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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26 : 조선의 역사 268 (제16대 인조 43)

두바퀴인생 2012. 10. 2. 04:59

 

 

한국의 역사 726 : 조선의 역사 268 (제16대 인조 43)

 

                   

                                                                                    남한산성                                       

                                                                                                                                                                                   

 

제16대 인조(1595~1649년, 재위: 1623년 3월~1649년 5월, 26년 2개월)

  

 

 

청나라(후금)의 건국 과정과 정묘, 병자호란 23

  

 

 

전란의 전조

 

1634년 말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정은 강학년(姜鶴年) 발언의 파장 때문에 뒤숭숭했다. ‘포악함으로써 포악함을 제거했다.’며 인조반정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했던 강학년의 직격탄은 인조와 조정 신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의 실정(失政)을 문제 삼았던 신료들조차 강학년의 발언에 격분했다.1635년 1월 홍문관 신료들은 ‘강학년의 죄는 목을 베어야 할 사안’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언관 자리에 있던 신료들이 동료의 발언을 문제 삼아 ‘목을 베어야 한다.’고 운운하는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다.

 

 

 
▲ 선조의 능인 목릉 전경
문화재청 제공

 

 

 

강학년과 이기안, 인조에게 도전하다

강학년의 발언을 계기로 신료들은 자신들이 인조와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하고 권세를 누리게 된 출발점은 인조반정이었다. 그들이 반정을 성공시킨 순간부터 광해군은 ‘극악무도한 패륜아(悖倫兒)’이자 ‘걸(桀) 임금이나 주왕(紂王)보다도 더한 폭군’으로 치부되었고, 광해군을 쫓아낸 반정이야말로 ‘천명(天命)과 인심의 호응 속에 무너진 윤리와 기강을 바로잡은 거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강학년이 홀연 백이(伯夷) 숙제(叔齊)처럼 ‘이폭역폭(以暴易暴)’ 운운하면서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한 방에 날려 버렸다. 신료들은 강학년을 엄벌하지 않으면 신인(神人)의 공분(公憤)을 풀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강학년을 조정에 추천했던 최명길은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며 관직에서 물러났다.

 

 

 
▲ 서울 역촌동에 있는 인조 잠저(潛邸) 기념비.
문화재청 제공

 

 

인조반정과 인조의 권위를 허무는 사건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1635년 2월 전라감사 원두표가 보내온 보고는 다시 조정을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보고 내용은 삼례(三禮)에 사는 생원 이기안(李基安)이 인조에 대해 무도한 말을 퍼뜨렸다는 내용이었다. 이기안이 사근찰방(沙近察訪) 김경(金坰)과 이야기를 하면서 ‘능양군은 믿을 수 없다. 그가 오래갈 수 있을까?’라고 불경한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기안은 서울로 끌려왔고, 그를 심문하기 위해 추국청(推鞫廳)이 설치되었다. 추국 과정에서 ‘일본인들을 끌어들여 난을 일으키려 했다.’고 말하는가 하면, 남인과 과거 대북파의 잔당들과 연결하여 역모를 꾀하려 했다는 진술이 나왔다. 결국 이기안은 처형되었지만 ‘역모 사건’의 파장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능양군은 인조의 잠저(潛邸) 시절 군호(君號)였다. 이미 강학년의 발언 때문에 조정이 뒤숭숭한 상황에서 이기안이 ‘능양군’ 운운한 것은 충격을 배가했다.

 

 

 

‘천변’의 원인을 둘러싼 공방

강학년의 충격적인 발언과 이기안의 역모 기도 사건을 계기로 인조에 대한 신료들의 비판은 수그러드는 조짐을 보였다. 특히 강학년이 인조가 저지른 3대 실책 가운데 하나로 꼽은 ‘부묘(廟)기도’에 대한 비판도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인조는 ‘강학년을 죽여야 한다.’는 신료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를 엄벌하는 데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자를 죽이는 군주가 아니다.’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흘리는 등 ‘강학년 문제’로 빚어진 신료들의 격앙된 모습을 은근히 즐기는 모습을 보였다.
 

