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갈등의 핵, 유태인, 그들은 누구인가?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갈등의 핵, 유태인, 그들은 누구인가?

두바퀴인생 2009. 7. 16. 12:15

 

 

아래 글은 '갈등의 핵 유태인' 이라는 책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며 저의 의견을 마지막 부분에 첨가하였습니다.


특정 종교를 이해하고 신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선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판단과 사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군대생활을 통해서 병사들이 무사히 사고치지 않고 전역하기 위해서는 종교활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고 병사들의 종교활동에 관심이 많았으며 어느 한 종교에 치우치지 않고  불교, 기독교, 천주교, 기타 종교까지 두루 다니면서 많은 종교인들을 접촉하면서 나름대로 신앙에 대한 가치관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이란 인간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과 절대선을 추구하면서 온 세상이 평화롭게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도 생각은 합니다. 어느 종파를 비난할 수도 없고 다르다고 무시해서도 안되며 자기것만 최선이라는 사고도 매우 우매하고 편협하며 위험한 생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타 종교를 이해하는 만큼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타 종교를 존중할 줄 아는 신앙심을 가진 신앙인이야 말로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살아온 자신의 삶에서 터득한 경험에 의해 생각과 시고가  다 다릅니다.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그를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이며 배타적인 사고는 상대를 적으로 만들며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는 점 입니다. 그릇이 아무리 커도 비워야 채우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비워야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대해서 알아보기 전에 창세기가 태동한 근원지인 이스라엘 민족에 대하여 먼저 유태인의 역사를 통해서 먼저 알아보기로 합니다. 그 주체적인 그룹인 유태민족의 역사, 그들의 종교인 유일신 사상의 유태교, 예수가 태어난 시기의 유태인 사회, 그리스도교의 태동과 역사에 대해서 복합적인 사고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갈등의 핵 유태인'-하나-

 

  


☞ 오늘날 마사다 유적지는 이스라엘의 정체성 확인의 장소입니다.  임관하는 이스라엘군은 모두 이  마사다언덕에   역사의 아픔을되새기면서 임관식을 갖는다고 합니다. 다시는 망국의 설움을 겪지 않기 위해서 마사다 언덕과   통곡의 벽은  오늘날  이스라엘 정체성의 확인의 핵심적 장소이다.

 

 

유태인은 누구인가 : 아브라함에서 유태왕국 멸망까지

 

1. 4천 년 역사의 유태민족

 

'셈족'에 속하는 유태민족

흔히 세계의 인종을 피부 색깔에 따라 백인.흑인.황인.홍인종으로 구분한다. 백인종은 각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크게 두 어족으로 나뉜다. 인도.유러피안족과(혹은 아리안족)과 셈어족이다. 인도.유러피언족에는 희랍어.라틴어.프랑스어.스페인어.독일어.영어.러시아어 등 동서유럽 언어들이 모두 포함된다. 셈어를 사용하는 인종은 주로 오늘날의 중근동 지역에 분포하는 민족이다. 이라크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서쪽으로 팔레스타인을 지나 지중해를 끼고 북부 나일강까지 그리고 동쪽으로 아라비아 반도와 페르시아에 이르는 지역 일대까지 분포된 인종들이다.

 

셈어족에는 아랍어.히브리아어.바빌로니아어.가나안어.페니키아어.앗시리아어.아카드어 등 중근동의 고전어가 모두 포함된다. 그래서 오늘날 셈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말할 때에는 크게 아랍권 민족들과 히브리어를 말하는 유태인으로 나눈다.

 

발견된 유적들을 근거로 유추판단해보면 고대 이집트 문명이 나일강 일대에 자리잡고 인접한 팔레스타인,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별개의 독립 문명권으로 있다가 기원전 3천 년 전부터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존재하였던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보고 있다.

 

유태민족은 유태교와 그 뿌리를 함께 한다. 거의 모든 인류 문명의 역사와 종교는 함께 출발하였던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유태민족이 남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런 토착 민족종교를 오늘날까지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아마도 그런 민족은 지구상에서 유태민족이 유일할 것이다.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

유태민족의 기원이 시작될 무렵인 2천 년 전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수메르'의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이 문화권 내에 속한 사람으로 '데라'라는 노인과 그 가족이 살았는데 당시 문화적 수준도 높고 정치체제도 안정된 지역의 문명사회에 적응하면서 지금의 이라크 지역의 '우르'라는 소도시에서 그런대로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데라 노인은 더 살기 좋는 곳을 찿아 아들 아브라함을 비롯한 가족과 많은 수의 부족들을 대리고 서북쪽으로 길을 떠나 오늘날 터키 땅인 '하란'에 도착한다.

