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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11 : 조선의 역사 253 (제16대 인조 28)

두바퀴인생 2012. 9. 17. 09:47

 

 

 

 

한국의 역사 711 : 조선의 역사 253 (제16대 인조 28)

 

                                            

                                                                               남한산성                                       

                                                                                                                                                                                   

 

제16대 인조(1595~1649년, 재위: 1623년 3월~1649년 5월, 26년 2개월)

  

 

 

청나라(후금(의 건국 과정과 정묘, 병자호란 8

 

 

심하전역과 인조반정(계속)

 

광해군이 명의 파병 요구를 거부하려 했던 것은, 폐모논의와 궁궐 건설 문제 등 내정(內政)의 현안들을 해결하는 것도 벅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명의 압력과 내부의 채근에 밀려 군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1619년(광해군 11) 2월,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갔는데, 약 1만 5000 가까운 병력이었다. 광해군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했던 심하 전역(深河戰役)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사에서는 이 전역을 보통 '사르후(薩爾滸) 전투'라고 부른다. 명군과 후금군 주력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던 전장(戰場)이 사르후 지역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투에서 명군은 거의 궤멸될 정도로 참패했고 두 나라의 향후 운명도 확연히 갈렸다. 사르후 전투는 명청교체(明淸交替)의 분수령이었던 것이다.

 

 

 

광해군, 강홍립을 발탁하다

 

광해군은 심하 전역의 향방에 대해 거의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그는, 명군이 동북(東北)의 오지인 허투알라(赫圖阿拉)까지 장거리 원정에 나서는 것의 위험성을 간파했다. 실제로 명군 가운데는 내륙 지역인 쓰촨(四川)에서 출발하여 산하이관(山海關)을 통과하고, 랴오양(遼陽)과 선양(瀋陽)을 거쳐 허투알라에 이르는 수천㎞의 거리를 행군해야 하는 병력도 있었다. 장거리 행군에 지친 명군이, 가만히 앉아 대비할 수 있는 후금군을 상대하기란 버거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은 또한 명군 지휘부가 조선군을 몹시 닦달할 것이란 사실도 예측했다. 그가 조선 원정군의 도원수(都元帥)로 문관 출신의 강홍립(姜弘立)을 임명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강홍립은 어전통사(御前通事:왕의 직속 통역관)를 역임할 정도로 중국어 실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명의 강요에 밀려 ‘내키지 않는’ 출병을 단행한 이상, 병력의 손실을 최소화하려면 적어도 명군 지휘부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작전권을 틀어쥔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다.

 

광해군은, 출정하기 직전 강홍립에게 지침을 주었다. ‘그대는 조선군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있으니 명군 지휘부의 명령을 일방적으로 따르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패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명군 지휘부는 조선군이 평안도에 머물 때부터 닦달을 시작했다. 총사령관이었던 경략(經略) 양호(楊鎬)는 강홍립에게 조선군 화포수(火砲手)부터 속히 도강(渡江)시키라고 요구했다. 조선군 부대 가운데 명군 지휘부가 가장 크게 탐냈던 병력이 바로 화기수였기 때문이다. 강홍립은 양호의 명령대로 화기수 5000명을 미리 들여보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명군의 우익남로군(右翼南路軍) 사령관인 유정(劉綎)의 휘하에 배속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강홍립을 질책했다. 명군 지휘부의 명령을 일방적으로 따르지 말라는 자신의 지침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광해군의 질책은 당연했다. 3월4일, 유정 휘하의 명군이 후금군으로부터 기습을 받아 궤멸될 때 배속된 조선군 화기수들도 대부분 전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낯선 땅에서의 행군, 또 행군

 

평안도 창성(昌城)을 출발한 조선군 본진은 1619년 2월23일 압록강을 건넜다. 조선군은 좌영(左營), 우영(右營), 중영(中營) 등 3개 진영으로 구성되었다. 조선군 가운데는 항왜(降倭)들도 참전했다. 항왜는 임진왜란 당시 투항했던 일본군 출신의 병사들을 말한다. 그들은 조총을 잘 다루고, 검술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용맹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 정예 병력이었다.

