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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역사 드라마의 허와 실 2

두바퀴인생 2009. 10. 29. 18:48

 

 

 

TV 역사 드라마의 허와 실 2

 역사를 재미와 흥행의 도구로 변질시키지 말아야...

 

선덕여왕 드라마의 진실... 허구적인 역사사실에 재미와 흥행에 빠져드는 국민들...

 

 

 

최근 TV드라마 '선덕여왕'이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TV드라마와 스포츠는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부정적인 면도 상당하다고 생각된다. TV드라마가 주는 영향은 엄청나다. TV드라마는 그 사회의 내면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으로 민중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 요즘 일반드라마는 불륜,패륜,간통,살인,간통,삼각관계,혼전임신,재산다툼,사기,도박,불법,폭력이 넘쳐나고 역사드라마는 물론 작가 나름대로 충분한 자료를 수집하여 만들었겠지만, 정사에도 없는 가공의 이야기로 허구에 가득찬 이야기로 횟수를 이어가고 있으며 한국 역사에 대해서 바른 역사를 배우지 못한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조작된 드라마 역사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한 조작된 드라마 내용을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역사서지만 그 내용은 대부분 잘못되고 조작된 내용으로 쓴 책이라는 점이며 일제를 통해 식민사관으로 비뚤어진 역사를 우리는 배우고 알고 있기에 더더욱 허구에 찬 역사 드라마에 대해 안타까움이 더하다.

  

 

이처럼 많은 국민들이 마약같은 TV드라마와 일부 스포츠에 빠져 어려움을 잊을 수 있는 좋은 즐길거리로 생각되지만 조작과 허구로 점철되고, 부정적인 내용으로 국민들의 정서를 오염시키는 상업위주.흥미위주의 작품을 쓰는 돈 많이 벌고 있는 작가, 방송사,스포츠 관계자들도 마땅히 비난 받아야 할 것이다. 물론 시대는 변하고 있다. 유교라는 패쇄된 사회에서 개같이 살아온 우리들이 새로운 시각과 사고로 민중의 진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상업주의와 허구로 일관된 내용으로 국민들을 속이고 오도한다면 그 사회적 책임은 반드시 져야할 것이다.

 

TV역사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에 허구를 가미하여 재미있게 만든 작품들이 많다. 역사공부를 소홀히 해 온 우리 국민들에게 허구의 역사를 인식시켜 진실을 오도하는 작태는 상업방송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영광스럽지도 못한  찌그러진 역사를 재미로, 흥행의 대상으로 삼는 민족은 아마 드물 것이다. 

 

따라서 드라마를 보는 이들이 선덕여왕 시대의 신라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인바, 제 27대 선덕왕 실록을 살펴보기 전에 앞 시대의 24대 진흥왕 시대부터 알아보고 선덕여왕 실록, 그후의 태종무열왕 시대까지 실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화랑도에 대한 위키백과 사전 내용을 보고 상세한 내용를 알아보자.

 

 

화랑도

 

화랑도(花郞徒) 또는 낭가(郎家), 풍류도(風流徒), 국선도(國仙徒), 풍월도(風月徒)는 신라의 청소년 심신 수련 조직이다. 귀족의 자제로 이루어졌다.

 

조직의 지도자는 국선(國仙)·화랑(花郞)·원화(源花 또는 原花)·화주(花主)·풍월주(風月主) 등으로 불리나 ‘화랑’(花郞)이 보편적인 칭호이다.

 

한국 고유의 사상과 도교, 불교, 유교가 합해진 이념에 따른 일종의 심신 수련 단체로 국가 차원에서 조직하거나, 지원하였다. 화랑은 화랑도의 지도자를 일컫는 말이라 추측되고 소속된 청년들을 낭도라고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조직으로 고구려의 조의, 선인이 있었다.

 

화랑도의 기원

우리나라에는 현모한 도(道)가 있다. 이를 풍류(風流)라 하는데 이 도(道)를 설치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3교(三敎)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敎化)하였다.

최치원의 〈난랑비서문

 

(鸞郞碑序文), 《삼국사기》

 

화랑의 제도적 설치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576년(진흥왕 37)의 기록으로서, 이 해에 진흥왕은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게 해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라는 아름다운 두 여자를 뽑아 300여 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했다 한다. 이들 두 여자는 질투 끝에 준정이 남모를 살해하였지만 《삼국사기》에는 이보다 앞서 화랑 사다함(斯多含)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어 화랑도의 기원을 훨씬 앞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따라서 화랑도의 기원은 학자에 따라 두레, 혹은 조의선인(皁衣仙人) 등을 내세우고 있어 아직 정설이 확립되지는 않았지만, 화랑도가 우리 고대 사회에 있어 독특한 형태로 발생한 것만은 사실이다.

