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고구려 실록: 제19대 광개토왕 실록 본문
고구려 실록: 제19대 광개토왕 실록
(재위기간 서기 391 모월-413년 10월, 약 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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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십육국시대: 오호(五胡)란 흉노, 선비, 갈, 강, 저 다섯
주요 이민족을 가리키는 말
양자강 아래의 진나라는 동진
광개토왕의 국력신장정책과 고구려의 팽창
광개토왕은 고국양왕의 장남으로 서기 375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담덕이다. 모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서기 386년 고국양왕 3년 정월에 12살의 나이로 태자에 책봉되었고, 서기 391년 고국양왕이 지병으로 상왕으로 물러남에 따라 17세의 나이로 고구려 제 19대 왕에 올랐다.
광개토왕은 즉위와 동시에 과감한 영토확장정책을 감행한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영토는 확장되고, 국제사회에 고구려의 위상도 제고되며 이를 위해 광개토왕은 숱한 전쟁을 수행한다. 화북의 새로운 맹주로 부상한 후연, 신진세력 백제, 그리고 왜, 신라, 부여, 거란 등 많은 나라가 고구려와 부딪친다.
광개토왕이 즉위할 무렵 국제정세는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는데, 전진이 멸망한 이후 후연, 후진, 서진, 후량 등이 중국의 북방과 서방에서 세력을 확대하였고, 남방의 맹주 동진은 꾸준히 영토를 확장하여 신진세력과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 때 한반도에서는 산동과 요서지역을 차지한 백제가 가야와 왜 등을 끌여들여 연합세력을 형성해 고구려에 대항할 움직임을 보였고, 신라는 강성해진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며 백제의 연합세력을 경계하려 하였다.
이처럼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광개토왕은 더욱 적극적이고 과감한 팽창정책을 감행하여 고구려의 국력 증진에 주력한다.
고구려 왕 계보도 (삼국사기에 의거)
해모수═╤═유화부인(하백의 딸)
│
소서노═╤═ 1.추모(bc37~19)═╤═예씨부인
│ │
┌┴┐ 2.유리명왕(bc19~ad18)═╤═송양왕의 딸
비류 온조 │
┌─┬─────┬────┬────┼─────┐
도절 해명 3.대무신왕(무휼) 여진 4.민중왕(해색주) 재사═╤═부여태후
(ad 19~ 44) (44~48) │
갈사국왕녀═╣ ╠═ 원비 ┌──────┼─────┐
호동 5.모본왕(? ? ? ). 6.태조왕(궁) 7.차대왕(수성) 8.신대왕(백고)
(49~53) (54~146) (146~165) (165 ~ 179) │
┌┴┐ │ │
막덕 막근 추안 ㅣ
┌────────┬───────────┬─────────────┴─┐
9.고국천왕(이이모) 발기 ╔═10.산상왕(연우)═╤═후녀(주통부인) 계수
(179~197)║ ║ (197~227) │
╚ 우씨왕후(우소의 딸)═══╝ 11.동천왕(교체)(227~248)
┌────────────────────┼──┐
관나부인(장발미녀)══12.중천왕(연불)(248~270) ═╤═연씨왕후 예물 사구
│
┌───────┬──────────────┴───┬──┬──┬─┐
(??) 13.서천왕(약로)(270~292) ═╤═우씨왕후(우수의 딸) 달가 일우 소발 공주(?)══명림홀도
┌─────────┴──────┐ (부마도위)
14.봉상왕(상부)(292~300) 돌고
┌┴┐ │
(?) (?) 15.미천왕(을불)(301~331)
├───────────┐
16.고국원왕(사유)(331~371) 무
┌────────┴────┐
17.소수림왕(구부)(371~384) 18.고국양왕(이연)(384~391)
│
19.광개토대왕(담덕)(391~412)
│
20.장수왕(거련)(413~491)
├──────┐
조다 승천
│
21. 문자왕(나운)(491~519)
┌──────────────────┴─────┐
22.안장왕(흥안)(519~531)══한씨미녀 23.안원왕(보연)(531~545)
│
24.양원왕(평성)(545~559)
│
25.평원왕(양성)(559~590)
┌──────────┬────────┬───┐
26.영양왕(원)(590~618) 27.영류왕(건무)(618~642) 태양 평강공주═온달(부마도위)
│ │
환권 28.보장왕(보장)(642~668)
┌──┬──┼──┬──┐
복남 임무 덕남 덕무 안승
자살,타살 등 일찍 죽은 왕자 타살된 왕, ══ 부부관계 |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는 2대 유리왕의 아들이자,6대 태조왕의 생부입니다.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固, ?~293)는 13대 서천왕의 차남으로 형인 14대 봉상왕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15대 미천왕의 생부입니다.
