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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은 있으되 정취는 없구나...

 

[한강을 걷다](41)강은 있으되 정취는 없구나

입력: 2007년 05월 25일 15:00:07
계곡(谿谷) 장유(1587∼1638)가 그랬다. 본래 지는 봄이 더 어여쁜 법이라고, 그리고 봄에게 묻는다. “바람 따라 날려 가는 일만 조각 꽃 이파리 / 나부끼는 봄빛이여 어디로 떨어지려는가”라고 말이다. 그 봄빛이 대지에 가득했다. 비온 끝이어서인지 하늘은 장쾌하게 푸르렀고 나부끼던 봄빛은 강 위에 내려 앉아 일렁거렸다. 그렇지만 나는 선뜻 강으로 나서지 않았다. 종일 공부방의 창을 통해 한강과 북한산을 바라보다가 해거름이 되어서야 강으로 나섰다.
청담대교 일대에서 시작되는 동호는 이곳 한남대교에 이르기까지의 강을 말한다. 오른쪽에 보이는 산이 남산이다.

압구정동, 강 언저리에 다다르자 저녁놀이 물들어 가는 하늘 위로 그믐달이 떴다. 그러나 그믐이어서인지 달은 샐쭉하기만 할 뿐 그 빛은 강물에 미치지 못했다. 다만 이제 막 불을 밝히기 시작한 가로등 불빛이 강물에 스며들 뿐이었다. 그렇게 어둠이 짙어갈수록 오히려 빛을 발하는 도시의 밤 풍경에 젖어들다가 장유가 지은 ‘야명정기(夜明亭記)’를 떠올렸다. 그가 지인인 호정(壺亭) 정두원(1581~?)의 정자에서 노닐다가 기문을 써 준 것이다.

어느 여름날, 장유는 강 건너에 저쪽에 있었다. 한남대교 북단에 있었다는 제천정(濟川亭) 서쪽의 야명정에 말이다. 그날 밤의 일을 장유가 말하기를 “이때 맑게 갠 밤은 적요하기만 하고 만상(萬象)이 적막 속에 잠긴 가운데 오직 보이는 것이라곤 띠처럼 둘린 장강(長江)에 고즈넉한 달빛만 아른거릴 뿐이었다. 그 밝고도 희디흰 경색(景色)이 위로 하늘에 뻗쳐 은하수와 서로 적셔 주며 비춰 주고 있었는데, 물결을 타고 출렁이며 다가오는 빛살들이 당우 사이에 흘러넘쳐 환한 경지가 눈앞에 툭 터져 전개되면서 마치 수정세계(水晶世界) 안에 있기라도 한 듯 사방을 둘러봐도 기이한 흥취에 젖어들며 정신과 육체 모두 상쾌하게 느껴지기만 하였다”라고 했으니 한강의 야경을 노래한 것이다.

그처럼 정자에서 바라보는 밤 강의 정취가 빼어나 호정의 지인인 백주(白洲) 이명한(1595~1645)이 야명정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그렇지만 장유는 강 곁에 지은 정자라면 응당 그 정도의 아름다움은 완상할 수 있을 것이라며 밤 정경을 자랑하는 호정의 말을 그저 외경(外境)에 치우친 생각일 따름이라고 일축한다. 그리고는 호정에게 묻는다. 진정한 야명의 경지를 알고 있느냐고 말이다. 장유가 말하는 야명의 경지는 이렇다.