인조는 ‘서인들의 집권이 오래되고, 그들이 사사건건 왕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기 때문’에 궁극에는 강학년의 발언이 나왔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인조와 신료들은 다시 충돌하고 말았다. 1635년 3월 14일 선조의 능(穆陵)에서 능침(陵寢)과 석물(石物)이 무너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간밤에 번개와 천둥이 요란한 상태로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이튿날 선조와 왕비의 능침 일부가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보고를 받은 예조는 서둘러 위안제(慰安祭)를 지내고 대신을 보내 봉심(奉審·무너진 능침을 살피는 것)한 다음 개수한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그런데 목릉이 무너진 원인에 대한 진단을 놓고 긴장이 다시 촉발되었다.

 

사헌부 신료들은 인조에게 목릉이 무너지는 변고가 부묘를 시행하려는 즈음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중시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선대(先代)의 혼령(魂靈)을 위로하기 위해 부묘를 연기하라고 건의했다. 인조는 부묘를 연기하라는 건의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신들이 목릉이 무너진 것을 ‘하늘이 내린 변고(天變)’라고 규정하자 발끈하는 모습을 보였다.

 

인조는 ‘봉분을 만든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비가 미친 듯이 퍼부어 스며든 물 때문에 무너진 것’이라며 대신들의 ‘천변’ 주장을 일축했다. 또 원인을 정확하게 구명하지도 않은 채 ‘천변’으로 몰아가려는 대신들의 저의가 불순하다고 질타했다.

 

부묘를 둘러싼 논란, 강학년의 ‘폭탄 발언’, 이기안의 역모 사건 등이 중첩되어 일어나면서 인조와 신료들은 치열한 책임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인조는 특히 목릉 붕괴의 원인에 대해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천변’ 운운하는 신료들을 계속 파직하는가 하면, 능에서 무너져 내린 사토(莎土)를 다른 곳으로 실어 옮긴 선공감(繕工監) 제조(提調) 신경진(申景 )을 나문(拿問·잡아다가 취조함)하라고 지시했다. ‘무너진 흙에 벼락이 내리친 흔적이 분명히 남아 있었는데 그것을 없애기 위해 고의로 흙을 옮겼다.’는 것이다. 인조는 신료들이 목릉의 붕괴를, 국왕의 실정에 대한 하늘의 경고 때문에 빚어진 ‘천재’로 몰아가면서 자신을 압박하려는 것을 차단하려 했던 것이다.

 

 

 

홍타이지 “조선 신료들 탐욕·부패” 직격탄

목릉 붕괴의 원인을 둘러싼 공방이 수그러들 무렵인 1635년 8월 후금 사신 동덕귀(董德貴)가 평양에 도착하여 국서를 올려보냈다.

 

홍타이지는 먼저 조선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 후금 영내로 진입하다가 체포되는 사례가 많다고 항의했다. 그는 법을 어기고 월경하는 백성들이 많은 것은 ‘조선 신료들이 탐욕스럽고 부패하여 임금의 총명을 가리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그는 ‘예로부터 신하가 국권을 쥐고, 사실(私室)을 강하게 하고 군주를 업신여기면 나라의 정사가 망가지게 된다.’고 충고했다. 이어 ‘후금은 형제국이므로 직언으로써 충고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과거의 국서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었다.‘권세가 강한 신료들은 조심하라.’며 조선의 내정을 걱정하는 듯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서인들의 권세가 너무 커졌다.’고 인조가 푸념했던 것이 어느새 홍타이지의 귀에까지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후금은 이제 조선 내정에 ‘충고’까지 하려고 덤비고 있었다.

 

사실 이 무렵 홍타이지는 상당히 고무되어 있었다.

 

차하르(察哈爾) 몽골 원정에 나섰던 도르곤(多爾袞) 등이 차하르의 릭단한(林丹汗)이 가지고 있던 원(元)의 옥새(玉璽)를 노획해 왔던 것이다. 릭단한은 몽골에서 칭기즈칸의 정통성을 잇는 권위를 지닌 인물이었다.

 

일찍이 원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는 주원장(朱元璋)의 명군을 피해 달아나다가 죽었고 그 와중에 원의 옥새는 행방이 묘연했다. 옥새는 200년이 지난 뒤에야 양치기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우여곡절 끝에 릭단한의 손으로 흘러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그 옥새가 홍타이지의 손에 들어갔던 것이다.