 

압록강을 건넌 후 허투알라에 이르는 조선군의 행군로에는 산악과 강이 널려 있었다. 날씨 또한 좋지 않았다. 양마전(亮馬佃)이란 곳에 도착했던 25일에는 눈이 내리고 강풍이 불어 날씨가 몹시 추웠다. 병졸 가운데 얼어죽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런데 무엇보다 문제는 군량 운반을 맡은 수송 부대가 본진을 제 때 따라오지 못하는 점이었다.

 

2월26일, 진자두(榛子頭)라는 곳에 이르러 강홍립은 유정을 만났다. 강홍립은 유정에게, 군량 운반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 사정을 설명하고, 조선군의 행군을 잠시 늦춰 달라고 요청했다. 유정은 거부했다. ‘약속한 시간은 정해져 있고 군율은 지엄한 것이기에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조선군은 할 수 없이 계속 걸었다.

 

2월27일, 진자두에서 50리 정도 떨어진 배동갈령(拜東葛嶺) 부근에 도착했을 때 조선군 세  영의 장졸들은 모두 휴대했던 군량이 떨어졌다. 보병들 가운데는 행군에 지쳐 정강이와 발 뒤꿈치에 유혈이 낭자한 병사들이 많았다. 계속 행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명군 ‘고문관’ 우승은(于承恩)이 달려왔다. 그는 강홍립에게 칼을 빼서 휘두르며 ‘조선군이 뒤처지면 자신의 목이 날아간다.’고 소리쳤다. 당시 명군 지휘부는 ‘조선군이 군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관망하려 하기 때문에 일부러 천천히 걷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래서 유격 교일기(喬一琦)와 우승은을 고문관 겸 감시자로 붙여 강홍립을 계속 몰아붙였다.

 

3월2일, 허기와 명군 지휘부의 채근에 시달린 끝에 조선군은 심하에 도착했다. 허투알라까지는 60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조선군과 명군은 약 600명의 후금군 기병과 조우한다. 적병은 높은 산 쪽에서 화살을 쏘아댔지만 조선군이 조총으로 응사하여 물리쳤다. 서울 포수 이성룡(李成龍)은 적장을 쏘아 맞혔고, 병사 한명생(韓明生)은 그의 목을 베어왔다. 조명연합군이 최초로 거둔 작은 승리였다. ‘만주실록’에 보면 ‘토부(托保)와 에르나(額爾納)가 이끄는 병력이 유정에게 패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성룡이 사살한 장수는 둘 가운데 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강홍립의 투항

 

작은 승리의 기쁨도 잠시 뿐, 3월3일 조선군은 다시 ‘굶주림과의 전투’를 치러야 했다. 강홍립은 병사들을 풀어 주변의 후금인 부락을 뒤져 숨겨진 양곡을 찾아냈다. 그것을 돌로 빻아 죽을 만들어 병사들에게 먹게 했다. 3월4일 아침, 조선군은 계속 행군하여 부차(富車)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세 발의 대포 소리를 듣는다. 이윽고 교일기 등이 강홍립에게 달려와 유정이 이끄는 명군 본진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지난 밤, 무리하게 행군을 감행하다가 귀영가(貴盈哥)와 홍타이지,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 후금군의 매복, 습격에 휘말린 것이었다. 명군의 궤멸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조선군도 후금군의 공격에 휘말렸다. 좌영과 우영이 먼저 후금군 철기(鐵騎)의 공격을 받았다. 조선군은 조총을 쏘며 저항했지만 두 번 째 탄환을 장전하기 전에 철기는 두 영을 유린했다. 선천(宣川) 군수 김응하(金應河), 운산(雲山) 군수 이계종(李繼宗), 영유(永柔) 현령 이유길(李有吉) 등이 전사하고 두 영은 무너졌다.