 

당시 이 지역을 포함한 중근동 전역에서는 우상을 만들어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가령 이집트는 거대한 우상신, 바빌로니아는 '마르둑', 가나안과 페니키아 지역 일대는 '바알' 신을 섬기고 있었다.

 

'하란'에서 살다가 아버지 데라가 죽고 아브라함이 가장을 겸한 부족장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매하기 짝이 없는 당시의 우상숭배를 무척이나 배척하던 아브라함이 새로운 이상 세계를 동경하면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어떤 환상이 보였을 것이다. 심리학자들이 말하기를 무언가에 집착하여 집중하다 보면  꿈에는 물론 멀쩡한 대낮에도 자신이 찿는 환영이 보인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일종의 환영을 보았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일일이 실증할 수는 없지만 어찌했던 그들의 기록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바로 하느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북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의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창세기 12:1-2), 구약성경(히브리어 경전)에는 하느님과의 만남이 어쩌면 신화같은 이야기로 이렇게 씌어 있다. 그에게는 아주 뜻밖의 일이었을 것이며 낯설었을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남쪽으로 길을 떠나 하느님이 말씀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한다.

 

이 야회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역사적인 � 만남은 유태인과 유태민족의 � 탄생이 된다. 당시 유일신 신앙이라는 아주 획기적인 새 아이디어가 세상에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이다. 구약은 아브라함 이전에 아담과 이브,노아의 방주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그런 선조들을 모두 제쳐놓고 아브라함을 첯 번째 유태인으로 본다.

 

어쨌던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동으로 옮겼다. 구약을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오늘날 팔레스타인)에 이르렀을 때에 야훼 하느님이 "내가 너의 자손들에게 이 땅을 주겠다"(창세기 12:70라고 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다시 길을 떠나 이집트로 갔다가 가나안으로 되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가 있는데, 풍요로운 땅도 아닌 가나안 땅을 하는님께서 유태민족에게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이미 그곳에는 가나안 민족이 살고 있던 남의 땅이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도착후 다시 이집트로 갔다가 되돌아 온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가나안 땅이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주신 땅보다 나일강 유역은 이미 강력한 왕조가 자리잡고 있어 되돌아 왔지만 더 살기 좋다고 나일강 유역에 정착하려 했다는 것이 의문이다. 이는 비록 흉년이 들었지만 하느님이 주신 가나안 땅을 버리고 더 살기 좋은 곳을 �아 갔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라는 점이며 불모의 황무지지만 이미 가나안이라는 다른 민족이 살고 있던 땅이었으며 살기 좋은 땅도 아닌 척박한 땅이었다. 하물며 이미 다른 민족이 살고 있던 땅을 약속하셨다니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다. 더좋은 땅도 얼마나 많은가?

 

구약의 이야기를 믿든 믿지 않든 중요한 사실은 아브라함이 야훼 하느님과 맺었다는 이 '계약'이 오늘날까지 전세계 유태인들의 기도 속에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전세계 기독교도들도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예수를 포함하여 수많은 제자와 신도들의 희생으로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그리고 위대한 종교임에는 틀림없다. 하느님과의 계약에서 그 계약서 원본이 있는지 없는지 아니면 구두계약인지는 몰라도 그것은 단지 우리들 한민족이 아닌 유태민족의 신화같은 역사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들의 단군신화를 남들이 보면 우습게 생각하듯, 그 민족이 만든 민족역사의 진위를 왈가왈부하자는게 아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종교적인 면에서 남의 민족 역사와 신앙이 문제가 아니라가 우리들 자신들의 문제이다. 그들을 이해하는 선이 아닌 자아를 망각한체 남의 역사와 종교에 너무 심취하면 결국 주체성을 상실하고 그들을 동경하고 결국에는 동화되기 쉽다는 점이다. 그래서 주체성이 없는 민족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수 밖에 없기 때문에 민족 역사와 신앙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거짖이든 진실이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 민족역사와 종교를 꾸준히 간직함은 그 민족을 단결시키고 민족적인 자부심을 일깨우는 역활을 한다. 2천 년을 나라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신앙을 지켜왔기에 오늘날 다시 민족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모두 할례를 받아라

아브라함이 애훼 하느님과 가진 이 계약은 구약성경 전편을 통해 흐르고 있다. 이른바 모세 5경으로 알려진, 토라라고 하는 창세기를 비롯한 출애급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에는 물론 그 이후의 여호수아기,판관기,사무엘 상.하,열왕기 상.하에도 간간이 흐른다.물론 모세 5경인 토라에서처럼 야훼 하느님과 직접적인 접촉에 이어 게속 등장하는 많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유태인들에게 끓임없이 전해진다. 이것이 유태인 역사의 전편에 흐르는 핵심 사상이다.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계약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할례'가 있다.