 

‘제고지보(制誥之寶)’라는 글자가 새겨진 옥새를 얻었을 때 홍타이지는 향불을 피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그러면서 ‘하늘이 역대 제왕들이 사용하던 옥새를 짐(朕)에게 보낸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며 감격해했다. 마치 자신에게 천명(天命)이 돌아왔다고 여길 법도 한 일이었다. 실제로 홍타이지는 사람을 시켜 조선에도 자신이 옥새를 얻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런 사연에서 얻어진 자신감 때문일까? 홍타이지의 국서 내용은 조선의 신경을 더욱 거스르게 만들었다. 거듭되는 천재지변을 둘러싼 논란,‘충고’ 운운하는 후금의 국서에 대한 찜찜함을 뒤로하고 1636년 병자년이 밝아 오고 있었다.

 

 

 

유화적인 대일정책 1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635년 후반 무렵, 조선은 또 다른 난제를 안고 있었다. 다름 아닌 ‘일본 문제’였다. 조선은 갈수록 높아지는 후금의 군사적 위협과 명의 요구를 감당하기에도 버거운 처지였다. 당연히 일본과의 관계 안정이 절실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의 바쿠후(幕府)와 쓰시마(對馬島)에서는 이른바 ‘야나가와 이켄(柳川一件)’의 여파가 가라앉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파장은 당연히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고, 조선은 ‘서북(西北) 방면의 난제’에 집중하기 위해서도 일본을 다독이는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야나가와 이켄’의 발생

 

 

 

 

‘야나가와 이켄’은 1633년(인조 11), 쓰시마의 가로(家老)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가 자신의 주군(主君)인 쓰시마 도주(島主) 소오 요시나리(宗義成)의 비리를 바쿠후에 폭로하면서 비롯되었다. 그 ‘비리’의 핵심은 소오가 1621년과 1629년 조선에 보내는 사신을 자기 휘하의 사람으로 멋대로 파견하고 그 과정에서 바쿠후의 국서(國書)까지 바꿔치기했다는 내용이었다. 1629년에 조선에 보낸 사신이란 겐포(玄方)를 가리킨다.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그는 조선이 정묘호란으로 수세에 처해 있던 상황을 교묘히 이용하여 서울까지 상경하는 데 성공한 바 있다.
 

실제 쓰시마 도주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의 교역을 재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과정에서 사절 명칭을 과장하거나 문서를 위조하는 일을 다반사로 저질렀다. 쓰시마 차원에서 조선에 보내는 사절을 국왕사(國王使, 바쿠후 장군이 보내는 사절)라고 가장하거나 아예 조선이 내려준 도장을 위조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시게오키는 왜 요시나리의 ‘비리’를 폭로했을까? 쓰시마 내부의 관계와 서열을 보면 그는 분명 요시나리의 부하이자 집사(執事)였다. 더욱이 그는 요시나리의 이복 여동생과 결혼하여 혼인 관계로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 그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시게오키가 자신의 주군을 고발하는 ‘배신’을 저지른 것은 잘 납득되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야나가와 이켄’ 관련 연구들에 따르면 시게오키는 기본적으로 요시나리에게 미묘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요시나리에 대한 우월감이기도 했고, 경쟁심이기도 했다. 시게오키는 요시나리보다 한 살이 많은데다, 에도(江戶)에서 태어난 이후 쇼군(將軍) 주변에서 생활했다는 자부심이 컸다. 권력의 중심지인 에도에서 잔뼈가 굵었고 쇼군의 측근들과도 친하다는 자부심이, 궁벽한 쓰시마의 연소한 주군을 가볍게 보는 자세를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시게오키는 바쿠후와의 관계, 조선과의 무역 문제 등을 놓고 요시나리와 갈등을 빚게 되었고 궁극에는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지경까지 치달았다.

 

 

 

‘야나가와 이켄’의 결말

양자의 갈등이 극에 이르자 시게오키는 급기야 소오의 집사 역할을 그만두겠다는 의향을 비쳤고, 끝내는 요시나리의 ‘비리’를 폭로하기에 이르렀다. 시게오키의 폭로 내용에 놀란 바쿠후는 1633년 5월부터 ‘야나가와 이켄’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요시나리와 시게오키는 각각 에도로 불려가 국서 위조와 국왕사 파견 건에 관련하여 심문을 받았다. 바쿠후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쓰시마에도 중신들을 파견하여 두 사람과 관련된 인물들을 수사했다. 그리고 사건과 관련된 중요한 증인들을 에도로 연행했다.