 

이민환(李民 )의 ‘책중일록(柵中日錄)’은 ‘강홍립이 거느리던 중영은 좌우영과 불과 1000보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달려가 구원할 겨를도 없이 두 영이 무너졌다.’고 당시 상황을 적었다. 후금군 철기의 가공할 파괴력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후금군의 포위 속에서 중영의 조선군 지휘부에서는 ‘마지막 결전을 치르자.’는 논의가 나왔지만 병사들 가운데는 아무도 움직이려는 자가 없었다. 눈앞에서 두 영이 무너지는 참상을 목도한 데다,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은 이미 전의를 잃었던 것이다. 싸울 의지가 없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포위를 뚫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강홍립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투항한다. 그런데 투항 상황에 대한 기록들은 서로 상당히 다르다. ‘광해군일기’와 ‘책중일록’은, 강홍립이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후금군이 먼저 통사를 보내와 항복을 종용했다고 적었다. '만주실록’은, 후금군이 조선군 진영을 공격하려 할 때, 강홍립이 먼저 사람을 보내 항복을 제의했다고 적었다.

 

양자의 기록에는 분명 각각의 주관적 서술과 윤색이 가해졌을 것이다. 따라서 어느 쪽이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적었는지를 명확히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강홍립이 남은 생령(生靈)들을 살리기 위해 항복을 선택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3월5일 허투알라로 들어가 누르하치에게 항복했다.

 

곧 이어 항복 소식이 한양으로 날아들었다. 조야를 막론하고 사대부들은 ‘매국노’ 강홍립의 가족들을 구금하라고 아우성이었다. 광해군은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강홍립의 항복과 함께 그의 정치적 운명도 조락(凋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강홍립이 이끄는 원군이 심하전역(深河戰役)에서 패하여 누르하치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은 조선 조야(朝野)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한편에서는 강홍립의 가족을 잡아들여 가두라는 아우성이,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항복 때문에 조선도 오랑캐가 되고 말았다는 비난이 터져나왔다. 명 일각에서는 조선군의 항복이 고의적인 것이라는 의구심과 조선에서 다시 원병을 동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광해군은 이 같은 안팎의 아우성을 잠재우고 패전의 후유증을 치유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명 원정군의 실상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사르후(薩爾滸) 전역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1619년 3월1일부터 4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명군은 10만 가까운 전사자를 냈다. 후금군의 전사자는 고작 200명 정도였다. 청나라 사서인 ‘만문노당(滿文老)’에서는 ‘이 같은 전과는 하늘이 후금을 도왔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라고 적었다.

 

후금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분명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하지만 광해군이 예측했던 것처럼, 명군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참패였다.

 

명군은 우선 병력에서 후금군을 압도하지 못했다. 명군 지휘부는 47만의 대군을 동원한다고 큰소리쳤지만 실제 순수 명군 병력은 10만이 채 되지 못했다. 당시 후금군은 6만 정도였다. 공격군의 병력이 수비군의 병력보다 3배 정도는 많아야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병가(兵家)의 정설임을 고려하면 명군은 우선 원정군의 면모를 제대로 갖췄다고 하기 어려웠다.

 

명군 병사들의 자질 또한 열악했다. 원정군의 병력 가운데 상당수는 사르후 전역 직전에 끌어 모은 병사들이었다. 병사들 중에는 시정의 무뢰배나 비렁뱅이들이 많았다. 그들을 갑자기 훈련시켜 정예병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지어 ‘이 같은 병력 100만을 끌어모아도 적 한 명을 죽이기조차 어려울 것’이라는 자조가 나올 정도였다. 갑자기 끌어모은 오합지졸로 후금의 철기(鐵騎)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 광해군은 조선이 후금에 고의로 항복한 것이 아니냐는 명의 의심을 없애기 위해 심하전역에서 전사한 김응하를 띄우는 사업을 벌였다. 사진은 철원에 있는 김응하 장군 사적비.
철원군청 홈페이지

 

 

명군의 무기와 화력 역시 문제가 많았다. 강홍립의 보고에 따르면 조선군을 지휘했던 우익남로군(右翼南路軍)의 사령관 유정(劉綎)의 휘하에는 대포조차 없었다. 좌익중로군(左翼中路軍) 사령관 두송(杜松) 역시 조선군 화기수 300명을 끌어다가 선봉으로 삼았다. 변변한 화력을 갖추지 못한 채 객병(客兵)인 조선군 화기수들을 서로 먼저 끌어가려고 했다.

