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TV 역사 드라마의 허와 실 본문
TV 역사 드라마의 허와 실
역사를 재미와 흥행의 도구로 변질시키지 말아야...
선덕여왕 드라마의 진실... 허구적인 역사사실에 재미와 흥행에 빠져드는 국민들...
최근 TV드라마 '선덕여왕'이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TV드라마 뿐만 아니라 일부 스포츠도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봉같은 국민들이 마약에 취하여 세월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우리 국민들은 2002년 월드컵에서 보여준 열정은 참으로 대단하였다. 그런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군중심리란 개성은 있으나 분위기에 휩쓸려 개성이 상실된 집단화되는 경향이 강하다. 남의 말 한마디에 쉽게 흥분하여 인터넷으로 악플을 달거나 마녀사냥을 하기도 하고 유언비어를 만들어 내며 무리가 되어 쉽게 밖으로 달려나가 같이 구호를 외치며 집단행동을 서섬치 않는게 요즘 사람들이다.
님비현상이 강하게 표출되는 요즘은 국가정책사업도 추진하기 힘들뿐만 아니라 막대한 추가예산이 소요되어 국민들의 혈세만 낭비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젊은 시절 대학가에서 이념서적에 생각의 혼돈을 가져오고 현실비판적인 사고로 무장된 일부 선동자들에 의해 길거리로 뛰쳐나가 데모와 최류탄에 상아탑 시절을 허비했던 많은 7080 사람들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속에서 환멸을 느끼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 소수의 선동자들에게 너무나 쉽게 충동질 받고 무리를 지어 휩쓸리며 개성이 상실된 군중이 되기 쉽다. 요즘 국민들을 열광시키고 있는 TV 드라마, 야구 시리즈 뿐만아니라, 골프 대회,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 등 삶이 어려운 국민들에게 그나마 재미와 열정을, 그리고 기쁨을 줄 수 있는 분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TV드라마와 스포츠는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부정적인 면도 상당하다고 생각된다. TV드라마가 주는 영향은 엄청나다. TV드라마는 그 사회의 내면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으로 민중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 요즘 일반드라마는 불륜,패륜,간통,살인,간통,삼각관계,혼전임신,재산다툼,사기,도박,불법,폭력이 넘쳐나고 역사드라마는 물론 작가 나름대로 충분한 자료를 수집하여 만들었겠지만, 정사에도 없는 가공의 이야기로 허구에 가득찬 이야기로 횟수를 이어가고 있으며 한국 역사에 대해서 바른 역사를 배우지 못한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조작된 드라마 역사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한 조작된 드라마 내용을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역사서지만 그 내용은 대부분 잘못되고 조작된 내용으로 쓴 책이라는 점이며 일제를 통해 식민사관으로 비뚤어진 역사를 우리는 배우고 알고 있기에 더더욱 허구에 찬 역사 드라마에 대해 안타까움이 더하다.
또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잘 모르는 입장에서 본 야구의 한국시리즈는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있지만 프로레스링처럼 관객수입을 최대한 올리기 위한 흥행쇼를 하는 모습으로 비치고 있어 진실성이 의문시 된다. 물론 선수들이나 관계자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어쩌면 그렇게 이기고 지며 횟수를 늘려갈 수 있는 실력들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이처럼 많은 국민들이 마약같은 TV드라마와 일부 스포츠에 빠져 어려움을 잊을 수 있는 좋은 즐길거리로 생각되지만 조작과 허구로 점철되고, 부정적인 내용으로 국민들의 정서를 오염시키는 상업위주.흥미위주의 작품을 쓰는 돈 많이 벌고 있는 작가, 방송사,스포츠 관계자들도 마땅히 비난 받아야 할 것이다. 물론 시대는 변하고 있다. 유교라는 패쇄된 사회에서 개같이 살아온 우리들이 새로운 시각과 사고로 민중의 진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상업주의와 허구로 일관된 내용으로 국민들을 속이고 오도한다면 그 사회적 책임은 반드시 져야할 것이다.
