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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실록: 제16대 고국원왕 실록 본문
고구려 실록 : 제 16대 고국원왕 실록
(재위: 331년 2월-371년 10월, 40년 8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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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시대=고구려는 완전히 중국 군현에서 벗어나 있다. 노란색으로 선명하게
분리돼 있고, 한군현이 대거 후퇴돼 있다. 한반도 남부는 아직 삼한으로 표시돼 있다.
모용 선비의 성장과 고국원왕의 수난
고국원왕이 즉위할 무렵 모용 선비는 더욱 힘을 강화하여 남하정책을 실시한다. 이 때문에 고구려의 서남쪽 변방이 위협받는다. 거기다가 산동반도에서 꾸준히 팽창정책을 펴오던 백제가 더욱 힘을 키워 북진정책을 감행하고 있었다. 신진세력의 강성으로 고구려는 잊지못할 수난을 경험하게 된다.
고국원왕은 미천왕과 왕후 주씨의 장남으로 아명은 사유, 이름은 소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서기 314년(미천왕 15년) 정월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331년 미천왕이 죽자 고구려 제16대 왕이 되었다.
중국의 5호 16국 시대
서진(西晋)이 기원 316년 흉노에게 멸망하자 서진(西晋)의 일족인 사마예는 317년 건업(현재의 남경)을 건강으로 개명하고 이 곳을 수도로 동진을 관중이라 불리는 왕도의 도움으로 강남 지방 호족들을 복종시켜 동진의 기반을 튼튼히 해 나갔다.
동진 정권이 수립된 후 6년째에 동진의 중신 왕돈이 형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건강을 공략, 함락시키고 반대파 중신들을 죽이거나 추방하였다. 동진의 황제 사마예는 왕돈의 반란에 심한 분노를 느껴 발병하여 죽고 그 후 왕돈의 난은 평정되었다.
동진 정권의 권력에는 북방에서 내려온 호족 왕씨가 강남 지방의 호족 세력이 2대 지주를 이루었는데 약 1백년 동안은 왕씨 일족과 그 뒤를 이은 유씨(庾氏), 사씨(謝氏), 환씨(桓氏) 등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동진은 끝내 중국 북부를 수복하지는 못하였으나 383년에는 비수의 대전에서 전진왕(前秦王) 부견의 대군을 격파함으로써 양자강 이남의 땅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동진은 말기에 이르러 남조 송(宋)을 세운 유유(劉裕)에게 멸망 당하였다.
한편 동진 왕조와 때를 같이하여 중국 북부에서는 흉노, 선비, 갈, 저, 강 등 다섯 이민족이 약 130년 간에 걸쳐 중국 북부에 16개의 왕조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를 오호십륙국이라 부른다.
![](http://www.subkorea.com/education/history/hist/chn/jpg/5ho16kuk.jpg)
이들 이민족은 일찌기 후한 말. 삼국시대에 이미 중국 북부에 이주하여 한민족과 섞여 살다가 서진 왕조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304년 남흉노의 수장 유연이 산서에서 독립하고 316년 그의 아들 유총이 서진 왕조를 멸망시킨 이후 중국 북부는 분열 상태에 빠져 오호 십륙국이 각지에 할거하게 되었다.
그동안 전진이 한 때 중국 북부를 통일하였으나 비수의 대전에서 동진에게 패함으로써 통일의 꿈이 와해되었다. 다음으로 선비족의 척발씨가 세운 북위가 점점 강력해져 주위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439년 다시 중국 북부를 통일함 으로써 오호 십륙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즉, 중국 북부는 북위가 통일하고 중국 남부는 송의 유유가 통일함으로써 남북조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고국원왕은 즉위하자마자 곧 졸본에 가서 동명성왕의 사당에 제를 올리고, 전국의 도성을 순시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병든 자들을 구제하였다. 이렇게 민생을 먼저 돌본 후에 서기 334년에는 자신이 거처하던 평양성을 증축하고 평양성 동쪽에 동황성을 축조했다. 이듬해에는 북쪽에 신성을 쌓았다. 이는 당시 강성해 지고 있던 모용 선비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었다.
