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봄 4 : 바람따라 세월따라, 한민족의 서사시......4
봄을 맞이하는 아파트 단지
신라의 삼한 통일, 천년사직의 붕괴
신라(新羅, 기원전 57년 ~ 935년)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 시대의 삼국 중 하나로, 현재의 한반도의 동남부 일대를 약 992년 동안 지배하고 있던 국가이다. 한국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존속한 국가이다. 국호인 ‘신라(新羅)’는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신라는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 경에 건국되었으며,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국가의 틀을 세우는 데는 가장 늦었다. 6세기 경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백성의 단결을 꾀하였으며 진흥왕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아 7세기경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589년에 중국을 통일한 수(隨)와 그 뒤의 당(唐)과 연맹(나·당 연합)을 맺은 신라는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또한 한반도를 노렸던 당나라군을 나·당 전쟁을 통해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삼국 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698년 발해가 세워짐과 함께 남북국 시대의 남쪽 축이 되었다.
통일 이후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고도의 중앙 집권 체계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 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득난세력(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이 건축·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 왕과 귀족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내부 분열이 이는 와중에 지방에서 자립잡고 있던 호족의 세력이 성장하여, 892년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태봉(처음 이름은 후고구려/뒷날 왕건이 국호를 고려로 바꿈)을 세움과 함께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려와 후백제의 공세에 버티지 못한 신라 경순왕은 935년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하여 56대 992년 만에 멸망했다.
신라의 왕은 박씨, 석씨, 김씨가 번갈아 가며 왕이 되었다.
밝아오는 아침
국호
신로(新盧)·시라(斯羅)·서나(徐那:徐羅我)·서야(徐耶:徐耶我)·서라(徐羅:徐羅我)·서벌(徐我)·서라벌·계림 등 "마을"의 뜻을 가진 여러 명칭으로도 불렸으나 지증 마립간 4년 504년 국호를 "신라"로 확실히 하며 왕에 대한 칭호를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에서 "왕"으로 정했다. 이 일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4년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이래로 국호가 정해지지 않아 혹은 '사라'(斯羅)'라 일컫고, 혹은 '사로'(斯盧)라 일컬었으며, 혹은 '신라'(新羅)라고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이라는 글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라는 글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생각해온즉,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이들을 보면 모두 '제'(帝)나 '왕'(王)을 일컬었거니와,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22세 동안 단지 방언으로만 왕호를 일컫고 존귀한 칭호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리나이다" 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좇았다.
봄이 오는 반포천
시기별 역사
시대 구분
- 삼국사기
일반적으로 신라의 역사를 시기 구분할 때는 《삼국사기》의 구분을 따른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실의 변화에 따라 상대, 중대, 하대로 나누었다.
- 상대(上代:시조 박혁거세 거서간∼28대 진덕여왕, BC 57∼AD 654, 28년 771년간)는 성골이 왕위를 독점하던 시기이다. 실제 골품 제도가 성립되고 성골 왕실이 확립된 것은 상당히 후대의 일이며 원시 부족 국가·씨족 국가를 거쳐 고대 국가로 발전하여 골품 제도가 확립되는 단계이다. 건국 이후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의 발전 및 팽창과 함께 고구려, 백제와 대립하던 시기이다. 삼국시대 말기와 남북국 시대이다. 또한 이 때는 신라문화의 황금기로 여러 국가들과 교역한 시기이도 하다.
- 중대(中代:29대 태종 무열왕∼36대 혜공왕, 654년∼780년, 8대 127년간)는 성골 왕통이 끝나고 무열왕계 왕실이 이어지던 시기이다. 대체로 삼국을 통일하고 전제왕권(專制王權)이 확립되어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 시기와 일치한다.
- 하대(下代: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780∼935, 20대 156년간)는 무열왕계 왕실이 끊어지고 내물왕계 진골 왕실이 성립된 시기이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내부의 분열, 골품제도가 붕괴되고, 족당(族黨)의 형성 및 왕권의 쇠퇴로 호족(豪族)·해상세력이 등장하고, 후삼국의 혼란 등 멸망에 이르는 시기이다.
