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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906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11

 

 

 

한국의 역사 906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11

 

 

                   

 

 

 

 

 3. 끊임없이 이어진 역모와 반역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과는 거리가 먼 잔혹한 형벌제도

 

 

서울 한복판에서 능지처참형

 

"너는 금부의 국문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아느냐?"

그 말 한 마디에 박 치의의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금부에서 국문이 시작되면 역모나 강도사건의 범인은 먼저 곤장을 쳐서 반죽음을 만든 다음 주리를 트는 것으로 이어진다. 두 다리를 한데 묶고 그 사이에 두 개의 주릿대를 넣어 비트는 방식이다. 그다음에는 커다란 태로 사정없이  등을 두들기는 태배형이 이어지고 그다음에는 판자 위에 날카로운 사기조각을 얹고 그 위에 무릎을 끓게 한 다음 다시 그 위에 판자를 깔아 무거운 바위덩어리를 올려 굴리다가 다시 나장 여러 명이 올라가 흔들어 대는 압슬형, 나중에는 죄인을 여러 명 묶어 놓고 여러 명이 장으로 아무 곳이나 마구 때리는 난장형이 이어지니 이런 형벌을 받고도 살아날 수가 있겠느냐?"

 

김개의 음성은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단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처형 방식도 잘 알고 있겠지만 칼로 목을 치는 정형은 거의 없고 수레 두 대에 양 다리를 묶고 잡아 당겨 몸을 두 토막으로 찢는 환형이 기본이며 죽은 다음에는 머리, 팔, 다리 등 몸을 다섯 토막 내어 거리에다 내걸며 미이 죽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관을 파내서 여섯 토막으로 찢어 소금에 절인 다음 각 처로 돌리게 된다.."

"그럼 어찌하리까?"

"10악 죄악 중 으뜸은 모반이야. 5형 중에서 대벽(능지처참)이 가장 무거운 형벌인데 잘 생각하고 순응하여라. 네가 능지처참형으로 죽을 것이나, 이직실고한 공을 인정받아 사면 받을 것이냐?"

 

이것은  영창대군을 역모로 엮기 위해 조작한 사건의 서두 부분이다. 실록에는 놀랍게도 마치 드라마처럼 이런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 이런 세밀한 묘사를 남긴 것은 광해군의 잔인성을 증명하기 위해 인조대의 사관들이 의도적으로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1613년 광해군 5년 여주의 여강가에서 건달 서자 7명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유흥비 조달을 목적으로 문경 세재애서 강도 행각을 벌이다가 꼬리가 잡혀 붙잡힌 것인데 조정에서는 이들이 고관댁의 부유층 자녀들인 점을 고려하여 그들이 자금을 모아 역모사건을 일으키려 했다는 쪽으로 몰았다.

 

영창대군을 죽인 조선 최대의 옥사 사건인데 영창 옹립 계획을 털어 놓으라고 협박하면서 무지막지한 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 기록을 읽으면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추국과정에서 수백 명이 고문을 당했고 그중 수십명은 대궐 마당에서 고문 도중 죽었다. 지금의 덕수궁 마당에서 벌어진 일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유배를 거거나 삭탈관작, 또는 추방되었다. 물론 반역과 연관이 있다고 판정된 사람들은 빠짐없이 <대명률> 조문에 따라 처형되었다.

 

조선의 형법서 원전인 <대명률>에는, "모든 모반 및 대역은, 함께 모의한 자는 주범과 종범을 가리지 않고 모두 능지처사한다. 범인의 아비와 아들로 나이 16세 이상인 자는 모두 교수형에 처한다. 15세 이하 아들 및 어미와 딸, 처첩, 할아버지와 손자, 범인의 형제와 자매, 아들의 아내와 첩의 경우는 공신의 집에 주어 종으로 삼는다. 재산은 모두 관청에서 몰수한다."는 등의 처벌 내용이 명기되어 있다.