선비족의 이동로
그 무렵 모용 선비를 이끌고 있었던 모용황은 337년에 국호를 연(燕)이라 하고, 남하정책을 시도했다. 모용부는 그때까지 요하 상류 양안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으나 연을 세우면서 발해만 연안의 용성(조양)에 국도 조성작업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예상대로 연의 모용황은 339년 고구려를 칩입하여 북쪽에 새로 쌓은 신성까지 밀고 왔다. 그들은 무력시위를 벌이며 고구려에 동맹을 요청했고, 고국원왕이 이를 받아들이자 군대를 철수했다.
고국원왕은 동맹약조에 따라 이듬해인 340년에 맏아들 구부(소수림왕)를 연의 도성인 양안에 보내 예방케 했다. 고구려 조정은 신진 강국으로 성장한 연의 침입을 막기위해 태자를 보내 모용황에게 인사를 하게 하는 다소 굴욕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고구려 조정의 저자세에도 불구하고 모용황은 침입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중원으로 진출할 계획을 가졌고, 중원을 치기 위해서는 먼저 고구려를 눌러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의 침략을 눈치 챈 고구려는 324년 2월에 환도성을 수리하고, 그 외곽에 있는 국내성을 보수한 다음 일차적인 천도를 단행한다. 평양성은 동천왕 시대 관구검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불타자 임시방편으로 옮겨온 곳이기에 그다지 견고하지 못하고 모용황의 침입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 판단했다. 이 때문에 고국원왕은 평양성의 동쪽에 동황성을 쌓아 거처를 옮길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연나라 상황이나 모용황이 용성으로 천도를 서두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동황성이 완공될 때까지 비교적 안전한 환도성에 가서 머물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환도성의 천도는 모용황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꼴이 됐다. 마치 고구려가 연나라 군대가 무서워 피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환도성으로 천도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들게 되었고, 고구려 백성들에게 불안감을 심어 주었으며 모용황의 침략이 곧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모용황은 이를 침략의 호기로 판단하고 용성으로 천도한 지 1개월 만인 342년 11월 병력 5만 5천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모용황은 자신이 4만 병력, 장수 왕우로 하여금 1만 5천을 나누어 북쪽과 남쪽 두 길로 공격했다. 북쪽은 평탄하여 주력부대가 이동하고 험난한 남쪽 길은 조력부대가 이동하는 게 정상이나 모용황은 반대로 주력을 이끌고 남쪽 길로 이동했다.
모용황의 이러한 결정은 고구려의 허를 찌르기 위함이었다. 이에 고국원왕은 아우 고무에게 5만 병력으로 북쪽길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1만 병력을 이끌고 남쪽 길을 지키다가 모용황의 4만 군대에 패주하여 호위병 몇 명만 대리고 도주하는 바람에 미처 피하지 못한 환도성의 왕족과 백성들은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이때 북쪽 길로 들어덕친 왕우의 1만 5천은 고구려군에게 전멸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모용황은 더 이상 전진을 미루고 포로로 잡은 태후 주씨와 왕후를 비롯하여 도성민 5만을 용성으로 압송하고, 도중에 고구려군의 반격을 염려하여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꺼내 싣고 가는 파렴치한 행동을 자행했다.