" 너희 가운데 남자는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 세우는 나의 언약.... 남자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포경을 베지 않은 남자는 나의 언약을 깨뜨린 자이니, 그는 나의 백성에게서 끓어진다."(창세기 17:10-14)

 

이 할례는 구약성경이 문자로 씌어지기 시작한 천여 년 이전부터 지켜져 왔다. 몰론 오늘날에도 지켜지고 있으며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아주 확실한 증표다. 당시 이러한 할례는 주변 다른 민족으로부터 멸시를 받아왔으며 나치스 치하에서는 유태인 식별 방법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할례는 오늘날에도 건강과 건전한 발육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다른 민족들 보다 무언가 남다른 진취적인 사고로 가득찬 민족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이 특이한 할례 이외에 유태인들은 모세가 나타나 십계명을 주기전까지 지켜온 계율이 또 두가지가 있다. 하느님 외에 어떠한 우상숭배도 금지한 것과 제사에 인간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매우 타당성 있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이단이며 반사회적인 생각이었다. 보편화되어 있던 우상숭배와 인간제물을 금지한다는 것은 그 당시 사회를 부정하는 것이며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을 믿는 다는 그 자체도 용납할 수 없는 이단, 즉 사이비 집단이라고 간주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상식을 벗어난 극단적인 탈선, 인정할 수 없는 사고, 변화를 추구하는 혁신주의, 그들은 이처럼 그 시대부터 혁신적인 생각으로 현실을 타파하고 미래를 창조하는 자세로 살아가기를 습관처럼 했던 민족이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엄청난 이단적인 생각 자체가 썩어가던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며 기존 사회로부터 비난과 멸시를 받지 않을 수 없는 탁월한 민족임에는 틀림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성경은 오늘날  가장 많은 사람이 읽는 책이다.

 

2. 객관적으로 기록된 민족국가의 흥망사

 

역사적 사실의 기록, 구약성경

가나안 땅애 돌아온 유태민족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나라를 건설하고 싸우고 망하는 역사를 되풀이한다. 그 시점부터 구약성경은 신화의 세계가 아니라 유태민족의 정사로서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이 시대부터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로 이어진다. 기원전 천 년 전후부터다.

 

  유태인들의 경전인 히브리 성경은 기독교의 구약이나 약간 다르게 편찬되어 있다.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    5경은 똑 같이 앞에 있지만 그 이후 편집은 다르게 되어 있다. 즉 모세 5경 뒤에 '여호수아기, 판관기'까지는 같지만 '롯기'는 뒤로 미루고 '사뮤엘 상.하, 열왕기 상.하'로 역사서를 끝내고 있다. 그리고   후기 예언자들편과 마지막편을 '시서'와 '지혜서'로 끝맺는다. '시서'와 '지혜서 '맨 끝에 '연대기'를   넣었다.

 

역사서의 기록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라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밝히면 창피할 것 같은 기록도 숨김없이 담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민족적인 위인이나 영웅이라도 행한 일을 그대로 가감없이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절의 구약은 미화시킨 역사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객관적인 눈으로 본 지도자들과 민족 성원의 흥망성쇠사다. 성인 군자도 없고, 권력자나 예언자라고 쓸쩍 봐주는 기록이 아니다. 수많은 등장 인물들이 펼치는 드라마는 믿음과 배신, 미움과 사랑, 전쟁과 평화, 음모와 갈등, 영광과 좌절 등 어느 나라 민족사와도 다름없는 굴곡에 찬 대서사시와 같은 이야기다. 그래서 구약은 자세히 기록되어 재미있다.

 

이민족과 생존을 건 싸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탁월한 지도자 모세의 지도아래 이집트를 탈출하는 출애급기를 기록한다. 시나이 반도를 돌아다니면서 40년 방황을 끝낸 이후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유태인들은 이미 죽은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란 탁월한 지도자 밑에서 싸우면서 정착하는 과정을 걷는다. 4백 년 뒤에 가나안 땅에 나타난 그들을 옛날부터 그곳에서 살아온 원주민들이 반길리가 없었다. 그래서 싸움과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그곳에서 살고있던 유태인들은 주변 종족들에게 수탈과 핍박을 당하면서 생명을 연명하느라 어지간히 고생들도 했을 것이다. 이집트에서 다시 고토를 �아간 이들을 반겨준 것은 바로 남아 있던 유태민족들이었으며 어렵게나마 정착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여호수아,판관기,사뮤엘기와 열왕기는 가나안 땅 정착 과정에서 주변 종족들과의 싸움이 주요 이야기다. 유태인들과 싸움을 벌인 종족들로는 '가나안', '힛타이트', '예브시트', '필리스틴' 등의 종족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작은 목초지를 얻기 위해서, 우물이나 저수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또 먹을 곡식을 약탈하기 위해서 피를 나눈 종족이 아닌 타종족은 모두가 크고 작은 싸움의 대상이었다.

