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우면산의 겨울 33 (삼성그룹, 창업에서 오늘까지 ) 본문
우면산의 겨울 33 (삼성그룹, 창업에서 오늘까지)
우면산 눈내린 새벽 등산로
전 세계가 폭설과 강진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천국처럼 아름답던 섬 아이티에 강진이 발생하여 지옥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포르토프랭스=AP/뉴시스】12일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규모 7.0의 강진이 발생한 이후 붕괴된 건물의 모습. 이날 지진은 포르토프랭스에서 서쪽으로 불과 16㎞ 떨어진 곳을 강타해 피해가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정부는 세종시 수정안 발표로 갈등의 늪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다. 야당은 물론 한나라당 내에서도 친이.친박끼리 서로 이견을 달리하면서 민심까지 요동치고 있다.
기업은 기업대로, 지자체는 지자체대로 정부의 신뢰를 의심하고 역차별을 내세우며 특혜시비로 비난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모두가 자신과 무리들의 잇속을 챙기는데 열심이다. 야권은 공개토론, 정총리는 수정안 입법, 박근혜는 국민약속 대로 원안 고수, 이대통령은 계파간 이견에 유감을 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계속되는 한파에 곳곳에서 수도관이 동파되고 모피, 양털부츠는 불티나게 팔리고 있으며 전기.가스 최대 사용량과 난방비,채소류, 유류가격은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어 서민들은 추위와 고통속에 벌벌 떨고 있다. 전 세계적인 재앙이 속출하는 데 우리 정부와 정치권은 엉뚱한 문제로 국력을 낭비하고 있으니 나라꼴이 한심하다.
'권력은 한계가 있으나 언론은 영원하다'며 중앙일보를 창간한 고 이병철씨의 말을 떠올리며 삼성의 창업 스토리는 계속된다.
한국 경제를 이끈 5대 재벌 창업주
20세기는 한국 경제사에 있어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 경제는 폐허가 된 국토를 땀과 노력으로 일구며 ‘한강변의 기적’을 연출하는 등 고도성장을 구가해 왔다. 그러나 새천년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국내 기업들은 IMF라는 암초에 부딪혀 또한번의 격변기를 맞이하였고 IMF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으로 치부되어 국민들로부터 비난과 질시를 받고 있지만 이들 기업들이 한국 경제성장을 견인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5대그룹을 비롯 대기업을 일궈온 창업주나 그룹 오너들의 경영일생은 한국경제 고도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20세기 한국경제는 창업과 수성으로 집약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재벌의 심장부인 5대그룹을 창업한 창업주나 수성에 성공한 형제-2세 그룹총수들이 한국경제에 미친 영향력은 대단했다. 한국 경제성장을 견인하며 오늘날 5대그룹을 일궈온 창업주는 현대 정주영, 삼성 이병철, 대우 김우중, LG 구자경, SK 고 최종현 회장이다.
고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은 창업 반세기라는 오랜 역사가 말해주듯이 한국 경제사의 살아있는 전설로 통한다. 정 명예회장은 창업 1세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황소같은 뚝심으로 오늘날 현대를 한국 최대의 재벌그룹으로 성장시킨 장본인이다.
1950년 1월 현대그룹의 모체인 현대건설을 창업하면서 파란만장한 사업인생을 시작하게 된 정 명예회장은 90년대 ‘소떼몰이 방북’에 이어 금강산관광을 성사시켜 남북 화해무드 조성과 남북 경협사업 기반을 다지는 큰 치적을 남기기도 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은 인재 제일주의를 표방하며 삼성을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파워 엘리트 집단으로 일구었다. 지난 87년에 타계한 고 이병철 회장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반도체산업에 뛰어들어 오늘날 한국이 ‘세계 최강의 반도체 국가’라는 명예를 누리는 일등공신이 됐다.
고 이병철 회장이 타개하자 삼성그룹 2대 회장으로 추대된 이건희 회장은 수성에 성공한 대표적인 오너경영인이다. 87년 그룹 경영권을 승계한 이 회장은 세계 초일류기업을 목표로 한‘제2의 창업’을 선언, 개혁과 변화를 강조했는데 당시 이 회장의 신경영 표방은 YS정부의 개혁바람과 맞물려 승승장구, 이건희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창업 32년이란 짧은 역사로 재계순위 2위까지 오른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창업과 성장, 퇴진은 한편의 드라마 그 자체였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세계경영을 표방해온 김 회장은 67년 3월 자본금 5백만원으로 대우를 창업, 재계 신화를 만들어 왔다. 대우그룹을 계열사 41개, 국내 종업원 10만5천여명, 해외법인 396개를 거느린 재계 2위(자산규모)까지 끌어 올렸던 김우중 회장. 그러나 그는 IMF 태풍과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재계 역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긴채 불명예 퇴진을 하고 말았다. 한국 경제성장의 주역이었고, 세계경영을 표방하면서 재계 신화를 창조해 왔던 김우중 회장의 몰락은 “영원한 재벌은 있을 수 없다”는 교훈만을 남긴채 이제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LG그룹의 창업주는 고 구인회 회장이다.
