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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핵 유태인, 그들은 누구인가? -둘- 본문
갈등의 핵 유태인, 그들은 누구인가? -둘-
유태인 무덤
* 유태인은 어떻게 살아왔는가?
1. 디아스포라 시대의 개막
'시냐고그'와 '랍비'의 등장
나라가 망한 후 유태인들은 세가지의 시련을 맞게 되었다.
첯째는 망국의 아픔이요
둘째는 신앙의 구심점인 성전 등이 상실된 것이요
셋째는 유태교 내에서 기독교의 등장으로 인한 분열이다.
같은 창조주 하느님을 두고 예수가 등장하여 새로운 이단 종교가 나타난 것이다.
이 세가지 가운데 어느것 하나 유태인에게는 치명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모두가 유태민족의 운명과 직결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미 앞선 시기에 출현하기 시작한 랍비의 등장으로 이 세 가지 충격에서 벗어나게 되는 길을 만든다. 랍비의 출현으로 성전이 없어도 훌륭히 유태교 신앙이 유지되었고, 살아가야 할 땅이 없이도 유태인의 문화와 전통을 무난히 지켜 나갈 수가 있었으며, 기독교의 압박 속에서도 유태교를 지킬 수가 있었다.
랍비라는 인물은 이미 기원전 6백 년경 유태인들의 '바빌론 유폐'를 통해서 유태인 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때 유태인들은 망국과 더불어 신앙의 구심점 상실에 충격을 받고 그들의 종교와 민족 문화와 전통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자체적으로 종교 지도자를 양성하고 집회소를 만들어 가면서 성전 없이도 가능한 유태교 신앙 방법을 개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랍비의 지도 아래 '토라'를 연구하고 해석하면서 상황에 따라 적응하는 새로운 신학 체계가 자리잡게 되었다. 이들의 집회소가 회당으로 알려졌고 뒷날 '시나고그'로 발전한다. 토라의 신학적 해석을 '미쉬나'라고 하며 토라 자체는 절대적인 하느님 가르침이라고 믿는다. 토라는 '씌어진 율법'이라 부르는 반면에 그 연구에서 비롯된 해석인 '미쉬나'는 '구술된 율법'이라고 부르면서 구분한다. 토라는 이미 기록되어 있어 변경이 불가능한 반면, 그 해석인 '미쉬나'는 변천하는 시대 상황과 연구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방랑하는 종족, 공부하는 종족
'디아스포라(Diaspora)'란 말은 희랍어에서 유래된 말로 '흩어진다', '산재한다'라는 뜻의 이 단어는 원래 보통명사지만 나라를 잃어버린 유태민족의 이산과 방랑을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되어버렸다. '디아스포라' 시대 이후 유태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는 단어로 '포그럼(Porgom)', '게토','홀로코스트' 겉은 것들을 들 수 있다.
'포그럼'은 러시아 및 동구권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에 대한 탄압.추방을 의미하는 말로, 1881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러시아는 자국 내 유태인들에게 정부단위의 조직적이며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다.
'게토'는 13세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처음 생긴 이래 유럽 전 지역에 생긴 것으로 유태인 집단 거주 지역을 뜻한다. '홀로코스트'는 1941년부터 자행된 히틀러의 '유태인 집단 학살'이다.
기원 직후 '디아스포라'의 주요 지역은 로마 제국의 세력이 미치는 전역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서도 이탈리아 북부와 오늘날의 남부 독일 등지에 유태인들이 많이 정착했다. 그러다가 로마 제국이 동.서로 나뉘면서 그 일부가 비잔틴 제국 쪽으로 뻗어갔고 그 발길이 동구와 러시아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중세 시대부터는 전유럽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뒷날 이 유태인들이 러시아와 유럽 지역의 박해를 피해 신생국 아메리카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이러한 디아스포라의 기나긴 여정은 오늘날 유태인들을 여러 모로 보아 아주 단련된 민족으로 만들어졌다. 비록 수적으로는 적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일당백의 정예분자가 된 것이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피가 오늘날 유태인들의 혈맥속에 살아 있다고 할 것이다.