. 장수왕의 아들인 조다(助多)는 생부인 20대 장수왕이 413~491년 오래 재위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먼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21대 문자왕(文咨王/?~519)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고구려 : BC 37년 개국~AD 668년 멸망 (28代 725년간)
순번 |
왕명(이름) |
재위 연도 |
재위 기간 |
혈통 관계 |
1 |
동명성왕(주몽) |
BC37년~BC19년 |
18년 |
해모수와 하백의 딸인 유화부인의 외아들. 부인은 예씨<자-2대 유리>와 연씨<소서노 자-비류, 온조> 고구려 개국시조이며 초대 군주. |
2 |
유리명왕(유리) |
BC19년~AD18년 |
37년 |
주몽과 왕후예씨의 장남. 부인은 송씨<자-도절, 해명, 3대 무휼, 여진, 4대 해색주>와 화희와 치희와 후비 |
3 |
대무신왕(무휼) |
AD 18년~44년 |
26년 |
유리와 왕후송씨의 3남. 부인은 원비인 비류국 여인<자-5대 모본왕>과 갈사부여의 갈사왕의 손녀 해씨<자-호동> |
4 |
민중왕(해색주) |
AD 44년~48년 |
4년 |
유리와 첫째 왕후송씨의 5남. 무휼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 |
5 |
모본왕(해우) |
AD 48년~53년 |
5년 |
무휼과 성씨불명 비류국 여인 사이의 차남(호동의제). 부인은 원비 |
6 |
태조왕(궁) |
AD 53년~146년 |
93년 |
유리왕(琉璃王)의 손자이며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와 부여태후 금씨 사이의 아들로 모본왕(慕本王)이 죽은 뒤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7세에 즉위함.119살에 서거하여 한국 왕 중 최장수 왕이며 93년간 통치한 최장수 재임군주임. 부인은 성씨불명<자-막근, 막덕> |
7 |
차대왕(수성) |
AD 146년~165년 |
19년 |
고추가 재사와 부여태후 금씨와의 2남으로 태조왕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자-추안> |
8 |
신대왕(백고) |
AD 165년~179년 |
14년 |
고추가 재사와 부여태후 금씨와의 3남으로 차대왕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자-발기(拔奇). 9대 남무, 발기(發岐), 10대 연우, 계수> |
9 |
고국천왕(남무) |
AD 179년~197년 |
18년 |
신대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남무(男武) 혹은 이이모(伊夷謨)라 한다. 부인은 우씨 |
10 |
산상왕(연우) |
AD 197년~227년 |
30년 |
신대왕의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어 즉위하였다. 부인은 소후후녀<자-교체(동천왕)> |
11 |
동천왕(교체) |
AD 227년~248년 |
21년 |
산상왕과 소후후녀의 아들. 아명은 교체, 휘는 우위거(憂位居) 또는 위궁(位宮)라함 부인 성씨불명<자-12대 연불, 예물, 사구과 후궁 동해녀 |
12 |
중천왕(연불) |
AD 248년~270년 |
22년 |
동천왕 아들.243년(동천왕 17) 태자가 되었고, 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부인은 연씨<자-13대 약로, 달가, 일우, 소발>과 관나부인<자-?> |
13 |
서천왕(약로) |
AD 270년~292년 |
22년 |
중천왕과 왕후연씨의 차남. 부인은 우씨<자-14대 상불, 15대 을불> |
14 |
봉상왕(상불) |
AD 292년~300년 |
8년 |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 |
15 |
미천왕(을불) |
AD 300년~331년 |
31년 |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차남. 부인은 주씨<자-16대 사유, 무> |
16 |
고국원왕(사유) |
AD 331년~371년 |
40년 |
미천왕과 왕후 주씨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17대 구부, 18대 이연> |
17 |
소수림왕(구부) |
AD371년~384년 |
13년 |
고국원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 |
18 |
고국양왕(이연) |
AD 384년~391년 |
7년 |
고국원왕의 차남. 부인은 성씨불명<자-19대 담덕> |
19 |
광개토대왕(담덕) |
AD 391년~412년 |
21년 |
고국양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0대 거련, 승평> |
20 |
장수왕(거련) |
AD 413년~491년 |
78년 |