 

유태민족이 싸움의 한복판에 있었으며 유태인들은 일종의 성전이라는 신념으로 타종족에 비해 강렬하게 싸움이 임했다. 여호수아는 점령지를 12부족의 자치 지역으로 나누어 정착하였는데, 각부족에는 판관을 두어 이를 연방 형식으로 통괄하였다. 이들 판관들은 족장과 같은 위치에서 상황에 따라 예언자가 되기도 하고 군사령관이 되기도 하였다. 이들 판관들 가운데 드보라, 삼손,사뮤엘 같은 탁월한 지도자로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온 지휘능력이 뛰어난 지도자들이었다.

 

 

드보라,삼손,사뮤엘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성 '드보라'의 행적은 마치 우리 나라 역사에서 백제 침략군을 맞아 지혜롭게 대처한 옛 신라의 '선덕여왕'과 흡사한 면이 있다. '드보라'는 강력한 '가나안' 군사들이 쳐들어 왔을 때 그녀는 '바락'이라는 장수를 시켜 고지를 점령했다가 가나안군을 계곡으로 몰아내는 전술을 편다. 그 전날 비가 많이 와서 그 계곡이 진흙탕으로 변해 가나안군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음을 예상했던 것이다. 이 작전에서 적장 '시스라'가 전사하고 가나안군은 결국 대패하고 만다.

 

'드보라'는 몰라도 '삼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삼손은 엄청난 괴력의 힘을 가진 장사로 '필리스틴'군이 쳐들어 왔을 때 당나귀의 머리뼈로 적군 만 명을 죽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데릴라라는 적군의 여자에게 폭 빠져서 그만 힘의 원천인 머리를 깍이고 이로 인해 몰락하고 만다. 영화로도 나왔지만 황당하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다.

 

사뮤엘은 장군이라기보다 예언자였다. 그는 마지막 판관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그의 요청으로 유태인을 보호하고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왕을 세우게 되는데 그가 '사울'이다. 사울은 농부였으며 농부가 왕으로 발탁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것으로 혈통과 출신을 중요시하던 당시의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않는 유태인만의 율법이었다. 유태인 사회는 능력이 있다면 누구라도 왕이 될 수가 있는 평등사상이 근간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평등 사상은 구약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유태인 사회의 인재 양성에 결정적인 원천으로 작용하게 된다.

 

유태인은 탁월한 군사 지휘 능력, 뛰어난 인덕이나 경영 능력, 예언자적인 능력 등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맞추어 필요한 능력자를 왕으로 모셨던 것이다.

 

사울왕의 치세도 싸움의 연속이었다. 정신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투를 벌였는데 그느 유능한 장수인 다윗을 수하에 두었다. 그러나 다윗의 능력을 시기하여 그를 해하려는 등 어지러운 상황이 벌어진다. 사울왕은 주변 이민족들과의 싸움에서 처음에는 성공하였으나 나중에는 싸움에 지고 자살하고 만다. 적은 그의 시신을 성벽에 걸어놓고 사기를 높이는 등 어려움 끝에 유태인들은 시신을 되�고 장례를 치른다. 이러한 이민족과의 싸움은 2백 년 가량 지속되면서 유태인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의 시대를 살았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이러한 유태인 역사를 보면, 왜 하필이면 이민족이 우글거리는 황무지에 가까운 불모지 땅인 가나안 땅을 하느님이 약속하셨느냐는 것이다. 그런곳에 타민족이 들어가면 당연히 기존의 정착하여 살던 민족이 가만이 있을리가 없는게 아닌가? 남의 땅을 주인에게는 사전 한마디 말도없이 유태민족에게만 그 땅을 임의대로 약속한 이유는 무었일까? 그런 곳에 떠돌이 민족이 정착하려면 당연히 서로 싸우고 피를 흘리는게 당연하다. 이런 경우에 맞지않는 행위를 유태인들에게 약속한 것과 그들에게만 임의대로 편애하여 약속한 하느님은 유태인들만의 하느님인가? 하느님은 무슨 마음으로 그런 약속을 했을까? 오늘날까지 인류 분쟁의 불씨는 여기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베들레헴 전경

 


베들레헴 시내 모습

 

 

3.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된 남북조 시대

 

209년간 지속된 북의 이스라엘

사울왕에서 다윗왕,그리고 솔로몬으로 유태인 왕국이 이어지면서 유태 왕국의 전성기를 구가하였으나, 결국 두 개의 왕국으로 나누어 분리하게 된다. 이를 남북조 시대라 지칭해도 좋을 것이다. 분렬은 국력의 약화를 의미하는데, 이민족의 침입으로 북의 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존속 기간은 불과 209년(기원전 931-722)이었다. 구약을 보면 이 기간 동안 내우외환을 겪으면서 9개의 왕조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은 15년 전후였으며 어떤 왕은 7일간 재위에 오르기도 하였다.수명을 다하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암살되거나 비명에 갔다.