종족 생존을 위한 전략
유태인들의 결속을 위해 유태인 지도자들이 생활 수칙으로 만든 몇 가지 중요한 규정들이 있다.
첯째, 모든 유태인들은 피를 나눈 형제들이므로 누구든 유태인이 노예로 끌려가면 반드시 인근 유태인 사회에서 7년 안에 몸값을 지불하고 찿아와야 한다.
둘째, 유태교 분파를 방지하기 위하여 기도문과 토라 독해를 일률화한다.
셋째, 13세를 넘어선 남자 유태인 10명 이상이 있는 유태인 거주지에는 반드시 최소 단위의 종교적인 집회를 갖도록 한다.
넷째, 13세 이상의 남자가 120명이 있는 유태인 거주지에는 독자적인 유태인 사회 센타를 만들고 유태인 생활을 관할하는 유태법(토라에 따른 해석)에 의한 규법을 유태인 거주민 전체가 준수하게 한다.
다섯째, 유태인 사회는 독자적인 세금 제도를 만들어 거주 국가로부터 재정적인 부담을 받지 않토록 한다. 그리고 비상시에 사용할 수 있는 예금을 비축해 둔다.
여섯째, 자녀 교육을 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유태인을 방치하지 않으며 유태인이면 누구나 유태인 사회에 도움을 청하고 받을 권리가 있다.
일곱째, 유태인 사회는 독자적인 유태인 자녀들의 교육기관을 만들어 유지하고 경영할 의무가 있으며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은 무료로 교육시키고 인재 양성을 위한 장학 제도를 만든다.
이러한 7가지 사회 준수 규약은 5세기 전후에는 모든 유태인 사회의 자활 규범으로 확고한 뿌리를 내렸다. 디아스포라 시대를 사는 유태인에게 유태인들의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생존 전략이며 이러한 대원칙은 시대에 따른 개혁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일곱가지 원칙은 그들이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으며 그들의 정체성을 고수하며 그들 민족이 서로 도우며 같이 더불어 잘 살아가도록 만든 규범이 되었다. 동족을 구하고,그들 민족역사와 사상,사회규범을 일률화하는 규범을 만들고, 최소단위의 종교집회와 유태법으로 규범을 만들고,그들나름대로 비사시 사용할 자금을 비축하며,가난한 동족을 방치하지 않으며 유태인 사회에 도움을 요청할 권리가 잇으며, 가난하여 자녀교육을 받지 못하는 동족을 무료로 그들 사회에서 반드시 교육시킨다는 제도이다.이 제도는 유태인들이 어느 국가에 소속되어 살아가더라도 그들 동족은 반드시 같이 도우며 더불어 살아가고 고유의 전통을 고수하고 자라나는 자녀들을 자체적으로 별도 교육을 시켜 그들 역사와 전통,사회규범에 따라 같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것으로 그들이 오늘날까지 전세계 각지에서 조국 이스라엘의 독립과 아랍권과의 고토회복전쟁에 발벗고 달려갈 수 있는 민족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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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유태역사미술관 입구에 서 있는 드레퓌스 동상 앞에서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다. 동상 밑에는 "너희들이 내가 살기를 원한다면 나의 명예를 회복시켜달라"는 드레퓌스의 말이 새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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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태인은 어떻게 살아왔는가?
2. 봉건주의 시대의 유태인들
장사꾼이 된 '아웃사이드'
유태인 사회가 중동과 이탈리아, 유럽 여러나라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4세기경부터 로마 제국은 점차 활력을 잃어갔다. 그즈음 아시아 유목민 '흉노족'이 중앙아시아를 휩쓸고 유럽으로 밀려들자 그 여파로 '동코트족'과 '서코트족'이 점차 서진을 하면서 로마 쇠퇴의 계기가 되었다. 5세기에 이르러 로마가 동.서로 분리되고 서로마가 코트족에 시달리다가 멸망하자 유럽은 다양한 지역의 봉건주의 국가로 분열되었다.
