, 유표의 수하였던 유비가 형주와 익주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처럼 중국이 혼미한 가운데 산상왕은 198년 2월 환도성 축성 공사를 시작하였다. 환도성은 중국의 침입에 대비하는 동시에 동한의 멸망을 기회로 영토를 확장하겠다는 의지로 설치하는 전진기지였다.
하지만 산상왕의 천도계획은 쉽사리 현실화되지 못했다. 당시 조정의 권력은 우나암을 근거지로 하는 왕후 우씨 일가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민심도 천도를 달가와 하지 않았다. 또 산상왕의 버팀목이 되어주던 국상 을파소도 203년 8월에 생을 마감하였으며, 대통을 이을 왕자조차 하나 없었다.
이처럼 나약한 정치적 입지를 극복하기 위해 천도계획을 실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을파소 후임으로 고우루를 국상에 임명하고, 209년에는 ㅕㅇ민출신 소후 후녀에게서 왕자 교체도 얻었다. 또한 즉위 초기 흉흉하던 민심도 점차 안정되어 가고 있었고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209년 10월에 마침내 천도를 감행하였다.
환도성으로 천도한 산상왕은 외척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213년에는 왕후 우씨 등 외척들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조정대신들의 힘을 빌어 왕자 교체를 태자에 책봉하였다. 그래서 고구려는 위나암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환도성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한편 중원은 위.촉.오 세 나라로 압축되면서 삼국시대가 전개되고 있었다. 217년에는 평주(현재의 하북성) 호족 하요가 공손도의 세력을 피해 민가 1만여 호를 데리고 고구려에 귀순하였다. 산상왕은 영토확장 정책을 자제하고 안정에 주력하면서 중원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중 227년 5월에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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