밝아오는 아침
- 삼국유사
《삼국유사》는 불교와 연관지어 상고·중고·하고로 신라사를 구분하였다.
- 상고(上古:시조~22대 지증왕, BC 57~514)는 불교 전래 이전 시기이다. 역사적으로는 신라가 고대 국가로 발전하기 이전 단계를 구분할 때 사용된다.
- 중고(中古:23대 법흥왕~28대 진덕여왕, 514~654)는 불교식 왕명이 사용되던 시기이다. 역사적으로는 골품제 하에 성골 왕실이 성립되어 소멸하기까지의 시기로 보고 있다.
- 하고(下古:29대 무열왕~56대 경순왕, 654~935)는 불교식 왕명 사용이 끝난 이후의 시기이다. 하고 시기 구분은 역사적으로 중대와 하대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잘 사용되지 않는다.
한국사 전체를 통해서 볼 때는 보통 제29대 무열왕 이전을 삼국시대, 그 이후를 통일신라시대로 크게 구분한다. 최근에는 발해와 신라가 병립한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보다는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통일신라라는 용어에도 문제제기가 되고 있으며 이를 후신라 혹은 대신라로 부르기도 한다.
신라사를 5기의 시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에 의하면, 내물왕 이전의 시기를 제1기, 내물왕부터 제22대 지증왕까지(356년 ~514년)를 제2기, 제23대 법흥왕(法興王)부터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까지(514년~ 654년)를 제3기,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부터 제36대 혜공왕(惠恭王)까지(654년~ 780년)를 제4기, 제37대 선덕왕(宣德王)부터 마지막 56대 경순왕(敬順王)까지(780년~935년)를 제5기로 잡는다.
이수오거리
신라의 국가 성립
신라는 처음 진한의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기원전 57년에 건국되었다. 이후 김알지가 남쪽 가야를 거쳐 들어오고 또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물 마립간 (재위: 356년 ~ 402년)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는 등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중앙 집권 국가로써의 발전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는데,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통치 집단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내물 마립간 때에는 해안가로 왜구의 침입을 많이 당하였다. 399년 (내물왕 44년)에는 광개토왕이 군사를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몰아내는 등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많이 받았고, 이 때문에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이 동안에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또한 고구려를 통하여 중국 북조(北朝)의 문화를 도입하면서 차차 발전을 하게 되었다.
신라의 정치적 발전
신라는 내물 마립간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나, 5세기 초 국력이 신장되자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5세기 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하였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또한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복속시키기도 하는 등, 지방 세력과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뒤이어 법흥왕(재위 514년~540년)은 병부를 설치하여 군제를 개혁하고,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고, 골품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불교를 공인하는 등 주변 세력들을 포섭하고,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김해 지역의 금관 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면서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백제와는 연맹 관계를 맺어 백제를 통하여 양(梁)나라와 교역하였다. 이때부터는 남조(南朝)의 문화까지 받아들이면서 크게 진보하여, 진흥왕 때에 그 전통을 이룩하였다.
신라의 팽창
신라는 진흥왕(재위 540년 ~ 576년 ) 때에 이르러서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나제 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551년) .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신라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이때의 신라 국세는 이른바 진흥왕 4비(眞興王四碑)인 창녕비(昌寧碑:昌寧)·북한산비(北漢山碑:서울 北漢山碑峰)·황초령비(黃草嶺碑:함남 함흥)·마운령비(摩雲嶺碑:함남 이원) 등이 증명하는 바이다.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의 위기
이와 같은 신라의 팽창은 고구려·백제 양국의 반격을 초래하였다. 진흥왕 이후에는 진흥왕 대에 복속했던 영토들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으며, 진덕여왕 (재위: 647년 ~ 654년)대에 와서는 백제가 신라의 턱밑인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까지 공격하여 위기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실패하였고, 신라는 당나라와 나·당 동맹을 맺어 고구려와 백제에 반격을 준비하였다.