이런 가운데 유태인들의 거주 지역은 전유럽으로 확산되었으며 당시 국경이 없는 국가 사이를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곳에 정착해 살았다. 이미 나라가 없어진지 몇 백 년이 흘러 완전한 세계인이 되어 있었다.
유럽의 봉건사회는 기독교가 지배하는 세계로 왕/영주.귀족/기사/사제.농노로 계층이 형성되면서 전유럽 지역에 확산되어 갔다. 이런 사회 체제 속에 기독교도가 아닌 유태인들은 끼어들지도 못하고 변두리 지역에서 붙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아웃사이드' 였던 것이다. 당시 교황을 중심으로 기독교 주교들이 유일한 신앙 체계로 정치권을 장악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는 유태인들은 개종 압력을 받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도시 변두리 지역 유태인 집단촌인 '게토' 속에 갇혀서 철저하게 소외되었으며 정치.사회적으로 많은 탄압을 받았다.
그러한 여건속에서 장인과 상인을 천시하던 당시의 사회에서 유태인들은 생계를 위해서 물건을 만드는 공인이나 장사에 전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런 직종은 돈을 만지는 직업이어서 거꾸로 유태인들은 부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왕이나 귀족들은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도 유태인을 적극 이용했다.물산 장려는 물론 필요한 통행도 세금만 내면 자유로웠다. 한번 이런 직종에 종사하기 시작하자 유탸인들은 전유럽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동족들과 횡적으로 서로 연결되면서 국경을 넘어 무역업을 활성화해나갔다. 농토를 갖도록 인정되지 못했던 유태인은 무역업.금융업.제조업자로 성장하게 했고 돈 많은 민족으로 발판을 굳히게 만들었다.
기독교가 전횡하던 중세는 교황청을 중심으로 모든 정신 세계가 기독교 일변도 였다. 모든 정치.사회적인 판단의 근거는 교황.주교.사제들에 의해서 농단되고 있었으며 이성을 토대로한 지식 산업의 성장은 불가하였기에 중세를 암흑시대라 부른다. 종교가 인간생활을 너무 관여하게되면 모든 법적인 절차와 판단은 기독교적인 정신에 입각하여 판단되어야 하고 다른 어떠한 이성적인 판단도 허용되지 못했던 시대이다. 이것이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면 발생되는 가장 큰 문제점이다.
7세기를 넘어서면서 이슬람 국가들이 생겨났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이슬람 국가와 기독교 국가간을 오가며 장사와 무역을 자유로이 할 수 있었다. 물론 양측에서 의심스런 눈초리로 보았고 스파이로 지목되어 고난을 겪기도 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거간꾼으로서의 유태인이 필요했고 그들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기독교권보다 이슬람권이 그래도 유태인들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서너 세기가 진행되면서 유태인들은 점점 엄청난 부를 거머쥐게 되었다. 그러자 경제적으로 궁핍한 왕이나 귀족들이 돈이 궁하면 으레 유태인들에게 손을 내밀 정도였으며 유태인들은 돈을 꾸어주면 반드시 이자를 받았다. 돈을 빌려간 권력자들이 돈을 갚지 않으려고 갖가지 핑계를 대어 유태인을 쫒아내거나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유태인은 모든 박해와 질시를 받으면서도 동족간에도 이자를 받는 철저하게 계산적이며 장사 원리를 지켰다. 누구던지 돈을 꾼 후에 원금과 이자를 제대로 갚지 않은 사람은 이후 절대로 상대하지를 않았으며 다른 사람에게로 거래선을 바꾸었다.