광개토대왕의 장남. 475년 백제 한성(漢城) 함락하고 개로왕 살해. 481년 신라 8성을 점령. 영토가 남은 아산만과 죽령(竹嶺), 서는 요하, 동은 홋카이도 훈춘, 북은 카이위안 개원까지 확장해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부인은 성씨불명<자-조다, 승천> |
21 |
문자명왕(나운) |
AD 491년~519년 |
28년 |
장수왕의 손자(조다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2대 흥안, 23대 보연> |
22 |
안장왕(흥안) |
AD 519년~531년 |
12년 |
문자명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 |
23 |
안원왕(보연) |
AD 531년~545년 |
14년 |
문자명왕의 차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4대 평성, 세군> |
24 |
양원왕(평성) |
AD 545년~559년 |
14년 |
안원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양성> |
25 |
평원왕(양성) |
AD 559년~590년 |
31년 |
양원왕의 아들. 제일부인 성씨불명<자-26대 원, 평강공주>. 제2부인 성씨불명<자-27대 영류왕, 28대 보장왕> |
26 |
영양왕(원) |
AD 590년~618년 |
18년 |
평원왕의 제일부인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환치> 수나라 문제와 양제가 30만과 113만 대군으로 침공해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대승해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됐다. |
27 |
영류왕(건무) |
AD 618년~642년 |
24년 |
평원왕의 제이부인의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환권> |
28 |
보장왕(보장) |
AD 642년~668년 |
26년 |
평원왕의 제이부인의의 차남. 제1부인 성씨불명<자-복남, 임무, 덕무> 제2부인 성씨불명<자-안승>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으며,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의 파상적인 공격을 받아 고구려가 멸망하자 체포되어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복국(復國)을 꾀하였다가 실패한 뒤 사망한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
고구려의 팽창정책을 빨리 감지한 쪽은 신라였다. 신라는 당시 백제가 주도하는 한반도 및 일본열도의 국제관계에 편입되어 있었는데, 신라 조정은 왜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또한 백제와의 관게에서도 열세에 놓여 있었기에 어떤 방법으로든 그 같은 외교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신라는 백제와 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제에 압박을 가하고 있던 고구려에 눈을 돌렸다. 때마침 고구려가 팽창정책을 감행하여 남하할 기세를 보이자 화친조약을 제의하기에 이른다.
신라의 화친제의는 고구려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고구려는 당시까지만 해도 한반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상태였다. 특히 백제의 근거지인 한반도 남부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그러나 요서쪽으로 밀려들고 있는 백제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백제 궁성을 공략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한반도 지리에 익숙한 신라와의 화친은 수십만의 병력을 얻는 것보다 나았다.
이럿듯 고구려와 신라는 서로 이익을 위해 화친을 원했고, 그것은 392년 1월 신라 내물왕의 조카이며 이찬 대서지의 아들인 실성(후에 실성왕)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는 형태의 화친조약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되자 백제, 왜, 가야 등의 연합세력이 신라를 침공할 조짐을 보였다. 이에 신라는 위급한 상황이 도래했음을 고구려에 알려 도움을 청했고, 고구려는 화친조약에 따라 392년 7월 4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우선 백제의 대륙 영토인 요서군과 진평군 일대를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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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안악 3호분 대행렬도. 이 정도면 사실상 사진이나 다를 바가 없다.