나·당 동맹 이후, 신라는 백제를 공격했다. 의자왕과 지배층의 향락 등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이 생겨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던 백제는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당시 고구려도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갈등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고구려는 결국 당나라의 공격으로 668년에 멸망하였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이용해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당나라의 야심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 일부와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남침해 오던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676년). 하지만 옛 고구려의 영토인 대동강 이북과 만주 일대를 차지하지 못하여,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뒤이어 한반도 북쪽과 만주 일대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들어서면서 남북국 시대가 형성되었다.
남북국시대는 남과 북에 두 나라(二國)가 있다는 것인데, "통일(統一)신라", 또는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는 오직 신라만을 인정, 발해를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므로 잘못 되었다는 반성이 학계에 일고 있다. 중국에서는 한국학계의 이러한 약점을 이용, 발해를 중국사에 편입시켰으며 "통일의 신라"(统一的新罗)라는 용어를 현재 사용하고 있다. 그 동안 한국학계의 이러한 약점은 신라를 중심으로 기술한 『삼국사기』의 영향이 크며, 반도사관을 정당화하려는 일제식민주의사학에 의해 강하게 뿌리내렸다. 또한 유신독재시절 전국에 김유신 동상과 사당이 세워지는 등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신라를 정통으로 인식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도올 김용옥은 자신의 저서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이 잘못된 용어라고 지적하며 대신 "신라의 삼국해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남북국 시대 신라의 발전: 왕권의 강화와 제도의 정비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영토 확장과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이 증대하였다. 이 무렵, 신라는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는데 무열왕 이후에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의 왕으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신문왕 때에는 김흠돌의 모역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들에 대한 숙청을 가하였다. 이 후,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화백회의를 주도하여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으며, 녹읍을 폐지하고 수조권만을 인정한 관료전(官僚田)이 지급하는 등 신문왕은 진골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또한 5묘제를 설치하여, 태종무열왕계의 정통성을 강화하였다. 이 후 685년에 사지(舍知)를 설치하여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의 5단계 관직제도를 완성하였으며, 같은 해에 지방제도인 9주 5소경제를 확립하였다.
붉은 색깔의 벗꽃
정치 변동과 호족 세력의 성장
8세기 후반 신라에서는 국가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는 군사력과 경제력,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다.
진골 귀족들은 녹읍제를 다시 부활시키는 등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권력 투쟁을 벌였다. 혜공왕이 죽고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진골 귀족들 사이에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귀족들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녹읍을 토대로 한 귀족들의 지배가 유지되는 한편,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었고, 농민들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또한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르면서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지게 되었다.
9세기 중엽의 문성왕(文聖王) 이후 중앙 귀족은 지방 세력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왕위 쟁탈을 위요(圍繞)한 정쟁(政爭)을 식히고 점차 타협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한편 골품제로 중앙의 정치 무대에 참여할 수 없었던 지방 세력은 중요한 활동 무대를 해상무역(海上貿易)에서 찾게 되었다. 이리하여 공적인 조공(朝貢)의 형식으로 행해지던 대외무역은 점차 민간무역에서 주도하였다. 이들은 당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활발히 교역했다. 그러나 당과의 무역이 가장 성하여서,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산둥반도(山東半島)나 장쑤성(江蘇省) 같은 곳에는 신라방(新羅坊)이 생기고, 이를 관할하기 위한 신라소(新羅所)라는 행정 기관이 설치되었다. 또 거기에는 신라원(新羅院)이라는 사원이 세워졌는데, 장보고가 문등현 적산촌(文登縣赤山村)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은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지방 세력가들의 민간 무역이 성행하고, 당의 지방통제권이 약화되면서 해적(海賊)의 출몰이 잦았다. 이는 성행하는 해상무역에 큰 타격이 되었는데, 이러한 배경 속에 해상의 군진(軍鎭)이 설치되었다. 신라는 본래 변경의 수비를 위하여 육지에 설치하던 군진(軍鎭)을 해적들의 활동이 심한 해안의 요지에 설치하여 이를 방비하였다. 청해진(淸海鎭 : 완도)·당성진(唐城鎭 : 남양)·혈구진(穴口鎭 : 강화) 등이 그것이며, 그 중 흥덕왕 3년(828년) 장보고(張保皐)가 설치한 청해진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장보고는 해적 출몰의 방비는 물론 국제 무역을 하여 황해의 왕자가 되었고, 다시 중앙의 정치에도 관여하였다. 장보고의 경우와 유사하게 지방에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대를 이어가며 행사하는 세력가들이 이 시기에는 수없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보통 성을 쌓고 스스로 성주(城主)라고 자처하였다.