 

명군 지휘관들은 서로 전혀 인화(人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네 개 방면의 부대로 편제된 명군은 본래 3월1일을 기하여 일제히 허투알라를 향해 출발하기로 약속했는데, 주력군인 좌익중로군을 이끌던 두송은 약속을 어기고 하루 일찍 출발했다. 공명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부대는 후금군의 정탐에 걸렸고, 고지를 선점한 후금군의 돌격전에 말려 참패하고 말았다. 두송의 패배 이후 마림(馬林)과 유정이 이끄는 나머지 부대들도 각개 격파되고 말았다.

 

 

 

광해군의 전후 수습책

 

병력, 병사들의 자질, 무기, 지휘관의 인화와 지휘 능력 등 승패를 결정하는 모든 측면에서 명군은 후금군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조선 내부에서는 패전과 관련된 모든 책임을 강홍립과 조선군에게 돌리고 있었다. 심지어 ‘명이 요동 전체를 누르하치에게 빼앗기게 된 것은 순전히 강홍립 때문’이라고 극언을 서슴지 않는 신료들도 있었다.

 

전쟁 직후 명 조정과 요동에서는 미묘한 소문이 돌았다. 명군 지휘관들 가운데는 조선군이 고의적으로 후금군에게 항복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그들은, 투항한 강홍립이 후금 진영에 머물고 있는 사실에 의구심을 나타내고, 조선 조정이 강홍립의 가족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주시했다.

 

명은 강홍립의 투항을 계기로 조선이 후금 측으로 넘어가지 않을까 우려했다. 서광계(徐光啓)는 조선과 후금이 연결되는 위험성을 강조하고, 자신이 조선으로 가서 조선 군신(君臣)들에게 유시(諭示)하여 그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자청했다. 서광계는 임진왜란 당시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상기시키고, 조선을 다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야흐로 명의 압박이 다시 가중되고 있었다.

 

광해군은 명의 의심을 불식시키고, 서광계 등의 재징병 요구를 막아내기 위해 부심했다. 그는 우선 강홍립의 항복을 ‘고의적인 것’으로 여기는 의심을 차단하기 위해 김응하(金應河)를 현양(顯揚)하는 사업을 벌였다. 김응하는 원정군의 좌영장(左營將)으로 출전했다가 전사한 인물이었다. 그는 후금군의 공격으로 진영이 함몰된 상황에서도 항복을 거부하고 싸우다가 순국한 용장이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칼을 빼들고 적과 맞섰고, 오른손에 화살을 맞자 왼손으로 칼을 바꿔 잡고 끝까지 저항하여 후금군조차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광해군은 명나라 사신들이 의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에 김응하를 모시는 사당을 짓도록 했다. 또한 그의 전공(戰功)을 찬양하는 시집 ‘충렬록(忠烈錄)’을 편찬했다. 편찬 이후 충렬록을 요동 지역까지 유포시켰다. 조선군 전체가 김응하처럼 용맹하게 싸웠다는 사실을 명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강홍립의 항복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명의 재징병 요구를 거부하다

 

1619년 4월 이후, 명에서는 조선을 설득하여 후금을 치기 위한 원병을 다시 동원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명 조정은 조선에 누차 사신을 보내 병력의 지원을 다시 요청했다. 물론 그 명분으로 ‘재조지은에 대한 보답’이 거듭 강조되었다. 오랑캐 하나를 제압하지 못하여 또 다른 ‘오랑캐’ 조선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것은 분명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명은 체면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광해군의 입장은 단호했다. 더 이상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조선의 화기수들이 심하전역에서 대부분 전사했다는 것, 거듭된 흉년 때문에 재정적 여유가 없다는 것을 재징병 거부의 명분으로 제시했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이 다시 군대를 보내면 누르하치는 의주까지 쳐들어 올 것이고, 의주에서 배를 이용하여 명의 전략 요충인 뤼순(旅順)을 공략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도 제시했다. 그 같은 사태를 막으려면 조선은 평안도를 확실히 지키는 것이 최상이고, 그것이 궁극에는 명을 돕는 계책이라고 설파했다. 명의 재징병 요구에 응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광해군의 단호한 태도는 신료들에 대해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광해군은 “나는 이미 출병 이전부터 패전을 예견했다.”고 상기시키고 자신의 대외정책에 대한 신료들의 반발을 묵살했다. 그는 강홍립과 연락을 취하는 것을 비판하는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홍립으로부터 밀서(密書)를 전달받아 후금의 내부 정세를 파악했다.