TV역사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에 허구를 가미하여 재미있게 만든 작품들이 많다. 역사공부를 소홀히 해 온 우리 국민들에게 허구의 역사를 인식시켜 진실을 오도하는 작태는 상업방송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영광스럽지도 못한 찌그러진 역사를 재미로, 흥행의 대상으로 삼는 민족은 아마 드물 것이다.
따라서 드라마를 보는 이들이 선덕여왕 시대의 신라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인바, 제 27대 선덕왕 실록을 살펴보기 전에 앞 시대의 24대 진흥왕 시대부터 알아보고 선덕여왕 실록, 그후의 태종무열왕 시대까지 실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제 24대 진흥왕 실록
(재위기간 서기 540년 7월~576년 8월, 36년 1개월)
1. 불법의 전도사 진흥왕과 신라의 무서운 성장
진흥왕은 법흥왕의 아우 김입종의 아들이며,법흥왕의 딸 지소태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삼맥종이다. 534년에 태어났으며, 입곱살이 되던 540년 7월에 법흥왕이 죽자 모후 지소의 섭정을 받으며 왕위에 올랐다.
법흥왕은 정비 보도부인에게서는 아들을 얻지 못했고, 후비 옥진궁주와 보과부인에게서 각각 대비와 모랑을 얻었다. 법흥왕은 이 두 사람 중에 비대를 총애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하엿으나, 비대의 외조부인 신라 최초의 풍월주인 위화랑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비대는 위화랑의 딸 옥진에게서 태어났는데, 옥진은 소지왕의 왕비 선헤와 묘심이 사통하여 낳은 오도의 딸이었다. 묘심은 골품이 없던 자라 옥진 또한 골품이 없었다. 위화랑은 그런 사실을 피력하여 법흥왕의 뜻을 꺽었다.
대의명분을 내세워 비대의 왕위 계승을 앞장서서 반대한 사람은 위화랑이었으나, 실제 이일을 주도한 사람은 법흥왕의 딸 지소였다. 그녀는 비록 딸이였으나, 가장 유력한 왕위 게승권자였다. 또한 그녀의 남편은 또 한 명의 유력한 왕위 게승권자인 법흥왕의 동복 아우인 입종이었다. 따라서 지소가 여자라는 이유로 왕위를 잇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녀와 입종 사이에서 태어난 삼맥종에게 왕위를 계승할 명분은 충분했다. 지소는 그런 명분을 바탕으로 공평부사한 위화랑을 충동질 했고, 결국 왕위는 그녀의 아들 삼맥종이 차지하게 되었다.
진흥왕이 일곱 살이라는 나이로 왕위에 오른 까닭에 실질적으로 왕권을 행사한 사람은 지소태후였다. 따라서 진흥왕은재위 초기 10여 년은 지소태후의 시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섭정에 오른 지소는 즉위와 동시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각 문무관들의 직위를 한 급씩 올려주는 선심책을 구사했다.그리고 곧장 실시한 정책이 인재양성책이었다.
당시 신라 사회에서는 명망있는 귀족 출신의 남녀들이 휘하에 여러 젊은 남자들을 거느리는 사조직이 유행했다. 지소태후는 이러한 조직을 공인하여 인재 양성을 위한 공적인 국가조직으로 변모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마련한 것이 선화와 원화 제도였다.
선화제도는 왕족 출신의 남자를 선화로 삼아 그 아래 여러 낭도를 거느리게 하는 것이고, 원화는 왕족 출신의 여자를 원화로 삼아 그 아래에 여러 낭도를 거느리게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속한 낭도들은 대개 귀족의 자재들이었는데, 지소태후는 이들 낭도들을 키워 조정의 재목으로 삼고자 하였다.