고 구인회 회장이 그룹 성장의 기반을 조성했다면 69년 2대 그룹회장에 오른 구자경 회장대에 들어서 LG는 재도약 빛을 내기 시작했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취임 후 선친이 다져 놓은 사업체를 더욱 발전-성장시키는 사업수완을 발휘했고, 80년대에 들어서는 유통-서비스분야를 확대, 그룹의 대표적 사업인 전기-전자분야의 비약적인 성장을 견인했다.
형제간 경영권 승계로 재계의 귀감이 됐던 SK그룹도 엄밀히 따지면 고 최종건 회장이 창업주다. 고 최종건 회장은 73년 타계하면서 동생인 고 최종현 회장에게 그룹회장직을 물려줬다. 고 최종현 회장은 회장 취임후 제2의 창업을 선언하면서 ‘석유에서 섬유까지’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본격적인 석유화학시대의 막을 올리게 됐다.
이처럼 20세기는 한국경제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재벌총수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재벌총수 이외에 지난 1세기동안 한국 경제에 영향력을 행사해 온 인물로 각종 여론조사 결과 박정희 전 대통령, 또 관료 출신으로는 남덕우 전 부총리와 조순 전 한나라당 명예총재, 이헌재 전 금감위원장 등이 거론되고 있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경제개발의 초석을 다지고 견인하였다는 점, 남 전부총리는 박정희 정권때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하면서 한국 경제정책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조순 명예총재는 한국은행 총재에 이어 한국 경제의 축소판이라는 서울시장과 국회의원(15대)을 역임했다는 점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히고 있다. 이헌재 금융감독원장은 IMF이후 영향력이 급상승해 DJ정부의 재벌개혁 선봉장으로서의 위상을 실감나게 하고 있다. (홍성철 기자)
우면산 새벽
삼성 그룹(三星 - , Samsung Group)
삼성그룹은 고 이병철씨가 창립하여 삼성전자, 삼성생명 등 여러 회사들이 계열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대표 재벌이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음 한 회사다.
경남 함안 출신의 고 이병철씨는 1938년 3만원의 자본금으로 대구 수동(현 인교동)에서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시업을 시작하여, 1951년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세워 무역업을 하면서 1953년~1954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 한국전쟁 후 초토화된 이 땅에서 먹고 입는 분야의 제조업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성장하여 1960년대에는 월남전의 특수와 인수합병의 대표주자로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다. 1964년 '동양라디오 및 텔레비젼' 방송, 1965년 '중앙일보' 창설하여 언론사 경영에 참여하였고, 1969년에는 오늘날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전자'를 설립하여 삼성그룹 육성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987년 창립자였던 이병철씨가 사망한 이후로 삼남인 이건희가 최고경영자를 인수받아 2009년까지 그룹을 이끌었으며, 삼성특검 재판 이후 사회적 비난을 의식하여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2010년 사장단 인사에서 이건희 회장의 아들 재용씨가 경영일선에 나서면서 이재용씨 체제로 굳혀가고 있으며, 현재 삼성그룹의 대표자격은 공채출신에서 삼성그룹의 최고 경영자 자리까지 오른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 삼성그룹의 대외 대표역할을 하고 있다.
창업주 이병철(李秉喆, 1910년 2월 12일~1987년 11월 19일)씨는 경남 의령 출신으로 호는 호암(湖巖)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1910년 경주 이씨인 이찬우씨와 안동 권씨 부인 사이에 2남 2년 중 막내로 태어나서 16세에 결혼, 중동중학을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하였다가 1934년 중퇴하였고, 1982년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명예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8세때인1938년 3만 원의 자본금으로 대구 수동(현 인교동)에 '三星商會(삼성상회)' 라는 간판을 내걸고 청과물과 건어물로 중국.만주 등지로 수출을 하면서 장사수완을 발휘하여 돈을 모았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세워 무역업을 하면서 1953년~1954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사업 영역을 크게 확대해갔으며, 1961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경제인협회(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 회장을 역임했다.
