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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실록: 제17대 소수림왕- 제18대 고국양왕 실록 본문
고구려 실록: 제17대 소수림왕 -제18대 고국양왕 실록
(재위:서기 371년 10월~서기 384년 11월, 13년 1개월)
문치를 통한 중앙집권화와 백제 정벌정책
소수림왕은 고국원왕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구부이다. 언제 태아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고국원왕 25년인 35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371년 10월에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평양성 싸움에서 전사하자 고구려 제17대 왕에 올랐다.
소수림왕은 즉위하면서 고구려는 문치주의를 표방한다. 문치는 곧 중앙집권화와 당시의 혼란스런 국제정세 속에서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고구려는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꾸준히 백제에 대한 정벌정책을 감행한다.
고구려 왕 계보도 (삼국사기에 의거)
해모수═╤═유화부인(하백의 딸)
│
소서노═╤═ 1.추모(bc37~19)═╤═예씨부인
│ │
┌┴┐ 2.유리명왕(bc19~ad18)═╤═송양왕의 딸
비류 온조 │
┌─┬─────┬────┬────┼─────┐
도절 해명 3.대무신왕(무휼) 여진 4.민중왕(해색주) 재사═╤═부여태후
(ad 19~ 44) (44~48) │
갈사국왕녀═╣ ╠═ 원비 ┌──────┼─────┐
호동 5.모본왕(? ? ? ). 6.태조왕(궁) 7.차대왕(수성) 8.신대왕(백고)
(49~53) (54~146) (146~165) (165 ~ 179) │
┌┴┐ │ │
막덕 막근 추안 ㅣ
┌────────┬───────────┬─────────────┴─┐
9.고국천왕(이이모) 발기 ╔═10.산상왕(연우)═╤═후녀(주통부인) 계수
(179~197)║ ║ (197~227) │
╚ 우씨왕후(우소의 딸)═══╝ 11.동천왕(교체)(227~248)
┌────────────────────┼──┐
관나부인(장발미녀)══12.중천왕(연불)(248~270) ═╤═연씨왕후 예물 사구
│
┌───────┬──────────────┴───┬──┬──┬─┐
(??) 13.서천왕(약로)(270~292) ═╤═우씨왕후(우수의 딸) 달가 일우 소발 공주(?)══명림홀도
┌─────────┴──────┐ (부마도위)
14.봉상왕(상부)(292~300) 돌고
┌┴┐ │
(?) (?) 15.미천왕(을불)(301~331)
├───────────┐
16.고국원왕(사유)(331~371) 무
┌────────┴────┐
7.소수림왕(구부)(371~384) 18.고국양왕(이연)(384~391)
│
19.광개토대왕(담덕)(391~412)
│
20.장수왕(거련)(413~491)
├──────┐
조다 승천
│
21. 문자왕(나운)(491~519)
┌──────────────────┴─────┐
22.안장왕(흥안)(519~531)══한씨미녀 23.안원왕(보연)(531~545)
│
24.양원왕(평성)(545~559)
│
25.평원왕(양성)(559~590)
┌──────────┬────────┬───┐
26.영양왕(원)(590~618) 27.영류왕(건무)(618~642) 태양 평강공주═온달(부마도위)
│ │
환권 28.보장왕(보장)(642~668)
┌──┬──┼──┬──┐
복남 임무 덕남 덕무 안승
자살,타살 등 일찍 죽은 왕자 타살된 왕, ══ 부부관계 |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는 2대 유리왕의 아들이자,6대 태조왕의 생부입니다.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固, ?~293)는 13대 서천왕의 차남으로 형인 14대 봉상왕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15대 미천왕의 생부입니다.