하지만 원화제도 내부에서 알력이 생겨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원환느 페지되고, 그 아래 있던 낭도들은 흩어지거나 성화에 합쳐졌는데, 이것이 화랑제도의 시초이다. 화랑의 원래 이름은 풍월이었고, 그 우두머리를 풍월주라 했다. 그런데 초대 풍월주가 위화랑이었던 까닭에 우두머리를 화랑이라 부르고, 그 무리를 화랑도라 칭했다.
지소태후는 541년 3월에 박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임명하고 중앙과 지방의 군대에 관한 업무를 맡겼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조치였다. 신라는 전통적으로 귀족 협의체인 화백회의를 통해서 정책을 결정해 왔다. 그런데 병권을 병부에 일임하고 병부령에게 권한을 맡겼다는 것은 왕이 화백회의를 거치지 않고 군대를 직접 지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한편 지소태후는 불교를 대대적으로 일으켰다. 544년 흥륜사를 준공하여신라 불교의 중심지로 삼았고, 3월에는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법제화하였다. 또한 중국 남조에 부처님 사리를 요청하였는데, 549년 봄에 양나라에서 사신과 유학승 각덕을 보내 불사리를 가져왔다. 또 595년 9월에는 남조의 진나라에서 사신 유사와 승려 명관을 보내왔는데, 그때 불경 1천여 권이 유입되었다.
이후 신라 불교는 날로 성장하여 566년에는 지원사와 실제사 두 절을 추가로 지었고, 황룡사도 준공하였다. 진흥왕은 553년에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도록 했으나 그 터에 황룡이 나타나자 이를 기이하게 여겨 궁궐을 고쳐 절을 짓게 하였다. 이 절이 바로 황룡사이다. 이후 13년 동안 공사를 지속하여 566년에야 준공했다. 573년에는 전쟁에 나가 전사한 사졸들을 위한 팔관회를 일 주일동안 열었으며, 574년에는 황룡사에 구리 3만 5천 근이 들어간 도금 중량이 1만 1백 98푼이나 되는 장륙상을 주조하였다. 576년에는 안흥법사가 중국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고, 서역 승려 비마라 등 두 명의 승려와 같이 돌아와 <능가승만경>과 석가의 진신사리를 바치기도 하였다.
진흥왕 대에 이르러 신라 불교의 발전은 급속도로 진행되엇으며 지소태후와 진흥왕의 적극적인 불교 중흥정책이 뒷받침이 되었다. 마년ㄴ에는 진흥왕이 머리를 깍고 가사를 입었으며 ,왕비 사도부인도 승려가 되어 영흥사에서 지낼 정도였다. 신라 왕실에서 불교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알 수 있으며 불교는 자연적으로 '호국불교'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지소태후는 역사서를 편찬하였는데, 545년 7월에 이찬 이사부가 국사 편찬을 강력하게 권고하자, 태후는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선비들을 모아 그들로 하여금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것이 신라 국사 편찬의 효시가 되었다.
신라가 화랑과 불교로써 국력을 다지고 있는 동안, 국제 관계는 급속도로 변하고 잇었는데, 특히 신라와 백제, 고구려의 관계는 이해관계 변화에 따라 묘하게 돌아갔다.
사실, 법흥왕 시대부터 신라와 백제의 관계는 조금씩 뒤틀리고 있었는데, 원인은 가야 문제였다. 백제가 임나지역 일부를 장악하여 백제와 가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신라는 어부지리로 가야를 병합하는 결과를 얻었다. 또한 가야의 왕족과 귀족들이 대거 신라로 귀부하였는데, 이 때문에 가야 백성들을 의식하여 백제에 호의적인 입장을 취할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신라와 백제는 점차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었고 백제는 무령왕을 거쳐 성왕이 즉위하였다.
성왕은 대단히 현실적인 인물이라 함부로 신라를 자극하지 않았다. 고구려와 등을 지고 있던 백제로서는 신라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성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했다. 이미 신라와 백제는 동성왕 이후 화친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가야 문제로 묘한 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성왕은 이러한 관계를 타개하기 위한 것이며 신라도 가야의 눈치를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던 관계로 화친에 동의했다.
