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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그리스도교) 부패와 종교개혁 본문
기독교(그리스도교)의 부패와 종교 개혁
예수의 탄생은 유태민족에게 엄청난 재앙을 초래하였다.
유태인들은 예수를 그냥 유능한 랍비 정도로 생각하고 그가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킬 인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혼란했던 유태인 사회에 메시아처럼 나타나 기적을 보여주며 기득권에 대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그에게 민중들이 모여들자 재사장들과 헤롯왕은 예수를 십자가에 메달아 처형하게 된다.
기원 후 70년 유태민족은 로마의 철저한 지배속에 고통스럽게 삶을 살아가다가 유태민족 중 과격단체들이 나타나면서 유태민족은 로마에 항거하기 시작하였다. 로마 병영을 공격하여 로마 병사를 살육하고 병영을 불태우는 등 게릴라 전술로 이스라엘 각지에서 봉기하자 로마군은 시리아 지역에 주둔하던 로마군단을 보내 대거 진압에 나서면서 유대전쟁이 시작되었다.
로마는 약속을 저버리거나 반항하는 민족이나 도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학살하고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불태우고 땅을 갈아 소금을 뿌리는 징벌을 가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방의 저항군이 차례로 진압되자 저항군은 예루살렘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예루살렘 공방전이 수 년간 계속되었다. 로마군 8만이 공격하는 예루살렘에는 약 2~3만명의 유태인들이 저항하고 있었다. 결국 치열한 공방전을 거쳐 예루살렘은 점령되고 저항군들은 무참하게 살륙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로 전락되거나 추방되었다.
극렬분자 960 여명이 갈릴리 호수 서편 난공불락의 '마사다 요새'에서 3년 가까이 저항하다가 결국 로마군에게 점령되면서 전원 옥새를 하므로 유태민족의 저항은 종말을 고했다. 그래서 유태민족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영원히 쫒겨나게 되고 세계 각지로 흩어져 2000년 가까이 유랑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죽은 후에 수 많은 사제들에 의해서 교세가 확장되면서 복음 전파의 고초를 겪었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 사제들이 무수하게 희생되었고 그런 가운데도 빈민층이나 가난한자를 대상으로 꾸준히 교세가 확장되었다. 결국에는 동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자 그리스도교는 급속하게 유럽지역까지 확산되면서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성장하면서 종교가 전세계를 지배하는 교황체제가 등장하고 종교전쟁,십자군 전쟁이 발발하는 등 종교가 모든 정치권력을 지배하는 중세를 맞이하게 된다.
기독교인들은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예수를 부정하며 죽음에 이르게 한 유태민족을 철저하게 차별하면서 마녀사냥식으로 타종교에 대한 탄압은 물론 무차별 학살하였다. 정치권력과 밀착된 기독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부패하기 시작하였고 탐욕으로 가득찬 모습으로 변질되어 갔다.
어느 종교집단이나 권력집단이나 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이기에 시간이 지날 수록 향략과 사치,부패의 늪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은 종교적인 논리로 해석되고 모든 과학적인 사고는 부정되었다. 소위 중세를 암흑시대로 만든게 되고 모든 학문은 종교적인 해석과 표현에 집중되었다. 과학이나 인문,사회,문화의 발전은 퇴보하였고 급기야는 면죄부를 판매하면서 기독교는 종교개혁의 빌미를 제공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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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교회의 기원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유태인 거주지역에서 시작됐다. 유태교의 입장에서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분파로 이해됐고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 문제로 유다교와 늘 갈등과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다.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다음에 예루살렘은 더 이상 그리스도교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이 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자연스럽게 집중되게 됐다. 비록 예루살렘이 그리스도교의 발상지이지만 오히려 로마가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정치 상황 등 복합적인 이유에 기인한다.
로마 교회가 언제 생겼는지, 즉 로마에 첫 그리스도인이 언제 정착했고 어떻게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형성됐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바오로의 로마 서간을 근거로 적어도 그 집필 연대인 58년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로마에 존재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오로는 59년에서 61년 사이에 로마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베드로의 경우에는 로마 도착 사실이 명확하게 나타나있지 않다. 다만 클레멘스의 코린토 서간과 외경인 베드로 복음서, 베드로 행전이 베드로의 로마 체류 사실과 함께 그의 순교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 나서 여론이 좋지 않자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4년 동안 모질게 박해했는데 이 박해 때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주역이었던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순교지라는 특수한 의미와 배경으로 인해 지역교회를 넘어선 새롭고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로마 교회는 초기 교회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일치의 기준이었고 가시적인 정점이었다. 이후 로마 주교는 스승처럼 다른 지역교회와 공동체의 문제에 가르침을 내린다. 클레멘스는 고린토 교회의 내부 분쟁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로마 주교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려준다. 당시 지역 공동체 지도자들은 로마를 방문해 로마 공동체와의 일치를 확인하고 보장받곤 했다.
로마 제국의 박해
로마 제국의 박해는 대체로 10번에 걸쳐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 성격은 3기에 걸쳐 뚜렷이 구분된다. 100년경 까지의 제1기는 교회에 호의적이다가, 로마시 대화재 사건으로 일어난 우발적이고 산발적인 박해기이며, 250년까지의 제2기는 교회를 반인류적 반국가적 금지된 종교로 규정하고 신자라는 이름만으로도 처벌의 대상이 되던 시기다. 가장 조직적이고 잔인하게 시행된 250년에서 313년까지의 제3기는 로마제국의 정치·사회적 혼란을 무마시키기 위해 일어난 박해시기였다. 이 400년여에 걸친 박해 때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도 순교했다.
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 교회와 로마제국은 비록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요인들을 안고 있었다.
먼저 로마인들은 병역을 노예나 무산자들에게는 부과 시키지 않을 만큼 시민의 권리요 의무라고 생각할 정도로 개인보다 국가를 절대시하는 성향이어서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믿는 그리스도교와 상충될 수밖에 없다. 아울러 황제들은 로마제국의 정치·사회적 혼란기를 맞으면 종교적 기반에서 제국의 쇄신과 내적 강화를 꾀했는데 황제숭배 같은 국가종교 예배가 국가에 대한 충성의 시금석으로 강조될수록 이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은 국가의 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로마인들은 영적 세력이 인간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고 있었는데 타치우스나 아우렐리우스 같은 황제들의 재위기간에 전염병, 기근, 홍수, 야만족 침입 등의 재난이 발생하자 그리스도교 반대파들은 그리스도교 때문에 신들의 분노를 사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며 군중들을 부추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에 대한 무지도 박해의 한몫을 담당했는데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에 대해 신자들을 식인종으로, 형제자매로서의 친교생활에 대해 근친상간하는 야만인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300여년에 걸친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는 마침내 로마제국의 새로운 사회·통치 질서로 자리잡게 되는 승리를 거둔다.
제국 교회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2년 이탈리아로 출정해 막센티우스와 서로마제국의 패권을 두고 다투게 된다.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던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티베르 강 밀비오 다리에서 결정적인 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전투 전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인들의 신에게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했을 때 공중에서 빛나는 십자가와 ‘이것을 가지고 승리하라’는 문구를 보았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키(Χ)와 로(Ρ)로된 군기를 만들어 가지고 싸워 승리했다고 한다. 이 밀비오 전투의 승리로 콘스탄티누스는 서로마의 주인이 됐고 그리스도를 수호신으로 숭배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의 이러한 개종은 박해의 종식과 함께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는 길을 열어놓는 대전환점이 된다.