1964년, 동양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과 1965년,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언론사 경영에 참여하였다. 1969년 삼성전자를 설립하여 삼성그룹 육성의 도약대를 만들었다. 1974년 삼성석유화학·삼성중공업을 설립하여 중화학공업에 진출하였고, 이후 용인자연농원·삼성정밀 등을 설립하였다.
1977년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되었으며, 1982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설립하였다. 금탑산업훈장을 비롯하여 세계최고경영인상을 받았다. 저서로 《우리가 잘사는 길》, 《호암자전》등이 있다.
- 1910년 출생
- 1934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 정경과 중퇴
- 1936년 협동정미소 설립
- 1938년 삼성상회 설립
- 1948년 삼성물산공사 사장
- 1951년 삼성물산 사장
- 1953년 제일제당 사장
- 1954년 제일모직 사장
- 1961년 삼성물산 회장 (~ 1987년)
- 1961년 8월 ~ 1962년 9월 : 전경련 초대 회장
- 1964년 한국비료 사장
- 1965년 중앙일보 사장, 1965년 성균관대학교 이사장
- 1969년 삼성전자 설립
- 1974년 삼성석유화학 설립
- 1987년 사망
- 65세에 위암판정을 받았으나 그 후로도 꾸준한 기업활동을 벌어왔고 반도체투자를 통해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 서울대학교 후문 근처에는 그의 호를 딴 '호암교수회관'이 있다.
-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에도 그의 호를 딴 '호암관'이 있다.
- 그는 식사 때 자녀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고 자신의 식사 시중, 밑반찬을 들게 하였다고 한다.
- 정치인 허경영이 스스로 이병철의 양자라고 주장한 적 있으나 사실로 밝혀진 것은 없다.
- 가족
고 이병철 창업주는 두 명의 부인과 4남 6년를 두었는데, 첯째 부인 박두을씨와 사이에 장녀 인희, 장남 맹희, 차녀 숙희, 차남 창희, 삼남 건희, 막내 딸 명희를 두었고, 둘쩨 부인은 일본인으로 1남 1녀를 두었는데 창업주 사망 후 일본으로 건너가 소식을 알 수 없다 함. 일설에 의하면 고 이병철 창업주가 자신의 사후 문제가 야기될 소지가 있다고 판단하여 엄청난 생활비를 주고 일체 나타나지 말 것을 서약하고 떠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故 이병철 창업주 4남 6녀, CJ·신세계·LG 등 국내 재계 두루 포진
셋째 이건희 전 회장, 장남·차남 제치고 회장직 승계
딸들의 맹활약… 2세 인희-명희 이어 3세 부진씨까지 ‘우먼파워’ 눈길
사카린 밀수사건·불법대출·삼성특검에도 불구 재계 서열 1위 자리 굳건
‘권력’이 최우선이었던 시대가 지나고 ‘금력’의위력이 커지면서 재벌가의 위상도 날로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국내 유수의 재벌기업을 일군 창업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창업주들은 제대로 된 고등교육도 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평범은커녕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경우도 빈번하다. 그러나 대를 내려오면서 그들의 후손들은 자연스레 상류층의 자격을 얻게 되고 국내 ‘상류층 클럽’의 최정점에는 재벌 2,3세들이 자리 잡게 됐다. 또 그 정점 중의 정점에는 ‘대한민국 초일류 기업’ 삼성家 사람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데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청과물 판매’ 기틀 위 세워진 ‘초일류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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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 ||
1910년 경주 이씨 문중의 부친 찬우씨와 안동 권씨 가문의 모친 재림씨 사이에서 태어난 이병철 창업주(2남2녀 중 막내)는 16살이 되던 해에 박두을 여사를 배필로 맞이했다.
이후 이병철 창업주는 만 28세가 되던 해인 1938년 3월1일, 대구시 중구 인교동에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상회’라는 이름의 가게를 차리고 청과물과 건어물을 중국과 만주로 수출하는 등 장사수완을 발휘해 지금의 삼성 기반을 다졌다.
이 창업주는 박두을 여사 사이에 얻은 3남4녀와 한 일본여성에게 얻은 2명의 자녀를 포함해 모두 4남6녀를 뒀는데 이들과 또 손자·손녀 등 가족 대부분은 현재 재계의 핵심축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같은 까닭에 ‘삼성家 사람’이라고 하면 국내 경제의 최고 권력가로 손꼽히고 있는 것.