고분 벽화에도 종류가 여럿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행렬도(圖), 전투도, 무사도, 수문장도입니다. 고구려 고분의 행렬도는 정규군의 행렬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전체적인 무장 상태나 병종 구성에 대한 가장 신뢰성 높은 증언입니다. 비록 평양 지역에 10개밖에 존재하지 않고 그나마 훼손이 심해 알아보기 어렵지만, 황해도 안악 3호 고분1에 그려진
대행렬도는 아직도 고구려군의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구려가 백제의 대륙기지를 먼저 공략한 것은 도성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자칫 한반도 쪽으로 대군을 몰고 갔다가 하북과 산동의 요서군과 진평군에 주둔하던 3만의 백제 정예병력에게 평양성을 공략당한다면 고국원왕의 사망때와 같은 곤경에 처할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하북의 요서군으로 밀려든 고구려의 4만 군사는 백제의 10개 성을 함락시킨 후 일부 주둔군을 남부에 남겨두고 다시 북진하였다. 당시 북쪽에는 거란이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여 고구려의 변방을 노략질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1만의 백성들이 거란에 잡혀가는 사건이 있었다. 광개토왕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해 9월에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려 거란의 본토를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대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거란군은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났고, 광개토왕은 남아있던 거란인 5백 명과 거란으로 이주당한 고구려인 1만을 환국시켰다. 그 길로 다시 남진하여 10월에 백제의 요새인 관미성을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시켰다. 관미성은 요새중의 요새로 주위가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며, 요새에 머무르던 백제군의 최후의 보루였다. 이곳이 고구려군에 무너지자 백제는 요서군을 상실하고 하수(황하) 남쪽으로 완전히 밀려났다.
이 관미성 전투에서 패배하자 백제 조정은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들끓었다. 하지만 백제의 진사왕은 향략과 사치에 빠진 채 이를 방관하였다. 이에 침류왕의 맏아들 아신왕이 사냥터에서 진사왕을 제거하고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여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아신왕은 관미성을 되찿기 위해 외숙부인 진무에게 군사 1만을 내주어 393년 8월에 고구려를 치도록 했다. 이에 고구려군은 관미성의 지형적 이점을 이용하여 수성전을 펼쳤고, 백제군은 별다른 성과없이 퇴각하였다.
394년 7월 다시금 백제군이 고구려의 남쪽으로 진주해왔다. 이에 광개토왕은 군사 5천을 동원하여 수곡성에서 백제군을 퇴각시켰으며, 백제의 재차 칩입에 대비하여 남쪽 변방에 7개성을 쌓도록 하였다. 그 후 백제가 395년 8월에 재차 칩입하자 광개토왕은 자신이 직접 정예 병력 7천을 이끌고 출전하여 백제군과의 전투에서 8천을 죽였다.
[사진설명] 고구려 삼실총의 벽화 중 '공성도(攻城圖)',
철제 투구와 갑옷으로 중무장한 병사들이 기마전을 벌이고 있다.
백제전에서 대승을 거둔 광개토왕은 회군하는 길에 북상하여 거란 소굴인 비려를 쳤다. 비려의 거란군을 토벌하고 잡혀간 백성들을 환국시켰다. 한편 백제의 아신왕이 11월 자신이 직접 군사 7천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기위해 바다를 건너려 했으나 폭설로 회군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광개토왕은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게 된다. 대륙백제를 공략하여 더이상 평양성을 넘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판단한 광개토왕은 한반도 백제 궁성에 대한 공격계획을 수립하여 396년 봄 대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백제로 향하였다.
백제로 향한 고구려군 대선단은 상륙작전을 시도하여 일팔성을 비롯한 50여개 성을 함락시키고 아리수(한강) 이북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아리수 남쪽에 진을 치고 기다리던 백제군은 고구려군이 아리수를 대선단을 이용하여 건너자 퇴각하여 백제 궁성에 집결하여 수성전을 펼쳤지만 역부족이었다. 백제군이 항복하자 광개토왕은 아신왕에게 신하의 예를 갖출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아신왕은 도성 밖으로 나가 항복을 서약하고 신하의 예를 갖췄다. 이에 광개토왕은 백제 왕족 및 대신 열 명을 볼모로 삼고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필을 대리고 귀국길에 올랐다.