고구려 왕 계보도 (삼국사기에 의거)
해모수═╤═유화부인(하백의 딸)
│
소서노═╤═ 1.추모(bc37~19)═╤═예씨부인
│ │
┌┴┐ 2.유리명왕(bc19~ad18)═╤═송양왕의 딸
비류 온조 │
┌─┬─────┬────┬────┼─────┐
도절 해명 3.대무신왕(무휼) 여진 4.민중왕(해색주) 재사═╤═부여태후
(ad 19~ 44) (44~48) │
갈사국왕녀═╣ ╠═ 원비 ┌──────┼─────┐
호동 5.모본왕(? ? ? ). 6.태조왕(궁) 7.차대왕(수성) 8.신대왕(백고)
(49~53) (54~146) (146~165) (165 ~ 179) │
┌┴┐ │ │
막덕 막근 추안 ㅣ
┌────────┬───────────┬─────────────┴─┐
9.고국천왕(이이모) 발기 ╔═10.산상왕(연우)═╤═후녀(주통부인) 계수
(179~197)║ ║ (197~227) │
╚ 우씨왕후(우소의 딸)═══╝ 11.동천왕(교체)(227~248)
┌────────────────────┼──┐
관나부인(장발미녀)══12.중천왕(연불)(248~270) ═╤═연씨왕후 예물 사구
│
┌───────┬──────────────┴───┬──┬──┬─┐
(??) 13.서천왕(약로)(270~292) ═╤═우씨왕후(우수의 딸) 달가 일우 소발 공주(?)══명림홀도
┌─────────┴──────┐ (부마도위)
14.봉상왕(상부)(292~300) 돌고
┌┴┐ │
(?) (?) 15.미천왕(을불)(301~331)
├───────────┐
16.고국원왕(사유)(331~371) 무
┌────────┴────┐
7.소수림왕(구부)(371~384) 18.고국양왕(이연)(384~391)
│
19.광개토대왕(담덕)(391~412)
│
20.장수왕(거련)(413~491)
├──────┐
조다 승천
│
21. 문자왕(나운)(491~519)
┌──────────────────┴─────┐
22.안장왕(흥안)(519~531)══한씨미녀 23.안원왕(보연)(531~545)
│
24.양원왕(평성)(545~559)
│
25.평원왕(양성)(559~590)
┌──────────┬────────┬───┐
26.영양왕(원)(590~618) 27.영류왕(건무)(618~642) 태양 평강공주═온달(부마도위)
│ │
환권 28.보장왕(보장)(642~668)
┌──┬──┼──┬──┐
복남 임무 덕남 덕무 안승
자살,타살 등 일찍 죽은 왕자 타살된 왕, ══ 부부관계 |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는 2대 유리왕의 아들이자,6대 태조왕의 생부입니다.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固, ?~293)는 13대 서천왕의 차남으로 형인 14대 봉상왕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15대 미천왕의 생부입니다.
. 장수왕의 아들인 조다(助多)는 생부인 20대 장수왕이 413~491년 오래 재위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먼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21대 문자왕(文咨王/?~519)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고구려 : BC 37년 개국~AD 668년 멸망 (28代 725년간)
순번 |
왕명(이름) |
재위 연도 |
재위 기간 |
혈통 관계 |
1 |
동명성왕(주몽) |
BC37년~BC19년 |
18년 |
해모수와 하백의 딸인 유화부인의 외아들. 부인은 예씨<자-2대 유리>와 연씨<소서노 자-비류, 온조> 고구려 개국시조이며 초대 군주. |
2 |
유리명왕(유리) |
BC19년~AD18년 |
37년 |
주몽과 왕후예씨의 장남. 부인은 송씨<자-도절, 해명, 3대 무휼, 여진, 4대 해색주>와 화희와 치희와 후비 |
3 |
대무신왕(무휼) |
AD 18년~44년 |
26년 |
유리와 왕후송씨의 3남. 부인은 원비인 비류국 여인<자-5대 모본왕>과 갈사부여의 갈사왕의 손녀 해씨<자-호동> |
4 |
민중왕(해색주) |
AD 44년~48년 |
4년 |
유리와 첫째 왕후송씨의 5남. 무휼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 |
5 |
모본왕(해우) |
AD 48년~53년 |
5년 |
무휼과 성씨불명 비류국 여인 사이의 차남(호동의제). 부인은 원비 |
6 |
태조왕(궁) |
AD 53년~146년 |
93년 |
유리왕(琉璃王)의 손자이며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와 부여태후 금씨 사이의 아들로 모본왕(慕本王)이 죽은 뒤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7세에 즉위함.119살에 서거하여 한국 왕 중 최장수 왕이며 93년간 통치한 최장수 재임군주임. 부인은 성씨불명<자-막근, 막덕> |
7 |
차대왕(수성) |
AD 146년~165년 |
19년 |
고추가 재사와 부여태후 금씨와의 2남으로 태조왕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자-추안> |
8 |
신대왕(백고) |
AD 165년~179년 |
14년 |
고추가 재사와 부여태후 금씨와의 3남으로 차대왕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자-발기(拔奇). 9대 남무, 발기(發岐), 10대 연우, 계수> |
9 |
고국천왕(남무) |
AD 179년~197년 |
18년 |
신대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남무(男武) 혹은 이이모(伊夷謨)라 한다. 부인은 우씨 |
10 |
산상왕(연우) |
AD 197년~227년 |
30년 |
신대왕의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어 즉위하였다. 부인은 소후후녀<자-교체(동천왕)> |
11 |
동천왕(교체) |
AD 227년~248년 |
21년 |