 

삼국 전체에 행해 오던 우리 고대 사회의 독특한 기풍, 혹은 종교가 특히 신라에 와서 화랑도로 정립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라의 경우는 씨족 제도가 오래 계속되었으므로 상호 부조의 협동정신이 강했고, 씨족원 사이에 일족(一族)의 명예를 중히 여겨 일신(一身)의 희생을 아끼지 않는 기풍이 있었으며, 고대 그리스와 같이 아름다운 육체와 아름다운 정신을 숭상하는 국민적 풍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백제에 비해 후진 국가였던 신라에서는 일찍부터 국가 민족의 수호를 이념으로 하여 궐기한 청소년들이 화랑도, 혹은 적당한 명칭의 단체를 자발적으로 조직해 애국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결과 사다함과 같이 뛰어난 인재들이 출현해 국가와 민족에 봉사하게 됨으로써 국가에서도 이에 대한 정책으로 국가 직속 체제하에 단합시킨 것이라 보며 남모·준정의 불상사가 서두에서부터 발생했어도, 다만 이를 운영의 결함으로 돌리고, 계속해서 화랑도 양성에 몰두했을 것이다.

 

 

                      

 

                                  

 

 

 

조직과 훈련

민간 청소년단체로서의 화랑도는 다만 화랑과 그를 따르는 낭도(郎徒)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576년 이후 국방 정책과 관련하여 이를 관에서 운영하게 되면서 조직이 체계화되었으며, 이들 화랑의 총지도자인 국선(國仙)을 두고, 화랑의 예하도 수개 문호(門戶)로 구성하게 했다. 화랑도의 총지도자인 국선은 원칙적으로 전국에 l명, 화랑은 보통 3∼4명에서 7∼8명에 이를 때도 있었으며, 화랑이 거느린 각 문호의 낭도는 수백에서 수천 명을 헤아렸다.

 

국선·화랑·낭도의 자격에는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아, 남녀 계급·승속(僧俗)을 막론했으므로, 때로는 거리를 방황하던 천애고아 미시랑(未尸郞)이 국선에 오르기도 하여 인격과 덕망과 용의(容儀)만을 중시했던 것이다.

이념

화랑도의 이념은 오로지 개인의 수양과 단련을 통한 국가에의 봉사였으므로, 서로 도의를 닦았고[相磨以道義], 가악을 즐겼으며[相悅以歌樂], 명산대천을 찾아다녔다[遊娛山川, 無遠不至], 또한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준수했다. 또 경문왕(景文王)의 고사에 관련되었듯이 ① 겸손하고 ② 검소하고 ③ 방자하지 않는 삼이(三異)를 생활신조로 삼았다.

세속 오계

세속오계는 화랑도의 지침으로, 진평왕 승려 원광이 수나라에서 수행을 하고 돌아와서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의 요청으로 내린 다섯 가지 계율이다.

  •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어야 한다
  •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로써 부모를 섬기어야 한다
  • 교우이신(交友以信):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어야 한다
  •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 나가서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
  • 살생유택(殺生有擇):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기풍

태종무열왕·경문왕을 비롯하여 김유신(金庾信) 등 역대 제왕과 현사(賢士)·충신·용장(勇將)·양졸(良卒)로서 화랑도 출신이 아닌 자가 드믈 정도로 화랑도는 신라 국력의 저장고 역할을 해 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 화랑도들은 한 시대의 중추적 위치로서 그 소임을 저버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역대에 걸쳐 화랑도의 특수한 기풍과 기질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기 때문이다.

 

즉, 국가와 동지를 위해 의(義)에 죽는 것을 즐겼고, 병석에서 약그릇을 안고 죽는 것을 수치로 여겼으며, 오로지 전진하다가 전사하는 것을 영예로 생각했고, 적군에 패하면 자결할지언정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로 알았다. 가야 정벌에 수훈을 세운 사다함, 황산벌 전투의 관창(官昌), 비령자(丕寧子)와 그 아들 거진(擧眞), 그리고 그 종 합절(合節), 김유신의 아들 원술(元述) 등 화랑사에 길이 아름다운 이름을 전하는 이들 화랑이 모두 이러한 기풍의 인물이었다.

 

음악이 화랑도의 수련에서 중요한 방식의 하나인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향가와 향가 작가의 대부분이 화랑도와 결부되어 있다.