 

신료들은, 강홍립의 투항 직후 후금이 보내온 국서를 소각하여 명으로부터 의심을 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해군은 국서에 속히 응답하라고 지시하면서 그들을 질타했다.‘우리에게 털끝만큼도 믿을 만한 형세가 없는 처지에 고담준론(高談峻論)만으로 적을 제압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대의(大義)를 강조하는 것만으로 오랑캐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신료들이, 출병과 패전 때문에 재정 상황이 어려워졌음을 들어 궁궐 건설 공사를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일축했다.‘궁궐 공사를 중단하면 누르하치의 목이라도 베어올 수 있느냐?’고 비아냥 섞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자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병을 채근하여 패전을 초래했던 신료들에 대한 반감의 표시였다.

 

자신의 예측대로 맞아떨어진 심하전역 패전을 계기로 외교정책에 대한 광해군의 자신감은 커졌다. 명의 재징병 요청을 거부하고, 신료들의 궁궐 공사 중단 건의를 묵살했다. 하지만 지나친 자신감은 부작용을 부르는 법이다. 이미 폐모논의 때문에 광해군을 삐딱하게 보고 있던 재야의 신료들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양단을 걸치는 광해군에 대한 반감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심하전역 이후, 외교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가열되는 와중에 인조반정의 조짐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1623년(광해군 15) 3월13일 새벽, 인조반정군이 궁궐에 들어닥치자 반정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다급하게 창덕궁의 담을 넘었다. 내시의 등에 업힌 채 궁인 한 사람만을 대동한 초라한 몰골이었다. 자신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반정군(反正軍)의 함성 소리를 뒤로하고 그는 안국방(安國坊)의 여염으로 숨어들었다. 궁궐 담을 넘는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왕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광해군’이 되었고,‘폐주(廢主)’,‘혼군(昏君)’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쫓겨난 임금’, ‘어리석은 임금’이란 뜻이다.

 

 

▲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남아 있는 창의문(자하문).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폐주’는 몸을 숨긴 지 하루도 못되어 체포되었다. 이윽고 강화도를 거쳐 제주도로 옮겨졌다. 유배지 제주에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19년 동안 절치부심하며 광해군은 ‘인생무상’,  ‘권력무상‘을 곱씹어야 했던 그 시간 한편으로는 청군의 침략으로 자신의 복권을 꿈꾸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지만 결국 그에게는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사이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의 역사도 요동쳤다.

 

 

 

인조반정, 성공하다

 

광해군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1623년의 쿠데타를 보통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 부른다. ‘반정’이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올바른 곳으로 돌아간다(發亂世反諸正)’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광해군을 몰아내려는 모의는 162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이서(李曙), 신경진(申景 ), 구굉(具宏) 등 무신들이 먼저 발의하고 김류(金 ),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등 문신들을 끌어들이면서 급진전되었다. 신경진과 구굉은 모두 능양군(綾陽君·인조)의 인척들이고 김류와 이귀, 최명길 등은 광해군대 조정에서 쫓겨났던 서인(西人)의 명망가들이었다.

 

그들은 왜 정변을 기도했을까? ‘인조실록(仁祖實錄)’은 ‘윤리와 기강이 무너져 종묘사직이 망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반정의 명분을 기록하고 있다. 1613년 ‘은상(銀商) 살해 사건’에서 비화된 계축옥사(癸丑獄事)를 통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살해되고, 곧 ‘폐모논의(廢母論議)’가 일어났던 것이 결정적이었다.‘폐모논의’는, 그것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불효(不孝)의 극치’이자 패륜으로 인식되어 광해군 정권에 치명타가 되었고, 반정 주도 세력에는 ‘거사’를 정당화하는 절호의 명분이 되었다.

 

 

▲ 광해군의 폐위를 논의하고 칼을 씻었다는 세검정.