548년 2월,고구려가 동에 지역주민들을 앞세워 백제의 독산성(경기 포천)을 공격하자 성왕은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자 신라 지소태후는 장군 주령에게 병력 3천을 주어 고구려군의 후방을 치자 고구려군은 패퇴하였다.
이러한 기세를 몰아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은 고구려군을 몰아 붙여 백제는 한성을 되찿고, 도살성을 함락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러자 고구려의 양원왕은 백제의 금현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렇듯 양쪽 군대가 서로 뒤엉켜 진퇴를 거듭하고 있을 때, 지소태후는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양쪽 군대를 모두 공격하여 금현과 도살 두 성을 차지하고 병력 1천을 주둔시켰다.
하지만 백제 성왕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신라의 행동에 기분은 나빴지만 감정을 감추고 백제,신라연합군은 고구려군을 계속 몰아 붙였다. 결국 백제는 고구려의 여섯 군을 차지하였고 신라는 열 개 군을 차지하는 개가를 올렸다.
당시 고구려는 돌궐의 급습으로 신성이 포위되고 도성이 위협받는 위급한 상황이라 신라와 백제를 상대로 전면전을 벌일 여건이 되지 못해 퇴각하였던 것이다. 돌궐이 물러나자,고구려는 전열을 정비하여 신라와 백제에 대해서 전면전에 나섰다.
이 무렵, 신라는 은밀히 고구려와 내통하여 고구려군이 밀고 내려오자 되려 백제군을 협공하여 한강 이북의 백제 땅을 차지하고 한성도 차지해 버렸다.
그러나 백제 성왕은 쉽사리 보복전을 전개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기 딸을 신라 왕실에 시집보내면서 신라와 싸움은 피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신라의 맹공을 누그러뜨린 성왕은 비통한 심정으로 사비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복수전을 전개할 요량으로 왜에 사신을 보내 군대를 요청했다.
554년 5월에 왜의 수군이 도착하자, 성왕은 가야의 반 신라 세력까지 끌여들여 신라 공략을 준비했다. 마침내 그해 7월에 성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태자 위덕으로 하여금 선봉대를 이끌고 신라의 관산성(옥천)을 공격토록 했다. 신라 각각 우덕과 이찬 탐지가 백제군에 맞서 싸웠으나 상황이 어려워지자 한강 북쪽에 주둔하고 있던 가야 왕자 김무력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성왕은 김무력이 합세한다는 정보를 듣고 선봉대와 합류하기 위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밤을 새워 급히 위덕에게 달려갔으나, 신라군은 백제 성왕이 선봉대와 합류할 것을 예상하고 중간지점에 매복하였다가 성왕군을 급습하여 성왕을 전사케 하자, 백제군을 급속히 사기가 떨어져 달아나게 되었으며 추격한 신라군에 의해 3만 이상의 병력을 잃게되는 대패를 당하게 된다.
이 사건 이후 백제는 궁지에 몰렸다. 성왕이 죽은 지 3개월 만에 고구려의 급습을 받아 옛 도읍인 웅진성이 포위되는 지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신라는 그런 백제의 고통을 불구경하듯 바라보며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확보한 영토에 주를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기 사작했다. 555년 비사벌(창녕)에 완산주를 설치하고(후에 대야주), 그해 10월에는 진흥왕이 직접 북한산을 순행하여 순수비를 설치하고 국경을 정하였다. 이듬해 7우러에는 비열홀주(한경남도 안변)를 설치하고 사찬 성종을 군주로 파견하였다. 557년에는 국원(청주)를 소경으로 만들었으며, 사벌주를 없애고 감문주를 설치하고 사찬 기종을 군주로 임명하였다. 또 신주롤 삼았던 한강 이북에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558년에는 귀족의 자제들과 6부의 호민들을 국원(청주)로 이주토록 하였다.
