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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안중근 의사 일대기 1

 

 < 안중근 의사 일대기 1 > 

 

 

"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료들에게 각각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여순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기전 두 동생과 홍신부에게 -

 

 - 나라가 풍전등화 같은 백척간두에 몰렸을때,오직 나라사랑과 구국의 일념 으로 국권강탈의 원흉을 쓰러뜨린 안의사의 용기야 말로 우리민족의 살아있는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 주변 열강들의 야욕과 그들의 얽히고 설킨 이해관계에 끼어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의 아픔을 좌시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용감하게 행동으로 맞섰던 그는 유독 의협심이 강하여 불의를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를 못했다.

 

 - 유년에는 학문보다도 산야를 달리며 사냥에 열중하며 남아의 기상을 길렀고, 성년 이후에는 가산을 털어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학교를 세웠으며, 나라의 국권이 완전히 기울었을 때에는 국외로 벗어나 독립을 위한 투쟁과 나라사랑을 외치며 해외동포의 힘을 결집하는데 온 몸을 바쳤다.

 

 -지구촌 사람들이 경천동지케한 거사의 계획도 많은 시간이나 자금이 소요되지 않은 어쩌면 천우신조의 필연적인 결과 였는지도 모른다.

 

 - 안의사는 법정 최후진술에서 " 일본국 4천만 민족이 '안중근의 날'을 크게 외칠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동양의 평화가 이렇게 깨어지니 백년 비바람 그 어느때에 그치리오!" 라고 외쳤으며 

 

 - 형장으로 가면서 " 이번 거사는 내가 할 일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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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의 출생과 성장

 

1879년 기묘년 7월16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성은 안씨요 이름은 '중근', 자는 '응칠'이였다. 배와 가슴에 7개의 점이 있으며 성질이 가볍고 급하여 이름을 중근(重根)이라 지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안인수씨로 진해현감을 역임하였고 6남3녀를 두었는데 태진,태현,태훈,태건,태민,태순의 6남중 셋째인 안태훈씨가 안중근의 아버지로 중년에 과거를 보아 진사로 합격하였으며 조씨에게 장가를 들어 3남1녀를 두었는데 중근,정근,공근의 3형제중 장남이 안중근이였다.

 

1884년 갑신년에 박영효의 천거로 70명의 해외유학생에 뽑혔으나 갑신정변으로 박영효가 일본으로 도망가고 많은 유학생들이 잡혀 살육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게 되자 안중근의 아버지는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으로 70-80여명의 가솔들을 대리고 숨어 들었다.

 

청계동은 전답이 많고 산천이 수려하고 계곡이 깊어 별유천지라, 안중근은 6-7세때 부터 서당공부를 시작하였고 14세때에 할아버지 안인수씨가 돌아가셨다. 중근은 사냥을 즐기고 글 공부는 소홀히 하여 주변 사람들로 부터 야단도 맞았으나 중국의 초패왕에 비유하면서 '이름석자만 쓸 줄 알면 되지 않느냐'하면서 말타기와 총쏘기를 즐겨하였다. 1894년 16세때에 아내 김씨에게 장가를 들어 두아들과 딸 하나를 두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는 동학당이 창궐하여 청계동에도 그 여파가 미쳐 안중근의 아버지는 포수들을 모으고 전 가솔들과 청계산중에 진을 치고 동학군에 항거하였다. 동학군 2만여명이 몰려오자 70여명으로는 대적이 되지 않자 겨울이라 동학군이 추위에 더 이상 전진을 못하고 진을 쳤다. 안중근 아버지는안중근을 포함하여 포수들과 가솔들 중 청장년들을 모아놓고

 

'내일이면 2만명의 동학군이 이곳으로 몰려오면 우리들은 전멸을 당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밤에 적들이 방심한 틈을 노려 일시에 기습을 한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다'고 설득하여 새벽을 노려 70여명으로 일시에 총포를 쏘며 화공작전으로 기습을 감행하자 2만여명의 동학군은 오합지졸로 변하여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자 우리는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동학군이 버리고간 많은 총포와 탄약,쌀 천여포대 등 군수품을 비롯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동학군으로 부터 노획한 쌀 천여 포대가 나중에 확인한바, 탁지부대신 '어윤중',선혜청 당상 '민영준'의 쌀로 동학군에게 탈취되었던 것으로 조정에서는 안중근의 아버지가 중간에서 가로챈 것으로 안중근의 아버지가 모함을 받게 되자 안중근은 한양으로 달려가서 무고함을 여러 경로를 통하여 여러번 호소하였으나 '어윤중'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며칠되지 않아 다행히 민란이 일어나서 '어윤중'이 살해되자 '어윤중'으로 부터의 모함은 종결되었으나 '민영환'은 계속적인 압력과 모함이 진행되자 '민영환'의 보복을 피해 안중근은 천주교 수도원으로 숨어 들어 수개월 동안 지내면서 그곳에서 홍신부를 만나게 되고 결국에는 천주교에 귀의하게 되었으며 그동안 많은 서적을 탐독하기도 하고 성경을 여러번 읽고는 많은 감화를 받게 되었다.