313년 밀라노를 방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동부지역의 황제 리치니우스와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논의하게 되고 그 중에서도 십자가 발현 체험을 한 콘스탄티누스는 종교문제, 특히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포고형식의 영을 내리게 된다. 이를 밀라노 칙령 혹은 관용령이라 부른다.
밀라노 관용령은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면서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을 막론하고 제국 내 모든 시민들에게 적용되는 종교자유의 원칙을 선포한 것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시대에 몰수당한 재산이나 팔린 재산까지도 교회에 반납하도록 명시한 것이다.
이 밀라노 관용령 자체가 그리스도교를 국교화 하거나 특권을 베푼 것이 아니라 타종교와 같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것뿐이지만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기초가 됐다. 밀라노 관용령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취한 여러 조치들은 대중의 대량 입교와 함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그리스도교 정신을 확산시키게 된다.
324년 콘스탄티누스는 반 교회적 정책을 시행한 리치니우스를 물리치고 전 로마의 유일한 통치자가 됨으로써 그리스도교 정책은 더욱 강화된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이은 아들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친 교회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비록 율리아누스 황제 때 반 교회 정책이 시행되긴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테오도시우스 1세 때인 380년 2월에 '가톨릭 신앙에 대한 칙령'(De fide catholica)의 반포와 함께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공인 종교가 됐다. 이로써 300년 간의 혹독한 박해를 이겨낸 그리스도교는 제국교회, 국가교회가 됐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을 단초로 제국의 공인교회가 된 그리스도교는 박해받는 교회에서 특권의 교회로, 순교자의 교회에서 국가교회로 전환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화는 광범위한 복음전파와 함께 대중의 대량 입교로 인해 양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 교회가 됨으로써 국가권력과 너무 밀착되어 부와 권력을 누리면서 세속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우려한 인물들 중 몇몇은 교회 복음화와 내적 쇄신 그리고 신앙생활의 심화를 위해 사막으로 은거하기도 해 초기 수도원 운동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십자군 운동
11세기 서유럽은 클뤼니 수도회와 그레고리오 개혁 등에 의해 수도원 문화가 확산되었고 종교적 열성이 고양된 상태였으며 새로운 공동체 의식이 생겨났다. 그리스도교 정신은 사회전반에 걸친 기본 토대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하는 요소는 전체 사회구조를 위협하는 위험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상업의 발달 등으로 봉건지배 체제가 해체되고 자치도시의 독립이 진행되는 시기로 무역세계의 확대가 당면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층민과 농민들의 생활 수준은 열악하여 생활수준이나 사회신분의 향상을 바라는 욕구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심이 날로 점증되어갔다.
십자군 전쟁의 또 다른 중요한 배경은 기사계급의 동요였다. 끊이지 않던 제후들간의 세력다툼이 11세기 이후 사회의 안정과 함께 소멸되었으며 교회도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교회 안에 유입된 호전성을 순화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평화」(Pax Dei)와 「하느님의 휴전」(Tregua Dei)이란 제도를 만들어 많은 전투 행위를 금지 시켰다. 이렇게 되자 기사들은 전투정신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고 신분마저 위태로워졌다.
서유럽과 동로마 제국, 이슬람으로 삼분되어있던 국제정세 또한 셀주크 투르크족의 발흥으로 균형이 깨지고 동로마 제국이 교황을 비롯한 서유럽 사회에 구원을 요청하게 됐다. 637년부터 팔레스티나 지역은 이슬람의 세력아래 들어가 있었지만 성지순례와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셀주크 투르크족이 점령한 이후부터는 성지순례가 어려워졌고 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리하여 11세기말부터 13세기까지 근 200여년 동안 8차례에 걸쳐 원정이 이루어졌다. 농민십자군에 이어 기사들과 귀족들로 이뤄진 제1차 십자군이 1099년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기도 했으나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십자군 원정이 거듭될수록 그 순수성도 잃어버리게 되는데 4차 원정에서는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놀아나 성지회복이 아니라 오히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라틴제국을 세움으로써 동서 교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회복할 수 없게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십자군 운동은 원정이 거듭될수록 신앙의 순수한 열정이 퇴색되고 변질된 채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으로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교황의 주도로 이뤄진 십자군은 초기에는 교황권의 신장을 가져왔지만 궁극적으로 십자군이 실패함으로써 교황권이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 동시에 유럽의 종교적 열정도 식었다. 또한 영주들이 십자군 원정에 나선 후 영지관리를 소홀히 하게 되고 경제적으로 쇠퇴하자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왕권이 절대화하는 한편 공동체의식이 강화돼 민족의식 내지는 국민의식이 싹트기 시작함으로써 서유럽사회가 근대로 넘어가는 계기가 마련됐다. 또한 동방과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은 학문을 증진시켜 스콜라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종교 개혁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해 가장 자주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이른바 「면죄부」이다. 그러나 이는 심히 왜곡된 표현이며 사실은 「대사특전(indulgence)」을 지칭한다. 16세기초 독일에서 촉발된 대사 논쟁은 소위 종교개혁을 부른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독일 종교분열의 직접적 동기는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위한 대사 설교에 있었다. 극도로 피상적이고 과장된 대사 설교를 통해 특히 당시 독일 교회는 부의 축적에 몰두한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교황청에 일정액을 그 조건으로 지불하기로 계약했으며 동시에 자기 교구 안에서 8년 동안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위한 대사 설교를 하도록 협약이 이뤄졌고 그 수익금의 반은 자신이 소유했다. 그는 대사 설교가들과 고해신부들을 임명하고 이들에게 설교에 대한 전체적 지침서를 주었다. 이 지침서는 돈을 많이 걷는 것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웅변적 과장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대사와 관련해 교리상의 잘못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루터의 주장처럼 대사를 통해 신자들의 미래의 죄까지 사해진다고 한 일은 없지만 고해성사표를 판매했고 이 표를 가지면 일생 중 언제라도 고해성사를 보면 교황이 보류한 죄까지 사해진다고 한 일은 있었다고 한다. 또 설교가들은 고해성사표를 사는 순간 교회의 영적 은혜를 얻기 때문에 통회가 필요없다는 식으로 설교를 했고 죽은 사람을 위해 대사를 얻을 때에도 고해성사를 보거나 통회할 필요 없이 돈만 주면 되도록 되어있었다.
작금의 대사 설교가 성실한 신앙생활을 위한 노력보다는 돈으로 자기 영혼을 구하려고 고심하고 순례와 같은 외적 행사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 루터는 대주교에게 새 훈령을 통해 대사설교의 폐단을 없앨 것을 요구하고 신학자들이 대사 교리를 명확히 밝힐 것을 촉구하면서 작금의 대사 시행을 반박하는 신학 명제로서 대사 명제와 대사 논문을 첨부했다. 루터는 후에 자신이 95개 조문을 발표하게 된 동기는 바로 이 편지에 대해 주교들이 아무런 회답을 주지 않은데 있었다고 말했다. 이 95개 명제는 루터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출판업자들의 손에 들어가 1518년 95개 항목으로 정리돼 「95개조 명제」로 인쇄됐다.
1. 개요
중세 말기에 인문학자들은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풍자하며 도덕적인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그것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가운데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에 달하는 반박문을 못 박은 사건은 로마 가톨릭의 유럽 지배 종식의 기점이 되었다. 물론 중세인들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신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했고, 인위적인 평안이 아닌 신이 직접 내리는 평안을 절실하게 요구하였다. 루터는 바로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켰다. 루터는 중세의 신비주의적 경건과 예리한 지성으로 중세교회의 부정과 인위적인 가면을 벗기고 복음의 실체를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 선물했다.