. 장수왕의 아들인 조다(助多)는 생부인 20대 장수왕이 413~491년 오래 재위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먼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21대 문자왕(文咨王/?~519)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고구려 : BC 37년 개국~AD 668년 멸망 (28代 725년간)
순번 |
왕명(이름) |
재위 연도 |
재위 기간 |
혈통 관계 |
1 |
동명성왕(주몽) |
BC37년~BC19년 |
18년 |
해모수와 하백의 딸인 유화부인의 외아들. 부인은 예씨<자-2대 유리>와 연씨<소서노 자-비류, 온조> 고구려 개국시조이며 초대 군주. |
2 |
유리명왕(유리) |
BC19년~AD18년 |
37년 |
주몽과 왕후예씨의 장남. 부인은 송씨<자-도절, 해명, 3대 무휼, 여진, 4대 해색주>와 화희와 치희와 후비 |
3 |
대무신왕(무휼) |
AD 18년~44년 |
26년 |
유리와 왕후송씨의 3남. 부인은 원비인 비류국 여인<자-5대 모본왕>과 갈사부여의 갈사왕의 손녀 해씨<자-호동> |
4 |
민중왕(해색주) |
AD 44년~48년 |
4년 |
유리와 첫째 왕후송씨의 5남. 무휼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 |
5 |
모본왕(해우) |
AD 48년~53년 |
5년 |
무휼과 성씨불명 비류국 여인 사이의 차남(호동의제). 부인은 원비 |
6 |
태조왕(궁) |
AD 53년~146년 |
93년 |
유리왕(琉璃王)의 손자이며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와 부여태후 금씨 사이의 아들로 모본왕(慕本王)이 죽은 뒤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7세에 즉위함.119살에 서거하여 한국 왕 중 최장수 왕이며 93년간 통치한 최장수 재임군주임. 부인은 성씨불명<자-막근, 막덕> |
7 |
차대왕(수성) |
AD 146년~165년 |
19년 |
고추가 재사와 부여태후 금씨와의 2남으로 태조왕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자-추안> |
8 |
신대왕(백고) |
AD 165년~179년 |
14년 |
고추가 재사와 부여태후 금씨와의 3남으로 차대왕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자-발기(拔奇). 9대 남무, 발기(發岐), 10대 연우, 계수> |
9 |
고국천왕(남무) |
AD 179년~197년 |
18년 |
신대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남무(男武) 혹은 이이모(伊夷謨)라 한다. 부인은 우씨 |
10 |
산상왕(연우) |
AD 197년~227년 |
30년 |
신대왕의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어 즉위하였다. 부인은 소후후녀<자-교체(동천왕)> |
11 |
동천왕(교체) |
AD 227년~248년 |
21년 |
산상왕과 소후후녀의 아들. 아명은 교체, 휘는 우위거(憂位居) 또는 위궁(位宮)라함 부인 성씨불명<자-12대 연불, 예물, 사구과 후궁 동해녀 |
12 |
중천왕(연불) |
AD 248년~270년 |
22년 |
동천왕 아들.243년(동천왕 17) 태자가 되었고, 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부인은 연씨<자-13대 약로, 달가, 일우, 소발>과 관나부인<자-?> |
13 |
서천왕(약로) |
AD 270년~292년 |
22년 |
중천왕과 왕후연씨의 차남. 부인은 우씨<자-14대 상불, 15대 을불> |
14 |
봉상왕(상불) |
AD 292년~300년 |
8년 |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 |
15 |
미천왕(을불) |
AD 300년~331년 |
31년 |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차남. 부인은 주씨<자-16대 사유, 무> |
16 |
고국원왕(사유) |
AD 331년~371년 |
40년 |
미천왕과 왕후 주씨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17대 구부, 18대 이연> |
17 |
소수림왕(구부) |
AD371년~384년 |
13년 |
고국원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 |
18 |
고국양왕(이연) |
AD 384년~391년 |
7년 |
고국원왕의 차남. 부인은 성씨불명<자-19대 담덕> |
19 |
광개토대왕(담덕) |
AD 391년~412년 |
21년 |
고국양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0대 거련, 승평> |
20 |
장수왕(거련) |
AD 413년~491년 |
78년 |
광개토대왕의 장남. 475년 백제 한성(漢城) 함락하고 개로왕 살해. 481년 신라 8성을 점령. 영토가 남은 아산만과 죽령(竹嶺), 서는 요하, 동은 홋카이도 훈춘, 북은 카이위안 개원까지 확장해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부인은 성씨불명<자-조다, 승천> |
21 |
문자명왕(나운) |
AD 491년~519년 |
28년 |
장수왕의 손자(조다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2대 흥안, 23대 보연> |
22 |
안장왕(흥안) |
AD 519년~531년 |
12년 |
문자명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 |
23 |
안원왕(보연) |
AD 531년~545년 |
14년 |
문자명왕의 차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4대 평성, 세군> |
24 |
양원왕(평성) |
AD 545년~559년 |
14년 |
안원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양성> |
25 |
평원왕(양성) |
AD 559년~590년 |
31년 |
양원왕의 아들. 제일부인 성씨불명<자-26대 원, 평강공주>. 제2부인 성씨불명<자-27대 영류왕, 28대 보장왕> |
26 |
영양왕(원) |
AD 590년~618년 |
18년 |
평원왕의 제일부인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환치> 수나라 문제와 양제가 30만과 113만 대군으로 침공해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대승해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됐다. |
27 |
영류왕(건무) |
AD 618년~642년 |
24년 |
평원왕의 제이부인의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환권> |
28 |
보장왕(보장) |
AD 642년~668년 |
26년 |
평원왕의 제이부인의의 차남. 제1부인 성씨불명<자-복남, 임무, 덕무> 제2부인 성씨불명<자-안승>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으며,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의 파상적인 공격을 받아 고구려가 멸망하자 체포되어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복국(復國)을 꾀하였다가 실패한 뒤 사망한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
소수림왕은 기골이 장대하고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 전해진다. 그는 태자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정사에 관여했는데, 전연이 고구려를 위협하던 340년에 고국원왕의 명을 받아 모용황을 예방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후 그는 고국원왕을 도와 국방과 행정 전반에 걸친 많은 경험을 하였고, 외교문제에도 적극 가담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전연의 멸망을 경험했고, 동시에 전진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백제의 침입으로 아버지는 잃는 아픔도 안게 되었다. 그는 이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탁월한 외교능력을 발휘하여 문치주의를 표방하는 한편,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백제에 대한 압박정책을 수립한다.