그러는 사이 이를 갈고 있던 백제는 가야의 잔존세력을 부추겨 신라를 협공했다. 562년 7월에 신라 변경을 침략하였고, 가야 왕 도설지가 군대를 일으켜 대대적으로 봉기했다. 그러나 백제군은 신라군의 역공을 받고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가양의 반란 세력은 장군 이사부와 사다함이 군사 5천을 이끌고 가서 진압하였다.
진흥왕대엔 신라의 영토가 크게 넓어져 가야 땅을 모두 병합하였고, 옛 동예 땅은 물론 옥저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 결과, 신라의 영토는 북쪽으로 함북의 마운령까지 이르러 한반도 땅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렇듯 정치,문화, 국력 등 다방면에서 큰 업적을 남기고 576년 8월 마흔 세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2. 진흥왕의 가족들
진흥왕은 김입종과 지소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네 부인에게서 아들 넷을 얻었고, 사통하여 딸을 하나 얻었다. 그의 정비는 사도부인이며, 후비로 숙명공주와 백제 성왕의 딸 소비 부여씨, 가야 이뇌왕의 딸 월화공주 김시가 있다. 사도왕후는 동륜태자와 구륜왕자를 낳았으며, 숙명공주는 금륜(진지왕)을 낳았다. 또 금진과 사통하여 난성공주를 낳았다. 월화공주는 제17대 풍월주인 염장의 아버지 천추를 낳았다. 하지만 소비 부여씨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 김입종(생몰미상)
입종은 지증왕의 아들이며, 연재부인 소생으로 법흥왕의 동복 아우다. 법흥왕의 딸이자 조카인 지소를 맞아들여 부인으로 삼았으며, 그녀에게서 삼맥종(진흥왕)을 낳았다. 그는 위화랑과 오도의 둘째 딸 금진과 관계하여 아들을 하나 얻었는데, 그가 숙흘종이나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입종은 법흥왕보다 먼저 죽었다.입종이 죽자 법흥왕은 혼자된 딸을 염려하여 박영실을 계부로 삼도록 했다.
* 지소태후 김씨(생몰년 미상)
지소태후는 법흥왕의 딸이며, 보도부인 박씨 소생이다. 삼촌인 입종에게 시집가 삼맥종을 낳았다. 삼맥종이 일곱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섭정이 되어 진흥왕 재위 10년 동안 수렴청정하였다.
법흥왕이 죽기 전에 영실공 박영실을 계부로 정해 주었으나 그녀는 영실공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좋아한 임물은 박이사부(박태종)였는데, 이사부는 그녀와 관계하여 1남 3녀를 낳았다. 이들은 세종이요, 딸은 황화,숙명,송화공주이다. 또 이화랑과 사통하여 만호 낭주를 낳았다.
이사부는 신하의 신분으로 그녀를 섬기는 입장이었기에 비록 관계는 하였으나 남편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녀가 낳은 아들과 딸들에게도 아버지가 아니라 신하의 입장으로 대해야 했다.
지소태후는 자신과 이사부 사이에서 태어난 숙명공주를 진흥왕의 왕후로 삼길 원했다. 그래서 진흥왕의 정비인 사도부인을 내쫓으려고 했지만, 진흥왕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진흥왕을 압박하여 숙명공주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진흥왕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숙명을 부인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고, 숙명공주 또한 진흥왕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지소태후의 끈질긴 ㅇ랍력으로 숙명공주를 왕후로 맞아들여야 했다.
숙명이 제2왕후가 된 뒤로 지소태후는 정비인 사도부인을 내쫓으려고 거세게 몰아쳤지만 진흥왕의 반대에 부딪치자 둘 사이에는 알력관계가 형성되었다. 그 때문에 왕실은 지소파와 사도파로 나뉘어 사사건건 대립하였으며 진흥왕 말기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여진다.