우선 창업주의 장남 맹희씨는 58년 손영기 전 경기도 지사의 딸 복남씨와 결혼을 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후계자로 낙점되는 행운(?)까지 거머쥐게 되면서 17개 계열사 경영을 맡으며 활발한 경영수업을 받아왔다. 그런데 일명 ‘한비사건’으로 불리는 사카린 불법 유통 사건에 연루되는 등 몇 차례 우여곡절 끝에 결국 후계구도에서 낙마하는 비운을 맞게 됐다.
이후 맹희씨는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등을 통해 “故이병철 회장이 제일제당·제일모직 등 ‘제일’자가 들어가는 계열과 안국화재(현 삼성화재)를 나에게 넘기기로 했었다”고 언급하는 등 당시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맹희씨가 이루지 못한 ‘그룹 수장’의 꿈은 맹희씨의 장남이 대신 이뤄냈다. 2002년 장남 재현씨가 삼성그룹에서 분리된 CJ그룹 회장으로 취임하게 된 것. 고려대 법대 출신인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삼성과 무관한 씨티은행에 공채를 통해 입사했으나 이후 이병철 창업주가 제일제당(현 CJ) 경리부로 자리를 옮기도록 지시, CJ그룹회장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다. 이재현 회장은 대학시절 지인의 소개로 부인 김희재씨를 만나 결혼을 했고,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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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희 전 회장은 故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셋째아들이다. | ||
故이병철 창업주의 차남 창희씨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인인 이영자씨와 연애 결혼을 했다. 그러나 91년 58세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비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하기도 한 창희씨는 한때 삼성이 인수한 새한제지, 삼성물산 이사 등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그룹 경영일선에서는 한발 물러서 있었다. 그러나 작고 전, 삼성그룹에서 독립해 나온 창희씨는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사와 특수세라믹사를 통합해 새한미디어를 설립, 독자운영에 나서 재기에 성공했다.
이창희 전 회장의 사망 후에는 부인 이영자 여사가 새한그룹 회장, 장남 이재관 부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2003년 이 부회장이 분식회계를 통한 불법대출 혐의로 구속되면서 경영권을 상실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이영자 여사도 경영에서 손을 떼게 됐다.
새한그룹은 삼성에서 분가한 그룹 가운데 유일하게 몰락한 기업이라는 오명을 안게 됐지만 혼사만큼은 화려했다. 이창희 전 회장의 장남 재관씨는 동방그룹 김용대 회장의 딸 김희정씨와, 차남 재찬씨는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의 딸 선희씨, 삼남 재원씨는 김일우 서영주정 회장의 딸 지연씨와 결혼했다. 막내딸 혜진씨는 조내벽 전 라이프그룹 회장의 장남 명희씨와 혼인했다.
이건희 전 회장, ‘글로벌 삼성’ 일군 뒤 쓸쓸히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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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가 황태자’로 불리는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는 이건희 전 회장의 첫째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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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주의 첫째, 둘째 아들이 모두 경영일선에서 ‘팽’(?) 당하게 되면서 삼성그룹의 2대회장 자리에 삼남인 이건희 전 회장 오르게 됐다. 유교적 전통 탓에 장자승계가 당연시 되는 분위기인 한국사회에서의 ‘셋째의 경영권 승계’는 다소 의외의 결정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때문에 당시 이건희 전 회장은 주변의 우려 속에 2대 회장직에 취임했다.
하지만 이병철 창업주는 70년대에 이미 이건희 전 회장의 후계 방침을 확정지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같은 기대에 부응하듯 이건희 전 회장은 현재 삼성을 급성장시킨 일등공신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러나 이 전 회장의 말년은 화려하지만은 않다. 지난해 4월 삼성특검수사에 대한 후속 조치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면서 돌연 그룹 회장직 사퇴를 선언, 현재는 대주주의 신분으로만 남아 있다.
