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고구려 실록 : 제13대 서천왕-제14대 봉상왕 실록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고구려 실록 : 제13대 서천왕-제14대 봉상왕 실록

두바퀴인생 2008. 9. 12. 22:06

 

 

고구려 실록 : 제13대 서천왕 - 14대 봉상왕 실록

 

                             

                       

                                    만주, 길림성 집안, 고구려 환도산성(丸都山城) 아래 피라밋군락,


 

제13대 서천왕 실록의 (재위 270년10월-292년 3월, 약 21년 5개월)

 

서천왕의 평화정착 노력과 북방정책

 

중천왕의 국력회복운동을 바탕으로 서천왕은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매진하며 북방정책을 추진한다. 고구려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숙신은 변방을 노략질하며 항거하고, 이 때문에 고구려 조정에서는 숙신정벌론이 대두되어 모처럼 전쟁준비에 돌입한다.

 

서천왕은 중천왕의 차남이며 이름은 약로(혹은 약우)이며 태어난 연대와 모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서기 25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270년 10월 중천왕이 사망하자 고구려 제13대 왕에 올랐다. 장남을 제치고 태자에 책봉된 기록은 상세히 나와 있지 않다.

 

서천왕이 왕위에 오른 이듬해인 271년 정월 서부 대사자 우수의 딸을 왕후로 삼는다. 또 그해 7월 국상 음우가 죽음에 따라 음우의 아들 상루를 국상으로 삼는다. 이는 서천왕이 중천왕의 권력분립정책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즉 연나부에서는 왕후를, 비루나부에서는 국상을 뽑아 힘의 균형을 이루려고 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서천왕 대에도 중천왕 대처럼 조정의 안정을 유지하면서 내부의 평화정착에 주력할 수 있었다.  272-273년 사이 여름에 서리가 내리는 등 농사를 망치자 백성들이 굶주리고 유랑민이 발생하는 등 민심이 흉흉해지자 서천왕은 국고를 열어 환곡을 나누어 주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어려움을 극복하게 된다.

 

경제 위기를 넘긴 서천왕은 내부적으로는 안정을 유지하면서 밖으로는 북방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는데, 276년 4월부터 4개월 동안 동북방에 있는 신성을 직접 순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280년 10월 숙신이 고구려 변방을 칩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자 고구려 조정에서는 숙신정벌론이 대두되기 시작하여  마침내 서천왕의 동복 아우인 대군 달가를 정벌대장으로 하여 숙신 정벌을 시작했다. 고구려군이 숙신 본토를 치고 들어가자 숙신군은 당황하여 도주하였으며 숙신의 본거지였던 단로성을 빼았고 추장을 생포하여 사형시킨다. 또한 끝까지 버티던 숙신인 6백여 호를 부여의 남쪽 오천으로 이주시켰으며, 7개 부락을 항복시켜 군영에 예속시켰다.

 

승전보가 전해지자 서천왕은 달가를 안국군에 봉하고 도성과 지방의 군사를 통괄하는 임무를 맡겼으며 양맥과 숙신 등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고구려가 숙신을 정벌하는 동안 서쪽에서는 선비가 힘을 키우고 있었다. 선비는 진이 오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서서히 남하하여 281년에 요서의 창려현을 습격하였고, 285년에는 추장 모용외의 지휘아래 진의 유주를 침공하였다. 또한 동쪽으로 부여를 습격하여 부여성을 함락시키고 부여왕 의려는 항전하다가 패색이 짙어지자 자살하였고, 선비는 부여인 1만 명을 자신들의 본토로 끌고 갔다.

 

이렇게 하여 부여 조정은 완전히 무너지고 일부 세력은 흑룡강을 건너 북옥저로 피신하여 임시 조정을 세웠으며 일부는 진나라 원군에 힘입어 부여국을 다시 세웠다. 이 때문에 두 개의 부여국이 생기게 되었다.

 

이처럼 모용 선비에 의해 부여가 둘로 갈라지는 사태가 일어나자, 고구려는 북방으로 군사를 보내 부여 영토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북부여원이라 부르는 한편, 북옥저로 찿아든 부여 임시 조정을 관리하였다. 이처럼 고구려의 북방 영토가 상당히 확장되자 북방과 서방에서 선비와 패권 다툼이 이어지게 된다.

 

서천왕이 북방정책에 매진하여 도성을 자주 비우자 왕족 내부에서 모반의 움직임이 일었다. 서천왕의 아우인 일우와 소발이 모반 계획을 세우고 병을 핑계삼아 온탕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무리를 모아 유언비어를 유포시키고 국가가 위기에 봉착하여 새로운 임금이 필요하다는 등 불온한 말을 퍼뜨린다.

 

이에 서천왕은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 국상을 시켜주겠다는 거짓 칙서를 전하게 한다. 칙서를 받은 그들은 부랴부랴 도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은 도성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서천왕이 명을 받은 역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후 서천왕은 다시 북방정책에 매진하다가 남방으로 진출을 모색하게 되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92년 3월에 생을 마감한다.

 

 

 

 

제14대 봉상왕 실록(재위 292년 3월-300년 9월 , 8년 6개월)

 

폭정을 일삼는 봉상왕과 창조리 반정

서천왕 사망 후 성정이 포악하고 사치를 일삼는 봉상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 조정은 난국을 맞는다. 더구나 선비족 모용부의 강성으로 전란에 휘말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흑기로 치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상왕의 폭정은 멈추지 않는다.