산상왕과 소후후녀의 아들. 아명은 교체, 휘는 우위거(憂位居) 또는 위궁(位宮)라함 부인 성씨불명<자-12대 연불, 예물, 사구과 후궁 동해녀 |
12 |
중천왕(연불) |
AD 248년~270년 |
22년 |
동천왕 아들.243년(동천왕 17) 태자가 되었고, 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부인은 연씨<자-13대 약로, 달가, 일우, 소발>과 관나부인<자-?> |
13 |
서천왕(약로) |
AD 270년~292년 |
22년 |
중천왕과 왕후연씨의 차남. 부인은 우씨<자-14대 상불, 15대 을불> |
14 |
봉상왕(상불) |
AD 292년~300년 |
8년 |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 |
15 |
미천왕(을불) |
AD 300년~331년 |
31년 |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차남. 부인은 주씨<자-16대 사유, 무> |
16 |
고국원왕(사유) |
AD 331년~371년 |
40년 |
미천왕과 왕후 주씨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17대 구부, 18대 이연> |
17 |
소수림왕(구부) |
AD371년~384년 |
13년 |
고국원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 |
18 |
고국양왕(이연) |
AD 384년~391년 |
7년 |
고국원왕의 차남. 부인은 성씨불명<자-19대 담덕> |
19 |
광개토대왕(담덕) |
AD 391년~412년 |
21년 |
고국양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0대 거련, 승평> |
20 |
장수왕(거련) |
AD 413년~491년 |
78년 |
광개토대왕의 장남. 475년 백제 한성(漢城) 함락하고 개로왕 살해. 481년 신라 8성을 점령. 영토가 남은 아산만과 죽령(竹嶺), 서는 요하, 동은 홋카이도 훈춘, 북은 카이위안 개원까지 확장해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부인은 성씨불명<자-조다, 승천> |
21 |
문자명왕(나운) |
AD 491년~519년 |
28년 |
장수왕의 손자(조다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2대 흥안, 23대 보연> |
22 |
안장왕(흥안) |
AD 519년~531년 |
12년 |
문자명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 |
23 |
안원왕(보연) |
AD 531년~545년 |
14년 |
문자명왕의 차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4대 평성, 세군> |
24 |
양원왕(평성) |
AD 545년~559년 |
14년 |
안원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양성> |
25 |
평원왕(양성) |
AD 559년~590년 |
31년 |
양원왕의 아들. 제일부인 성씨불명<자-26대 원, 평강공주>. 제2부인 성씨불명<자-27대 영류왕, 28대 보장왕> |
26 |
영양왕(원) |
AD 590년~618년 |
18년 |
평원왕의 제일부인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환치> 수나라 문제와 양제가 30만과 113만 대군으로 침공해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대승해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됐다. |
27 |
영류왕(건무) |
AD 618년~642년 |
24년 |
평원왕의 제이부인의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환권> |
28 |
보장왕(보장) |
AD 642년~668년 |
26년 |
평원왕의 제이부인의의 차남. 제1부인 성씨불명<자-복남, 임무, 덕무> 제2부인 성씨불명<자-안승>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으며,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의 파상적인 공격을 받아 고구려가 멸망하자 체포되어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복국(復國)을 꾀하였다가 실패한 뒤 사망한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
이 때문에 고구려군은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지 못하고 관망해야 했으며 고구려는 연나라의 신하국이 되겠다는 서약을 해야만 했다. 이후 343년 2월에 미천왕의 시신은 돌려 받았으나 태후 주씨는 용성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했다. 이는 연나라가 화북평원을 공략할 시 고구려가 뒷통수를 치지 못하게 함이었다.
한편 고구려는 새롭게 수축한 평양 동황성으로 천도하고 동진과 화친을 맺어 연나라에 압력을 가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모용황은 애초 계획대로 발빠르게 영토확장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우문 선비를 병합하고, 배후를 염려하여 345년 9월 다시금 모용각을 보내 고구려 남소를 함락시켰다.
모용황의 팽창정책에 고구려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태후와 왕후가 연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는 한 일방적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모용황이 348년 사망하고 아들 모용준이 왕위에 올랐다.