이 시기에 유태인들이 모두가 장사꾼이나 제조업자로 변신한 것은 아니다. 체제밖에서 살았던 유태인은 체제와는 관계없이 학문에 전념할 수가 있었는데 천성적으로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유태인들에게는 정말 호기였다. 유태인 사회가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나 자리잡은 '시나고그'의 '랍비'를 중심으로 한 '토라' 연구 및 '하나쉬' 연구 그리고 이 연구에서 비롯한 '탈무드' 공부가 전성기를 맞았고, 거주 국가의 고전 연구도 활발해 유태인들의 지적인 전통을 이어갔다. 체제밖에서 유태인들은 각 지역을 오가며 새 문물과 지식을 넓혀갈 수 있었으며 이성을 바탕으로 한 학문 영역과 서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지적인 욕구를 자유로이 채워갈 수 있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외국어와 외국 문물에 관한 폭넓은 지식을 갖춘 종족으로 유대민족이 단연 으뜸이었다.
황금기 누린 이슬람권 유태인들
같은 아브라함 후손이며 모세와 예수까지 선지자라고 모시는 이슬람교는 8세기 후반 '마호메트'에 의해 비롯된다. 이슬람교가 탄생했을 시절 유태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쫒겨나 디아스포라 생활을 시작한 지도 여러 세기가 흘렀고 유럽 세계는 초기의 온갖 탄압을 승리로 장식한 기독교의 독무대가 되어 있었다.
한번 세상에 나오자 이슬람교는 '한 손에 코란을 또 한손에 칼을' 이라는 구호처럼 기독교의 전도와는 차원이 다른 방법으로 잠깐 사이에 중동,아라비아 반도, 북아프리카 지역은 물론 지중해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광대한 땅을 휩쓸었고 유럽까지 손을 뻗는다. 우선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해 스페인을 손에 넣은 다음 피레네 산맥을 넘어 한때 프랑스까지 넘보다가 기독교권과 '뚜르 전투(732)'에서 패해 유럽 진출이 좌절되었다.
스페인에 진출한 이슬람 세력이 세운 나라가 '무어 제국'이다. 711년에 탄생한 무어 제국은 그 자리에서 5백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슬람 지배를 유지했다. 정복자 이슬람인들은 정복지내의 기독교도와 유태인들을 똑 같이 대우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타민족, 타종교의 지배 아래서 생활한 습성이 몸에 밴 유태인들이 비위에 덜 거슬렸을 것이며 경제적인 관리 능력을 높게 평가하였기 때문에 유태인들을 더 선호하게 된다.
정복지의 이슬람은 유태인들의 외국어 구사 능력이나 외국 문물 이해 능력이나 항상 책 일기를 습관처럼 하고 있는 유태인들을 무언가 우수한 민족으로 보았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무어인들 지배 아래 높은 지식인으로 대접을 받았으며 폭넓은 자유가 허용되었다. 여러 지역에 유태인 종교 및 민족 학교격인 '에시바'가 설립되었고 우수한 랍비도 쏟아져 나왔다. 중세의 기독교권의 종교적 구속에 이성은 사라지고 깊은 잠에 빠져 이지의 발전이 정체되어 있던 여타 기독교권의 여러 유럽 지역과는 달리 이베리아 반도의 무어 제국은 이슬람 문화의 꽃을 피움과 동시에 유태인들이 가장 자유롭게 자신들 문화의 꽃도 피울 수 있었던 시대였다.
모든 분야에서 이슬람 문화의 꽃이 활짝 핀 이 시절, 이 지역에서 유능한 유태인들은 이슬람 상류 사회에 속해 눈부신 활약을 하게 된다. 수도원이나 서류 창고 속에 잠자고 있던 고대 희랍과 로마의 서적이 아랍어, 라틴어로 번역되었으며 거의 대부분이 유태인 학자들에 의해서 번역되었다. 히브리 문학과 고대 희랍 문학도 모두 이들의 손에 의해 번역되었으며 토라의 아랍어 번역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유태인들은 디아스포라 시기 동안 이 스페인의 이슬람 제국에서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종교적으로 탄압이 없고 사회적으로 대접 받으며 학문적으로 비약할 수 있는 모처럼 안정된 생활을 누린 황금기로 꼽는다. 그러나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태인들은 유태인 집단 촌락인 '게토' 에 갇혀 살면서 모든 자유와 사회 참여가 제한을 받는 등 기독교권으로 부터 많은 학대를 받으며 차별대우를 받았다. 그 한 고비가 성지 회복에 나선 십자군 원정 시절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십자군 시대의 유태인
고래 싸움에 등터진 유태인
2000년의 부활절을 앞두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 2천 년 역사에서 일어난 지난날 기독교의 과오를 지적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대소 6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 도중 자행된 유태인 살해다. 십자군의 목적이 이슬람교도의 손 안에 잇던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1차 십자군 원정에서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은 무려 4만여 명에 달하는 유태인 및 이슬람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였다고 한다. 애꿋은 유태인들이 고래 싸움에 등 터진 겪이었다.