 

바쿠후는 사건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쇼군의 권위와 관련된 문제이자 조선과의 외교 문제와도 연결된 중대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바쿠후는 두 사람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면서 쓰시마에서 조선으로 가는 무역선의 파견을 중지시켰다. 뿐만 아니라 쓰시마의 어선들이 조선 근해로 나아가 조업하는 것도 중지시켰다. 그 같은 상황에서 두 사람에 대한 바쿠후의 조사는 2년 가까이나 계속되었다. 1635년 3월, 쇼군의 판결이 내려졌다. 판결은 일반의 예상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쇼군은 요시나리의 손을 들어주었다. 쇼군은 ‘국서 위조’와 관련하여 요시나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또 쓰시마의 영주(領主)이자 다이묘(大名)로서 요시나리의 위치를 다시 인정하고, 당시까지 해오던 것처럼 조선과의 외교도 계속 담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쇼군은 또한 요시나리에게 이듬해까지 조선으로부터 통신사를 초치하라는 명령도 아울러 내렸다.

 

국서 위조와 관련된 모든 죄는 시게오키의 것으로 판결되었다. 쇼군은 시게오키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유배에 처한다고 선고했다. 그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던 측근들의 일부는 사형에 처해졌다. 당시 쇼군 주변의 바쿠후 실력자들 대부분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었음에도 시게오키는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바쿠후는 왜 ‘국서 위조’와 관련된 최고 책임자인 요시나리 대신 ‘고발자’인 시게오키를 처벌하는 조처를 취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소오 가문을 매개로 이어져온 조선과의 기존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으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국서를 제멋대로 뜯어고친 것은 분명 커다란 허물이었지만, 중세 이래로 조선과의 관계를 능숙하고 원만하게 이끌어온 소오 가문의 노련한 능력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바쿠후가 ‘야나가와 이켄’과 관련하여 소오 요시나리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그렇다고 요시나리가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바쿠후는, 요시나리의 측근이자 외교승(外交僧)으로서 조선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담당했던 겐포를 유배에 처하는 조처를 내렸던 것이다. 요시나리에게는 조선과의 관계에서 ‘외교 참모’를 잃는 아픔이었다.

 

바쿠후는 겐포를 제거한 후 대신 교토(京都)의 다섯 사찰(五山)들로부터 승려들을 쓰시마에 파견하여 외교문서의 작성과 감독을 맡기는 조처를 취했다. 소오가 외교문서를 위조하는 것을 막고 조선과의 외교를 직접 감독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야나가와 이켄’과 조선의 고민

‘야나가와 이켄’이 요시나리의 승리로 귀결되었지만 그 사건이 진행되는 와중에서 조선은 상당히 긴장했다. 사건이 조선에 미칠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일찍부터 쓰시마 내부에서 소오 요시나리와 야나가와 시게오키 사이에 알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1617년(광해군 9) 일본에 다녀왔던 이경직(李景稷)은 ‘시게오키는 교활하고 민첩한데 요시나리는 우직하나 기력이 없어 보인다.’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 1624년 일본에 회답사(回答使)로 다녀온 강홍중(姜弘重) 또한 쓰시마에 머물면서 양자를 관찰했다. 그는 조선 사절단을 접대하는 요시나리와 시게오키의 선단 규모까지 비교할 정도로 세심하게 양자를 살폈다.1632년에도 양자가 서로 싸운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조선은 왜역(倭譯) 최의길(崔義吉)을 보내 상황을 탐지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결국 ‘야나가와 이켄’이 터지고, 바쿠후가 사건의 전말을 수사하면서 조선으로 오는 무역선과 어선들의 출항을 금지시키자 조선의 의혹은 더 증폭되었다.

 

조선은 당시 명과 후금으로부터 전선(戰船)을 빌려달라는 요구에 시달리고 있었던 데다,‘공경(孔耿) 사건’과 관련하여 서북변의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바로 이 때 쓰시마로부터 와야 할 세견선(歲遣船)이 오지 않자 조선은 일본과 쓰시마 내부에 중대한 변고가 일어났다고 여기게 되었다. 자연히 남방 지역의 해방(海防) 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쓰시마와 에도의 사정을 탐문하고 일본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문이 줄을 이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 문제’에만 주로 매달려왔던 상황에 또 다른 난제가 추가된 것이다. 인조와 조정의 당국자들은 서북과 동남, 양쪽에서 위협받고 있는 조선의 냉혹한 현실을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북으로부터의 위협이 더 급박하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일본에 대한 조선의 대응은 유화적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유화적인 대일정책 2