9세기 이후에 나타난 신라 사회의 이러한 커다란 변화는 상업 발달에 따른 대상인(大商人)의 대두와 대토지 소유의 확대로 점차 구체화되었다. 중앙 집권 체제의 약화에 따라 지방의 토호와 귀족들은 점탈 또는 매매의 방법으로 농장을 확대하여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또 신라 지방 행정의 말단인 촌락의 인민을 통제하던 촌주(村主)도 역시 토지와 인민을 다스리며 세력을 확장해 갔다. 약화된 국가 권력은 이들 지방 세력을 규제할 수 없었다. 한편 국가의 비호 밑에 발달한 사원도 면세(免稅) 특권을 가지고 토지를 겸병(兼倂), 농장을 확대해 갔다.
한편,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6두품 출신의 유학생들과 선종 승려들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들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후삼국의 성립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는 그 지배권이 축소되면서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대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신라의 멸망
후고구려의 궁예를 실각시킨 고려 태조는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웠다. 그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하였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에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경순왕의 자진 항복을 받아내어 신라를 손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신라의 역사 대략을 살펴보았다.
처음 신라는 경주 근방 6촌을 기반으로 기존 세력이 힘을 모아 박혁거세라는 인물을 추대하여 왕으로 옹립하고 가야와 경쟁하면서 삭탈해, 김알지라는 북방에서 이주해온 외부인들이 신라 사회에 흡수되면서 통치기반을 이루게 되었고 그들이 돌아가며 자신들의 힘과 능력에 따라 합의에 의해 왕위를 이어갔다. 그들은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구의 끊임없는 침공과 약탈을 견디어 내면서 국가 존망의 위기까지 겪으면서 힘겨웁게 역사를 이어갔고, 한 때는 백제연합군에 의해 전국이 유린되고 서라벌이 점령당하기 직전까는 가는 국가 위기를 겪으면서 고구려의 도움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해 나갔으며 고구려의 속국처럼 지배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진흥왕 대에 이르러 삼국은 연합과 분열, 동맹과 배신을 거듭하면서 신라는 영역을 확장해 나가며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백제와는 숙명적인 대결을 거듭하였다. 그 후 백제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무왕, 의자왕 대에는 신라의 영역을 옥죄기 시작하였고 금성 근방 대야성이 함락되는 등 신라는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엿으나 연개소문의 거절로 실패하자 당나라에 손을 뻗어 동맹을 맺게 된다. 이때 김춘추, 김유신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여 왕권을 강화하면서 나.당연합군을 결성하여 내부적인 분열과 사치로 혼란을 거듭하던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마지막 방어선이던 계백의 5천 군사의 소멸과 함께 백제 의자왕은 사비성에서 나.당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멸망당하게 된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고구려 정복에 당군과 일조하여 결국 하평양성에서 보장왕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고구려까지 멸망시키는 일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이 점차 드러나자 신라는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를 벌이면서 당군을 대대적으로 격파하여 물리침으로써 신라는 평양 - 원산선 이남을 실질지배하게 됨으로써 명실공히 미완의 삼국통일을 달성하게 된다. 