 

구약의 열왕기를 보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럽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왕이 죽거나 암살되기전에는 반드시 예언자가 나타나 율법을 위반한 그를 규탄하고 멸망을 예고하는 장면이 나오곤 한다.

 

이스라엘 건국 후 반 세기가 흘렀을 때 '오므리'가 왕위에 올라 그런대로 나라를 다졌으나, 그의 아들 '아합'이 왕위를 이었다. 아합은 '시도니트' 종족 '이세벨'이란 공주를 아내로 맞았는데, 이 여인이 이웃 종족들의 우상인 '바알'이란 신을 궁중내에서 섬기면서 어린이를 우상의 공물로 바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율법에 의해 사유재산제도가 정착되어 있던 관습을 무시하고 이웃 백성의 포도원을 빼았기 위해 그를 모함하여 죽이는 등의 행위를 일삼자, 예언자 '엘리야'는 "나봇의 피를 핥던 개들이 같은 장소에서 네(야합)의 피를 핥으리라!(열왕기 상 21:19)라고 규탄하며 재앙이 올 것을 예언한다.

 

그로부터 12년 후 아합은 전쟁터에서 죽고 '예후'라는 장군이 전권을 장악, 왕후인 이세벨과 아합의 가족들을 도륙한다.그래서 또 새로운 '예후 왕조'가 시작된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209년을 지속하다가, 지금의 터키지방에서 태동한 나라로 당시 철제무기로 무장한 강력한 신흥국가인 '앗시리아'의 공격을 받는다. 앗시리아와 10년에 걸친 싸움끝에 결국 멸망하면서 명맥이 끊긴다. '사마리아'를 앗시리아가 유린하고 이스라엘의 유태인들을 그 지역에서 �아낸다. 이로써 12지족 가운데 10개 지족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이웃 나라 타민족에 동화되거나 남쪽의 유대 나라로 흡수되거나 아라비아 반도 남단 예멘으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뒤이은 남쪽 유다왕국의 멸망

남쪽의 유다왕국은 북의 이스라엘보다는 백여 년 더 오래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다. 유다 왕국 또한 345년(기원전 931-586) 동안 유지하면서 내우외환이 그칠날이 없었다. 유다 왕국은 다윗의 자손들이 오랜 기간 왕위를 누렸으며 평균 재임 기간은 17년이었다. 유다 왕국은 이웃인 아라비아 '모압'과 필리스틴 사람들과의 전쟁에 시달리면서 이 나라도 이세벨의 딸인 '아탈리아'란 여자가 왕후로 있었는데, 어머니를 닮아 몹시 사치스럽고 탐욕스러웠으며 그녀 역시 우상인 바알 신을 궁중에 끌여들여 굿판을 벌이곤 하였다. 성격이 포악하던 남편인 '르호보암'왕이 죽자 아예 권력을 독점하여 다윗의 자손들을 도륙했다. 그 학살속에서 도망나온 일곱 살의 로호보암 손자인 '예호아쉬'가 아탈리아가 피살된 후 왕위를 잇는다.

 

나라는 계속 어지러웠고 우상 숭배는 공공연히 유행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요시아'왕 시절이었다. 우연히 솔로몬의 성전을 수리하던 중 토라의 원전 두루마리를 발견한 것이다.이 토라 원본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을 휩쓸었고 사람들의 눈을 뜨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요시야왕은 저잣거리의 우상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주술사나 무당들을 싹쓸었다. 이렇게 해서 유다 왕국은 제 모습을 찿게 된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유다 왕국은 그 지역 최강자로 등장한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서 강력한 국가로 성장한 '바빌론'과 대치하게 된다.

 

바빌론은 앗시리아를 먼저 정복하고 유다 왕국에 조공을 강요하였으나 거절하자 전쟁을 일으킨다. 바빌론군은 에루살렘에 난입하여 성전을 파괴하고 약탈한 후 유다 왕국을 속국으로 만들어 꼭두각시 왕을 두기도 하였다. 유태민족의 저항은 16년 간이나 계속되었으나 결국 유다 왕국은 멸망하게 된다. 