 

즉 효소왕 때의 득오곡(得烏谷), 경덕왕 때의 월명사(月明師)·충담사(忠談師), 경문왕 때의 요원랑(遼元郞) 등 4선(四仙) 등으로서, 이 중 충담사는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요원랑 등은 〈현금포곡〉(玄琴抱曲), 〈대도곡〉(大道曲), 〈문군곡〉(問群曲) 등을 지었으며, 월명사는 자신이 국선(國仙)의 도에 속하며 단지 향가를 알 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한다. 이 밖에도 신라 국민들은 화랑들의 아름다운 행적이 있을 때마다 향가를 지어 그들을 기리거나 위로했다.              

                                                                             - 이상 위키백과 사전-

 

 

 

 

신라왕조신록의 내용

 

화랑도는 진흥왕 대에 조직된 인재 양성 단체로 다분히 사교 집단적인 성향이 강했다. 화랑도의 성립 시기에 대해 <삼국사기>는 진흥왕 37년(576년)이라고 기록하고 잇으나, <삼국사절요>,<화랑세기>,<동국통감> 등에서는 진흥왕 원년에 청립된 것으로 적고 있다. 진흥왕의 모후 지소태후가 이 단체의 형성에 깊숙히 관여한 사실을 감안해 볼 때, 그녀가 살아 있을 때 청립된 것이 분명하므로 진흥왕 원년설이 옳을 것이다.

 

화랑제도가 생길 무렵, 신라 사회는 유망한 왕족 또는 귀족의 남녀들이 휘하에 여러 젊은 남성을 거느리는 사교 집단이 많았다. 지소태후가 섭정이 된 뒤로 이들 단체들을 인재 양성을 위한 국가 조직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을하였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원화(源花)제도'였다. '원화'가 창립되고 뒤이어 '선화'도 창립되어 병립하였으며 '선화' 다음에 나타난 것이 '화랑'이다.

 

'선화(禪花)제도'란 덕망 높은 귀족 남성을 지도자로 삼고, 그 아래 수백 명의 낭도 조직을 형성한 집단을 말하는데, 이 남성 지도자를 일컬어 '선화'라고 하였다. 선화는 왕이 지명하였는데, 휘하의 낭도들을 지도하고 지휘하는 역활을 하였다. 선화제도는 기본적으로 '선도(禪道)'의 전통에 따라 참선과 무예, 학문을 닦고, 유사시에는 전쟁에도 참여하는 복합적인 기능을 하였다.

 

원화제도는 그 우두머리 또는 후견인이 여자였는데, 그 여자를 일컬어 '원화'라고 하였다. 신라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왕의 후궁이나 공주들이 많은 낭도를 거느렸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원화제도'가 되었다. 원화는 반드시 왕이 지명하였고 원화의 신분은 후궁이나 왕실의 여자였다. 따라서 그 휘하의 낭도들은 그녀를 보호하고 추종하는 일종의 호위무사 역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선화와 원화는 근본적으로 그 기능과 역활이 달랐지만, 나라에서는 여기에 속한 낭도들 가운데 인재를 선발하여 조정에 등용하였다. 비록 단체의 성격은 달랐지만, 인재를 천거하는 집단이라는 측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었다.

 

화랑의 창립과 더불어 성격이 달랐던 두 단체가 하나로 통합되었다. 두 단체의 통합은 원화를 폐지함으로써 이뤄졌다. 원화제도가 폐지된 것은 원화를 둘러싼 권력다툼 때문이었다.

 

원화제도가 생긴 이후 초대 원화로 지명된 사람은 '준정'이라는 여자였는데,지소태후는 준정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지소태후는 법흥왕과 동성왕의 딸 '보과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남모공주'를 좋아하여 원화로 삼기를 원했으나 이 사실을 안 준정이 질투심에 사로잡혀 남모에게 술을 먹인 다음 강가로 유인하여 물에 빠뜨려 죽여 버렸다.

 

이 사건의 전모는 '남모'를 받들고 있던 낭도들에 의해서 폭로 되었는데, 이로인해 '준정'은 처형되었고, 동시에 원화도 폐지되어 버렸다. 그리고 원화에 소속되었던 낭도들은 해산되어 선화의 낭도들로 편입되었다.

 

그때부터 선화의 무리들은 '풍월도(風月徒)'라 불리게 되었고, 그 우두머리를 일러 '풍월주'라 하였다.