67년 이 전 회장과 백년가약을 맺은 삼성의 ‘안방마님’ 홍라희 여사는 법무장관·내무장관을 거쳐 중앙일보 회장을 지낸 홍진기씨의 장녀로 165㎝의 키에 미모와 지성까지 갖춘 재원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재용 결혼식
이 전 회장과의 사이에 재용, 부진, 서현, 윤형 등 1남3녀를 두고 있는 홍 여사는 79년 막내 윤형씨를 낳은 뒤인 83년 현대미술관회 이사로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서울대 미대 응용미술학과 출신인 홍 여사는 2004년 삼성미술관 리움(Leeum)관장으로 취임했으며, 그 다음해인 2005년에는 현대미술관회 회장으로 선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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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호텔과 삼성에버랜드 경영전략담당 전무직을 겸직하고 있는 이부진씨는 이건희 전 회장의 첫째 딸이다. | ||
지난 99년 삼성 계열사의 평범한 회사원 임우재씨와 결혼해 세간의 이목을 끈 바 있는 이 전 회장의 첫째딸 이부진씨는 현재 신라호텔과 삼성에버랜드 경영전략담당 전무직을 겸직하고 있다. 특히 이 전무가 최근 들어 활발한 경영행보를 보이고 있어 고모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에 이은 삼성가 출신의 전문 여성 경영인이 또 탄생하게 될지에 재계의 관심이 쏠려 있는 상태다.
둘째딸 서현씨는 미국 뉴욕의 패션전문학교 파슨스 출신으로 지난 2000년 동아일보 사주인 김병관 명예회장의 차남이자 제일모직 전무인 재열씨와 결혼했다.
이화여대 불문과 출신인 막내딸 윤형씨는 미니홈피 등을 통해 재벌가 딸의 이미지가 아닌 소탈한 모습을 보여 팬카페가 생길 정도로 많은 네티즌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런데 2005년 미국 유학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당시 국내외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이명희-이부진 등 여성 경영인 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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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 정용진 부회장. 이 회장은 이병철 창업주의 다섯째 딸이며, 정 부회장은 이 회장의 아들이다. | ||
창업주의 차녀 숙희씨는 LG그룹 구인회 창업주의 삼남 구자학 아워홈 회장과 결혼했으며, 1남1녀를 뒀다. 당시 이들의 결혼으로 ‘한국 재계의 쌍두마차인 삼성과 LG가 사돈을 맺는다’고 떠들썩해진 바 있다. 딸 명진씨는 故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막내아들인 조정호 메리츠증권 회장과 결혼했다.
삼녀 순희씨는 대학교수와 결혼,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 사녀 덕희씨는 삼성가의 고향인 경남 의령의 대지주 이정재씨 집안으로 시집갔다. 마산고와 서울대 상대를 나온 남편 이종기씨는 중앙일보 부회장, 제일제당 부회장을 거쳐 삼성화재 회장까지 지내다 은퇴했다.
삼성가 2세 딸들 가운데 가장 활동을 벌이고 있는 사람은 다섯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이다. 이 회장은 4·5대 국회의원과 삼호방직·삼호무역 회장을 지낸 정상희씨의 차남 재은씨와 결혼했다. 남편 재은씨는 경기고·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수학한 엘리트로 삼성항공·삼성종합화학 부회장, 삼성전기 회장, 삼성전자 대표이사 등을 역임하며 삼성그룹에서 맹활약하다 분가와 함께 삼성을 떠났고 현재 신세계와 조선호텔 명예회장직을 갖고 있다.
신세계의 후계자인 정용진 부사장은 미스코리아 출신 탤런트 고현정씨와 결혼했다가 2003년 이혼했다. 이 회장의 딸 정유경씨는 현재 조선호텔 상무를 맡고 있으며, 초등학교 동창인 문성욱씨와 혼인했다. 성욱씨는 현재 신세계I&C 부사장직을 역임하고 있다.
베일에 싸인 日부인과 1남1녀 얻어
한편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박두을 여사 사이에서 얻은 3남4녀 외에도 일본인 여성에게 얻은 넷째 아들 이태휘 전 CJ 상무와 여섯째 딸 이혜자씨를 두고 있다. 이 둘은 이병철 전 회장의 타계 후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며, 최근 근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첫째 부인 : 박두을
장녀 : 이인희 한솔
장남 : 이맹희 CJ
차녀 : 이숙희(장조카:구본무LG그룹회장)
차남 : 이창희 새한그룹
삼남 : 이건희 삼성그룹
손자 : 이재용
막내딸 : 이명희 신세계(e-mart)
둘째 부인 : 일본인 (이름불명)
사남 : 이태휘
육녀 : 이헤자
- 1938년 3월 1일 대구에서 '삼성상회' 설립
- 1948년 삼성물산공사 설립
- 1953년 제일제당 (현 CJ제일제당) 설립
- 1954년 제일모직공업 (현 제일모직) 설립
- 1956년 호주박람회에서 삼성물산에 참가
- 1957년 대한민국 최초로 사원공개 채용 실시
- 1958년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인수
- 1963년 신세계백화점과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인수
- 1964년 한국비료(현 삼성종합화학)으로 설립.