* 사도부인 박씨(534~614년)
사도부인은 박영실과 선혜왕후 소생 오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일곱살이란 어린 나이에 동갑인 진흥왕에게 시집와서 왕후에 책봉되엇으며, 동륜태자와 구륜왕자를 낳았다.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는 자신의 계부 박영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도부인도 몹시 싫어했다. 사도부인을 정비에서 폐하려고 하였으나 사도부인을 사랑했던 진흥왕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신의 딸 숙명공주를 억지로 지흥왕의 제2 정비로 만들었다.
시어머니인 지소태후와 사도부인 사이에 알력이 생겨 왕실이 갈라져 신라 왕실의 커다란 회근이 되었으며 대개 지소태후의 계열을 진골정통이라고 하고 사도부인의 게열을 대원신통이라고 한다. 이는 왕비를 선택할 때, 처음에는 김알지계와 박혁거세계를 구분한 것을 일컬었는데 대립 이후에는 지소계와 사도계로 구분되었다.
지소태후가 진흥왕 말년까지 살다가 죽은 후에 진흥왕이 주색에 빠지자 사도부인은 진흥왕을 대신하여 막강한 권력을 형성하여 정사를 좌지우지하면서 왕권을 행사하였다.
지소부인은 진흥왕이 죽기 전 사도부인이 낳은 동륜태자 대신에 숙명공주의 아들 금륜(진지왕)을 왕위에 즉위시켰는데, 지소부인이 죽은 후 사도부인은 진지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여색에 빠져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자, 미실과 힘을 합쳐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소생인 동륜태자의 아들 백정(진평왕)을 왕으로 세웠다.
이렇듯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그녀도 만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머리를 깍고 승려가 되어 영흥사에서 살다 진평왕 36년 614년 81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다가 생을 마감했다.
* 숙명공주(생몰년 미상)
숫명은 박이사부(박영실)와 지소태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그녀는 지소태후의 강압으로 진흥왕의 후비가 되었고, 금륜태자(진지왕)을 낳은 뒤에는 제2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진흥왕에게 매력을 느깆 못했다. 그래서 위화랑의 아들 이화랑을 좋아했는데 이화랑과 사통하였는데 여러번 진흥왕에게 들키기도 하여 진흥왕이 폐위시키려 했으나 지소부인이 울면서 만류하는 바람에 시행하지 못했다.
그런데 숙명은 이미 이화랑과 사통하여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결국 이화랑과 같이 달아났다. 이일로 사람들은 그녀의 아들 금륜이 진흥왕의 아들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덕분에 진흥왕은 사도부인 소생인 동륜을 태자로 삼게 되었고 지소부인의 반대도 물리쳤다.
그후 지소태후는 이화랑과 숙명을 다시 불러 부부가 될 것을 허락하였고, 숙명과 이화랑은 원광과 보리 두 아들과 화명과 옥명 두 딸을 낳았다. 만년에 그녀는 이화랑과 영흥사에서 지내며 불도 정진에 전념하였다.
* 동륜태자(?~572년)
동륜은 진흥왕과 사도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언제 태자에 책봉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고, 태자에 책봉된 뒤에는 정숙이라는 시호를 사용했다.
진흥왕은 원래 그를 태자에 책봉하려 햇으나 지소부인의 반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욱이 숙명이 금륜을 낳자, 지소부인은 금륜을 태자에 책봉할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숙명이 이화랑과 사통하면서 도주하는 사태가 발생되자 금륜이 진흥의 자식이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 덕분에 동륜이 태자에 책봉될 수가 있었다.
동륜은 박미진부와 묘도 사이에서 태어난 미실을 좋아했다. 동륜은 그녀를 만난 뒤로 색을 탐닉하다가 진흥왕의 또 다른 첩인 보명공주에게 마음이 쏠린다. 그래서 보명과 관계를 갖게 되는데, 572년 3월 어느 날 그녀를 만나기 위해 홀로 보명궁의 담을 넘다가 어쩌구니 없게도 부명궁을 지키던 큰 개에게 물려 죽었다.
그의 부인은 김입종의 딸 만호부인이며, 아들 하나를 두었다. 진지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진평왕이 그의 아들이며 이름은 백정이다.
-서초동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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