독일에서 루터를 중심으로 개혁 운동이 일어남과 더불어 스위스에서는 칼뱅의 개혁운동이 꽃을 피우게 되었다. 개혁파의 신학은 점점 칼뱅의 신학으로 수렴되면서 칼뱅주의는 대륙 쪽 개혁파 신학의 주류가 되었다. 칼뱅의 제자였던 녹스는 영국으로 가서 개혁파 신학을 전하였다. 이렇게 16세기 유럽은 대변혁을 맞았다.
이렇게 유럽이 점차적으로 교황청의 억압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면서 인문주의도 더 활발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훗날 문예부흥을 불러왔다. 신학의 시녀로서 빛을 보지 못했던 철학이 과학적인 방법의 도입과 더불어서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서 무조건적인 신앙의 강요가 호소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신대륙의 발견과 더불어서 박해받던 유럽의 개신교 신자들에게 탈출의 기회가 마련되었으며, 지금까지 억압받던 노동자와 농민들이 제 몫을 찾기 위해서 조용한 시위를 일으키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새로운 양상의 변화가 일어났다.
공격을 받은 로마 가톨릭 내부에서는 조용하게 자신들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서 개신교에 반격할 수 있는 철갑을 더욱 단단히 함으로써 내부 개혁을 실시해 쇄신하였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그리스도교 내부의 개혁과 함께 해외 선교에 힘을 쏟는 예수회가 시대적 필요에 부응해서 창설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로 기독교는 수 백개의 여러 종파로 분열되었고, 그로 인해 기독교 종파 간 갈등을 가중시켜 신앙상 혼란을 일으켰다는 비판을 종교개혁파에게 내리는 사람들도 있다.
개혁자들의 사상
개혁자들의 신학적 사상은 소위 다섯 Solas(Five Solas)로 요약된다:
- Sola Scriptura (오직 성서) : 진리냐 아니냐의 최종 권위는 오직 성서에 있다는 뜻으로 로마 가톨릭의 교권주의에 저항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진리의 판단기준은 성서이지, 교회가 아니라고 해석한 것이다.
-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오직 십자가에서 억조창생의 죄값을 다 받고 하느님의 의를 완전히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덧입는 것뿐이라는 뜻이다.
- Sola Gratia (오직 은혜) : 구원에 필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는 것은 전적인 하느님의 선물로써 하느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뜻이다. "믿음" 역시 하느님의 선물이며, 믿음은 구원의 은혜를 받는 '통로' 역할을 할 뿐이며 그것의 '대가'로 구원을 받지는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 교리는 인간의 종교적 행위를 강조하는 업적의를 비판하는 데 목적이 있다.
- Sola Fide (오직 믿음) : 하느님이 내리시는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Soli Deo Gloria (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 : 구원은 하느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하느님이 받으신다는 내용이다.
2.종교개혁의 요인
종교개혁은 그리스도교 내부의 부정과 부패를 개혁하여 초대교회의 원형으로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의 모습을 보면 루터만이 아니라 그 이전 사람들이 있었다. 영국의 존 위클리프나 보헤미아의 얀 후스는 사상적인 개혁자들이었고 사보나롤라 같은 이는 도덕적인 개혁자였으며 버나드나 타울러나 엑카르트는 신비적인 개혁자들이었다. 이들에 의하여 준비된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에 반대하기 위하여 성서의 유일한 권위를 강조하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교리, 그리고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을 기본 원리로 하여 그리스도교의 변화를 추구하였다. 루터나 칼뱅은 이러한 운동을 보다 더 효과 있고 광범하게 전개하였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을 불러온 요인은 3가지 정도로 말할 수 있다.
도덕적 요인
교회가 신령한 축복을 돈 받고 파는 장사를 하면서도 그것을 합리화 시키려 할 때 루터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 외에도 성직매매가 성행 했다. 그리고 신부는 문란한 생활과 사회의 지탄을 받는 생활을 했다. 이러한 도덕적 타락은 일부 주교들이 교회 개혁을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정식으로 건의하기에 이르기까지 했다.
지적인 요인
르네상스는 유럽의 지적인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고대 문학에로의 복귀, 개인주의적 각성, 지리상의 발견에 따라 동서 문화의 교류, 봉건 제도의 붕괴에 뒤따른 상업인구의 격증, 스콜라 철학의 퇴조와 함께 득세한 옥감주의의 득세, 이 모든 것들이 중세의 사상적 기초를 흔들었다. 북유럽에서는 인문주의가 대학가를 휩쓸었다. 르네상스에 뒤따른 새로운 학문열은 교부신학과 성서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연구를 장려했으며 종교개혁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여 주었다. 중세의 지식사회는 성서적 인문주의의 세찬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사회적 요인
십자군 이후 봉건 사회가 점차 무너지면서 상업의 발달로 농업 경제가 상업 경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에 변화가 생겨졌다. 국가주의의 등장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 아래 들어오게 되고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로 인한 교황권의 몰락은 교회 개혁을 가속화 했다. 교황청이 부과하는 조공의 상승과 지나친 사치는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했고 루터가 개혁의 봉화를 들자 독일의 농민들은 일제히 봉기했다.
3.독일의 종교개혁
독일의 종교개혁은 먼저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각종 모습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루터의 외침이 독일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세속 제후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교황청으로부터의 경제적·정치적 자유를 얻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이전의 독일의 정치적 상황
종교개혁 이전의 독일의 상황은 다른 나라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교황청이 위치한 나라로 십자군 전쟁 이후로 도시의 발달과 봉건 제도에 도전하는 단계에 있었다. 프랑스는 십자군 파견으로 전쟁 이후의 세력권에서 크게 부상하였다. 스페인은 1492년 이래로 통일 왕국 시대를 맞이해서 해상무역권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스페인의 위성 국가였으며,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의 위성국가로서 힘은 발휘하지 못했으나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청의 힘이 가장 강력히 미칠 수 있었던 곳은 독일뿐이었다. 그리고 독일인들의 보수적인 기질마저 겹쳐져서 교황청의 시녀 노릇을 자처하였다. 각종 세금성 헌금을 바치는 등 독일은 교황청의 재정적 수입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통치 아래 대봉건 영주들의 총회의를 두고서 제국을 통치하였다. 공동의 주전법으로 화폐를 통일시키고 관세법을 통일시킴으로써 하나의 의회 아래에서 통일 국가의 형태를 가지고 운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8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던 막시밀리안이 1519년 1월에 죽고 부르군디의 필리프의 아들이며, 스페인의 왕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의 손자인 카를 5세가 1519년 6월 선제후들의 손에 의해서 새로운 황제로 선출되었다. 카를 5세는 독일계 스페인 사람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교황청의 착취
문예부흥과 더불어서 각종 예술의 부흥이 유럽 전역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교회도 예술적인 감각을 도입하였다. 역대 교황들은 취임과 더불어서 자신의 임기 동안에 거대한 성당과 궁전을 짓고 그 곳을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을 일생의 보람과 업적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큰 사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였다. 그 자금원은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세속 제후들이었다.
루터가 그의 논문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을 통하여 독일 내에서 개혁되어야 할 폐단 27종류를 열거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이러한 로마 교황청의 수탈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폐해가 컸던 첫 수입세, 팔리움, 보류권, 사라센세 등은 각종 공물 제도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밖에도 조달비, 공석금, 기부금, 십자군 자금 등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교황청은 십일조를 강요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의 눈에는 이러한 광경이 신의 이름으로 개인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흡입기를 제도화 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이때 건축되거나 제작된 작품 중 유명한 것은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그림 등과 함께 로마 교황청의 베드로 대성전이다.