그러나 고토 고구려 땅을 잃게 되었으나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에 의해 발해가 건국됨으로써 조선의 역사는 남북국시대를 열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신라가 미완의 삼국통일이나마 달성하게 된 것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다르게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신라가 미완의 삼국통일을 이루게 된 것은 국가 위기시 지도층과 가진자들의 솔선수범 정신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즉 신라의 젊은이들을 화랑제도라는 국가사관학교를 통해 수양과 훈련, 학문과 충의정신 연마를 단련하였고 유사시 그들은 국가를 위한 멸사봉공의 정신을 배양시키고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바치는 희생정신이 빛을 발하였기 때문이다. 계백의 5천 결사대 앞에서 보여준 두 젊은 화랑의 무조건적인 희생정신은 좌절에 빠져있던 신라군을 감동시켰고 그것은 바로 분노와 용기로 승회되었던 것이다. 그로인해 계백의 5천 군사도 그 두 젊은 신라 화랑의 희생이 가져올 신라군의 맹공을 예상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들은 신라군의 맹공앞에 황산벌에서 백제의 마지막 저항의 꽃을 피루고 연기처럼 역사속으로 사라져갔다. 이는 다시말해 나라의 지도층이 국난을 당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흥망이 달라진다는 점을 우리 후손들에게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백제는 무왕, 의자왕 대에 이룩한 신라와의 여러 전쟁에서 부분적인 승리에 도취되어 사치와 방탕에 빠졌고 귀족들의 권력 투쟁은 충신과 열사를 멀리하면서 국가의 위기가 다가오는 국제정세를 등한시 한 채 백강에서 풍류를 즐기며 추락에 앞서 찿아오는 자만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 수많은 백제의 군사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백강 하구 전투에서 당군을 막아내지 못했고 5만 신라군을 막아낼 군사가 계백의 결사대 5천 밖에 없었다니 말이다. 대륙백제를 호령하던 백제군이 이처럼 순식간에 무너지게 된 것은 왕권을 두고 백제 지배층이 벌이던 권력투쟁에 여념이 없었고 불안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의자왕 자식들이 조정 대신들의 주축을 이루면서 위기시에 어느 누구도 앞장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충신을 쫓아내고 부패에 빠진 정권에 대부분의 지도층과 백성들이 등을 돌리게 된 것이 아닐까? 아! 주몽에게 버림받고 산동반도를 거쳐 위례성에 안착한 온조가 세운 백제는 소서노의 한을 품은채 역사속으로 사라져 갔던 것이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영토 확장과 함께 인구가 크게 늘고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이 증대하였다. 이 무렵, 신라는 최초의 진골 출신의 왕으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이 강화되었고 이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신문왕 때에는 김흠돌의 모역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들에 대한 숙청을 가해졌고 8세기 후반 신라에서는 국가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는 군사력과 경제력,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다.
한편 진골 귀족들은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권력 투쟁을 벌였다. 그래서 진골 귀족들 사이에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그래서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귀족들 간에는 왕위 쟁탈전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다시 왕권을 대변하던 시중보다 귀족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었고, 농민들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또한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르면서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지게 되었다.