백제 원정에서 대승을 거둔 고구려는 이 때 획득한 아리수 이북의 백제 땅 58개 성과 7백 개 촌을 고구려에 편입시켰으며, 그 곳에 부수도인 하평양(현재 대동강변 평양 지칭 추정)을 건설하여 한반도정책의 교두보로 삼았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396년에 광개토왕이 공취한 백제 58성은 아래와 같이 비정된다.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은 이것으로 종결되지 않았다. 아리수 이북 땅을 고구려에 빼았긴 아신왕은 영토 회복을 위해 군대를 증강하는 한편, 397년 5월에 태자 전지를 왜에 보내 원병을 요청하였다. 7월에는 대대적인 군대 사열을 실시하고, 이듬해 3월에는 고구려를 치기 위한 전초기지인 쌍현성을 쌓았다.
이렇게 되자 다시금 양국간에 전운이 감돌았고,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신라에서는 왜의 침입을 염려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398년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변경을 침입하여 백성 3백여 명을 포로로 잡아가는 등 백제가 아리수 이북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분개한 아신왕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와 말을 대대적으로 징발하고, 왜에 사람을 보내 신라를 공격해줄 것을 요청했다. 백제는 왜가 신라를 치면 고구려가 원군을 보낼 것이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칠 계획이었다.
이에 왜는 399년에 대선단을 파견하여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이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전국이 유린되고 서라벌이 함락 진전에 놓이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광개토왕은 신라의 원병 요청에 대비하여 하평양에 내려가 병력을 순시하였다. 그 때 신라에서 보낸 사신이 광개토왕을 찿아와 원군을 요청하였고, 광개토왕은 신라의 원군 요청을 받아들여 출병을 결심하게 된다.
하지만 고구려는 쉽사리 신라를 지원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후연이 호시탐탐 고구려를 노리다가 급기야 399년 2월에 연 왕 모용성이 병력 3만을 이끌고 신성과 남소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기 때문이다. 모용성은 주변 7백 리의 땅을 점령하고 백성 5천여 호를 그 곳에 이주시켜 놓고 돌아갔다.
서북 변방이 위협받자 광개토왕은 한동안 신라에 대한 원군 파병을 보류한채 연을 주시했다. 하지만 신라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광개토왕은 400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신라로 보냈고, 자신은 나머지 군사와 함께 도성에 머물며 연의 동태를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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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비는 고구려 19대 왕인 광개토왕(391∼412)의 훈적(勳積)을 기리고 왕릉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그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 9월 29일에 세운 석비(石碑)다. 높이 6.39m, 무게 37t에 이르는 이 거대한 비석은 현재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 있다. 이 비석의 사면에 모두 1775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중 150여자는 현재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다.
광개토왕 비문은 내용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부에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왕계(王系), 그리고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2부에는 광개토왕이 수행한 정복활동의 내용과 그 성과를 연대별로 서술해놓았다. 3부에는 왕릉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수묘제(守墓制)를 개혁했다는 내용과, 수묘인의 출신지 등을 밝혀 놓았다.
광개토왕비가 유명해지게 된 것은 일본이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비문을 조작했다는 비문변조설이 확산되면서부터. 건립 이래 1590년간이나 그 자리에 서 있는 이 비석의 조작설이 나오게 된 것은, 이 비석이 재발견되는 과정에서 석연찮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 비문 조작설 제기 되면서 해석 논쟁 치열
발해 멸망 후 한국사의 무대가 한반도로 국한됨에 따라 광개토왕비는 우리 민족의 기억 속에서 한동안 사라졌다. 광개토왕비가 우리 문헌에 다시 등장한 것은 조선조에 이르러서였다. 이때는 금나라 황제의 업적을 적어놓은 비로 알고 있었다. 이 비가 고구려 광개토왕비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청나라가 건국 후 지안을 포함한 백두산 지역 일대를 황족(皇族)이 발생한 신성지역이라 하여 봉금(封禁)함에 따라 비석 주변 일대는 모두 황무지로 변했다. 19세기 말 봉금이 해제되고 지역개발이 시작되면서 광개토왕비의 존재가 다시 알려지게 됐다. 중국학자들은 금석학적으로만 관심을 가졌으므로 본격 연구는 일본 참모본부 소속의 관변학자들에 의해 진행됐다. 만주 정세 파악을 위해 파견된 스파이 사코 가게야키(酒勾景信)가 1883년 비의 탁본을 일본으로 가져간 뒤 약 5년간 참모본부에서 비밀리에 연구했던 것. 일본에서는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를 합리화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를 광개토왕비 신묘년조(辛卯年條)에서 찾았다고 흥분했다.