소수림왕이 즉위하던 시기는 중원에 큰 변화가 일어난 때이다. 이미 270년에 모용씨의 전연이 저족의 우두머리 부견이 이끄는 전진에 몰락하고, 그 잔존세력은 부견에게 항복하였다. 이렇게 되자 부견은 남진하여 동진의 익주를 탈취하고, 서쪽으로는 구지와 전량, 또 북쪽으로는 소수족의 지방할거 정권을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한다. 전진은 그 여세를 몰아 동진을 멸하고 중국을 통일하겠다는 야심을 품는다.
하지만 전진은 고구려에 대해서만은 온건한 자세를 보였다. 그들은 동진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고구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비록 전진은 전연의 영토를 차지하긴 했으나 한나라 시대의 구요동, 현도,유주 등의 지역에 대해서는 고구려에 양보하는 자세를 보였다.
고구려는 전진의 의중을 재빨리 파악하고 소수림왕 즉위 초기에 전연이 차지하고 있던 유주 ,현도, 요동 등을 점령하고 하북과 산동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하지만 산동과 하북에는 백제가 세력을 키우며 북상을 꿈꾸고 있었다. 고국원왕의 전사로 원한을 품고 있던 고구려는 북진을 추진하고 있던 백제를 응징할 움직임을 보였고, 백제 역시 고구려의 침입을 예상하고 항상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수림왕은 쉽사리 백제를 향해 칼을 빼들지는 않았다. 소수림왕은 국제정세에 밝았고 정치감각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신흥강국인 부견의 전진과 화친을 맺고 한편 강남의 동진과도 돈득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같은 그의 외교노선은 백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백제도 동진과 외교관계를 맺어 고구려의 압박정책에 대항했다.
소수림왕은 이처럼 고도의 외교전략을 구사하며 대내외적으로 문치주의를 표방하고 국방위주의 노선에서 탈피하여 문화적 일체감을 형성하는 외교 형태를 구사하여 전진과 동진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백제를 고립시키려고 하였다. 뿐만아니라 내부적으로는 중앙집권화를 꾀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소수림왕은 전진과 동진에서 크게 부흥하고 있던 불교를 적극 수용하여 종교적 일체감을 꾀하는 한편, 태학을 세워 교육제도를 체계화하고 율령을 반포하여 관습법에 의존하던 종래의 통치형태를 버리고 문치국가로서의 면모를 일신했다.
문치주의에 따른 소수림왕의 정책은 중앙집권화의 토대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중원의 두 맹주인 전진과 동진의 호응을 얻었다. 이에따라 고구려는 내정과 외치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안정되었다.
고구려 조정은 이러한 안정을 바탕으로 백제 고립화에정책을 추친한다. 마침내 376년 11월 고국원왕에 대한 복수의 칼을 뽑아들고 백제의 북쪽 변경을 쳤다. 하지만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던 백제의 반격에 밀려 별 성과없이 퇴각하고 말았다. 백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듬해인 10월에 3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 평양성을 공략하였다.
백제의 기습을 받은 고구려는 한동안 고전하였으나, 수성전을 펼쳐 백제군을 퇴각시켰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후 시련을 겪는데, 누차에 걸친 전쟁으로 민심이 흏흏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으며, 설상가상으로 378년에는 극심한 가믐으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그해 8월에는 북쪽 변경 지역에 새롭게 성장하던 거란족이 칩입하여 변경 8개 부락을 함락시켰다.