 

안중근은 삶을 살아감에 항상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신조가 있었는데

�째, 친구와의 의를 중히 여기고

둘째, 술과 노래를 즐기며

세째, 총을 쏘며 사냥을 즐기고

네째, 말타기를 즐겨하는 것을 신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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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얼빈역두에 울린 7발의 총성(아래글은 안중근 의사가 직접쓴 기록임)

 

 

나는 청년시절 의협심이 강하여 중국상인의 야만적인 행동에 달려가서 담판을 짓거나 하였으며 지방의 사업적인 단체모임에서 문제가 생겨 회원들이집단으로 항거하자 대부분의 간부들이 도망갔으나 나는 단신으로 그들과 설득으로 담판을 짓는 등 어려움이 봉착하면 정면에서 직접 해결하는 해결사였다.

 

인재양성을 하기 위하여 진남포에 학교를 세우고 나라의 독립은 첫째,교육의 발달이요, 둘째, 사회를 확장하는 것이요,세째, 민심을 단합시키는 것이요, 네째,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급선무로 생각하였다.

 

학교운영도 점점 옥죄는 일본관헌의 압력에 더 이상 운영이 어렵게 되자 동지에게 학교운영을 넘겨주고 단신 북간도로 이동하여 '블라디보스톡'등지를 돌아다니며 자금을 모으고 동지를 규합하고 조직을 짜는 등 직접적인 독립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수백명의 동지들이 모이자 나는 동지들을 훈련시켰는데 말타기,사격 등 훈련을 시키고 조직을 확장하여 나갔다.

 

나는 독립군 의병장으로 '참모중장'이란 직책에 임명되었으며 정예장병 수백명을 이끌고 함경도 지역으로 숨어들어가 일본군을 기습하고 일본관헌을 습격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다가 혹한의 산악지역에서 군수품의 부족과 이탈자가 속출하자 몇몇의 동지들과 한달반을 헤메다가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영토인 '엔치야'에 도착하였으나 피골이 상접하여 동료들이 알아보지를 못하였다.

 

십수일을 휴식한 뒤에 '블라디보스톡'으로 귀대하자 남아있던 동지들이 대대적인 환영식을 준비하였으나 거절하고 짐을 꾸린 다음 '하바로프스크'-->'헤이롱장(흑룡강) 상류지역'-->수찬(水淸)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단체조직을 확대하고 동지를 규합하고 교육을 통하여 사명감을 확산시켰다.어느지역에서는 '일진회' 잔당에게 의병장 경력이 발각되어 구금되었으나 그들을 간신히 설득하여 죽음에서 살아나온 경우도 있었다.

 

1909년에 나는 '엔치야'로 돌아와 동지12인과 결의를 하였는바,같이 모여 태극기를 펼쳐놓고 왼손약지를 절단하여 피로써 혈의 맹세를 하였는데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이란 글자를 쓰고 장지를 찍었다.

 

그해 9월경에 '블라디보스톡'으로 귀향하여 정보를 수집중에 '이토'총독이 '블라디보스톡'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그래서 가까운 시일내에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듣게 되자 나는

 

" 여러해 소원하던 목적을 이제야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 라고 중얼거리며 '하얼빈'으로 갈 것을 마음먹고 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그 지역 갑부였던 '이석산'을 �아가서 여비 백원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자 권총으로 위협하여 여비를 강제로 받아내었다.

 

나는 '우덕순' 동지와 만나 8연발 권총을 준비하고 같이 '쓰이펜호'지방으로 이동하여 통역을 담당할 '유동하'동지를 만나 상의를 하였다. 그들과 같이 '하얼빈'에 도착하여 '김성백' 동지집에서 유숙하면서 신문 등 각종 정보를 수집하였고 정확한 '이토'의 도착 일정을 수집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정보를 수집하였다. 우리는 '창춘'으로 이동하여 거사하는 방안도 고려하였다. 나는 '유동하'가 개인사정으로 집에 다녀오겠다 하여 통역을 담당할 '조도선' 동지와 합류하여 김성백 집에서 유숙하였다.

 

여비가 부족하여 애태우면서 우,조 동지와 같이 '지야이지스고'로 이동하여 현지 정거장을 답사하고 조도선이가 역무원에게 물었다.

