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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기록자의 마음, 진실은 알 수 없다.

두바퀴인생 2008. 3. 6. 11:58

 

역사는 '기록자의 마음'일 뿐… 진실은 알 수 없다

조선일보|기사입력 2008-03-06 03:23 기사원문보기

영화 '알렉산더'의 장면들

알렉산더

서양에서 두말할 나위 없는 영웅이자 동시에 신화적 인물이 된 알렉산더.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크는 물론 율리우스 시저, 루이 14세, 나폴레옹, 앙드레 말로의 우상이던 알렉산더는 과연 기록대로 위대한 정복자, 불세출의 영웅이었을까? 2004년에 제작된 올리버 스톤의 영화 '알렉산더' 속으로 들어가 보자.

'플래툰' '7월 4일생' '디어 헌터' 등 베트남 3부작으로 유명한 올리버 스톤은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바 있고, 예일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베트남전에도 참전한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역사적 기록 뒤에 있는 개인의 복잡한 내면 심리와 주변 환경을 설명하는 데 공을 들여 역사 뒤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친다. 이런 태도는 '알렉산더'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주목할 것을 이야기를 끌고 가는 나레이터의 존재다. '사후 40년 알렉산드리아'이라는 자막이 보이는 가운데 노인이 과거를 회상하는데, 이 노인은 알렉산더의 친구이자 부하였고, 알렉산더 사후 이집트를 통치했던 프톨레마이오스(안소니 홉킨스 분)다. "영웅의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할 수는 없지! 다시 받아 적게!"라며 '독살'이라는 문구를 '열병'으로 고쳐 쓰게 하는 장면을 통해 감독은 시작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란 것이 100% 진실이 아니라고 선전포고를 하는 듯하다.

이처럼 영화는 제3의 화자를 통한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 방식으로 알렉산더의 빛과 그림자를 조망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역사학자 E. H. 카(E. H. Carr)가 그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강조한 "역사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그 시대를 기록한 '기록자의 마음'이다"라는 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알렉산더 사후 시간적 거리를 두고 역사에 접근하려는 형식을 취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건 올리버 스톤이건 그 누구도 역사적 진실에 100% 도달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알렉산더(콜린 파렐 분)는 그리스에서도 변방 취급을 받던 북쪽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부왕 필리포스 2세(발 킬머 분)와 올림피아스(안젤리나 졸리 분) 사이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서로를 증오하고 폭력을 일삼는 부모 밑에서 유년기를 보낸 알렉산더는 부모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가진 심약한 아이로 묘사된다. 올림피아스는 남편 필리포스를 경멸하는 대신 알렉산더를 제우스의 아들, 아킬레스와 동일시하며 아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는다.

알렉산더는 13~16세까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사사 받아 철학과 의학, 과학적 탐구에 흥미를 갖게 된다. 하지만 문명과 야만을 경계 짓는 스승의 편협한 가르침에 회의를 갖는다. BC 336년, 필리포스가 암살된 뒤 20세로 즉위한 알렉산더는 BC 334년 소아시아로 건너가 고르디움에서 아시아를 통치할 사람만이 풀 수 있다 하는 고르디우스 왕의 매듭을 칼로 끊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그는 승승장구하며 시리아, 페니키아, 이집트, 인도 북부까지 점령했다.

윤희윤 성공회대 강사 '이 영화 함께 볼래' 저자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가우가멜라 전투(BC 331년)는 역사의 판도를 뒤바꾼 전투이자 알렉산더의 천재성을 보여준 전투로 기록된다. 4만 명 대 25만 명이라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우위로 빛나는 승리를 거뒀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는 전투 전 알렉산더의 행동을 잘 묘사하고 있다. 알렉산더는 1만 명이 넘는 병사 하나 하나의 이름을 불러 노고를 치하하고 그리스를 위해 목숨을 바쳐 달라고 호소했다는 것. 이 부분은 영화에서 그대로 재현되며 유명한 '부케팔로스 말 길들이기' 일화와도 연결된다.

마지막 부분은 원정에 지친 장군들이 알렉산더를 독살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은연중 암시하는 장면이다. 기록에 의하면 알렉산더는 BC 323년 6월, 바빌론에서 열흘간 고열에 시달리다 급사하는데 그때 나이 불과 33세였다. 사인은 열병 후유증, 지나친 음주, 과로, 독살 등 설이 분분하다. 사후 제국은 치열한 다툼 끝에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 등 세 나라로 갈라졌다.