마르틴 루터
95개조 명제 발표까지
종교개혁의 기폭제는 대사(大赦, 면죄부라는 말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오역된 단어임.)였다. 대사는 사도 시대 이래로 인간 구원 과정에서 보조 수단으로 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혈 공로와 성인들의 보속 공로를 갖고서 신자가 현세에서 또는 죽은 다음에 연옥에서 받아야 하는 죄의 잠벌을 없애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를 범한 신자가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의 잘못을 용서받고 영벌에서 벗어났지만 자기 죄 때문에 생긴 벌을 받아야 하는데 이러한 죄벌은 먼저 고해 신부가 부과하는 보속의 실천을 통해서 덜어질 수 있다. 아울러 보속하지 못한 잠벌은 대사를 통해서 면제받고 영혼이 정화되어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1513년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대사(大赦)를 반포하고 대사부 판매 촉진을 목적으로 대사 설교를 실시하였는데,문제가 된것은 독일의 대사 설교가 테쩰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대사발부의 지침을 어기고 자의적으로 대사를 홍보하였던 것이다.(훗날, 테쩰은 교회로부터 단죄받는다.) 이에 루터는 신자들이 대사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를 망각하고 대사를 면죄부로 착각하여 남용하고 있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이 문제에 비판적인 자신의 견해를 95개조로 낱낱이 써서 발표하였고, 로마 교황이 파견한 특사 요한 에크와 논쟁한다. 루터는 에크와의 논쟁에서 교황권과 공의회가 한점 오류도 없다는 교황무류성을 거부하였다.
라이프치히 논쟁
1519년 엑크와 루터 사이에 라이프치히 신학 논쟁이 개최되었다. 이 논쟁에서 결국 엘리트 신학 코스를 받은 엑크가 이기게 되고, 루터는 우울하게 비텐베르크로 되돌아간다.
마침내 루터는 교황과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으며 교황에게 반감을 가진 독일의 기사 및 시민들이 그를 열렬히 지지하였다. 이날 이후로 루터는 확고한 신념으로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교황은 적 그리스도의 상징이며, 가장 악마적인 존재로 묘사되었다. 당시 독일의 정세는 루터의 개혁을 단순히 영적 차원에만 국한시키지는 않았던 것이다. 상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보름스에서 소집한 제국 의회에 루터가 소환될 정도로 확대된다.
보름스회의
보름스회의로 추방령이 내려진 이후 루터는 작센의 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로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거해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에 임하며, 당시 그의 신약성서 번역은 독일 문학사와 특히 현대 독일어 발전에 주춧돌이 된다. 루터의 과격한 설교와 저서는 곧 독일 교회를 혼돈으로 빠뜨리게 된다.
농민봉기와 루터의 좌절
어떠한 일에든지 돌발적인 현상이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다가 시간이 되면 뜻밖의 현상인 것처럼 돌출하기 마련이다. 루터 개인이 보름스회의에 참석할 때까지만 해도 죽음을 각오하고 뒷일을 멜란히톤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은신해 있는 사이에 비텐베르크의 분위기는 예상 밖에도 칼슈타트가 주도하면서 시위적 양상이 곁들어 들자 지금까지의 불만 세력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4세기부터 16세기의 대변혁기에 이르기까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농민들이 자신들의 권리 회복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지배층의 착취를 언제나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신분상 농노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이러한 농민들의 불만이 루터의 힘을 얻고 1524년 터져 나왔다. 이 농민 소요는 더욱 거세게 몰아치면서 도시의 빈민층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혁 운동에 농민들이 가담함으로써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은 다름 아닌 루터였다. 지금까지 루터가 교회 개혁을 주도하는 데에는 프리드리히의 막강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 편에서 프리드리히는 착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힘없는 농민들보다는 힘 있는 선제후들을 지지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지지자들을 잃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로마 가톨릭측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아우구스부르크 협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주장이 여러 동조자들과 함께 수정되어서 제출되는 등 혼자의 힘으로 반가톨릭 운동을 이끌어 갈 수 없게 되었다.
소요한 농민들은 짧은 시일 내에 결성된 모임체였기 때문에 내부적인 결속력이 없었으며, 운동 자체나 외부의 대항 세력을 지속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었다. 농민들의 소요 사태는 독일 북부로부터 진압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526년에 거의 진압이 되었다. 진압 과정에서 소요군의 사망 수는 100,000-150,000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루터였다. 루터는 농민들이 잠잠해짐으로써 원하는 독일교회의 개혁이 달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루터는 소요 지역들을 찾아다니면서 농민 운동을 당장 그만두라고 하였다. 이것이 실패할 경우 자신의 반가톨릭 운동에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설교 여행을 떠났으며, 이 기간 동안에 그토록 자신을 지지했던 프리드리히가 사망했다.
루터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 "농민들로 이루어진 살인과 도적 떼를 반대하며"라는 소책자를 발표했다. 심지어 루터는 이 책자에서 제후들이 농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가 자신에게 힘이 되었던 제후들, 특히 선제후 프리드리히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선무 설교 여행까지 감행했던 것을 볼 때에 손을 씻은 빌라도를 연상케 된다. 아무튼 농민 소요가 루터에게 치명타를 가한 것은 사실이다.
'루터의 개혁' 평가
루터는 본래 로마 가톨릭을 개혁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교황청에 의해 등 떠밀리다시피 해서 하게 된 것이 종교개혁이다. 루터는 근본적으로 보수파였으며, 루터의 개신교는 보수적이고 소극적이었다. 어쨌든 루터의 종교 개혁은 종교를 탈피한 점에 특색이 있고, 그것으로 지도권을 행사해 온 로마 교황정청의 지적 문화에 대한 반발심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그 반발심에는 질투심이 내포되어 있었다.
덧붙여 당장 루터를 믿고 봉기에 나선 농민들에게 "인간은 신 앞에서는 평등하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는(현실에서 차별은 있다고 하는 의미) 고사에서 알 수 있듯이 루터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와 상관없이 귀족 기반의 개혁을 추진하게 된 관계로 일반 민중들에게 깊숙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4.스위스의 종교개혁
스위스는 역사적으로 유럽의 오지에 속하는 척박한 땅으로써 산업이 발달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자유를 원하는 농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자주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다 각종 박해받던 신앙인들이 몰려들게 되었고,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고 1291년 연방체계로 발전하였다.