 

비빌론에 유폐된 유태인들

바빌론은 유다 왕국의 유태인 대다수를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구약의 기록을 보면 상류사회의 주요 인맥이 거의 잡혀 끌려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유명한 '바빌론 유폐'생활이다. 그러나 바빌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은 유태교의 체질을 성전 중심에서 토라.율법 중심의 유태교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빌론의 유다 지배는 불과 50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기원전 536년 비빌론은 신흥 강대국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했다. 이렇게 해서 페르시아의 지배가 시작되는데 패르시아는 바빌론과는 달리 지배하의 각 민족의 종교와 행정 자치를 허용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황제는 비빌론에서 유폐생활을 하던 유태인들의 고토 귀환을 허용하였으며 비빌론이 탈취했던 성전의 온갖 금은제 제기 등도 고스란히 갖고 돌아가도록 허용했다. 유태인들은 엘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게 된다.(기원전 515년) 이것이 솔로몬 성전에 이어 제2성전인데 성전 준공식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고 구약의 기록에 남아 있다.

 

이 시기부터 유다 왕국은 제사장 중심의 행정자치령 형식의 나라가 된다. 구약에는 이때 '예수하', '에스라','느헤미아'란 이름이 나오는데의  페르시아가 이집트까지 점령한 이후 첯 귀환팀보다 백 년후에 제2차 고토 귀환팀으로 이스라엘로 돌아온다.

 

'에스라'는 당시 정상급 사제 출신의 선비였다. 모세 율법에 통달한 학자로 제2의 모세라고도 지칭된다. '느헤미아'는 페르시아 황제의 술잔을 바치는 직책을 맡고 있던 사람으로 황제의 최측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황제의 허락을 받아 유다국 자치행정수반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는 뛰어나 행정가로 성전 재건과 성벽을 복구한다.

 

이스라와 느헤미아는 유태인의 정체성 유지와 유태교의 부흥을 위하여 유태인은 이민족과 결혼을 금지 시키고, 토라를 정비하였으며 그후 수정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이런 자치령 형식으로 가다가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멸망시켜 이 지역 일대가 알렉산더 대왕의 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페르시아와 희랍계의 지배 

알렉산더 대왕의 유다왕국 점령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유태인들에게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의 충격을 주었다. 수준 높은 이민족 문화를 접하면서 유태인은 한층 세련된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일렉산더 대왕이 젊은 나이에 죽고 광대한 제국은 장수들에 의해 분활 통치되었는데, 팔레스타인 지역은 이집트를 점령한 '톨레미' 장군에 의해 백여 년간(기원전 323-198년)통합 지배된다. 그러다가 시리아 지방의 패자로 등장한 또 다른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장군 출신인 '셀레시드'가 시리아에서 자기 왕조를 세우고 팔레스타인 지방까지 빼았아(기원전 198년) 셀레시드 지배를 받게 된다.

 

이 새로운 지배자는 통레미와는 달리 진한 희랍적인 냄새를 풍긴다. 이스라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들여놓는가 하면 할례를 금지하고 안식일을 없애는 등 종교 탄압을 강행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정통파 유태교 사제 계급을 주축으로 한 범유태인 저항군과의 싸움으로 번진다. 24년간 계속된 저항군의 싸움은 셀레시드군을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그래서 탄생한 왕조가 '하스모니안' 왕조이다. 이 왕조는 80년간 계속되는데 역시 골육상쟁과 온갖 무질서가 판을 치다가 막판의 알렉산드리아 여왕 한 사람만이 바른 정치를 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여왕의 집권기(기원전 78-69년)가 이 정권의 황금기로 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여왕 사후 내란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운 사이 기원전 63년 로마가 진출하여 이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식민지화 했다. 로마가 지지한 헤롯왕이 나왔고 나라 이름도 '유대아'로 바뀌었다. 대단히 혼란한 사회가 계속되면서 헤롯왕의 아들 헤롯이 계승하나 역시 혼미한 사회,종교적인 상황이 계속되다가 기원 원년을 맞는다. 바로 예수가 태어난 시기였다. 그러다가 기원후 70년 로마에 반기를 들고 항쟁하자 로마군의 반격으로 식민국가인 유대아 조차 멸망해 버린다. 로마는 수도 엘루살렘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그곳의 유태인을 포함하여 팔레스타인에서 모두 몰아내 버렸다. 그후 유태인은 길고도 긴 2천 년을 나라없이 전세계를 방황하는 유랑민족이 되어 버렸다.