“문을 닫아걸고 조용히 앉아서 이 마음을 돌이켜 관조(觀照)하노라면, 외부의 경계가 범접하지 못하는 가운데 내부의 풍경이 스스로 현현(顯現)하면서 하늘의 빛이 발산되어 끝 간 데 없이 환히 비춰 주게 되리라”고 했다. 이는 묵조(默照)하며 자신의 마음속을 바라보면 외경의 아름다움과 함께 내부의 풍경이 서로 응하여 새로운 경지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외경에 집착하여 내부의 풍경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야명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는 강에 비친 달빛에만 매달리지 말고 스스로의 마음속을 환하게 만들라는 이야기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어떤 사물을 바라볼지라도 자신의 마음처럼 환하지 않은 것이 없을 터이니 나 스스로를 관조하는 것이야말로 내 앞에 빼어난 야명을 펼쳐놓는 것이라는 이야기일 터이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시시각각 그 색을 달리하는 물빛은 너무도 유혹적이다. 그 강 곁을 걸어 사우당(四友堂) 한명회(1415~1487)가 지은 압구정(狎鷗亭)이 있었을 만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 그 자리는 정확히 알 수 없거니와 다만 강 건너 있었다는 독서당과 마주보고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뿐이다. 일본 야마모토문화관(大和文華館)이 소장하고 있는 많은 조선의 산수도 중 한 장에 압구정과 강 건너 북쪽의 독서당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그림이 있기 때문이다.

그날은 밤이 깊도록 성수대교로부터 한남대교에 이르는 강변을 걷다가 돌아왔으며 다음날 다시 강으로 나갔다. 잠실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동호를 에돌아 잠실로 갔다가 다시 압구정 언저리로 돌아왔다. 정자가 있었을 만한 자리에 앉아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서거정의 ‘압구정부(狎鷗亭賦)’를 읽었다. 그는 압구정에서 보이는 각 방향의 정경은 물론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동쪽은 산들이 지극히 높아 겹겹이 늘어선 능선들은 용이 날고 범이 뛰는 듯했으며, 강물은 “광나루를 구불구불 돌아서 / 삼전도를 질펀히 흐르다가 / 세차게 흐르다 백 번 꺾어져서 / 더욱 제멋대로 쏟아져 흐르도다 / 저자도는 희미하게 눈에 들어오고 / 늪에는 새매들이 빙 둘러 있도다 / 큰 들은 손바닥처럼 편평하고 / 살곶이 교외의 주위에는 / 말 목장이 빙 둘러 있는데”라고 했으니 새매들이 빙 둘러 앉아 있다는 늪이 곧 독서당이 있었던 응봉(鷹峰) 일대이며 살곶이 주위는 뚝섬(纛島)을 말하는 것이리라. 북으로는 도봉산과 삼각산 그리고 남산이, 남으로는 관악산과 청계산 그리고 대모산이 보이는가 하면 서쪽은 탁 트인 강물이 넘실거리며 바다로 향하는 해문(海門)과도 같았다고 쓰고 있다.

보물 867호인 독서당계회도. 응봉이 과장되게 그려졌으며 산 아래 전각이 독서당이다.(왼쪽) 1531년경의 독서당계회도. 독서당은 지붕만 보이고 오른쪽 뒤로 북한산과 도봉산이 보인다. (오른쪽)
그러나 내 눈에는 강 건너 응봉 정수리와 그 오른쪽 멀리 삼각산이 희끗 보일 뿐 강변에 성곽같이 늘어 선 건물들에 가려 시인묵객들이 앞다투어 읊었던 아름다운 정경은 간 데 없었다. 그것은 응봉에서 이곳을 바라 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강가에 수많았다던 정자는 단 한 채도 남지 않았으며 배를 타고 강 가운데로 나아가도 철옹성처럼 강변에 늘어선 건물들만 눈에 들어 올 뿐이니 강은 있으되 강을 있게 한 주위의 자연풍경은 없는 것이다. 내 어찌 장유가 말하는 야명의 경지를 모르겠는가. 그러나 굳이 해거름으로부터 강을 거니는 까닭은 불빛의 현람함을 탐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낮 동안 적이 실망스러웠던 정경을 어둠에 묻어 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야경(夜景)은 낮보다 더욱 자극적이었으니까 말이다.