예루살렘은 638년 이래 아랍 사람들의 점령하에 있었다. 11세기 후반 1092년 교황 우르반 2세의 주장에 따라 성지 회복의 기치를 내걸고 전유럽이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각국의 왕과 제후들이 기독교 성지 회복 전쟁에 나섰다.
이렇게 하여 십자군 원정이 1096년에 시작, 약 3백 년에 이르는 기간에 걸쳐 간헐적으로 지속된다. 첯 십자군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여 각 지역의 대영주들이 주도했으며 60만 대군이었다. 이른바 평민십자군인 농민들로 구성된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각 지역에서 모집된 농노들로 구성된 십자군은 지휘체계나 훈련 정도가 안된 오합지졸이었다. 일단 용감하게 라인강을 건너 진군했으나 병참부대가 뒤따르는 것도 아니어서 금방 식량이 바닥났다. 처음에는 이동로 주변의 영주들이 식량을 조달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식량은 턱없이 부족하였으며 근본적인 문제는 현지조달 방법이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고 군대가 보급 물자를 현지 조달하게되면 약탈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우선 유태인 거주지역이 약탈의 첯 대상지역이었으며 병사들에게는 유태인 부락 약탈은 장려 사항이었다. 복종하지 않으면 죽이고 집은 불태웠다. 약탈의 참상이 너무 심하여 지역의 영주들이 교황에게 그 실상을 알렸고 교황은 원정군에 경고까지 했다. 엉터리 평민십자군 부대는 발칸 반도 초입에 들어서기도 전에 흩어져 버렸고, 그 뒤를 이은 각 지역의 영주들이 중심이 된 십자군은 그런대로 질서가 잡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지를 회복했다. 예루살렘에서 저지른 만행으로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성전과 함께 한 약탈전쟁
제2차 십자군 원정은 주로 높은 신분의 기사들이 중심이 되어 동원되었으나 막대한 희생만 치르면서 별 성과를 얻지 못했고, 그후 계속된 십자군 원정도 마찬가지로 유명무실해졌다. 1차 십자군 원정만 성공하였으나 그 자치령도 오래 가지 못했다. 전후 6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이처럼 대부분 실패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적인 이상으로 뭉친 십자군이었으나 현실은 기독교권의 교황과 비잔틴 제국간의 종주권 타툼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과 각국의 왕이나 제후,영주들의 욕심에서 비롯된 이중적인 인간의 탐욕이 원인이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기독교 정통을 이유로 희랍 정교를 비하하였고 희랍 정교는 문화적인 수준 미달이라고 로마 교황청을 얕잡아 보았다. 그래서 양 진영의 반목은 십자군 원정시 오히려 격화되었는데, 이탈리아 상업 도시 베네치아가 재정적인 후원을 맡은 제4차 십자군 원정시에는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약탈하였다.
종교적인 전통으로는 로마 교황청이 권위가 높았으나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희랍계의 비잔틴이 더 높았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십자군이 값진 미술품을 무더기로 약탈해 갔으며 전쟁 비용을 부담했던 베네치아도 투자한 이상으로 거두어 들였다.
당시 비잔틴을 점령한 십자군은 이 도시를 철저히 유린했는데 유태인들은 마침 사전에 추방된 상태로 화를 모면하였다.