 

조선의 사법 제도의 기본은 <경국대전>이다. 세조가 즉위하자마자 법전을 만들기 위해 6전 상정소를 설치하고 시작한 끝에 10여 년 만인 1466년 편찬되었고 계속 수정을 거듭하다가 1485년 성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되고 시행되었다.

 

이 법전은 6전 체제로 되어 있고 각기 14~61개 항목으로 이루어졌다. 6전은 이.호.예.병.형.공전인데 대부분 명나라의 법전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고 그중에서도 형전은 <대명률>, 즉 명의 법률을 그대로 베낀 것이나 다름없다.

 

중국은 땅이 넓고 각 제후들 간에 피나는 전쟁이 계속된 곳이라 형벌은 특히 잔인했는데 그걸 전쟁도 별로 없었고 인구도 많지 않는 작은 땅인 조선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하긴 명나라의 모든 것을 답습하자는 풍조였고 관복도 똑 같이 입었으니 당연하다 할 것이다. 

 

사실 지금 우리나라 형법도 1953년에 일본법을 그대로 베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본은 또 독일 것을 베꼈다. 일본이나 독일 모두 세계에서 범죄가 아주 적은 국가인데 이런 나라들의 법을 그대로 쓰다보니 우리나라는 세계에서도 범죄나 재판이 많기로 손꼽히면서 처벌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범죄자들을 위한 사법제도라는 비판도 있다.

 

조선 형법은 5가지 형벌로 나뉘어 있다.  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인데 태형, 장형은 고문을 하는 것이고 도형, 유형은 귀양형이다. 또 사형은 교형, 참형, 능지처사로 나뉘었다. 교형은 온전히 목을 매다는 것이고 참수는 목을 베는 것이며 능지처사는 목, 팔, 다리 등을 잘라내는 잔혹한 처형방법이다.

 

당시 조선에서 얼마나 많은 사형수가 나왔는지는 자료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증보문헌비고>의 형량과 죄목에는 전체 범죄행위의 2,083개 중 두들겨 패는 태형, 장형이 832개, 귀양형인 도형, 유형이 841개, 사형은 356개 조문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형에 해당되는 죄목이 전체의 18%에 달한다. 이는 조선 엄벌주의 국가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중 365개의 범죄행위 가운데 가장 잔인한 처형인 능지처사에 해당하는 범죄는 모두 15개인데 그중 첯째가 역모이다. 그 밖에는 가족 3인을 죽이거나 신체를 절단한 흉악한 살인범, 그리고 가족이나 주인을 살해한 강상범 등이 있는데 그런 범죄는 드물었기 때문에 역모사건에서 주로 시행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능지처사 처벌은 모두 거열형으로 했다. 세조 때 사육신은 모두 이 형으로 처형되었다. 즉 여러 대의 수레에 살아있는 사람의 양팔과 다리와 목을 묶고 사방으로 끌어 당겨 찢어 죽이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인 군기시 앞에서 시행된 이 처형은 조정 관리들이 모두 나와 참관을 했다. 끝난 다음 머리는 따로 3일간 번화가에 내걸었고 그다음에는 잘린 시신은 지방을 순회시켰다. 순회기간은 무려 7개월씩 걸렸다.

 

사육신 사건 때 고문 끝에 죽어버린 박팽년, 유성원 등도 다시 시신을 가져다가 이런 거열형에 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남이 장군도 누명을 쓰고 이런 능지처사를 당하였는데 그의 부하 9명과 함께였다.

 

이런 처형은 모두 공개리에 했는데 교형, 참형은 도성 밖의 당고개와 마포 강변, 능지처사인 거열형은 서울 한복판인 군기시 앞, 혜민국거리에서 주로 시행되었다.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려 했을 것이다.

 

이런 능지처참형은 쭉 이어져 오다가 1894년에야 비로소 폐지되었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외국 선교사들의 기록에도 그 끔직한 모습들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지금 절두산 순교박물관에 가면 목이 잘린 순교자의 기념상이 말없이 방문객을 내려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