소아시아 입구에서 고르디움의 매듭을 과감히 잘라 버렸기에 아시아의 정복자가 될 수 있었던 알렉산더, 하지만 그가 매듭을 풀라는 신탁을 어기고 성급히 잘라 버렸기에 단명했고, 그의 제국도 조각조각 잘려 나갔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史實)은 하나일 수 있겠지만 역사의 기록, 해석은 어차피 기록자 혹은 해석자의 마음 아니겠는가?


일본의 역사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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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가 반도사관을 위해 우리 고대사를 조작했고 ‘대륙의 조선’을 ‘한반도’로 옮겨 놨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보고서는 1910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고문서와 고지도 등 50여종 20만권이 서울 남산에서 소각됐고 대동여지도 역시 1930년 조선총독부의 검열도장을 찍어 공개된 점으로 미뤄볼 때 각색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뿌리깊은 일본의 역사왜곡
 
 전후(戰後) 새 역사의 흐름 속에서 아시아의 청룡으로 떠올라 세계를 주름잡던 일본이 지난 십여 년간 고베발 경기침체의 국면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벌인 역사조작극이 이제 국제무대의 힘겨루기 판에 놓여 밀고당기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이 오기 전에 그들의 버릇을 바로잡지 못하고 그 동안 수수방관해온 우리 모습이 지금은 그들의 누른 싹수를 키운 밑거름이 되어 버렸다.  
  
  
일본의 임나가 백제와 신라를 지배하다?
  이 책의 저자인 홍윤기 박사는 일본에서 그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연구한 사람으로 피끓는 열정으로 그들의 잘잘못을 파헤치고자 나름의 역사적 사료와 증거들을 들어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책 전체를 꿰뚫는 논지는 찾기 힘들지만, 나열식으로 이루어진 역사왜곡의 실상을 우리 역사의 동시간대에 비교하면서 꼼꼼이 살펴보면, 저자의 역사 사랑의 뜨거운 순정을 느낄 수 있다.
  
  우선 그들이 왜곡하는 역사를 시간대별로 나누어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신라시대 이전의 고대사이다. 그런데 이 부분이 가장 아쉬운 부분으로 본서에서는 이에 대한 내용은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
  
  둘째는 신라시대와 일본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에 관한 부분이다. 본서에서는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되어 저질러지는 일본의 만행을 역사적 사료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신라, 가야지역에 과거 일제강점기 때의 조선총독부와 같이 이 지역을 관할하는 일본의 행정부서가 있었다는 내용으로서, 일본의 조선침략과 대륙침략의 야욕을 위해 조작된 밑바탕인 것이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고사기』(古事記, 712년 편찬)와 두 번째 역사책 『일본서기』(日本書紀, 720년 편찬)에 보면, 이 세상에 실존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로서 9명의 천황들을 만들어놨다. 그중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신라에 쳐들어가서 신라왕의 항복을 받고 신라왕을 마부로 삼았으며 무릎을 꿇고 사죄하게 하고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까지 조공을 바치게 했다고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공황후 섭정 46년이 A.D. 246년으로 신라, 백제, 고구려를 복속시킨 후에 문예와 기술·방직·금은·기계 모두가 삼한으로부터 전래해 와서 일본의 개화를 도운 것이 매우 많았으며, 이에 국운이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한다. 그런데 이 내용을 살펴보면 후진국이 선진국을 침공하여 이기고 갖가지 문물을 배워 번창했다고 하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또한 신공황후의 재위기간이 『삼국사기』 백제왕들의 재위기간과 비교해볼 때, 120여 년이나 앞당겨져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은 5∼6세기 중엽 무렵, 조선의 임나에 설치되었던 출선(出先)기관으로서, 임나 등을 비롯한 그 밖의 백제·신라 등까지도 지배했으며, 서기 562년에 임나가 신라에게 합병되기 전까지 존속했다고 하는 설이다. 이러한 역사왜곡은 일본이 고대 조선인 정복왕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건국된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역사서도 왜곡, 유물도 조작
  이에 대해 저자는 일본 극우사관의 원류를 역사서와 유물의 왜곡 날조로부터 비롯됨을 정확히 꼬집고 있다. 내용인즉 광개토대왕의 비문 훼손으로 광개토왕의 남하가 임나일본부의 일본군의 저항에 부딪쳐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남아있는 광개토대왕비의 사진을 비교하고, 떠진 탁본이 훼손된 비문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로부터 조작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광개토대왕비의 비문 훼손에 대해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비석은 1880년으로 한 농민의 집안 땅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듬해 일본군 중위 사코우 카게아기가 비문을 떠서 해독하였다. 그리고 1907년 4월 프랑스 학자 샤방느가 현지에서 입수하여 1908년 통보(通報)(제2권 8호)에 탁본을 발표했는데, 당시는 새까만 바탕에 자획이 비교적 명료한 문자로 찍혀있었다. 그런데 6년 뒤인 1913년에 세키노 타다스(關野 貞, 1875∼1935, 미술사가, 건축학 전공, 도쿄대 교수)와 이마니시 료우(今西 龍, 1875∼1931, 조선사 전공, 경성제대 교수)가 조사했을 때 찍은 사진에는 비면에 세로줄이 그어지고, 그 사이에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 후로도 나이토우 코우난(內 湖南, 1866∼1934, 동양학자, 도쿄대 교수)이 찍은 사진에는 아예 석회를 발라 비문을 새겼다. 그렇게 그들은 유물마저 파손시키면서 노골적으로 역사 왜곡작업을 벌여왔다.
  