장유는 한 때 등잔기름이 없어 책을 읽지 못했던 때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장야무고화(長夜無膏火) 불능독서(不能讀書)’라는 제목의 시에서 “반딧불도 보이지 않고 눈도 도통 내리지 않으니 / 겨울 석 달 공부하려던 계획 문득 차질 생겼네. / 긴긴 밤 한가로이 누더기 보듬고 있을 따름 / 이웃집 기름 빌려 달라 청하기도 부끄럽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는 진나라의 차윤(車胤)이 반딧불을 모아 글을 읽고, 손강(孫康)이 눈(雪)빛으로 글을 읽은 형창설안(螢窓雪案)을 기대했건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긴 겨울밤을 막막하게 지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건너다보이는 응봉 기슭의 독서당은 등잔기름 걱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땔감이나 양식 걱정도 없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었다.

사가독서(賜暇讀書), 곧 나라로부터 휴가를 받아 책을 읽는 것이었으니 오죽 풍요로웠겠는가. 임금이 하사한 수정잔이나 복숭아를 닮은 잔에 임금이 내린 어주(御酒)를 따라 마시는 호사를 누리는 것은 물론 언제라도 동호에 띄울 수 있는 방주(方舟)도 두 척이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공부를 할 수 있는 조건이 좋은 만큼 해야 할 일도 있었으니 각각 읽은 경사(經史)의 권수(卷數)를 계절마다 글로 써서 아뢰어야 했으며, 매달 세 차례 글을 짓되 예문관의 관원의 월과(月課)와 동시에 시행하여 등급을 매겼던 것이 그것이다. 정치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율곡(栗谷) 이이(1536∼1584)가 자신의 정치관을 문답형식으로 풀어 쓴 ‘동호문답(東湖問答)’과 같은 것이 월과의 대표적인 결과이다.

퇴계 이황도 독서당에서 사가독서를 했는데 학봉(鶴峰) 김성일(1538~1593)이 쓴 ‘퇴계선생언행록’에 선생이 독서당에 머물 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도산(道山)에서 사가독서를 하던 날에는 동료들이 모두 구속에서 풀려난 기분으로 검속함이 없이 매일같이 술 마시고 시 읊는 것으로 소일하였으나, 선생께서는 홀로 하루 종일 단정하게 앉아 있거나 혹은 문을 닫고 들어앉아 글을 읽었다. 비록 때때로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서 놀기도 하였으나, 역시 지나치게 놀이에 빠져드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다. 이에 동료들이 모두 그 지기(志氣)와 조행(操行)을 고상하게 여겨 존경하였으며, 자기들과 다르게 처신한다고 시기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세월은 흘렀다. 16세기, 이곳 동호 일대의 한강은 풍류와 공부가 상존하는 조선 최대의 문화공간이었건만 흔적으로 남은 것은 겨우 그림 몇 장과 수많은 시편들뿐이다. 도시는 개발논리를 앞세워 그토록 찬란했던 한 시절의 문화를 깡그리 쓸어버린 것이다. 오죽 한심한 지경이면 독서당이 있었던 정확한 장소조차 제대로 알지 못할까. 당시 강물과 함께 흘렀을 경사문(經史文), 곧 요즈음 말하는 문사철(文史)의 도저한 물결은 오히려 강물보다 더욱 도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강에는 무엇이 흐르며 또 이 강에서 그 어떤 인문학의 밑밥을 건질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어둠 속에 강변 풍경을 묻어도 씁쓸함은 지울 길이 없다. 지나간 날들의 허물을 고치지 못하는 것은 더욱 큰 허물을 짓는 것이며, 지나간 날의 좋은 점을 지켜서 현재에 더욱 함양시키지 못하는 것은 미래를 아름답게 경영하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도시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강은 더 이상 사색의 공간이 되지 못하고 외경만을 가꾸는 장소가 되어버렸으니 이것은 누구의 허물인가.

그만 강을 떠나 돌아서는데 불현듯 퇴계의 글 한 줄이 생각났다. 그가 ‘주자대전’을 읽고 그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가려 뽑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엮고 난 다음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사람이고, 이 책을 읽어도 사람이다(未讀是書猶是人 旣讀是書猶是人)”라고 했다. 참 무시무시한 말이다.

〈이지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