‘야나가와 이켄(柳川一件)’에 대한 최종 판결은 1635년(인조 13) 3월15일에 내려졌다. 도쿠가와 쇼군은 소오 요시나리(宗義成)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요시나리에게 그것은 ‘찜찜한 승리’였다. 주군인 자신을 배신하고 사지(死地)로 몰아 넣으려 했던 야나가와 시게오키에게 가벼운 처벌이 내려졌고, 자신의 심복이었던 외교승 겐포(玄方)를 곁에서 떠나 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또한 ‘조건부 승리’이기도 했다. 바쿠후(幕府)는 요시나리를 선택하면서 그의 역량을 시험하고, 동시에 조선을 떠보는 조건을 달았다. 조선은 쓰시마의 소오를 다독거리며 바쿠후와의 관계도 안정시킬 수 있는 묘책을 찾아야 했다.

 

 

 

▲ 조선통신사가 쓰시마에 배를 정박시켰던‘오후나에’유적.

 

 

바쿠후의 의도

조선과 주고받은 국서를 멋대로 고쳤다.’는 혐의에도 불구하고 바쿠후가 요시나리를 처벌하지 않은 데는 까닭이 있었다. 당시 바쿠후는 점차 쇄국(鎖國)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기독교의 유입을 막기 위해 외국과의 무역을 나가사키(長崎)로 집중시키고, 동남아 등지로 가는 무역선(朱印船)의 출항과 일본인의 도항(渡航)을 금지시키는 조처를 구상했다.

 

바쿠후는 그 같은 흐름 속에서 조선과의 관계도 다시 정비하려고 했다. 무역을 유지하면서도 유럽 국가들을 통한 기독교 유입을 차단하려 했던 바쿠후에게 조선과의 관계는 중요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이 유일하게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였다. 중국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조선과 국교를 유지하는 것은 국내적으로 쇼군과 바쿠후의 권위를 높이는데 필수적이었고, 조선과의 교역 또한 매우 중요했다.

 

 

▲ 쓰시마에 세워진 조선통신사기념비.

 

 

바쿠후가 요시나리를 ‘선택’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가까스로 재개시켜 놓은 조선과의 관계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래 일본에 대해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을 가진 데다, 왜란을 겪으면서 일본을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원수(萬世不共之讐)’로 여기고 있는 조선을 상대해 왔던 소오 가문의 경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
 

바쿠후는 요시나리의 손을 들어 주면서 ‘1636년까지 조선으로부터 통신사(通信使)를 초치(招致)하라.’고 명한 것은 요시나리의 조선에 대한 교섭 역량과 조선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조건이었다.1635년 8월, 바쿠후는 향후 겐포를 대신하여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할 승려들을 직접 선택했다. 교토(京都) 동복사(東福寺)의 승려 인서당(璘西堂)과 소장로(召長老), 천룡사(天龍寺)의 승려 선장로(仙長老)가 그들이었다. 이제 이들 세 사람이 번갈아 쓰시마로 들어가 머물면서 조선으로 보내는 외교문서 작성을 맡게 되었다. 교토에서 온 외교승들이 바쿠후의 지휘 아래 쓰시마의 대조선 외교를 직접 관장하고, 동시에 감시하는 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야나가와 이켄’이 종료된 뒤 인서당이 맨 먼저 쓰시마로 건너왔다.

 

 

 