스위스는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으며, 서쪽의 프랑스어 사용권 지역과 북쪽의 독일어 사용권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종교개혁 즈음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의 박해를 피해서 많은 개신교도들이 피난 와서 슈트라스부르크를 중심으로 이민사회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며, 제네바도 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산업의 발달이 거의 불가능한 지역이었으나, 지리적인 조건 아래에서 단련된 신체적 강인함으로 인해서 스위스인들은 오래 전부터 교황청의 용병으로 일해서 재정적 수입을 충당하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용병제도는 프랑스의 아비뇽 교황청 시절에 양쪽으로 용병이 팔려가는 바람에 민족 간에 편이 갈려 전투를 했던 고난을 겪었으며,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의 전투에 다시 한 번 용병으로 팔려가서 동족끼리 살상하는 모순을 겪었다. 그래서 스위스의 종교 개혁은 용병제도의 근절이라는 재정적 수입원의 차단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크게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츠빙글리의 개혁
츠빙글리는 독일의 개혁자 루터와는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루터는 개인의 구원의 확신을 위한 영적 투쟁으로부터 출발해서 복음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다음에 로마 가톨릭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는 순서를 밟았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처음부터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고서 이것들을 에라스무스적인 풍자와 학문적인 공격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츠빙글리는 개인의 구원과 말씀 안에서의 구원의 확신이 처음부터 약했다. 그렇지만 그는 나중에 목회자로서의 경륜이 쌓여감에 따라서 교회와 교인들의 요구 사항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으며, 본인도 점차적으로 복음의 진수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복음 이해는 인문주의적인 합리적 요소가 끝까지 있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재세례파 사람들이 취리히를 중심으로 반기를 들면서 재세례를 베푸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츠빙글리는 과격 재세례파 사람들과도 싸워야 하는 이중 고통이 있었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루터보다 훨씬 강하였다. 그는 용병으로 벌어들이는 수입보다는 한 사람의 동족의 생명을 더욱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그의 개혁은 재정적 수입원의 차단이라는 고육책으로 모범을 보이는 데서 인정을 받았다. 츠빙글리는 루터만큼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글은 개혁교회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복음 이해와 화체설에 반대하는 영성체 신학을 확립시켰다.
그러나 47세라는 인생의 황금기에 죽음으로 인해서 자신이 벌여 놓았던 많은 일과 사업의 뒷마무리를 후배인 칼뱅에게 양보하고 말았다. 이러한 면에서 같은 인문주의자로 출발해서 개혁주의로 바뀌었던 칼뱅은 가장 적절한 후계자이며, 또한 완성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제네바의 개혁이 이루어지기까지
제네바는 1387년 이래로 도시의 군주로서 주교, 도시의 소유자로서 사보이 가문의 백작, 그리고 자유 시민들로 이루어진 3원 체제에 의해서 통치되어 오다가 1444년 이후로는 사보이 가문에서 주교까지 세습적으로 계승함으로써 자연히 자유 시민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네바의 시민들은 스위스의 자치주들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프라이부르크와 제휴하였지만 베른은 이에 동의하지 않아서 적잖은 대결상태를 유지했다.
이렇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제네바 시는 소의회와 대의회 제도로 바뀌었으며, 모든 중대사는 대의회에서 결정하였다. 베른은 제네바가 개혁되기를 바라는 눈치였으나, 공개적으로 요구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그 유명한 현수막 사건이 발생 했다. 현수막에는 "누구든지 자신이 죄를 회개하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진실하게 믿으면 모든 죄에 대한 완전 면죄부를 수여 받을 수 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로 인해서 1532년 가을에 제네바에 도착해서 조용하게 가정집에서 설교하던 파렐, 사우니어, 올리베탄은 추방당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파렐은 제네바를 포기할 수가 없어서 프로망을 불어선생의 자격으로 제네바에 잠입 시켜서 불어교습과 더불어서 개혁적 복음주의를 설교케 하였다. 그러다가 점점 수적 불어난 복음주의자들과 가톨릭주의자 사이에 시민전쟁을 방불케 하는 격렬한 몸싸움도 있었다. 여기에서 윌리라는 이름의 가톨릭 사제가 희생되었다.
가톨릭 측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려고 하였으나 베른은 복음주의자 편에 서서 옹호하고 나섰다. 프로망의 활동으로 가톨릭 수도자와 공개 토론회가 실시되었으며 파렐은 공개 토론회 참가자로서 1532년 12월20일 에 다시금 제네바에 발을 딛을 수 있었다. 그래서 1533년 2월에는 최초의 복음주의식 세례를 베풀었으며, 3월1일부터는 공개적으로 복음주의식 예배를 드렸으며, 수도원의 교회를 빌려서 사오천 명씩 한꺼번에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제네바시는 기사도 정신에 뛰어난 프랑스인 파렐을 맞이해서 개혁을 이끌어 갈 준비를 마쳤다. 이제는 길이 닦인 도로 위에 복음주의 마차를 이끌어갈 마부가 필요하였다. 바로 이러한 요구 조건을 충족시켜 준 사람이 바로 칼뱅이었다.
칼뱅의 개혁
시작
1537년 1월에 칼뱅은 제네바의 대의회 앞에서 자신의 개혁안이 담긴 비망록을 전달하였다. 성만찬, 공중 예배에서의 찬양, 어린이의 종교 교육, 결혼 등 4가지였다. 성만찬은 가급적으로 자주 집행하는 것이 좋으나 현재적인 형편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행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합당한 자는 주님의 몸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출교에 관한 치리를 제정해서 참여치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회중에게는 시편찬송을 적극적으로 권장함과 동시에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순수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간략한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을 작성해서 목회자가 직접 가르치도록 했다. 결혼은 지금까지 악하고 비성경적인 교황청의 법에 의해서 이루어 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새로운 규정을 제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칼뱅의 새로운 제안은 교회의 행정에 관한 조항으로서 소의회와 대의회를 통과하였다. 성만찬은 일 년에 4차례 집행하며, 결혼광고는 예식거행에 앞서서 3주 동안 광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제네바시는 칼뱅과 그의 동료 파렐의 가르침에 따라서 종교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개혁에 찬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1538년 1월에 시의회는 원치 않는 사람에게는 성만찬을 베풀지 않는다고 결정하였으며, 2월의 시의회 선거에서는 칼뱅과 파렐을 반대하는 4사람이 특별 평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른시의 간섭과 더불어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재세례파와 손을 잡았으며, 파렐과 칼뱅은 아리우스주의자 이며, 자유방임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베른 의회는 제네바를 위시한 전지역을 그들의 손에 넣으려고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연약한 제네바 시의회는 3월에 이르러서 베른의 예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사태변화 가운데서 코로우, 파렐, 칼뱅은 제네바시를 떠날 것을 명받았다.
파렐과 칼뱅은 제네바를 떠났으며, 칼뱅은 허탈감에 빠져서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연구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그간 파렐과 더불어서 3년 동안 개혁을 시도 하였던 모든 일이 허사로 끝난데 대한 분노와 갈등을 이겨 내면서 연구와 동시에 프랑스 난민들을 돌보는 목회일에 전념하였다.
다시 돌아온 칼뱅과 그의 개혁
파렐과 칼뱅이 떠난 제네바의 상황은 예전보다 좋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악화되는 것 같았다. 새로 부임한 목회자를 특별평의원들은 자기의 종같이 부렸으며, 모든 가장들에게 교회에 참석토록 하는 의무규정을 부과 하였으며, 주의 만찬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도시의 도덕적 수준은 날로 저하되어 갔다. 이렇게 해서 평의원들은 인기가 떨어지고 다음해 선거에서 재당선하지 못했다. 이때로부터 칼뱅을 다시 초청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539년 10월 대의회에서 대표자를 보내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칼뱅은 보름스의회에 참석 중이었기 때문에 답장을 유보한 채 번민에 있었다. 이 때 파렐의 충고가 크게 작용하였다. 파렐은 제네바가 차지하는 지역적인 중요성을 들어서 제네바가 개혁되면 인근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의 복음화가 가속화 된다고 강력하게 설득하였다. 칼뱅은 3년여 동안 제네바를 떠나 있다가 1541년 9월 13일 다시금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네바 교회규범을 제정해서 의회에서 통과 시켰다. 이제는 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엄격한 훈련과 경건생활 실천을 위한 각종제도와 이단을 색출해서 처리하는 데 이르기까지 칼뱅은 정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제네바의 개혁 추진과 칼뱅의 신학
칼뱅은 제네바에서 소위 말하는 외국인이었다. 이런 그가 제네바에서 세력을 얻어 확장시키기까지의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다시 돌아온 칼뱅과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마찰이 끊임없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칼뱅의 사상을 율법적인 독선이라고 비난하였다. 마치 루터에게 농민전쟁이 예기치 않는 결과를 초래하였듯이 칼뱅도 이들을 맞이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제네바의 현지인과 자유주의자.