  
  
가공의 인물로 탄생된 일본 천황가의 뿌리
  
  또 임나일본부의 뒷받침을 위해 그들은 그들의 뿌리마저 조작을 하고 있다. 임나일본부라는 막강한 통치기구가 있으려면 상당한 시간을 가지고 이루어진 국가형태가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오랜 역사의 뿌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그래서 이를 위해 제1대 천황부터 9대까지 9명의 가공의 인물들을 만들어 일본역사의 시작시점을 실제보다 1천여 년을 늘여 놓았다. 그나마 역사적 사료의 상세함 등을 들어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10대 스진천황의 즉위 년도도 BC 97년으로 실제보다 500여 년을 앞당겨 놓았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 유물로 주장하는 수많은 국보들의 대부분이 신라와 백제에서 건너갔다. 또한 최근 한·중 양국민의 서슬퍼런 질책의 칼날과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는 가운데서도 고이즈미 총리가 뻔뻔스럽게 참배를 드리고 있는 신사(神社) 또한 바로 신라에서 건너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일본인 쿠메 쿠니타케 교수의 논문들을 빌어 입증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신라는 이미 2세기경부터 나라(奈良) 땅에서 천신사상을 배경으로 신도적인 국가체제를 구성하였으며, 신라의 고대 야마토(大和)지역의 지배는 신라신 스사노오노케토를 정점으로 해서 그의 아들 대국주신을 신앙하는 신도의 국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한다.
  
  이처럼 역사적 사료들과 양심 있는 몇몇 일본 학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한일간 역사의 진실이 만천하에 공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우 일본인들은 그들의 대륙침략의 야욕을 끝끝내 버리지 못하고 현재의 역사대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역사왜곡을 통한 황국사관에로의 복귀
  세번째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이르는 시간대로 바로 일제가 저지른 백여 년 전의 만행들이다. 위안부 문제와 독도문제 등 근대에 일어난 수많은 문제들이 모두 그들의 철저한 역사왜곡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왜곡은 지난 백여 년간의 그들의 만행을 교묘하게 얼버무리며 현재 그들의 정치적 야망을 펼치고, 경제적 수렁에서 빠져 나오고자 하는 도구로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일들은 지난 백여 년을 통해 극우주의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그 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의 일만엔 지폐엔 근대 일본에서 극우주의자의 뿌리가 되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가 그려져 있다. 젊은 시절 그는 자비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민중운동가였지만 후에 “조선이라고 하는 악우(惡友)와 사귀는 것을 거절한다”(脫亞論, 1885)고 하며 조선을 못된 친구라고 무조건 매도한 반한주의자였을 뿐 아니라 동시에 정한론(征韓論)에 앞장섰던 조선 침략주의자였다.
  