이로부터 이른바 신묘년조의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이 구절을 둘러싼 해석은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지만 내용상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어서 조공을 바쳐왔는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와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이다. 이것은 일제강점기 관변학자들이 주장한 내용이다.
둘째, 위 기사에서 辛卯年來와 渡海破를 끊어 읽고, 이 사이에 주어인 고구려가 생략됐다고 보는 설이다. 한말의 유학자 위당 정인보는 이런 시각 아래 바다를 건너 백제와 그 다음에 등장하는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은 주체가 왜가 아닌 고구려라고 보았다.
셋째, 신묘년(391년)조는 그 다음에 등장하는 영락6년(396년)조의 기록, 즉 고구려가 백제를 쳐서 58성 700촌을 함락시킨 백제 정벌을 합리화하기 위해 왜를 등장시켰다는 설이다.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백제침공을 위한 명분용으로 고구려가 과장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1974년 일본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에 의해 제기됐다.
● 왜(倭), 당시 국제관계의 주요변수
그런데 1970년대 재일교포학자 이진희씨가 광개토왕비에 석회를 발라 비문을 조작했다는 설을 제기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이는 식민사관의 청산과 민족사학의 계승발전이라는 점에 관심을 갖고 있던 한국 사학계의 주목을 끌었고, 나아가 일반인들에게까지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중국학자 왕젠췬(王健群)이 비에 석회를 바른 것은 탁본의 편리를 위해서였을 뿐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비문변조설은 많이 퇴조했다. 중국의 개방 이후 비(碑)를 직접 볼 수 있게 됐고, 석회가 발라지기 전에 떠낸 원석탁본(原石拓本)도 발견됐다. 하지만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아 비문변조설과 그 부정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광개토왕 당시 왜가 한반도에서 벌어진 국제관계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고 있었다는 점과, 그때 왜의 활동은 항상 백제와의 관련 아래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쪽에서는 왜의 실체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경향이 있고, 일본 쪽에서는 이를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다. 광개토왕 비문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4세기 말∼5세기 초 한반도 남부지역의 국제관계는 백제-가야-왜가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었고, 고구려-신라가 이에 대한 상대세력으로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여기에서 양측의 주축이 된 나라는 백제와 고구려였다.
김현숙 경북대 영남문화연구권 책임연구원
▼고구려는 독자적 ‘大王國土’▼
○광개토왕비의 천하관
광개토왕비가 갖는 역사자료로서의 중요성은 고대 한일 관계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광개토왕비는 4, 5세기 고구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발전 수준, 당시 고구려인의 정신세계를 종합적으로 보여 주는 타임캡슐이다.
이 중에서도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고구려사 귀속 문제와 관련해 특히 주목되는 것이 고구려왕의 천하관(天下觀)이다. 비문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 보면 고구려왕이 중국과 다른 독자적 천하관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왕의 천하 속에는 먼저 대왕국토(大王國土)에 살고 있는 고구려민이 있고 그 외곽에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고 충성을 다해야 하는 속민(屬民)인 동부여와 백제 신라 숙신이 있었다.