칼뱅의 개혁은 이단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데에서 다른 사람과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단성이 있는 것은 정죄하였으며, 자유주의자들을 맞이해서는 전통신앙과 신학을 고수함으로써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칼뱅의 신학
칼뱅 역시 기독교 본래의 모습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많은 부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미사를 폐지하였고, 교계제도를 장로제도로 바꾸었으며, 교회의 성 미술을 우상이라며 배척하고 파괴하였다. 그의 신학은 저서 《기독교강요》에 잘 나타나고 있다. 칼뱅과 그의 《기독교강요》 만큼 기독교 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예는 드물다. 종교개혁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개신교회의 신학은 점차 칼뱅 쪽으로 수렴되었고, 지금도 종교 개혁의 전통을 고수하는 신학적 유파를 가리키는 개혁주의라는 말은 ‘칼빈주의’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칼빈주의의 핵심 주장은 '칼빈주의 5대 강령'이라는 다섯 가지 요점으로 요약된다. 이것은 칼뱅이 만든 것은 아니고 훗날 개혁주의에 반대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이론에 반박하기 위해 도르트 총회에서 정해진 것이다. 하지만 칼빈주의의 사상을 잘 요약하고 있다.
- 이 부분의 본문은 칼빈주의 5대 강령입니다.
- 전적 타락 :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은 그 질(質)이 달라서 그 중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참 믿음도 있고 받을 수 없는 유(類)의 믿음도 있는데, 다른 종류의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할 수 있으되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장을 '전적 무능력'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주의할 것은 그 '무능력'이라고 함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타락하여 참된 믿음을 갖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로 보건대 하나님이 참된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못 믿는다는 것이다.
- 무조건적 선택 : 앞의 '전적 타락'설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게 되는 것인데, 누구에게 참된 믿음을 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 제한 속죄 : 앞의 '무조건적 선택'을 받은 사람이 결국 '구속에 언약' 또는 '은혜의 언약'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실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 불가항력적 은혜 :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로 보건대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아니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속의 언약'과도 연관이 있다.
- 성도의 견인 :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로 보건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구속의 언약'과 연관이 있다.
이들 주장은 개혁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개신교 종파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또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신학적 관점 차이로 처형시켰다는 오해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칼빈을 만나기 전 이미 스페인과 프랑스의 로마교회 종교재판소로부터 공석 상태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 칼뱅이 있던 제네바에서 체포되었으나 제나바 시의회의 재판을 다시 받게 된다. 프랑스인으로서 시민권이 없던 칼뱅은 종교회의(종교재판은 아님)에서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재판에 다른 영향력이 없었다. 결국 제네바 시의회는 세르베투스를 이단자라는 명목으로 화형에 처했고, 이리하여 세르베투스는 칼뱅 생전에 제네바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 당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칼뱅과 신정정치
제네바는 본래적으로 자유스러운 분위기였고 자유가 강조되는 도시였다. 그러나 칼뱅은 타락한 사람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생활규범과 훈련이 필요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부임하자마자 4가지 개혁안을 부르짖었으며, 그는 신학이 사회권력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상은 제네바 행정 사법에 영향을 주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춤, 도박, 주정, 술집 출입의 횟수, 방종, 사치, 접대 행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분수에 넘치는 의복 착용, 음란하거나 비신앙적인 노래 등에 금지, 혹은 비난, 구금형을 가하였다. 심지어는 잔치집의 접시까지 세며 규제했다. 주민들의 교회 참석 여부를 감독하는 사람이 파견되었으며, 교회법원의 사람들이 가정을 1년에 한 차례씩 찾아가서 신앙상태를 점검 하였으며, 심지어는 길거리에서 무심코 뱉은 말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이상과 같은 엄격한 규율은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영국의 청교도에 이르기까지 개혁교회의 주된 윤리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칼뱅의 개혁' 평가
칼뱅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 되는 것은 종교 개혁 운동의 신학이 사상적 체계를 잡는 데 그가 미친 영향이다. 이것은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가 갖는 의미라 해도 무방하다. 종교 개혁을 이끈 많은 인물들이 있었지만 결국 개혁교회의 신학은 점차 칼빈 쪽으로 수렴되었고, 지금도 종교 개혁의 전통을 고수하는 개혁주의 신학은 칼뱅주의라는 별명으로도 불리고 있다.
칼뱅에 대한 비난 중엔 그가 자신과 이념을 달리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종교적인 비관용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루터와 칼뱅이 신학적으로 차이가 있었음에도 서로 비난하지 않았다는 점을 내세운다.
5.영국의 종교개혁
독일 루터교회의 예전학자 빌리암 나아겔(Wiliam Nagel)은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마르틴 루터등의 종교개혁자들의 영향으로 진행된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 근거로 빌리암 나아겔은 영국 그리스도인들은 1521년에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받아들였는데,그들중에는 영국교회의 예전을 개혁한 종교개혁자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가 있었다고 말한다. 즉, 성공회는 혼인무효라는 헨리 8세의 개인적 문제가 아닌,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인 영향으로 등장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헨리 8세
리치몬드의 공작이었던 헨리 7세는 영국 내부의 결속을 어느 정도 다진 다음에 종주국이었던 에스파냐와의 우호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에스파냐 왕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 사이의 셋째 딸인 캐서린을 맞이해서 큰아들 아더와 결혼시켰다. 1501년 11월 14일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으나 1502년 4월에 신랑이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사벨라는 강력한 압력을 가해서 아더의 동생 헨리 8세와 재혼시킬 것을 요구했다. 만일 듣지 않으면 결혼 지참금을 회수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캐서린은 1509년 시동생인 헨리 8세와 결혼하였다. 철이 들면서 헨리 8세는 어쩔 수 없는 결혼이었지만 아들을 낳아서 왕위를 계승하려고 했으나 캐서린과의 사이에는 딸만 낳았고 그것도 다 죽고 오직 메리 튜더만 살아남았다. 왕자가 없이 딸만 있다는 것은 자칫 영국이 후계자 문제로 외세의 간섭을 받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과정에서 헨리 8세는 궁녀 앤 볼린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아이를 갖고 만다. 그래서 자신과 캐서린의 결혼은 불법이므로 혼인을 무효화하고 앤과 결혼하기를 원했다. 월시 추기경은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영국을 떠난다. 그러나 헨리 8세의 혼인무효 요청은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불허로 거부되었다. 이에 월시는 그 책임을 물어 실각되고 그의 뒤를 이어 토마스 크랜머대주교가 영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토마스 크랜머는 헨리 8세의 요구에 따라 교황권 제한령과 사전 보호법을 발동시킨다. 이 두 가지 법으로 로마교회 지도자 교황의 권한이 영국 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국왕의 허가 없이 교황에게 항소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헨리8 세와 앤과의 결혼이 적법하다고 공포되고 앤은 왕비가 되었다.