그로부터 약 50년 후 희랍은 비잔틴을 되찿았으나 이를 고비로 비잔틴 제국은 사양길에 접어들어 마침내 이슬람권인 터키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결국 동방의 기독교 보루가 기독교인들간의 전쟁으로 인해 약화되고 없어지게 되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가 없다. 이러한 현상은 같은 종교라도 사상과 이념이 다르면 타 종교보다 더 철저한 앙갚음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말로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종교가 권력과 밀착하면 종교적인 유일신적 이론과 편협된 사고와 아집으로 나타나며, 타 신앙에 대한 포용력의 부족으로 명분없는 전쟁과 살륙이 자행된다는 사실이다.
* 십자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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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태인들의 생활 영역
유럽 각국의 유태인 추방
다아스포라 시대의 유태인들이 겪은 가장 큰 고난은 거의 전유럽에서 일어난 유태인 추방일 것이다. 먼저 조직적으로 유태인을 추방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유태인들이 영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1세기 초반 경으로 상인과 공인으로 활약했으며 부가 축적되자 왕이나 지방의 영주들에게는 돈 줄이 되었다. 그런 차입이 빈번하다보니 부채가 쌓이고 이자까지 늘어났다. 그래서 왕이나 지방 영주들은 부채를 들거나 없애기 위해서 유태인들에게 세금을 배가시키고 트집을 잡아 그 지역에서 내 쫒기도 하였다. 유태인들로부터 돈을 빌려쓴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유태인들이 고리대금업자나 수전노로 보였을 것이며 이러한 인식이 확산되자 유태인에 대한 증오심도 영국과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1144년 영국 '노르위치' 지역의 한 마을에서 '휴우'라는 한 소년이 결혼 잔치에 다녀오다가 길에서 행방불명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족괴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인근 일대를 샅샅이 뒤진 끝에 구정물 구덩이에 빠져 죽은 소년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누군가가 유태인이 소년을 잡아 피를 뽑아 마시고 구덩이에 쳐 박았다는 소문을 퍼뜨렸는데 이 소문이 삽시간에 마을 전역으로 퍼졌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이 인근에 살고 있던 유태인 19명을 잡아 매달아 죽였다. 이 소문은 영국 전역으로 퍼졌고 유럽 대륙에도 전해졌다. 이 소문은 윤색되기도 하였는데 유태인들이 그들의 명절인 '과월절'에 기독교도들의 피를 포도주에 섞어 마신다는 중상으로 번지기에 이른다.
1272년에서 1307년 사이 영국의 '에드워드왕'의 치세 기간에 대대적인 유태인 추방운동이 벌어졌다. 영국에서 �겨난 유태인들은 바다 건너 프랑스로 이주했다. 프랑스도 인식이 좋지않던 유태인들을 반길리가 없었고 그들도 추방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독일로 갔으나 독일도 수많은 소공국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들 사회에서도 유태인을 대체로 반기지 않아 유태인들은 마음편한 소공국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살았다.
스페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페인의 유태인들은 이슬람 국가 시절에는 황금기를 누렸으나 13세기 중반 아랍권이 물러가고 기독교 국가가 세워진 후 유태인들은 기독교로 개종을 강요받았다. 대대적인 개종 운동은 1319년부터 착수되어 1350년, 1415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고, 약 50만 명에 달하는 유태인 가운데 30만 명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많은 기독교 개종자들은 계속 거주권을 유지하고 상류사회에 속해 살았다. 그러나 위장 개종자들은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유태인을 미워한 군중들의 마구잡이식 행패로 피해를 입은 유태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기독교 교회는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유태교를 증오했으며 군중들은 유태인을 미워하고 싫어했다.
개종을 거부한 스페인 유태인들은 '포르투칼', '북아프리카'와 '오스만 터키' 등지로 옮겨 다녔다. 포르투칼로 간 유태인들은 또 다시 �겨나 '암스텔담'이나 남미로 옮겨 갔는데 남미로 간 유태인들이 '카리브 해역'으로 번져 갔고 일부는 그곳에서 '북미 대륙'으로 진출한 첯 번째 그룹이 되었다.