  그의 ‘탈아론’은 메이지유신 이후 침략주의 노선의 제국주의적 발상이 되어 이후 일본을 군국주의 침략국가로 이끌게 되었고, 이로부터 역사교과서도 조작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의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어, 이후 1999년부터 일본사회 일각에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등장했는데, 일본 군국주의가 내세웠던 지난날의 황국사관에로의 복귀가 궁극적인 목표이다.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그들은 역사 조작과 왜곡을 통해서 그들의 꿈을 현실화시키려 하고 있다. 그들이 내세운 가상의 역사가 이제는 힘있는 자의 편에 서서 대 일본제국이라는 그들의 망령이 되어 세상의 역사를 뒤집을 시간대에서 폭발하기에 이른 것이다.
  
  선천 역사는 힘있는 자의 편에 서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만사와 만물의 참이 그대로 드러나는 우주의 가을이 오고 있지 않은가?
  
  가을이 되면 모든 생명이 그 진액을 거두어 뿌리로 돌아가듯이 가을개벽을 맞아 우리 역사의 진액을 이제는 거두어야 할 때이다. 우리는 인류 문명의 종주국으로서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고자 하는 가슴 한 켠의 울부짖음과 그 자성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다가오는 가을 세상의 주인됨의 자질을 갖추고 세상의 불의를 바로 잡을 수 있지 않겠는가!
 
 출처 : 월간 개벽
 
 
중국의 동북공정
 

 
 
이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 중국의 동북공정은『신新중화주의』다. 우리나라에서 동북공정 전문가로 불리는 고구려 연구재단 연구위원인 저자(윤휘탁 박사)의 『신新중화주의』를 통해 동북공정 뒤에 숨은 중국의 음모를 파헤쳐 보자.
 
 
 제1부 중국과 한반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는 중국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여태껏 우리가 우방으로 믿어왔던 미국 대신 새로운 대안으로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자유로운 통일 한반도로 향하려는 우리의 장애물로 생각해야 할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저자는 우선 중국의 국가전략인 ‘동북공정’을 올바로 이해해야만 하며 나아가 동북공정을 배태시킨 ‘중화민족 대가정 만들기’의 논리와 그에 수반된 중국의 국부적 미시적 정책과 전략 등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향후 우리의 미래를 예측하고 거기에 합당한 국가전략을 수립하는 데 시급하게 요구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중화민족 대가정’은 주체민족인 한족(漢族)이 비(非)한족과의 장기간에 걸친 통일과 분열의 순환 속에서 형성된 거대한 중화민족의 가족, 통일적 다민족 국가인 중국을 의미한다. 그 구체적인 목표는 중화민족의 부흥과 단결, 중화민족 국가의 주권과 영토의 완결성 유지, 양안(대륙과 대만)의 통일로 집약해서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중화민족 대가정 만들기’는 중화주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과거에 화려했던 중화민족 국가의 새로운 부흥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신新중화주의의 서곡이라 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 자체의 발전을 넘어서서 주변 민족국가와의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해 볼 필요가 있다.
 
 
 제2부 ‘중화민족 대가정’을 만들기 위한 국가 이데올로기
 동양 유교문화의 실질적인 중심이었던 중국은 공산화와 더불어 그들 문화의 근간을 이루었던 유가적 전통을 파괴했다. 이것은 중국인의 의식 속에 큰 문화적 공백을 만들어냈고, 그들이 받아들인 사회주의는 경제발전의 측면에서 한계를 경험했다. 그러다 개혁 개방과 더불어 자본주의 문화 유입으로 중국에서는 사회주의의 미래에 대한 회의감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에 중국정부에서는 체제를 유지 강화하기 위해 사상통제와 사회주의 신념과 애국심을 고취시킬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화민족 대가정 만들기>에 필요한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1990년을 전후로 ‘사회주의 정신문명 건설론’과 ‘애국주의’를 추진하고 있다.
 
 ‘사회주의 정신문명 건설론’은 기존의 사회주의 교육을 강화하는 동시에 개방을 통한 서구 자본주의 문화를 유입하는 정책이다. 하지만 전자를 강조하면 경제발전에 악영향을 주고 후자를 강조하면 체제에 위협이 올 수 있다. 그래서 이 둘 간의 상호마찰을 완화시키는 것으로 ‘사회주의 도덕’을 내세우고 있다.
 
 이것은 유가의 전통사상인 선공후사나 대공무사, 의리관을 강조함으로써 중국인민이 국가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세워 생각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중국 인민 모두를 사회주의 틀 속에 강고하게 묶어 두려는 것이다.
 