1533년 9월 앤이 공주 엘리자베스를 낳았으며, 1534년에는 수장령(Royal Supremacy, 왕위지상권)이 영국의회에서 통과되었다. 국가권력을 신성한 것으로 이해한 루터의 영향으로 등장한 수장령은 "신앙상의 권위 또는 영국 성공회 교구가 개혁 또는 수정을 시도할 경우, 그 과오, 이단. 죄악을 검열하고 개혁과 수정을 가하여 근절한다"는 권리가 왕권에 있다는 선언이며, 민주주의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교회가 세속 정치권력을 갖고 있거나 정치인들과 곁탁한 당시 유럽교회에서 수장령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으므로, 민주주의에 익숙한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를 비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1536년에는 부패의 온상이던 수도원을 해산시키는 수도원 해산법을 통과시킴으로써 6세기이후 로마교회의 지배를 받던 영국 성공회는 로마교회에서 독립하였다.이에 교황청은 격노하여 헨리 8세를 비롯해 앤 볼렌, 크랜머 등을 파문하였다. 앤의 두 번째 임신과 더불어서 왕위 계승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누구든지 왕자를 낳으면 계승권을 가지고 그 다음으로는 메리,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엘리자베스라고 명기하였다.
1536년 앤이 두 번째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헨리 8세는 간통죄를 적용해서 처형시키고 그의 눈길은 세 번째 여인인 제인 시무어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낳고서 죽고 만다. 그 후 헨리 8세는 클리브즈의 앤과 결혼하였으나 이혼한다. 그러자 보수파에서 캐서린 하워즈를 왕비로 내세우면서 로마 가톨릭 6개 조항을 발표시켰다. 그러나 보수파도 얼마가지 못하여 헨리 8세는 캐서린 하워즈를 간통 혐의로 처형하고서 마지막이자 여섯 번째 부인인 캐서린 파아와 결혼하였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음으로써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오른다.
헨리 8세는 6번을 결혼하면서 각 권력의 암투에 휘말리면서 개혁보다는 권력 유지에 부심했다. 즉 개혁을 향한 의지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해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래서 영국 성공회는 종교적 극단을 피하는 중용(Via Media)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지금도 성공회는 종교적 극단을 피하는 중용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에드워드 6세
에드워드 6세는 너무도 어린 나이인 10세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히 외척이 힘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삼촌이었던 헤르포드의 백작은 섭정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서머셋 공작으로 승진 하여서 국가의 총사령관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서머셋은 개신교 추종자였다. 따라서 영국성공회는 개신교 사상에 따라 영국 종교개혁을 진행하였는데, 당시 개혁방향은 다음과 같다.
- 로마 가톨릭 6개 조항을 파기시킴과 더불어서 로마 가톨릭과 관련된 모든 법을 파기시켰다.
- 국회는 성만찬 집전시 보혈과 성체(聖體)의 분배를 허용하였으며, 성직자의 결혼을 금하는 법령을 무효화 시켰다.
- 에드워드 제1기도서가 작성되었다.
- 영문성서의 출판과 판매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 에드워드 제2기 도서가 마련되었다.
- 영국 성공회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42개 조항이 발표되었다. 이 헌장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절에 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조로 대체되기는 하였으나, 영국 성공회의 근본적인 신앙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 새로운 헌금법을 발동하여서 모든 헌금을 국왕의 수입으로 하여 교황청의 재정을 압박하였다.
이상과 같은 변화가 영국에서 일어나자 유럽으로 피난 갔던 개혁추진파들이 급거 귀국하였으며 동시에 유럽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영국으로 망명 오는 사람들로 있었다. 이렇게 해서 대륙으로 피난하였던 사람들이 새로운 학문과 개혁적 전통을 영국 교회에 소개하기 시작함으로써 영국의 대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메리 1세의 반동
에드워드 6세의 사망은 영국의 왕위 계승 문제를 야기시켰다. 영국인들은 메리에게 눈길을 돌렸으며 왕위에 오른 메리는 자연스럽게 영국의 로마 가톨릭화를 추진하였다. 메리 1세는 한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 그래서 그녀는 헨리 8세의 시절과 에드워드 6세의 시절 법령을 상당 수 번복하였다.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은 적법한 것이었으며, 메리 자신은 적법한 왕위 계승자라고 선포하였다. 에드워드의 6세의 모든 종교적인 법안을 폐기시켰으며, 헨리 8세 시절의 반-교황적인 법을 무효화 시켰다.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서 메리 1세는 중세적인 예전을 그대로 복구하였으며, 성공회의 감사성찬례가 아닌 로마 가톨릭 미사를 다시금 실시하였다.
메리 1세는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와 결혼하였다. 그와 동시에 로마교회 성직자들이 속속 복귀하였으며, 교황청 사절이 공식적으로 다시 파견되었다. 교황청 사절은 순종법을 발동시킴과 동시에 이단 규제법도 발동시켰다. 이때부터 개신교신자와 성공회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메리 1세는 피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과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휴 래티머 주교 등의 성공회 성직자들을 처형하였다.역사학자 앙드레 모로아의 《영국사》에 따르면, 휴 래티머 주교는 순교를 앞두고 "오늘 영국은 하느님의 빛, 영원히 꺼지지 않을 영원한 빛으로 밝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의 수습
엘리자베스 1세(1559년- 1603년)의 즉위 이전부터 영국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개신교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1559년 1월 15일 대관식을 거행하고서 왕위에 올랐으며, 1603년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영국 성공회를 개신교 쪽으로 이끌어 갔으나 어느 한 쪽으로도 과도하게 흐르지 않았다. 종교 개혁 이후의 종교대립을 막기 위해 엘리자베스 1세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극단을 피하는 중용노선(Via Media)을 걷기 시작했으며, 이에 반발한 청교도들이 발생했다. 여기서 청교도들은 장 깔뱅의 종교개혁 사상을 따르는 개신교 신자들을 말한다.
엘리자베스 1세는 여러 번의 반대를 물리치고서 4월 29일 여왕의 영국 교회 지존법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해서 모든 성직은 여왕에 종속되었다. 이 권한을 바탕으로 영국 교회 통일법을 통과시켜, 사제나 주교등의 영국 성공회 성직자들의 예복과 교회의 장식을 비롯한 모든 것을 통일시켰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63년 두 번째 의회 소집으로써 제2차 통일령을 통과시켰는데 이번에는 훨씬 더 종교 개혁을 강하게 추진하였으며, 많은 점에서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는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1556년 매슈 파커캔터베리 대주교에 의해, 에드워드 6세의 42개 조항을 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조로 개정하였는데, 개신교의 영향을 받아서 로마 가톨릭의 교리에 대해서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조를 보면, 연옥, 면죄부, 성상 및 유물에 대한 예배와 숭배, 그리고 성인을 통한 기도에 관한 로마 교회의 교리는 어리석은 것이며 헛되게 발명된 것이고 성서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적대하는 것이라며 로마 교회의 교리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1563년 두 번째 의회는 영국 성공회의 통일법을 놓고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청교도 측의 패배로 끝났다. 교황청은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시켰으며 여기에 맞선 엘리자베스 1세는 반 교황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585년 예수회 사람들을 영국에서 강제로 추방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무찌름으로써 교황권과 로마주의로부터 영국을 보호하였으며, 동시에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화려한 대영제국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 종교 개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실천이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국 성공회는 신학적으로는 개신교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전과 신앙은 초대교회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
6.과격파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루터교, 장로교, 그리고 성공회로 대별되는 3대 보수적 종교개혁과 재세례파, 성령주의파, 그리고 반 삼위일체파로 이어지는 3대 급진적 종교개혁이 있다. 후자에 속하는 종교개혁을 흔히 과격파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전자가 이룬 종교개혁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지며, 성서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개신교 보수파들에게도 배척을 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한시적인 운동에 불과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온건한 보수파들에게서 볼 수 없는 신선함이 있었고, 이들은 집단적인 공동체를 거점으로 해서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운동이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7.로마 가톨릭교회의 대응
종교개혁은 단순하게 신앙적인 개혁에 그치지 않았다. 유럽의 문화와 문명을 온통 뒤바꿔 버린 분기점이었다. 유럽의 각 나라들이 로마 교황청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었으며, 예술에서도 인문주의와 더불어서 신앙적인 주제를 떠나서 인간을 중심으로 삼았으며, 과학에서도 신앙적인 면에서 벗어나서 합리적인 요구를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종교 개혁은 각 나라의 경제적 자립을 확보해 줌으로서 교황청의 재정적 압박과 더불어서 권위를 상실케 하였다.