 

"이곳에 매일 기차가 몇차례나 내왕하는가?"

"매일 세번씩 내왕하는데,오늘밤에는 특별열차가 하얼빈에서 창춘으로 가서 일본대신 '이토'를 영접해 가지고 모래 아침 여섯시 경에 여기에 이를 것이다"

 

나는 '모래 아침 여섯시 쯤이면 아직 날이 밝기 전이니 '이토'가 반드시 정거장에 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설사 차에서 내려 시찰을 한다해도 어둠속이라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할 수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내가 '이토'의 모습을 모르는데야 어찌 능히 일을 완수해 낼 수가 있을 것인가?' 라고 생각하고 다시 앞서 '창춘'을 가보고 싶어도 노자가 부족하니 어쩌면 좋은지를 고민하다가 '김성백' 동지에게 여비를 구하기 위하여 보낸'유동하' 동지에게 전보를 쳤다.

 

"우리는 여기 이르러 하차했다. 만일 그곳에 급한 일이 있거든 전보 쳐주기 바란다" 황혼이 다 된 뒤에 답장이 왔으나 그 말뜻이 분명치 아니하여 더욱 의아스러움이 적지 않아 그날밤 깊이 생각하고 좋은 방책을 헤아렸다.

 

이튼날 나는 '우덕순'과 상의하면서

"우리가 같이 이곳에 있는 것은 좋은 방책이 아니다. �째는 돈이 부족하고, 둘째는 '유동하'의 답전이 의심스럽고,셋째는 '이토'가 내일 아침 새벽에 여기를 지나갈 것인즉 일을 치르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일의 기회를 잃어버리면 다시는 일을 도모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여기서 머물며 내일의 기회를 기다려 틈을 보아 행동하고 나는 오늘 '하얼빈'으로 돌아가서 내일 두곳에서 일을 치르면 충분히 편리할 것이다. 만일 그대가 일을 성공하지 못하면 내가 성공할 것이요, 만일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그대가 꼭 일을 성공시켜야 할 것이다. 만일 두곳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다시 비용을 마련한 다음 새로 상의하여 거사토록 하는 것이 완전한 방책일 것이다" 라고 하고 '우덕순'은 그곳 정거장에서 새벽에 도착하는 '이토'를 노리도록 조치하고 나는 '하얼빈'으로 돌아왔다.

 

나는 '유동하'에게 답신내용을 확인한바  제대로 이야기를 못하기에 화를 내었던바 '유동하'는 아무 말 없이 나가 버렸다. 나는 '김성백'의 집에서 유숙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새옷을 벗고 수수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권총을 차고 바로 정거장으로 나가니 아침 7시쯤이었다. 정거장에는 러시아 장관,군인들이 나와서 '이토'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차를 파는 집안에서 차를 두세잔 마시면서 초조하게 기다린바 9시쯤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와사 닿았다. 나는 찻집에 않아서 그들의 동정을 엿보며 어느때 저격하는 것이 좋은까 하고 십분 생각하였으나 미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차 이윽고 '이토'가 차에서 내리는게 아닌가!

 

'이토'가 내려오자 군대가 경례하고 군악소리가 하늘을 울리며 귀를 때렸다. 그 순간 분한 생각이 터져 일어나고 3천길 엄화가 머리속에 치밀어 올랐다.

 

" 어째서 세상 일이 이같이 공평하지 못한가! 슬프도다! 이웃나라를 강제로 빼았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는 이같이 날뛰고 조금도 꺼림이 없는 대신 죄 없이 어질고 약한 인종은 어찌하여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

 

다시 더 말할것 없이 나는 뚜벅뚜벅 걸어서 용기있게 나가 군대가 늘어선 뒤쪽에 이르렀다. 앞으로 보니 러시아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중에 맨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일개 조그만한 늙은이가 이같이 염치없이 감히 하늘과 땅사이를 횡횡하듯 걸어오고 있었다.

 

" 저것이 필시 늙은 도독 '이토'일 것이다!"하며 단총을 뽑아들고 그 오른쪽을 향하여 신속히 네발을 쏘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십분 의아심이 머리속에 일어났다.내가 본시 '이토'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한번 잘 못 쏜다면 큰 일이 낭패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뒷쪽을 향하여 다시 3발을 잇달아 쏘았다. 또다시 생각하니 만일 죄없는 사람을 잘못 쏘아 다치게 했다면 반드시 잘된 일이 아니라 잠깐 주춤하여 생각하는 사이에 러시아 헌벙에게 붙잡혔다. 그때 나는 곧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란 뜻의 러시아말)를 세번 부른 다음 정거장 헌변파견대로 잡혀 들어갔다.

 

1909년 음력 9월 13일(양력10월 26일) 상오 9시반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