- 1965년 중앙일보 창간, 삼성문화재단 설립
- 1966년 중앙개발(1997년 에버랜드리조트로 개칭) 설립
- 1968년 전주제지(현 한솔제지) 설립
- 1968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설립
- 1969년 삼성전자공업(현 삼성전자) 설립
- 1969년 일본의 산요와 제휴하여 '삼성산요전기' 설립
- 1970년 삼성전기 설립, 삼성-NEC 전기공업 (현재의 삼성SDI) 설립
- 1972년 제일합섬(현 웅진케미칼) 설립
- 1973년 제일기획 설립
- 1973년 '임페리얼'로 호텔업 진출, 그 해 11월에 '호텔신라 (현 신라호텔)'로 개칭
- 1974년 삼성중공업 설립
- 1975년 삼성산요전기를 삼성전자로 개칭
- 1976년 용인자연농원 개장
- 1977년 삼성정밀 설립(2000년, 삼성테크윈으로 개칭)
- 1978년 삼성항공 설립(1991년 삼성전자에 편입(2000년 삼성텔레스로 분사)
- 1978년 호암미술관 완공
- 1982년 호암미술관 개관, 삼성라이온즈 창단
- 1983년 삼성조선과 대성중공업이 삼성중공업으로 통합
- 1985년 삼성데이타시스템(현 삼성 SDS) 설립
- 1987년 11월 삼성의 창립자 이병철 사망, 12월 이건희 삼성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
국립 국악원
이건희(李健熙, 1942년 1월 9일 - )는 경상남도 의령 출신의 기업가로 삼성그룹을 창업한 이병철의 셋째 아들이다. 삼성전자의 전 대표이사이자 삼성그룹의 전 회장이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아내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꾸자'며 "신경영"을 주창했다.
2008년 4월 22일, 이건희 회장의 차명계좌가 적발되고 천억원대의 세금포탈 혐의가 적발되면서, 이건희는 삼성 경영쇄신안을 내놓고 삼성과 관련된 모든 직책을 내놓고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하여 전격퇴진하였다. 이건희가 증여세를 피하면서 삼성 그룹의 지분을 물려주려 했다는 의심을 받은 이건희의 아들 이재용도 최고 고객 책임자(CCO, Chief Customer Officer)의 직위에서 물러났다.
2009년 3월 포브스지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이건희 일가의 재산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30억 달러로, 세계 205위를 차지했다.
2009년 12월 29일, 정부에서 특별사면을 하기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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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서울사대부고, 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졸업.
- 1965년 일본 와세다 대학 경제학부 졸업.
- 1966년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 MBA과정 수료, 동양방송에 입사.
-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
- 1979년 삼성그룹 부회장 (~ 1987년)
- 1981년 한.일 경제협회 부회장
- 1987년 삼성그룹 회장 (~ 2008년)
- 1996년 IOC 위원(현재)
- 1996년대한레슬링협회 회장
- 1998년 삼성전자 대표이사, 삼성그룹 회장
- 2005년 대한올림픽위원회 명예위원장
- 2005년 고려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 2008년 '삼성 비자금 의혹 관련 사건'으로 조세포탈혐의 불구속기소
- 2008년 4월 22일 그룹 경영쇄신안으로 전격퇴진
가족 관계
부인 홍라희와 함께 1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 장녀이부진 호텔신라 상무, 차녀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보, 삼녀 이윤형 (사망)
이명박 대통령의 가계를 보면 장녀 이주연의 남편 이상주가 삼성화재 상무보(?)로 연계되어 있다.
- 1988년 창업 50주년을 맞이하여 제2창업 선언
- 1988년 CCKA카드 인수, 삼성카드로 개칭
- 1991년 코리아 엔지니어링을 삼성엔지니어링으로 개칭
- 1991년 신세계백화점과 한솔그룹 분리
- 1992년 국제증권을 인수하여 삼성증권으로 상호변경.