 

봉상왕은 왕후 우씨의 맏아들로 이름은 상부(혹은 삽시루)이며 언제 태어났는지, 태자는 언제 책봉되었는지 기록이 없다. 또한 왕위에 오른 시기도 정확하지는 않으며 숙부인 달가를 죽인 292년 3월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 같은 성품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친족 살해도 서슴치 않는 악랄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 탈상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안국군 달가를 살해하는데, 그는 숙신 정벌 공로로 안국군에 임명되어 행정 및 군사에 관한 직책을 수행하였으며 숙신과 양맥지역 자치구를 다스리는 탁월한 정치력과 덕망으로 백성과 군사들을 잘 이끌어 백성들의 신망이 높았다. 봉상왕은 태자 시절부터 달가의 명망을 시기하고 질투하다가 왕위에 오르자 달가에게 역모죄를 씌워 죽인 것이다.

 

폭정을 일삼는 왕에 의해 충신 달가가 살해되자 불안감이 증폭되면서 민심은 이반으로 나타났다. 선비족 모용외는 고구려의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을 틈타 293년 8월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으로 밀려들었다.

 

          

 

선비족 모용외의 급습을 받은 고구려는 봉상왕을 북방의 신성으로 대피시키고 수성전을 준비했다. 이에 모용외는 말머리를 돌려 신성으로 봉상왕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선비족의 기병대가 봉상왕 행열을 거의 가까이 따라왔을 때 신성의 관리로 있던 북부의 소형 고노자는 급히 군대를 몰아 봉상왕을 맞이하는 한편, 기병 5백을 동원하여 뛰어난 전술과 통솔력으로 모용외 기병대를 괴멸시키자 패퇴하여 물러났다.

 

모용외의 군대를 물리쳤다는 소식을 들은 봉상왕은 고노자를 대형으로 높여주고 곡림을 식읍으로 내려 전공을 치하하고 다시 평양성으로 돌아왔다.

 

환궁한 봉상왕은 백성들이 불안해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는 누군가가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요인이 되고 급기야는 자신의 친동생 돌고를 모반혐의를 씌여 자결명령을 내려 자결하게 한다. 이 때 돌고의 아들 을불은 시골로 도망가서 몸을 숨긴 덕에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그러자 민심은 더욱 흉흉해지면서 민간에 나라가 곧 망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조정의 버팀목이었던 국상 상루가 죽자 봉상왕은 남부 대사자 창조리를 국상에 임명하고 작위를 대주부로 격상시켜 준다.

 

창조리가 국상에 올라 민심을 수습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봉상왕에 대한 백성들의 민심이반은 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차, 선비족 모용외는 296년 8월에 다시 군대를 이끌고 재차 고구려를 침입했다. 모용외는 일사천리로 변방을 통과하여 고국원에 도착했다. 모용외는 그곳에서 서천왕의 능을 발견하고 파도록 지시했다. 이 때 부랴부랴 출동한 고구려군이 풍악을 울리면서 달려오자 모용외는 무덤속에서 풍악이 울리면서 갑자기 병사들이 죽어 넘어지자 귀신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겁을 먹고 도망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선비족의 침입에 놀란 봉상왕은 선비족의 침입을 막을 방안을 찿도록 조정 대신들에게 지시했다. 이에 국상 창조리가 신성의 영역을 대폭 확대하여 북부 대형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아 변방을 지키도록 건의했다. 이에 봉상왕은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임명하고 선비족의 침입을 방비토록 했다. 고노자는 백성들에게 신망이 높았으므로 변방을 안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군사들의 사기도 드높았다.

 

고노자의 능력에 힘입어 변방은 안정시켰지만 조정의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298년에는 추수 전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한 해 농사를 망치고 굶주리는 백성들이 늘어나고 국가 재정은 바닥나고 있었다. 그런대도 봉상왕은 궁실을 증축하는 등 국고를 탕진시키고 있었는데,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고 강제로 세금을 징수했다.

 

이러한 봉상왕의 사치와 향락을 위한 국고 탕진은 점점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조정 대신들이 누차에 걸쳐 궁실 증축을 재고하자고 건의했으나 봉상왕은 듣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 모반을 일으킬 것이라는 불안감에 돌고의 아들 을불을 죽이기 위해 전국에 군사를 풀었으나 그는 잡히지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자연 재앙이 연이어 닥쳤다. 299년에는 지진이 일어나 많은 민가가 파괴되었으며 사람들이 죽었다. 이듬해 정월에 다시 지진이 일어났으며 2월부터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계속되자 백성들이 유랑민이 되고 먹을것이 없어 서로 잡아먹는 일이 발생했다. 이런가운데도 봉상왕은 사차와 향락은 그칠줄을 몰랐으며 국상 창조리는 직언을 하였으나 되려 국상을 죽이겠다는 폭언도 서섬치 않자 창조리와 조신들은 더 이상 방치하였다가는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반정을 계획하여 300년 9월 드디어 반정을 감행하였다. 창조리는 군사를 일으켜 궁성의 호위군을 제압한 다음 봉상왕을 붙잡아 별궁에 가두었다. 이렇게 되자 봉상왕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자결하였으며, 그의 두 왕자도 함께 자결하였다. 이로써 봉상왕의 폭정은 종결을 고하게 된다.

 

창조리는 반정을 도모하기 전 미리 사람을 시켜 을불을 찿게 했다. 반정에 성공하자 어렵게 찿아낸 을불을 받들어 봉상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왕위를 잇게 했다. 그가 바로 미천왕이다.

                                                                                                      -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