9세기 중엽의 문성왕(文聖王) 이후 중앙 귀족은 지방 세력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왕위 쟁탈전이 잠잠해지고 점차 타협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한편 골품제로 중앙의 정치 무대에 참여할 수 없었던 지방 세력은 중요한 활동 무대를 해상무역(海上貿易)에서 찾게 되었다. 이리하여 공적인 조공(朝貢)의 형식으로 행해지던 대외무역은 점차 민간무역에서 주도하였다. 이들은 당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활발히 교역하였는데, 당과의 무역이 가장 성하여서,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산둥반도(山東半島)나 장쑤성(江蘇省) 같은 곳에는 신라방(新羅坊), 신라소(新羅所)라는 행정 기관이 설치되었고 또 거기에는 신라원(新羅院)이라는 사원이 세워졌는데, 장보고가 문등현 적산촌(文登縣赤山村)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은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지방 세력가들의 민간 무역이 성행하고, 당의 지방통제권이 약화되면서 해적(海賊)의 출몰이 잦게되자 이는 성행하는 해상무역에 큰 타격이 되었는데, 이러한 배경 속에 해상의 군진(軍鎭)이 설치되었는데 청해진(淸海鎭 : 완도)·당성진(唐城鎭 : 남양)·혈구진(穴口鎭 : 강화) 등이 그것이며, 그 중 흥덕왕 3년(828년) 장보고(張保皐)가 설치한 청해진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장보고는 해적 출몰의 방비는 물론 국제 무역을 하여 황해의 왕자가 되었고, 중앙 귀족들이 그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정치 권력 투쟁에 끌여들이므로써 불행의 씨앗은 태동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노예로부터 시작된 그의 험난한 인생은 성공의 문턱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해상왕 장보고는 그 꿈을 펼치기도 전에 조정에서 보낸 자객에게 암살을 당하고 청해진은 해산되고 말았던 것이다. 어쩌면 신라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장보고의 청해진은 신라가 다시 되살아 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탐욕이 내민 칼날에 그 꿈은 여지없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9세기 이후에 나타난 신라 사회의 이러한 커다란 변화는 상업 발달에 따른 대상인(大商人)의 대두와 대토지 소유의 확대로 점차 구체화되었고 중앙 집권 체제의 약화에 따라 지방의 토호와 귀족들은 점탈 또는 매매의 방법으로 농장을 확대하여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또 신라 지방 행정의 말단인 촌락의 인민을 통제하던 촌주(村主)도 역시 토지와 인민을 다스리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국가의 비호아래 사원들도 면세의 특권을 가지고 토지를 겸병, 농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약화된 국가 권력은 이들 지방 세력을 규제할 수 없었다.
이처럼 신라는 미완의 삼국통일 이후 귀족들의 탐욕과 사치, 권력투쟁은 국가의 기강 약화를 초래하게 되었고 지방 호족들에 의한 지방분권 시대가 강화되면서 백성들은 토지를 잃게 되자 도적떼로 변신하였으며 중앙의 통제력이 거의 상실되자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그런 와중에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가 등장하면서 후삼국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에 와서야 신라와 발해를 두고 남북국시대는 남과 북에 두 나라(二國)가 있다는 것인데, "통일(統一)신라", 또는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는 오직 신라만을 인정, 발해를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므로 잘못 되었다는 반성이 학계에 일고 있다. 중국에서는 한국학계의 이러한 약점을 이용, 발해를 중국사에 편입시켰으며 "통일의 신라"(统一的新罗)라는 용어를 현재 사용하고 있다. 그 동안 한국학계의 이러한 약점은 신라를 중심으로 기술한 『삼국사기』의 영향이 크며, 반도사관을 정당화하려는 일제식민주의사학에 의해 강하게 뿌리내렸다. 또한 유신독재시절 전국에 김유신 동상과 사당이 세워지는 등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신라를 정통으로 인식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도올 김용옥은 자신의 저서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이 잘못된 용어라고 지적하며 대신 "신라의 삼국해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고려 시대 이후 김부식을 포함한 우리의 선조들은 발해를 잊은채 살아왔고 우리들의 역사에서 배제된채 조선시대까지 신라의 삼국통일을 우리 역사의 정통성으로 인정하면서 한반도에 안주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라를 주도적으로 역사에 부각시킨 김부식의 삼국사기로 인한 영향이 절대적이었고 반도사관에 입각한 일제의 역사왜곡이 가져온 결과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그 잊혀졌던 우리의 발해사를 되찿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지만 발해사의 쟁점은 중국, 러시아, 일본, 북한 등 각국의 인식차이로 인해 아직 우리 역사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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