 

초대 풍월주는 위화랑이라는 인물이다. 위화랑은 섬신공 김파로의 아들로, 벽아부인 소생이다. 소지왕의 총애를 받던 벽아부인은 위화랑을 임신하였을 때 입궁하여 소지왕의 보살핌을 받았는데, 이 때문에 위화랑은 '마복자'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마복자(摩腹子)'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배를 문질러 낳은 아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신라 사회에만 있던 풍습인데, 사계사의 어디에도 유래를 찿아보기 힘든 독특한 문화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어떤 집단이 있다면 집단의 우두머리는 휘하 부하 중에서 임신한 아내가 있다면, 그 아내를 자기 처서로 불러들여 살게 하면서 살을 맞대고 정을 통함으로써 태어날 아이와 인연을 맺는다. 이는 일종의 '의제가족' 관계를 맺는 풍습인데, 성적인 접촉을 그 수단으로 삼는다는 사실이 매우 경이로운 점이다.

 

이같은 마복자의 풍습은 신라 사회의 어느 집단이나 있는 일로 왕이 마복자를 얻는 것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왕의 마복자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왕과 마복자의 관계를 맺는 아이는 대개 왕족이었다. 즉, 왕의 마복자가 될 수 있는 신분은 한정되어 있었다는 뜻이며 이미 출세가 보장되어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 법흥왕도 소지왕의 마복자 출신이다.

 

어쨌던 위화랑은 이렇게 대단한 신분인 마복자로 태어 났는데, 위로 누나가 하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벽화'였다. 벽화는 인물이 줄충하여 '소지왕'의 사랑을 받다가 후궁이 되었다. 벽화는 소지왕이 죽은 후 '법흥왕'의 후궁이 되어 '삼엽공주'를 낳았다. 덕분에 위화랑도 자주 궁에 출입하여 소지왕과 법흥왕의 사랑을 받았고, 궁궐 사람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또 후에 위화랑의 딸 '옥진'도 법흥왕의 후궁이 되어 '비대왕자'를 낳았다.

 

 

 

 

위화랑이 초대 풍월주가 된 것은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또 단순히 그런 왕실과의 관계로만 풍월주가 된 것도 아니다.

 

<화랑제기>에 그는 얼굴이 백옥같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와 같고,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를 가졌다고 한다. 또 그는 성격이 곧고 대의를 알며 공평무사했다. 이런 까닭에 많은 낭도가 그를 존경하여 풍월주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진흥왕은 위화랑 이후 풍월주를 '화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하였는데, 그를 총애한 나머지 그의 이름으로 풍월을 대신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화랑이란 이름은 위화랑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화랑 조직은 풍월주를 우두머리로 삼고, 그 아래 '부제' 1인,그 밑으로 좌우전방 '대화랑' 각 1인씩 3명, 좌우전 '화랑' 2인씩 6명, 소우전화랑 12명, '묘화랑' 84명 등의 화랑들이 상층을 이루고, 화랑 밑으로 중간계층인 '낭두'가 있다. 낭두는 가장 아랫계급인 '망두'에서 제9대 '노두'까지 총 9계급으로 나눠며, 그들의 계급에 따라 그들의 아내와 자녀의 계급도 결정된다. 대개 화랑은 왕족 또는 주요 귀족의 자제들이며, 낭두는 일반 귀족 출신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낭두 아래에 있는 '낭도'들은 대개 소귀족이나 서민들이며, 숫자상으로 가장 많았다. 천민이나 노비 계층은 낭도가 될 수 없었다.

 

풍월주의 아내는 '화주'라 하고, 풍월주에서 물러난 사람을 '상선'이라고 불렀다. 상선은 풍월주나 부제의 지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낭두'들은 모두 상선이나 풍월주의 마복자로 구성되며, 만약 자식을 잉태하였는데도 그 자식이 상선이나 풍월주의 마복자가 되지 못하면 낭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화랑과 낭두의 관계는 상관과 부하의 관계가 아닌 일종의 '의제가족'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낭도의 딸들을 '봉화'라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풍월주가 머무는 선문에 들어가 교육을 받아야 했다. 봉화들 중에서 풍월주의 총애를 받는 여자를 '봉로화'라고 했으며, 봉로화가 되어야 낭두의 처가 될 수 있었다. 낭두의 처가 되어서 이들을 낳은 여자를 '봉옥화'라 하였다. 화랑도에 속한 서민의 딸들은 모두 '유화'라고 했는데, 이들은 낭두나 화랑의 총애를 받기 위해서 화랑도에 들어오며, 주로 화랑이나 낭두들의 시중을 들었고, 때론 육체적 관계를 맺기도 했다. 