 그리고 다민족 국가인 중국이 그들의 모든 민족을 아우르기 위해 만든 이념적 동력이 ‘애국주의’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애국 열기를 불러 일으켜 중화민족을 부흥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 체제를 이끌어온 공산당을 애국주의의 모범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 체제의 이완 방지와 공산당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두 가지 이론 모두 중화민족의 단결을 고취해서 중화민족의 대가정을 만들기 위한 국가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제3부 ‘중화민족 대가정’을 만들기 위한 역사이론
 중국 정부의 국민 통합을 위한 이데올로기는 정치 사상 분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중국 역사 자체를 현재의 필요에 따라 재해석하려는 노력이 개혁 개방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다. 그 결과물이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이다. 그 내용은 중국 영토 내에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모든 민족은 중화민족이고, 그들이 역사 속에서 행해왔던 모든 활동과 그들이 세운 왕조는 모두 중국의 역사적 내용이며 각각의 왕조들이 관할했던 강역들의 총합이 역사상 중국의 강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중국의 당리당략을 위한 현실 편의주의적 관념일 뿐이다. 또한 인간을 역사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피동적인 객체로 격하시키면서 각 역사의 시기마다 존재했던 시대정신을 무시하는 것이다. 현재 티벳 민족이나 위구르 민족의 독립운동이 중국정부에 의해 철저히 탄압받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논리 자체가 현재적인 모순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4부 ‘중화민족 대가정’을 만들기 위한 민족통합정책
 지금까지 국민통합을 위한 국가 이데올로기와 역사이론을 살펴보았지만, 이것만으로 중화민족의 단결에 완결성을 가져오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왜냐하면 지역적으로 발전이 불균등해지면서 민족별 지역별로 생활수준의 격차가 벌어지자, 낙후된 지역 특히 변강민족의 소외감과 불만이 더욱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중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두 가지 민족 통합정책이 ‘서부 대개발정책’과 ‘동북 진흥전략’이다.
 
 중국은 경제의 균등한 발전과 함께 서부변강지구가 중국 대가정의 일부분임을 깨닫도록 하는 문화적 민족통합정책까지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변강민족을 억지로 중화문화 속에 융화시키려는 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그들에게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 동북 진흥전략의 핵심은 낙후된 동북지구를 진흥시켜 주민의 불만을 해소하고 일부민족(특히 조선족)의 이탈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향후 한반도 정세변화를 예측하고 대비하고자 실시되고 있는 문화정책이 바로 ‘동북공정’이다.
 
 그러나 서부대개발이나 동북진흥전략 모두 궁극적으로는 <중화민족 대가정화>를 이루어내기 위한 또 다른 중화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제5부 중국의 ‘동북공정’과 한반도 한국사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문제인 ‘동북공정’에 대해서 살펴보자. 동북공정의 중심 땅인 만주는 과거 요동으로도 불렸던 땅으로 고구려, 발해의 고토이자 우리 역사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근현대에는 열강의 각축장으로 조선의 정치적 망명지였으며, 19세기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이주하는 등 한반도와 깊은 연결고리를 맺고 있다. 이러한 연계성 때문에 한반도의 정세변화는(극단적인 예로 남북통일) 지금 중국의 영토로 인식되고 있는 이 동북지역에 심각한 충격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 발해사를 중국사로 편입함으로써 동북지역에 대한 연고를 강화하고 조선족 문제가 다른 지역의 소수 민족 문제를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되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하려 하고 있다. 또한 북한 지역이 한사군의 관할구역이었으므로 원래부터 중국 땅이었다는 식의 논리를 펴면서 북한정권이나 체제의 붕괴에 대비한 연고관계를 만들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동북공정은 학술적 대응만으로 해결될 성격의 것이 아니라 한·중 사이의 정치적 외교적 국제 역학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동북공정의 역사논리는 신중화주의의 동북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중화민족 대가정을 만들어 과거 동아시아에서 누렸던 맹주 자리를 탈환해 보려는 중국의 문화적 정치적 욕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류문명과 중국 한족 문화의 뿌리는 신교문화의 종주국, 동방의 조선인 대한민국이다. 중국의 거대한 야심도 결국은 가을개벽의 정의로써 심판받을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동방문화 종주국의 뿌리가 확연히 드러나면서 역사는 정의에 따라 진실 그대로 바로잡힐 것이다.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6.11월호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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