 

재야 유태교 지도자 랍비

유다 왕국의 예언자들은 대부분 랍비라는 유태교의 지도자로 나라의 장래를 예언하고 종교적 율법을 지키도록 유태민족을 지도하는 정신적 지주들이었다. 그때까지 성전 중심의 유태교가 주를 이루었으나 바빌론 유폐부터 랍비의 역활은 유태민족의 정신적 샘물과 같은 역활을 하였다. 성전없이 유태교를 가정에서 스스로 지키며 율법을 준수하고 토라의 기르침을 따르며 민족의 역사를 배우고 고토 팔레스타인에 대한 향수를 어린 시절부터 몸에 베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토라를 쉽게 생활화시켜 만든 것이 '탈무드'로 그들은 누구나 이 토라와 탈무드에 의해서 성장하고 자라게 된다. 성년이 되면 유태인이라면 누구나 토라와 탈무드에 대하여 숙독하게 되며 안식일과 계율을 준수하면서 종교적 민족적 의식을 함양시켜 나가는 주체적인 역활은 각 지역의 유태인 지도자 랍비였다. 랍비는 토라에 대한 전문가이면서 유태민족 사화를 이끌어 나가는 민족의 지도자이며 종교적인 지도자로 유태인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통곡의 벽

 

4. 유태민족 국가의 종언

 

예루살렘 공방전

지배자 로마와의 전면 항전의 직접적인 발단은 기원후 66년 5월 어느 날 예루살렘 교외의 로마군 주둔지를 일단의 유태인 열혈 단원이며 행동적인 민족주의 항쟁파인 극렬 게릴라들이 급습, 점령함으로써 시작됐다. 이 기지가 유태인 독립 항쟁 게릴라들에게 떨어지자 전체 유태인들이 환호했고 전국에 산재한 게릴라들을 자극하여 무력 저항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유데아,이두메아,사마리아,갈릴리 전지역의 게릴라들이 로마 점령군에 대하여 적극적인 무력항쟁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무력 봉기 첯 해는 게릴라군의 연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의 결사적인 항전은 주둔 로마군의 열세로 일방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당시 로마군은 식민지 유태민족들이 로마 정규군의 요새를 공격.점령한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유태인들의 저항을 만만히 보았을 뿐만아니라 주력 부대를 시리아 지역에 투입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소수 치안 유지 병력만 남아 있었다.

 

로마군이 각지에서 피습을 당하자 이 급보를 보고 받은 시리아에 주둔 중이던 '케스터스 갈루스' 장군 휘하의 군단이 급파되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네로' 황제가 급히 보낸 장군으로 당시 로마의 가장 유능한 '베스파시안' 장군의 로마 최정예 군단이 진군하게 된다. 로마 최정예 군단이 진주하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유태인 게릴라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전투력의 열세로 일소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시작된 것이 예루살렘 공방전이 3년간 계속되었다.

 

종군기록 사학자 '요세프스'

로마의 예루살렘 공방전 와중에 두 사람의 유태인이 후세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데 '요차난 벤 차카이'와 '팔에비아스 요세프스'이다. '차카이'는 인멸 위기에 있던 유태인의 민족종교와 문화유산을 지킨 사람이며, '요세프스'는 당시 유태인들의 피어린 저항사를 낱낱이 기록한 역사학자이다. 두 사람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면서도 한편 유태인들로부터는 민족 반역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이기도 하다.

 

요세프스는 부유한 제사장 가정에서 태어나 토라.율법 등을 익혔으며 로마로 유학하여 일류 교육기관에서 수학한 히브리어는 물론 희랍과 로마 고전의 일인자였다. 특히 역사학에 깊은 지식이 있었으며 로마 시민권자였다. 요세프스는 투항했다는 설과 본래 로마군 중간급 장교로 근무했다는 설이 있으나 베스파시안 사령관이 요세프스를 종군 전쟁 기록자로서 자기 군단에 근무토록 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후세에 남긴 주요한 저술로는 <유태인 전쟁사>,<유태인 고대 제도 및 풍습>,< 마사다 항전사>가 있다. 그는 강한 로마를 잘 알고 있었으며 유태인들의 저항이 결국 유태민족의 멸망을 초래하는 무모한 항쟁임을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군 종군 기록자이지만 객관적으로 싸움의 전말을 기록하였으며 오히려 로마군보다 유태인의 항쟁 모습을 잘 그려 놓았다고 한다. 그를 전쟁 수행 기록관으로 채용한 것이나 기록에 대해 일체의 간섭도 하지 않았던 베시파시안 장군의 인품과 지적 수준도 대단하였던 인물이었다.

 

베시파시안 장군의 로마군은 저항하는 유태인은 물론 눈에 띠는 건물은 거의 모두 파괴하면서 소탕전을 전개하였다. 수도인 예루살렘을 포위하면서 압박해 갔는데 68년 중반 경에는 예루살렘을 제외하고 나머지 전지역이 평정되었다. 로마군은 예루살렘도 일거에 점령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성 밖을 포위하고 성 내의 유태인들의 항복을 종용하면서 지구전을 펴기로 하였다.