- 1993년 제일제당(현 J제일제당)이 삼성그룹에서 분리
- 1993년 제2창업 선언 5주년을 기념해 그룹 CI 변경, 싱글 삼성 정책「신경영」 선포
- 1994년 삼성의료원 설립
- 1995년 삼성어린이박물관 개관
- 1995년 제일합섬(현 웅진케미칼) 분리
- 1996년 용인자연농원 개장 20주년, 에버랜드로 개칭
- 1996년 성균관대학교의 재단으로 재영입되어 고급인력육성에 막대한 투자 시작
- 1997년 삼성프라자 분당점 개점, 올림픽 파트너로 공식 선정. 이로 인해 2004년 15조7천억원으로 수익 증가
- 1998년 창립 60주년 기념식
- 1998년 삼성시계, 대도제약 청산
- 1998년 삼성전자가 일본의 나가노 동계올림픽 스폰서로 공식 선정
- 1999년 중앙일보와 보광이 삼성그룹에서 분리
- 1999년 삼성건설의 삼성아파트가 삼성쉐르빌로 개칭
- 2000년 삼성SDS 정보통신본부 분사, 유니텔(현 삼성네트웍스) 설립
- 2000년 삼성자동차가 워크아웃. 프랑스의 자동차회사 르노에 인수되어 르노삼성자동차 출범
- 2000년 삼성전자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하계올림픽 스폰서로 공식 선정
- 2002년 유니텔이 삼성네트웍스로 개칭
- 2002년 삼성전자가 미국의 소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스폰서로 공식 선정
- 2003년 삼성전자가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디자인회계 전략회의 개최
- 2004년 삼성전자가 그리스의 아테네 하계올림픽 스폰서로 공식 선정
- 2005년 동남아시아(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의 지진, 해일에 지원
- 2006년 에버랜드 개장 30주년, 현재의 에버랜드리조트로 개칭
- 2006년 삼성전자가 이탈리아의 트리노 동계올림픽 스폰서로 공식 선정
- 2007년 삼성건설이 두바이의 버즈 두바이 건설에 참여
- 2007년 삼성 이건희 회장 취임 20주년
- 2008년 4월22일 비자금이 폭로되면서 이건희 회장 사퇴. 이 후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 삼성그룹 회장을 겸함
- 2008년 11월 17일 삼성그룹 사옥이 현 시청역 태평로에서 강남역 강남역사거리부근으로 새사옥이전. '삼성타운'이라는 새 이름으로 30층이상 빌딩 3동으로 구성.
- 리모델링 예정인 현 시청역 태평로에 삼성증권, 삼성카드등 입주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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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 구조
삼성그룹은 지주회사가 없고, 지배구조가 복잡한 재벌이다. 이건희의 아들인 이재용이 삼성에버랜드의 25.1%의 지분을 가진 주주로, 지배구조의 꼭대기에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이건희 일가가 삼성에버랜드 지분 54%를 가지고 있으며, 삼성에버랜드는 삼성생명의 대주주이다. 삼성생명은 또 여러 회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삼성에버랜드, 삼성생명, 삼성전자를 비롯한 많은 자회사들이 순환출자로 얽혀 있다. 이러한 구조가 1970년대 정부 주도의 대기업 중심의 경제 성장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만들어진 결과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과세상의 몇 가지 문제와 조세포탈 등 약간의 책임만 해결되면 오히려 삼성으로서는 출자·승계 구도를 완벽하게 합법화하고 법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순환출자구조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특정인이 자기가 가진 주식 수 이상의 의결권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문제점은 이 순환출자의 고리에 금융회사가 끼어 있다는 점이다. 고객에게 빌린 돈으로 기업에 대한 지배구조를 강화하는 데 쓴다는 것이다. 보험회사와 차이는 있지만 은행의 경우 이론적으로는 고객의 예금을 통해 기업지배를 무한히 할 수 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은행의 기업지배를 제한한다. 이 법을 원용한 법이 '금융산업 구조개선에 관한 법'(금산법)이다. 1997년에 제정된 이 법은 금융회사가 계열사의 주식을 5% 이상 갖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이 법에 따를 경우 순환고리는 끊어지고 지배력에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볼 때 기업의 지배구조 방식은 주주 중심의 영미식, 은행 중심의 유럽, 일본식, 재벌 중심의 동남아식 등 다양하며 정답은 없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기도 하다.
또 하나는 증여 과정이다. 삼성카드는 에버랜드 주식을 주당 10만원에 사들였는데 이재용 남매는 7700원에 매입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회사는 손해를 본 것이다. 만약 재판에서 지게 된다면 금전적인 손해뿐 아니라 도덕성에도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2008년 ~ 2009년까지 삼성특검을 통해 재판이 진행되어 대법원에서 무죄로 최종 판결되었다.
관련 기업
- 신세계백화점(신세계그룹) - 1963년에 삼성그룹에 흡수되었고, 1991년에 삼성그룹에서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1997년에 공식 분리되었다.
- 한솔제지(한솔그룹) - 1991년 분리되었다.