유태인 밀집도시 '게토'
중세 후반부터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에 생겨난 유태인 격리 집단 거주 구역인 '게토'는 기독교도들에 의해 개종 압력이 지속되는 한편, 유태인과의 접촉은 가급적 금기시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인 박해로 유태인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벽으로 둘러싸인 집단 거주 지역에 모여 살았다. 이것은 서로의 편의에 의하여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듯 하다. 게토는 이탈리아와 독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 쪽에 많이 만들어 졌으며 상대적으로 폴란드를 제외하고 동부 지역은 적었다.
게토는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주민들의 출입을 위한 큰 대문이 있다. 게토 내에 사는 유태인들은 아침 일찍 대문을 나와 생업에 종사할 수 있지만 날이 저물면 대문안으로 들어와야만 했다. 게토 내에는 한가운데 넓은 통로가 있고 양측에 집들이 줄지어 서 있다. 통로 중앙에는 회관 구실을 하는 건물이 있고 다른 한 끝에 유태인 공동묘지가 자리잡은 형태가 흔했다. 삶과 죽음이 한 선상에서 이루어진다는 유태인들의 믿음이 잘 드러난다.
게토의 규모는 적게는 2백 명에서 많게는 5-6백 명으로 구성된 경우가 대부분이며 천 명이 넘는 게토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게토에서는 유태교의 랍비를 중심으로 일상생활이 영위되었으며 거주민들의 원활한 자활을 위한 자문 역활을 했다. 가난하기는 했어도 그들의 고유한 종교와 문화, 그리고 전통을 이어나가면서 안온한 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었다. 게토는 대게 후미진 곳에 자리잡았고 그 근처에 집시나 창녀들이 몰려 사는 곳이기도 하였다.
중세의 유태인들은 게토 밖을 출입하려면 가슴에 노란 마크의 별을 달고 다녀 보통 사람인 크리스찬과 구별되게 했다. 노란 마크는 1215년 교황 '이노센트 3세'가 내린 교황령에 의해서인데 유태인들은 열등한 민족이어서 가슴에 '부끄러움의 표시(Badge of the shame)'를 달아야 한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게토는 18세기 말과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에서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나치스 독일 치하에서 가장 악명높은 것은 '바르샤바 게토'로 한때 50만 명의 유태인이 집단적으로 수용되기도 했다.
이슬람권 영향을 받은 스페인 등지의 유태인들을 '쉐파르딤(Separdim)'이라 부르며 독일을 중심으로 동구권 지역의 유태인들을 '에쉬케나짐(Ashkenzim)'이라 부른다. 이들 두 갈래의 유태인들은 오랜 기간 동안 몸 담아 살아온 지역의 문화권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생활했기 때문에 각각 다른 유형의 문화적 성격을 가진 유태민족으로 성장하게 된다.
13세기 이후 영국과 프랑스에서 추방된 유태인들은 독일로 많이 몰려 갔고, 살길을 찿아 동부 유럽으로 옮겨갔다. 수적으로 스페인계 유태인보다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이들은 이 지역에서 오래 동안 살면서 자기들만의 독특한 언어로 알려진 '이디쉬'를 만들었다. 이디쉬는 독일어와 히브리어와 합성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스페인계 유태인들은 스페인어와 히브리어를 혼합한 '라디노'라는 언어를 개발했는데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방의 유태인들간에 사용되고 있다.