 

'베시파시안' 장군과 '벤 차카이'

벤 차카이는 화전을 주장한 바리사이파계의 랍비였다. 그는 일반 서민 대중들로 부터 존경을 받던 인물로 명성있는 학자겸 랍비였는데 주전파들이 주도권을 장악하자 그의 말을 들으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로마와의 이번 전쟁으로 자칫하면 2천 년 유태민족과 유태민족 유산의 종말로 끝날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로마군의 결의로 보아 예루살렘 함락과 함께 전체 주민의 죽음이나 노예화는 뻔한 것이었다. 그리고 유태문화의 인멸이었다. 그는 자신의 속 뜻을 제자들에게 털어놓고 방법을 함께 강구한 결과 죽은 시체로 위장해 성 밖으로 빠져나가기로 하였다. 우선 전염병 같은 돌림병이 걸린 자신을 주변에 알리고 자기가 죽었음을 위장하여 관속에 들어갔다. 제자들이 관을 호송하여 성문에 도착하였다. 제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설치는 주전파에게 들키는 날이면 피살될 것은 뻔한 일인지라  싸움에 정신이 없던 주전파들을 겨우 속이고 성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거짓말 같은 실화이야기다. 그는 성 밖으로 나오자 즉시 베시파우스 사령관을 찿아갔다.

 

그는 베시파우스 사령관을 만나자 먼저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그의 관상을 보았는데, 머지 않아 로마 황제가 될 상이라했다. 사령관은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청이 무었이나고 물었다. 차카이는 팔레스타인 어느 한적한 곳에 '유태민족 문화유산 연구소' 같은 곳을 제자들과 운영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했다. 베스파시안 사령관은 쾌히 승락했다.

 

차카이는 어떻게 그와 같은 예언을 할 수 있었을까? 당시 로마는 '네로' 황제가 죽고 후계자가 없어 세 명의 인물이 황제에 올랐으나 번갈아 암살되는 등 정국이 불안정 하였으며, 그런 상황이라면 군대의 강자가 반드시 혼란한 정국을 바로 잡을 수 있으니 베스파시안 장군이 거의 확실한 황제 자리를 차지하게될 가능성을 점쳤던 것이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이듬해인 69년 로마 원로원은 군통수권자인 베스파시안에게 황제 등극을 권유해왔고 그는 마침내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예루살렘 공격은 아들 '티투스' 장군에게 일임하고 로마로 떠났다.

 

베스파시안 황제는 차카이와의 약속을 지켰다. 차카이는 예루살렘 에 가까운 곳에 '야브네'란 연구소를 차리고 유태민족의 종교.문화.역사의 중심 연구소가 될 '예시바'의 � 스타트로 보고 있다. 이로써 유태 문화유산이 인멸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사라진 유데아 왕국

로마군은 후임 '티투스' 사령관의 지휘 아래 예루살렘 포위 공격을 더욱 가열화시켰다. 로마군이 성을 헐어내고 성내로 진입하여 2주간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으나 로마군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기도 하였다. 티투스 사령관은 성 외곽 지역에서 유태인을 잡아다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기도 하며 성안의 유태인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또 한 해가 흘러 3년째가 되는 70년. 마침내 로마군이 성을 함락시킨다. 성에 난입한 로마군은 유태인 남자는 모두 도륙하고 여자와 어린이는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다. 모든 건물과 성전은 돌 하나 남기지 않고 파괴되었다. 배신에 대한 보복은 철저하게 하는 것이 로마군의 전통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투입된 로마군은 8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유태인 공성군은 2만3천4백여 명에 불과하였는데 3년간이나 치열한 공성전을 전개하였다는 것은 유태인의 전투력이 얼마나 강력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티투스 사령관의 로마 개선문은 현재도 남아있다. 옛 로마 원로원 건물 옆에 서 있는 이 개선문이 바로 예루살렘 함락을 기념해 세운 개선문이다. 이어 다시 2년을 넘게 계속된 '마사다 요새 항전'은 예루살렘 함락 직후 벌어진 유태민중들의 처절한 마지막 절규였다. 그후 2세기 전후까지 유태인들의 산발적인 저항은 계속되었으며 상당한 전투력으로 로마군을 괴롭힌 '시몬 바 코츠바'가 가장 강력했다. 이에 로마는 '세르베스' 장군의 군단을 파견하여 산발적인 전투를 3년간이나 벌여 135년 결국 완전히 진압되었다.

 

이 일련의 전쟁으로 유태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로마군은 예루살렘은 물론 팔레스타인 전지역에 대해 유태인들은 모조리 도륙하였으며 건물은 모조리 불태우고 파괴하였다. 이때부터 유태인은 2천 년에 걸친 본격적인 유랑의 시대가 시작된다. 몰론 타지역에 정착하거나 바빌론 유폐시절에 이미 그 지역에 정착한 유태인들도 있었으나 예루살렘 함락 이후 명목상이나마 존재했던 유데아 왕국의 종언으로 이때부터 본격적인 유랑시대의 시작된 것이다.

                                                                   -서초동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