 

화랑도의 전승기는 위화랑이 제1세 풍월주가 된 540년부터 681년에 '김흠돌'의 난에 대한 여파로 풍월주가 폐지될 때까지 241년 동안이다. 그 이후로 화랑도는 조직이 약화되고 사병화하는 경향을 띄게 되어, 급기야 신라 말에 이르러서는 일개 수련 단체로 전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잠시 풍월주가 폐지되고 원화가 부활된 적이 있었는데, 제6세 풍월주 '김세종 '때의 일이다. 당시 진흥왕의 후첩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미실'이라는 여자가 강력하게 원화의 복구를 주장하여 풍월주를 물러나게 하고 원화를 부활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미실은 진흥왕과 관계하면서 동시에 그의 아들 '동륜태자'와도 관계하였고, 또 '금륜(진지왕)'과도 관계하였다. 동륜은 지나치게 색을 밝혔는데, 진흥왕의 또 다른 처인 '보명공주'의 처소인 보명궁의 담을 넘다가 큰 개에게 물려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동륜의 황음행각이 드러나고 미실의 낭도들이 다수 개입하였으며, 또한 미실이 색정을 난잡하게 표출한 것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미실은 원화에서 물러나고, 원화도 다시 폐지되었다. 그리고 다시 풍월주가 복구되어 세종이 그 자리로 돌아왔던 것이다.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어진 재상과 충신이 화랑도에서 나왔으며,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또한 여기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김대문이 화랑세기에서 거론한 풍월주는 총 32명이다. 그는 이시기의 화랑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화랑이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인물 중에는 제15대 풍월주 '김유신',제18대 태종무열왕 '김춘추',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이 제 13대 풍월주였으며, 가야 정벌의 영웅 사다함이 재15대, 화랑 중에 화랑으로 이름을 날린 '문노'가 제8대 풍월주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장수가 화랑도 출신이며 6세기 중엽~7세기 말엽까지 신라 사회를 따받친 인물들은 모두 화랑도 출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화랑도에도 파벌 싸움은 있었다. 파벌이 형성된 것은 제7대  풍월주인 '설화랑' 때였다. 제6대 풍월주 '세종' 때에 문노와 그 낭도들이 세종을 따라 출전하여 전공을 세웠는데, 그들이 전공을 인정받지 못했으며 제7대 풍월주는 설화랑에게 돌아 갔는데, 이에 문노 일파가 설화랑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파벌을 만들었는데 이를 '호국선'이라 하였다. 그리고 설화랑이 이끈 파를 '운상인'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파벌이 생긴 최초였다. 이후 호국선과 운상인은 또 다시 파가 쪼개져 나뉘고, 여기에 가야 출신 파벌이 보태졌다.

 

이렇게 하여 화랑도의 파벌은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는데, 우선 출신 성분을 기준으로 지소태후를 추종하는 '진골정통', 사도왕후를 추종하는 '대신원통', 가야 왕족과 신라 왕족 사이에서 형성된 '가야파' 등으로 나뉜다. 거기에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한 '통합원류파', 통합파와 문노파가 섞여 형성된 '이화류' 등 시간이 지날수록 파벌은 늘어 났다. 이들 파벌은 서로 자기파에서 풍월주를 배출하려고 경쟁을 하였고, 급기야  681년에는 파벌 싸움이 극에 달해 '김흠돌'이 난을 일으키자 신문왕은 화랑도를 페지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내렸다.

 

그후 화랑도는 부활하지만, 풍월주는 사라지고 국선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으며 조직의 힘도 크게 약화되었다.

 

이렇듯 신라의 통일을 전후해 신라 사회에 엄청난 족적을 남긴 화랑도의 근본 정신은 선도(禪道)였다. 하지만 불교가 확대 보급되면서 불교 사상이 그 한쪽을 차지하게 되었고, 후에 다시 유교가 보태지면서 유불선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그런 까닭에 '최치원'은 화랑을 '풍류'라 하였고 '유불선의 세 가지교를 포괄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화랑도의 성격을 단순히 도를 숭상하는 수련단체라고 규정하기에는 곤란하다. 화랑도 당시 신라 사회의 권력 구도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권력집단이요, 그곳에서 인재를 발탁하여 등용했다는 측면에서 인재양성기관이요, 유불선의 도를 추구했다는 측면에서 학문집단이요, 개인 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수단이었다는 측면에서 사교집단이었다. 화랑도를 딱히 어떤 단체로 단언하는 것보다는 시대를 반영하는 총체적인 집단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서초동 퍼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