이릇듯 백제,거란 등이 칩입하고 가믐이 지속되는 바람에 소수림왕의 문치주의 정책은 후반기로 갈 수록 퇴색하는 경향을 보였다. 소수림왕은 외적의 칩입과 가믐으로 인한 경제파탄 등으로 밀어닥친 난관을 극복하려고 애를 쓰다가 기력을 소모한 나머지 건강이 나빠져 서기 384년 11월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서초동 요약-
제18대 고국양왕
(?~서기 392년, 재위 : 서기 384년 11월~391년 모월, 약 7년)
1. 후연의 등장과 고국양왕의 팽창정책
고국양왕 즉위 무렵에는 중국 대륙의 세력 판도가 급변하던 시기였다. 전진이 몰락하고, 모용수가 연(후연)을 재건하여 하북과 요서를 압박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와 후연의 대립은 불가피해졌고, 백제 또한 이 기회를 노려 요서 지역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고구려는 후연과 백제를 대상으로 숱한 전쟁을 치르게 된다.
고국양왕은 고국원왕의 차남이며, 소수림왕의 동복 아우이다. 모후는 고국원왕의 왕후이고, 태어난 년도는 확실치 않으며, 이름은 이련(또는 어지지)이다. 384년 11월에 형인 소수림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조신들의 추대에 의해 고구려 제18대 왕에 올랐다.
고국양왕이 왕위에 오르던 384년에는 전진에 의해 멸망했던 모용 선비의 연이 재건되어 있었다. 역사적으로 후연이라고 불리는 이 나라는 모용황의 아들 모용수에 의해 건국되었다. 모용수는 전연을 강국으로 만든 모용황의 아들로 전연 시대에 많은 공을 세웠다. 하지만 모용위가 왕위에 오르면서 왕의 미움을 받았고, 그 때문에 전진의 부견에게 투항하였다. 그 후 전진의 신하로서 많은 역활을 하였는데, 부견이 중원 통일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섣불리 동진을 공략하다가 383년 그 유명한 '비수전투'에서 대패하자, 그 틈을 이용하여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하북으로 밀려들었다. 그 후 유주와 기주를 차지하고 국호를 연(후연)이라 하였다.
유주와 기주는 소수림왕 시대에 이미 고구려에 투항한 곳이었다. 따라서 비록 관청을 설치하지는 않았지만 그 곳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고구려였다. 그런데 모용수가 대군을 이끌고 그 곳을 점령함으로써 고구려와 모용수는 일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하지만 묘용수가 그 곳을 장악할 당시에 고구려의 소수림왕은 병상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소수림왕이 죽고 고국양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는 후연에게 강경한 자세를 보이게 된다.
고국양왕은 즉위 이듬해인 385년 6월에 4만의 군사를 보내 모용수의 부대를 쳤다. 이 때 모용수는 대방 왕 좌를 굴복시켜 그로 하여금 용성을 수비케 하였지만 고구려군은 그들을 패퇴시키고 현도로 진군하여 현도성을 함락하고 남녀 1만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이에 모용수는 그해 11월에 모용농에게 대군을 주어 현도와 구요동을 회복함으로써 고구려에 막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이처럼 고구려가 후연을 막아내기에 여념이 없을 때 백제는 한반도 쪽에서 고구려의 후미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고구려는 386년 8월에 군사를 출동시켜 백제를 선제공격하였다. 무력으로 위압하여 감히 후방을 치지 못하게 함이었다. 이런 까닭에 고구려는 단지 무려시위만 하였을 뿐 백제에 대해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백제는 섣불리 고구려의 후미를 치지 못했다. 또한 고구려는 말갈을 압박하여 백제를 공략하도록 부추겨 백제는 말갈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때문에 고구려는 백제에 대한 경계를 풀고 후연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백제가 389년 9월 한반도 쪽 후미를 급습하자, 고구려는 후연에 대한 공격을 늦추어야 했다. 그러다가 이듬해 다시 백제가 달솔 진가모를 시켜 도암성을 공격하여 주민 2백 명을 포로로 잡아가는 시태가 벌어졌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고국양왕이 병으로 드러눕고 말았다. 이에 따라 후연과 백제에 대한 공격 계획은 취소되었고, 고구려 조정은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에 고국양왕은 자신의 병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391년 말에 태자 담덕에게 왕위를 내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았다.
상왕으로 물러앉은 고국양왕은 요양을 하며 건강회복에 주력하였나,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서기 392년 5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능은 고국양에 마련되었으며, 묘호는 '고국양왕'이라 하였다.
고국양왕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왕후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며, 단지 장남 담덕에 대한 언급만 있다. 담덕에 대해서는 광개토왕실록에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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