‘일본위협론’이 다시 제기되다

이미 언급했듯이 ‘야나가와 이켄’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은 바짝 긴장했다. 후금의 위협과 명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과의 관계마저 악화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또한 소오 요시나리를 매개로 유지되어 왔던 조일(朝日)관계에 변동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야나가와 이켄’을 계기로 일각에서는 일본이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위기론이 퍼지고 있었다. 특히 1635년 연말에 재이(災異)가 거듭되면서 ‘일본위협론’은 더욱 힘을 얻었다. 창덕궁 정전(正殿)에 벼락이 내리치고, 한성부 연못의 물빛이 붉게 변하는 변고가 나타났다.11월6일에 열린 경연 자리에서 사간 민응형(閔應亨)은 “옛날부터 나라가 망하려면 괴상한 변고가 이어지는 법”이라며 “선조의 능침(陵寢)이 무너지고, 큰바람 때문에 나무가 뽑힌 것은 장차 전쟁이 일어날 징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구체적으로 임진왜란 무렵을 예로 들었다. 신묘년(1591년)에 풍재(風災)가 극심하더니 이듬해 왜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재이가 거듭되는 것은 전쟁이 일어날 징조’라는 민응형의 발언에 조정은 술렁였다. 누가 쳐들어 온다는 것인가? 민응형을 비롯한 삼사(三司) 신료들은 일본의 침략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목했다.11월7일, 인조는 비변사 당상과 대신들을 불러 모았다. 인조는 대신들에게 일본이 과연 위험하냐고 물었다. 오윤겸(吳允謙)은, 뚜렷하게 쳐들어올 기미가 보이지는 않지만 일본인들의 성정(性情)이 남에게 지기 싫어한다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만일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조선이 일본보다 후금을 우대하고 있다.’고 쇼군에게 참소할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경계했다. 또 시게오키가 비록 패했지만 쇼군 주변에 시게오키를 두둔하는 자가 많다는 사실을 우려했다. 이홍주(李弘胄)와 신경진(申景 )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별로 없지만 수군을 잘 정비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자.’고 했다.

 

11일에는 김상헌(金尙憲)이 차자(箚子)를 올려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더욱 강하게 거론했다. 그는 조정이 오로지 서변(西邊)을 막는 데만 급급하여 남변(南邊)의 방어는 거의 팽개쳐 버렸다고 비판했다. 남쪽의 군병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데다 무기도 엉성하고, 백성들은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려 조정을 원망하고 있다고 실상을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정에 대한 원망이 가득한 백성들을 유사시에 전장으로 내모는 것이 가능하겠냐?’고 반문했다. 김상헌은 남변의 방어 태세를 점검하기 위해 통제사영(統制使營), 경상 좌수영(左水營)과 우수영(右水營)에 감군어사(監軍御史)를 파견해야 한다고 대책을 제시했다.

 

사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재침 가능성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본의 위협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조정은 후금의 동향이 불온하다고 느낄 때마다 주로 강화도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삼남에서 수군과 전선(戰船)을 차출해 강화도 방어에 투입하기도 했다. 심지어 명사(明使) 노유녕(盧維寧)을 접대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전라도 수군의 입방(立防)을 면제해 주고 대신 포(布)를 받기도 했었다. 일본의 위협을 고려한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위험천만한 방책이었다.

 

 

 

신료들과 달리 인조는 日에 대해 낙관론

신료들과는 달리 인조는 일본에 대해 대체로 낙관론을 폈다. 그는 ‘관백(關伯)이 전쟁에 싫증을 내서 백성들에게 총포를 쏘지 못하게 하는 데다, 반란을 걱정하여 장수들의 처자를 인질로 삼고 있으니 다른 나라를 넘볼 근심은 없다.’며 ‘일본위협론’을 일축했다.

 

이렇게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예측이 서로 엇갈리는 상황에서 조정은 수군을 점검하고 방어 태세를 정비하자는 선에서 논의를 마무리지었다. 거의 모든 신경이 서북변 쪽으로 가 있는 상황에서 비롯된 고식책(姑息策)이었던 셈이다.

 

이제 일본에 대한 대책은 유화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알아 차렸는지 일본은 조선에 대해 공세적으로 나왔다. 겐포를 대신하여 쓰시마에 부임한 인서당은 1635년 12월, 조선에 보낸 문서에서 명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명분은 ‘일본은 명의 신하가 아니므로 그 연호를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과거 쓰시마가 조선의 예조를 ‘합하(閤下)’라고 부르던 것도 ‘족하(足下)’로 바꾸겠다고 했다.‘조선과 일본은 대등한 나라이고 쓰시마 역시 예조와 동등하니 합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조는 관례를 어겼다는 이유로 인서당이 기초한 문서를 받지 않으려 했다. 쓰시마는 ‘합하’문제를 거론하여 조선이 자신들을 ‘족하’라 부르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비변사 신료들은 일본과 사단이 생길까 우려하여 그냥 넘어가자고 했다.

 

조선은 결국 이후부터 쓰시마 도주를 ‘족하’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은 통신사의 파견도 수락하고, 바쿠후가 요청한 마상재(馬上才·말 위에서 곡예를 펼치는 유희)를 벌일 인원도 파견하기로 했다. 일본측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 준 것이었다. 모두 소오 요시나리의 낯을 세워 주어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병자호란 직전, 조선은 이렇게 후금의 위협을 의식하여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려고 부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