5. 유태인의 정체
혈통이냐 종교냐
1950년 신생 이스라엘 의회에서 첯 번재로 통과한 법이 '귀환의 법'이 있다. 이 법은 유태인이면 누구나 이스라엘 땅을 밟는 즉시 시민권이 주어진다는 법이다. 이 귀환의 법을 통해 유입된 인구로 인해 이스라엘 인구는 건국 이후 만 3년을 넘으서면서 바로 늘어났다. 그런데 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유태인의 정의에 문제가 생겼다. 유태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태인이 시민권이 거절된 사건이 있었다. 그 이유는 이 법이 규정한 유태인의 정의는 혈통이 아니라 유태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유태교도로 보아야 한다는 해석 때문이었다. 혈통이 유태인이라도 유태교도가 아니면 유태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예멘과 이디오피아 유태인들의 경우에는 인종으로 보아 흑인이기에 혈통으로 보아 전통적인 유태인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은 동포로 인정되어 귀환 즉시 시민권이 주어졌다. 예멘의 경우는 '마술융단작전'으로 유태인들을 이스라엘 공군이 비행기로 실어 날랐다. 이는 유태인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혈통보다 유태종교가 우선시 된다. 핏줄보다 신앙이다. 이 점에서 역사 속의 유태인은 유태인 부모가 낳은 종족이면 누구나 유태인이었다. 유태인만큼 핏줄을 중요시하는 민족도 흔치 않을 것이다.
모계냐 부계냐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유태인의 피도 어지간히 혼혈이 되었고 이제는 누가 누구인지 분간이 어렵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시냐고그에 등록을 하거나 유태교의 제반 율법을 지키면서 생활하는 사람이라야 유태인이라는 범주에 넣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어엿한 유태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도 유태교와 멀어져 가는 듯이 보이면 유태인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유태인도 많으며 쉽게 선을 그을 수도 없는 것 같다.
혈통만으로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것이 유태인 사회의 통념이다. 혈통만으로 보면 유태인종은 백인이라는 것이 상식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흑인도 있고 아시아계 인종도 있다. 금발 유태인, 검은 곱슬머리 유태인, 갈색 머리 유태인 등이 있고 파란눈의 유태인, 검은 눈의 유태인 그리고 키가 크거나 혹은 작달막한 유태인 등 이제 세계 인종 전시장에 내놓을 만한 다양한 인종의 유태인들이 많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유태인 스스로도 유태인의 정의가 애매하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유태인들은 대체적으로 유태인의 정의를 다음 세 가지로 한다고 한다.
첯째, 유태교를 믿고 그 율법에 따른 생활을 하는 사람
둘째, 부모가 유태인인 사람
셋째, 유태인의 전통 문화유산과 그 관습에 젖어 있으며 유태인 사회의 일원으로 행세해온 사람이다. 다시 말해 종교적.인종적.문화적인 세 가지 범주로 보는 것이 유태인의 정의다.
그런데 이 범주 역시 애매한 구석이 없지 않다.
양쪽 부모 가운데 어느편을 더 우선시 하느냐의 문제다. 기원전까지만 해도 부계를 우선시 했는데 디아스포라 시대를 거치면서 유태인의 혈맥은 부계보다 모계를 우선시 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유태인이어야 진짜 유태인으로 보는 것이다. 유전학에서도 모계가 혈통 유전인자가 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러한 경우와는 관계없이 3대나 4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양측 부모 가운데 어느 한측이라도 유태인의 피가 흐르면 유태인으로 간주했고 집단 수용소로 보내졌다. "나는 유태인이 아닙니다"라고 발버둥쳐도 소용이 없었으며 히틀러는 혈통을 매우 중요시 하였는데 가령 할아버지 때부터 타종교로 개종했어도 유태인으로 보았다.
유태교라는 종교를 혈통보다 앞서 보는 방법은 더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골수 정통파 유태교에서는 보수파나 개혁파 유태교를 진정한 유태교로 보지 않는다. 더욱이 개혁파 유태교에 이르러서는 아예 유태교 문전에도 들어서지 못할 이단이라고 못박는 정통파 랍비가 많다. 그런가 하면 개혁파는 정통파를 가리켜 '자신을 태생 유태인이며 유태교도라고 자칭한 유태인들이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른 이른바 '하시드'로 알려진 정통파 유태인들'을 가리켜 '돌다시피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서초동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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