- 구 (주)새한 (구 제이합섬, 현 웅진케미칼) - 1995년 독립하였으며 1997년 새한그룹으로 공식 출범하였다.
- CJ 제일제당(CJ그룹) - 삼성그룹의 회사 제일제당에서 출발하였다. 1993년에 분리되었다.
- 중앙일보 - 삼성그룹의 자본으로 설립된 신문이며, 현재 분리되었으나 삼성의 영향은 아직도 남아있다.
- 르노삼성자동차 - 원래 삼성자동차로 출발하였으나 2000년 프랑스 르노에 지분 70%를 매각하였다.
- 성균관대학교 - 1965년에 설립자 이병철이 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1979년부터 잠시 운영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1996년부터 재단 운영을 맡고 있다.
- 한국휴렛팩커드 - 1984년에 삼성전자와 미국 휴렛카펫드가 합작법인인 삼성휴렛팩커드를 설립하였다. 1995년에 현재의 사명으로 변경되었고, 1998년 삼성전자 지분 45%가 휴렛팩커드로 인수되어 삼성에서 완전 분리되었다.
- 네이브 - 1999년 6월에 서비스를 처음 시작한 대한민국의 포털 사이트이다. 1998년 삼성SDS의 사내 벤처에서 시작해 분할된 네이버컴 주식회사에서 운영하다가 2000년 한게임과의 합병 후 현재 NHN 주식회사에서 운영하고 있다.
- 동양방송 - 1963년부터 1980년까지 존속했던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및 라디오 방송사이다.1964년 5월에 라디오 서울(RSB)로 시작했으며, 같은 해 11월에 삼성그룹에 인수되면서 중앙방송(JBS)으로 이름을 바꿨다. 1970년대에 큰 성장을 기록하다가1980년 언론 통폐합에 따라 한국방송공사KBS)에 흡수되었으며, 라디오는 KBS 3라디오 및 KBS 2FM, 텔레비전은 KBS 2TV로 통합되었다.
눈내린 고목의 상처
2010년 1월 15일 삼성에서 발표한 사장단 인사 내용은 보면 아래와 같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가 부사장으로 승진해 최고운영책임자(COO)를 맡으며 경영 전면에 나선다. 그동안 부품(DS)과 완제품(DMC) 부문으로 이원화됐던 삼성전자도 최지성 사장의 단독 최고경영자(CEO) 체제로 바뀐다.
삼성은 15일 이 같은 내용이 담긴 큰 폭의 사장단 내정 인사를 했다. 부회장 2명, 사장 10명 승진과 이동·소속 업무 변경 11명 등 23명 규모다. 이들은 내년 초에 열릴 주주총회에서 승인을 받게 된다.
이에 따라 삼성의 경영권 후계구도가 이 부사장 중심으로 재편될 전망이다. 특히 이 부사장 측근으로 알려진 최지성 사장이 삼성전자 단독 CEO가 되면서 ‘이재용 체제’에 힘이 실릴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삼성전자 DS 부문장을 맡았던 이윤우 부회장은 이사회 의장직을 맡아 경영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게 됐다. 삼성의 ‘얼굴’ 역할을 하는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은 유임됐다. 김순택 삼성SDI 사장은 삼성전자 신사업추진단장 부회장으로, 최도석 삼성카드 사장은 부회장으로 각각 승진했다.
삼성은 이번 인사에서 고참급 부회장·사장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젊은 부사장급을 대거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삼성전자의 신종균·조수인·김기남·이상훈 부사장, 삼성디지털이미징의 박상진 대표이사 부사장, 삼성생명의 김상항 부사장, 삼성엔지니어링의 박기석 부사장, 삼성경제연구소의 정기영 부사장, 법무실의 김상균 부사장이 모두 사장으로 승진했다. 김석 삼성증권 부사장은 삼성투신운용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했다.
이상대 삼성물산 부회장과 김징완 삼성중공업 부회장은 대표이사 직함을 떼고 각각 삼성엔지니어링 부회장과 삼성중공업 부회장을 맡게 됐다. 이순동 삼성사회봉사단장 사장은 이날 출범한 삼성미소금융재단 이사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상완 삼성전자 종합기술원장과 삼성투신운용 강재용 사장은 삼성 사회공헌위원회 사장으로, 삼성 일본 본사의 이창렬 사장은 삼성사회봉사단 사장에 각각 내정됐다.
계열사
삼성그룹은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제14조에서 규정하는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이다. 삼성그룹에 속하는 회사는 총 64개로서 이 중 금융·보험회사가 10개이다.
(기업명 오름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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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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