이에 고구려는 연에 대해 온건정책을 쓰면서 포로로 잡아있던 연의 동호이군 송황을 연나라에 돌려 보냈다. 이에 모용준은 고구려에 대해 다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시작하면서 적극적으로 남하정책을 추진하고 있던터라 고구려와 더 이상 관계를 악화시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모용준은 남하정책을 추진하면서 남쪽에 진치고 있던 단 선비를 몰락시킨 후에 도읍을 재현으로 옮기고 다시 화북에서 후조를 멸망시키고 위를 세운 염민을 몰리치면서 화북일대를 통일한다. 그리고 업(화북 임장)으로 도읍을 옮겨 왕을 자칭하게 된다.
이렇듯 연의 시선이 중원에 집중되고 있을 때 고구려는 355년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 태후와 왕후를 돌려보내 줄 것을 간청한다. 이에 모용준은 더 이상 고구려와 관계를 악화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태후와 왕후를 돌려보내 준다.
이후 연과 고구려는 한동안 충돌없이 지냈다. 연의 모용준 이래 얼마동안 번영을 누리다가 점차 왕실은 사치와 향략에 빠져들면서 멸망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서쪽에서는 저족이 세운 진(전진)이 세력을 확장하여 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진나라는 349년 저족 추장 부흥이 건립한 국가로 초기에는 관중을 근거지로 삼았으나 부흥의 아들 부건이 장안을 도읍으로 정하고 국호를 진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그 후 부생이 뒤를 이어 폭정을 일삼다가 부건의 조카 부견에 의해 제거되고 왕권을 잡은 부견은 한족 왕맹을 재상으로 세워 진을 강국으로 건설한다. 이어 370년 날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연을 침공하여 모용위를 사로잡고 멸망시킨다. 이후 부견은 남하하여 동진의 익주를 탈취하고 서로는 구지와 양, 북으로는 대국 등 화북지방의 할거 세력들을 멸망시키고 화북지방을 통일한다.
이러한 중원의 소용돌이 가운데 고구려는 연의 영역으로 진출할 기회를 노린다. 그런데 이 때 남쪽에서 새로운 신진세력이 북진하고 있었는데, 다름아닌 백제였다.
백제는 5호 16국 시대가 전개되고 서진이 몰락하자 화북지방의 주인이 사라진 틈을 노려 고이왕 대에 형성한 대륙 영토를 기반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백제는 건국초기부터 산동반도 주변에 근거지를 형성한 바 있으나 고구려와 후한 세력에 밀려 근거지를 마한이 지배하고 있던 한반도로 옮겼다. 하지만 백제는 낙랑,말갈 등과 패권 다툼을 벌이며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꾸준히 대륙에서 명맥을 잇다가 마침내 변방족이 강성해져 중원이 여러 나라로 갈라지자, 그 상황을 이용하여 일부 근거지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 영토를 확장하였던 것이다.
대륙백제의 영토확장
백제는 모용씨의 전연이 전진에 의해 멸망을 눈앞에 두자 발해 연안에서 힘을 형성하여 요서 지역으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서기 369년 9월에 2만의 군사로 백제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치양전투에서 백제의 태자 근구수가 이끄는 군사에 패해 군사 5천을 잃고 오히려 몰리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370년에 진나라 왕맹이 연을 격파하였고, 백제의 근초고왕은 그 상황을 놓치지 않고 북진정책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에 고구려는 371년 9월에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를 선제공격하였다. 하지만 패하 강가에 숨어있던 백제의 복병에게 기습을 당해 패하여 퇴각하였다. 백제는 승세를 놓치지 않고 고구려를 향해 진군하였고, 마침내 서기 371년 10월에 백제의 근초고왕은 자신이 직접 3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급습하기에 이른다. 백제의 기습을 받은 고구려는 미처 대책을 세우지 못하여 수세에 몰렸고, 급기야 군사를 지휘하던 고국원왕이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는다.
고국원왕이 화살을 맞자 태자 구부가 군대를 통솔하여 백제군에 대항한다. 구부의 활약으로 가까스로 평양성을 지키고 백제군을 퇴각시켰지만, 화살에 맞은 고국원왕은 결국 상처가 심해져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서초동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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