이들 외에 비문에 등장하는 왜(倭)와 거란의 일파인 패려(稗麗)는 타파, 또는 공파의 대상이었을 뿐 자국의 천하 안에 넣을 존재가 아니었다. 당시 고구려와 가장 빈번하게 전쟁을 벌였던 후연(後燕)에 대한 내용은 비문에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중국은 당시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관심 밖에 있는, 즉 별개의 천하에 속하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4, 5세기 고구려왕의 천하관을 보면 당시 고구려가 자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하는 중국측 주장이 억지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5만 병력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왜군은 황급히 신라에서 발을 빼기 시작하였고 고구려는 고삐를 늦추지 않고 왜군을 압박하자 왜는 신라인 수 천을 포로로 잡아 왜로 돌아갔다.
이렇게 왜군이 황급히 물러나자 고구려의 후미를 치려던 백제도 쉽사리 군사를 움직이지 못했고 고구려 공격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고구려군은 이처럼 싸우지 않고 신라에세 왜군을 내쫓았고, 신라의 내물왕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고구려에 대한 조공을 맹세했다.
이처럼 신라에 대한 원군 임무를 달성한 고구려는 드디어 후연을 칠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그리고 402년에 군사를 동원하여 빼았겼던 신성과 남소를 회복하고 후연의 평주를 공격하였다. 이에 평주 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고, 고구려군은 평주를 점령한 후에 여세를 몰아 유주를 압박하였다. 그러다가 404년 11월에 다시금 유주로 진격하여 후연의 도성을 향해 치달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왜와 백제가 연합군을 형성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 때문에 고구려군은 퇴각하여 평주와 신성, 남소 등을 다시 모두 잃고 요동성까지 밀리는 형세가 되고 말았다.
왜와 백제는 산동의 백제군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수군을 이용하여 고구려의 대방지역을 공격하였고, 기습을 받은 고구려군은 당황하여 몰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광개토왕은 평양을 수비하던 정예병력을 동원하여 총력전을 펼친 끝에 가까스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퇴각시켰다. 또한 요동성을 에워싸고 있던 연군도 고구려군의 수성전을 뚫지 못하고 물러갔다.
아렇듯 후연, 왜, 백제 등의 침략을 가까스로 막아내긴 했지만 고구려의 국력소모는 엄청났다. 그러나 전쟁은 다시 406년 12월에 이어졌는데 후연의 모용희가 그해 7월에 거란을 치기 위해 출병했다가 거란의 병력에 밀려 공격도 하지 못하고 퇴각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그는 퇴로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고구려의 목저성을 선제 공격하였으나 피로에 지친터라 승리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에 광개토왕은 후연의 위협이 사라지자 백제의 대륙기지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판단아래 407년 평양 동황성과 평양성을 증축.수리하여 전쟁에 대비하고, 기병과 보병 5만을 동원하여 백제군을 공격하였다. 그 결과 백제의 6개 성을 함락하고 백제군 전체를 초토화 하여 백제의 대륙기지를 현저히 약화시켰다.
그 무렵 후연이 무너지고 남연과 북연으로 갈라졌다. 고구려와 영토를 맞대고 있던 북연의 왕은 고운이었는데, 그는 모용보의 양자였지만 고구려 출신으로 그는 고구려에 대해 호의를 보였고, 고구려 역시 그의 호의를 받아들여 북연과 화친을 맺고 변방을 안정시킬 수가 있었다.
변방이 안정됨에 따라 광개토왕은 409년 왕자 거련을 태자로 삼고, 평양의 백성들을 동쪽의 독산 등 새로 쌓은 6개 성으로 이주시켰다. 또 백제로부터 빼았은 남쪽지역을 순행하며 그 곳 백성들을 위무함으로써 내정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듬해인 410년에는 국력이 쇠락해가던 동부여를 정벌하고 조공을 약속받았으며, 이 때 동부여의 주요 귀족들이 대거 고구려에 귀순하였다.
이처럼 광개토왕은 주변 국가들을 모두 평정하여 고구려의 위상을 한층 높였으며, 재위말기에는 내정의 안정에 주력하여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던 백성들의 삶을 진작시키는 데 열중하였다. 그리고 서기 413년 10월 3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광개토왕은 1명의 왕후에게서 거련(장수왕)과 승평, 두 명의 아들을 얻었지만 왕후와 차남 승평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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