교황청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잃어버린 권위를 회복해야만 했다. 이러한 절대적인 필요성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하였으며, 새롭게 조직된 예수회라는 종단의 창설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쇄신 운동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시도에 그쳤다. 그것은 개혁을 주도해야 할 교황이 교회 문제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세속 문제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오스만 제국 등 이슬람 세력의 유럽 침공에 반격하기 위해 십자군을 조직해야 했고 유럽 각 나라들의 정치적 분쟁에 일일이 개입하여 중재해야만 했다.
게다가 1572년에 신성로마제국의 개신교를 신봉하는 용병들이 교황령에 쳐들어 와 로마를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의 일로 가톨릭교회도 그에 따라 종교개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오히려 태도가 강경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가톨릭교회는 자유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던 1869년-1870년의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더욱 더 보호망을 강하게 하였다가 1962년-1965년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보호막을 벗어 버리고 개방을 허락함으로써 비로소 종교 개혁에 도전장을 던졌다고 말할 수 있다.
로마 가톨릭의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막식에서 옵서버로 참석한 비가톨릭 종교자들에게 가톨릭이 그리스도교의 분열의 책임을 나누어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
1545년 12월 13일에 교회 개혁을 수행하려는 강한 의지를 지닌 교황 바오로 3세의 주최 아래 트리엔트에서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18년 동안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는 세 시기 즉, 교황 바오로 3세 치세에 속하는 제1기(1545년-1547년), 교황 율리오 3세가 속개한 제2기(1551년-1552년), 교황 비오 4세 치세 때 열린 제3기(1562년-1563년)로 구분된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목적은 개신교가 점차적으로 강성해 가는 것과 교회 내부의 부패상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주교들의 태만으로부터 야기되었다고 밝히며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교회의 증가하는 부패는 영적 이상의 상실, 교리 문제에 관한 신학적인 불명확성, 그리고 교황청의 타락에 그 원인이 있었다. 따라서 회의에서 교회 개혁에 관한 중요 안건으로는 교회의 무능, 성직자 중임제, 그리고 감독 소홀 등이었다. 교리 문제에서는 불가타판 성경을 정경으로 재확인하였다.
그런데 1552년 1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주선으로 회의장에 도착한 개신교측 사절들은 새로운 공의회 소집, 이미 결의된 신앙 교리의 취소, 교황 수위권 거부, 공의회 우위사상의 인정과 같은 무리한 요구사항을 내놓았다. 게다가 루터교회를 신봉하는 독일인 기사들이 갑자기 회의장 안으로 난입해 난동을 일으키자 교황은 공의회를 서둘러 중단하였고 더 이상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의 대화는 있을 수 없게 되었으며 기독교 세계의 분열만 두드러졌다.
예수회의 창설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피레네 산맥에 접한 로욜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문의 출세와 명예를 위하여 일찍부터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하고나서 그는 성경과 여러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영적 지도자로서의 꿈을 끼웠다. 그리고 영성 훈련과 은둔 생활, 고행, 대학에서의 공부, 신학 공부를 하였다.
1541년 4월 14일 예수회는 이냐시오를 공식적인 대표자로 선출하고 4월 22일 새로운 수도회로 출발하였다. 예수회의 창설 목적은 분명했다. 헌장에서 밝히는 대로 종교 개혁으로 인해서 실추된 교황의 절대권 회복을 위해서 싸우는 군대 교단이 될 것과 해양 개척으로 인해서 발견된 신대륙에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을 전하는 선교 집단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붙인다면 학문을 발달시킴으로서 선교의 사명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군대적인 절대 복종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예수회는 그 설립 목적과 부합되게 전세계에 선교 활동을 펴나갔다. 이제 로마 가톨릭교회는 유럽에서 개신교와 성공회에게 빼앗긴 교회 영역을 유럽 밖의 선교에서 보충하였다. 특히 예수회는 신앙의 토착화라는 새로운 선교 방법을 개발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 지방의 관습과 생활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고 원주민들과 의식주를 함께하면서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올바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언어로 교리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하였다.
종교재판
한때 중세 유럽에 유행했었던 종교재판을 16세기에 자신들의 전제적 통치에 일대 위협을 느낀 교황청이 강경일로로 돌아서서 개신교 박멸의 수단으로 부활시켰다. 용의자로 지목되기만 하면 교황청에서 파견된 심문관의 철저한 고문으로 강요한 고백이 강요된 후 정죄되면 세속 정권에 의하여 형이 집행되었다. 재산 몰수, 투옥, 유배 및 사형 등의 형이 내려졌다. 교황 바오로 4세의 영도 아래 소위 '거룩한 이단심문소(Sanctum Officium Sanctissimae)'라 불리는 악명 높은 신앙교리성성이 모든 나라들의 종교재판 중심기관으로 설립되어 수많은 이단심문관들을 양성하여 전 유럽의 개신교 탄압의 기수로 삼았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처럼 이단으로 지목되고 박멸의 대상으로 곤욕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에서도 똑같이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들과 자체 내부를 향해 종교재판을 자행하였다. 개신교에서 자행한 종교재판에서 비롯된 각종 고문형과 마녀 사냥은 로마 가톨릭교회 이상으로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7]
9.끝내면서
1517년 10월 31일을 계기로 일어난 유럽의 이른바 종교개혁 운동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일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은 긍정적 시각에서 보는 이들도 있는 반면, 부정적 시각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이들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위클리프, 후스를 위시한 신학적 도전은 중세 기독교의 기초에 균열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신비주의 개혁자들의 집단적 운동은 점차 하나의 범시민 운동으로 번져서 교황청의 단일 체제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다. 거기에다 교회의 위신은 교황청의 분열로 이어져 땅에 떨어졌으며, 교황청의 지나친 과세는 일반 시민들의 원망을 자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부조리는 16세기 유럽 대륙 중에서 독일의 경우가 제일 심했다. 또한 독일은 연방제이므로 교황의 세력이 왕권을 통하여 직접 미치기가 힘들었으며, 르네상스를 통한 인문주의의 영향이 지성인들 사이에 컸기 때문에 어느 곳보다도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늘날 루터의 개혁운동을 보다 폭넓은 동기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루터 개인의 입장에서는 종교적 관심에서 출발했던 교회 개혁 운동으로만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루터 자신은 어떻든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동기는 결코 종교적 신념과는 큰 관계가 없고 정치적 동기가 더욱 강하게 작용했으며, 칼뱅의 개혁은 경제적 동기가 주요한 동기가 되어 그의 개혁에 참여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서초동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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