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시대의 흐름

신 조선 책략

 

 

신 조선 책략

 

[중앙일보 배명복]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길러온 중국이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겸허저조(謙虛低調)의 자세에서 벗어나 '할 일은 적극적으로 개입해 관철하겠다(有所作爲)'는 굴기(<5D1B>起)하는 대국(大國)의 포효(咆哮)가 사해(四海)에 진동(震動)하고 있다. 중화(中華) 민족주의와 맞물려 적나라하게 맨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중국의 패권주의에 맞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국가적 책략(策略)은 무엇인가.

백령도 앞바다에서 시작된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불러오고 있다. 천안함 침몰 사건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정면 충돌하면서 동아시아에서 미·중의 패권 경쟁이 노골화하고 있다. 한·미·일과 북·중·러의 신(新)냉전 구도도 자리를 잡고 있다. 서해에서 뺨 맞고 동해에서 화풀이하는 격이지만, 핵 항공모함 등 20여 척의 전함과 200여 기의 공중전력이 동원된 사상 최대 규모의 한·미 연합훈련이 동해에서 실시되고 있다. 중국이 앞마당으로 여기는 남(南)중국해 자유 통항(通航)에 대한 국가적 이해를 내세워 미국이 난사(南沙)군도와 시사(西沙)군도 영유권 분쟁에 개입하면서 전선(戰線)은 남중국해로 확대되고 있다. 미국이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참여를 공식화하고,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도 중국에 대한 견제 전략이다.

 

                                      

 


서로를 필요로 하는 미·중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고려할 때 예측 가능한 장래에 미·중 간 패권 다툼이 열전(熱戰)으로 비화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문제는 남북한이다. 이대로 가면 한반도는 미·중 패권의 각축장으로 변해 마냥 휘둘릴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북한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피폐한 북한 경제의 단물을 빨아먹고 있다. 대외교역의 75%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북한이 중국의 '동북 4성(省)'으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남한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의 대중(對中)교역 규모는 이미 미국과 일본과의 교역을 합한 것보다도 많다. 중국이 기침만 해도 한국은 몸살을 앓게 돼 있다. 중국이 전략 품목 몇 가지를 금수(禁輸)하면 한국 경제는 바로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중화경제권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 지리멸렬(支離滅裂)하지 않으려면 남북한과 북방지역을 묶는 대(大)한반도 경제권의 실현이 필수적이다. 대륙과 해양, 동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허브(hub) 경제권' 역할에 한반도의 미래가 있다.

문제는 북핵(北核)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대한반도 경제권 구상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핵무기는 북한의 고립과 궁핍을 자초하는 암덩어리고, 남한의 대북(對北) 접근을 가로막는 족쇄다. 핵개발은 김일성 부자(父子) 최대의 실책이지만 스스로 포기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미국이 천안함 사태를 계기로 초강경 대북 금융제재에 나선 것은 6자회담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미련을 반 이상 접은 결과로 보인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을 할 각오가 아니라면 열쇠는 중국이 쥐고 있다. 체제의 존속과 핵 포기 중 택일할 것을 중국이 북한에 단호하게 요구해야 북핵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수 있다.

하지만 천안함 사태는 중국에 대한 합리적 기대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분명하게 보여줬다. 그렇다고 낙담할 수만은 없다. 중국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동북아에서의 핵 도미노다. 남북한이 동시에 핵무장을 하는 것은 중국으로서는 악몽이다. 핵개발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중국을 압박해야 한다. 중국이 책임지고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도 핵을 개발할 수밖에 없다는 신호를 물밑에서 계속 보내야 한다. 한·미가 외교·국방장관 회담 후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2014년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을 명문화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정부가 베이징과 상하이까지 사정권에 두는 사거리 1500㎞급 크루즈 미사일 개발 사실을 공개한 것도 중국을 겨냥한 메시지 성격이 짙다. 목표물을 1~2m 오차 내에서 정확하게 가격할 수 있는 크루즈 미사일 양산(量産) 소식에 중국 언론은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미국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한국의 핵개발 가능성을 핑계 삼아 미국이 대중 압박에 나설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 주민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도 필수적이다. 북한의 급변사태와 통일은 별개의 문제다. 급변사태와 관련한 미·중 간 뒷거래와 담합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도 북한 주민 스스로 남한을 선택할 수 있도록 정성을 쏟아야 한다. 인권을 유린하고, 백성을 헐벗게 한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강경책을 고수하더라도 북한 주민에 대해서는 인도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남아도는 재고 쌀 처리 문제로 고민할 게 아니라 북한 주민에게 전달하는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당장 천안함 때문에 어렵다면 세계식량계획(WFP)에 처분을 맡기는 것도 방법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국격(國格)을 갖춘 소프트파워 국가가 되는 것이다. 이주노동자와 결혼이민자를 멸시하고 학대하는 수준의 국격으로는 세계인의 마음을 살 수가 없다. 세계 여론을 우군(友軍)으로 확보할 때 속절없이 당한 구한말의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

130년 전 주일(駐日) 청국(淸國)공사였던 황준헌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을 통해 열강(列强)의 각축 속에서 조선이 국권(國權)을 보전하는 방책을 제시했다. 당시 최대 위협이자 도전은 러시아였지만 지금은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중국이다. 한 치 앞만 내다보는 '팃 포 탯(tit-for-tat)'식 대응에서 벗어나 벌레가 아닌 새의 눈으로 대국(大局)을 보는 거시적 안목이 절실한 시점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