 

 

하지만 인조반정 주도세력들이 거사를 성공시키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고변(告變) 때문에 거사 계획이 몇 차례나 누설되었지만 용케도 토벌을 피했다. 1622년 가을, 평산부사(平山府使)로 임명된 이귀는 신경진과 함께 거사를 도모하려 했는데 기밀이 누설되었다. 체포되기 직전의 상황에서 김자점(金自點)과 심기원(沈器遠) 등이 광해군의 후궁에게 청탁을 넣어 겨우 무마되었다.

 

1623년 3월의 거사 계획도 마찬가지였다. 거사 하루 전날인 3월12일, 북인(北人) 김신국(金藎國)은 자신이 입수한 서인들의 거사 계획을 정승 박승종(朴承宗)에게 알렸다. 곧바로 역모 관련자들을 심문하기 위한 추국청(推鞫廳)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관련자들을 잡아들이라는 왕명이 떨어지지 않았다. 추국청이 설치될 무렵, 광해군은 후궁들과 연회를 벌이려던 참이라 재가를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광해군이 이러한 반정 기도를 사전에 알고서도 대비를 소홀히 한 것이 또한 의문이며 영원히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남기고 있다.

 

그래서 반정 주도 세력들에게는 그야말로 천운(天運)이었다. 이윽고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했던 반정군은 3경 무렵 창의문(彰義門)을 깨부수고 창덕궁으로 들이닥쳤다.

 

 

 

광해군, 폐위되다

 

인조반정의 거사를 이끌었던 반정군의 전력(戰力)은 사실 보잘것없었다. 병력은 1,400여명에 불과했다. 그 가운데 장단부사(長湍府使) 이서가 이끄는 700명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오합지졸이었다. 홍제원에 집결했던 군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유생들과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 무기를 잡아보거나 전투를 치른 적이 없는 그들이 기율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일사기문(逸史記聞)’의 저자는,“웃고 떠들고 소란을 피워 제대로 통솔되지 않았다.”고 당시 상황을 적었다.

 

▲ 서울 종로구 신영동에 있는 세검정 정자.

 

 

반정군이 그나마 대오를 갖추고 기율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무장 이괄(李适) 덕분이었다. 그는 당시 광해군에 의해 북병사(北兵使)에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려던 직전에 반란군에 가담했다. 이귀가 그의 장재(將才)를 알아보고 김류가 나타나지 않자 임시로 대장을 맡긴 것이었다. 이서 등 몇몇을 빼면 백면서생(白面書生)에 불과했던 반정군 지휘부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정군이, 광해군에 대한 경호를 책임지고 있던 훈련도감(訓鍊都監)의 정예병과 대적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러나 훈련도감 이홍립은 이미 반정군에 포섭된 상태였다. 그래서 반정군은 창덕궁으로 거의 무혈입성(無血入城)했고, 광해군은 반역세력에 대한 진압 한번 시도하지 못한 채 궁궐의 담을 넘어야 했다.

 

왜 그랬을까? 문제는 항상 내부로부터 불거져 나오기 마련이다. 즉위 말년의 광해군이나 그의 측근이었던 대북파(大北派)는 정치적으로 모두 문제가 있었다. 대북파의 핵심인 이이첨은 정치적 반대파인 서인과 남인(南人)을 모두 축출한 이후 권력이 극도로 비대해졌다. 그는 대외정책에서 광해군과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광해군 또한 권간(權奸)이 되어버린 그들을 불신하고 견제했다.

 

광해군은 폐위되기 전 6년 동안 자신의 경호 책임자인 훈련대장을 11차례나 교체했다. 평균 1년에 두 차례나 바꾼 것이다. 제대로 믿을 만한 신료가 없는 상황에서 비롯된 불신감의 표출이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거사가 일어날 당시 훈련대장이었던 이흥립(李興立)은 반정군에게 이미 포섭되었고 광해군을 배신한 이흥립은 반정군이 창덕궁으로 난입하는 것을 수수방관했다.

 

광해군은 또한 말년에 김개똥(金介屎)이란 상궁을 총애했다. 그런데 그녀는 이귀, 김자점 등 반정 주도세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이귀가 역모를 꾀한다.’는 투서가 수차례나 들어왔음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비호 때문이었다. 말년의 광해군은 정치적 판단력에서 분명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 조정에서 쫓겨난 이귀, 김류, 최명길 등 ‘서인’ 명망가들은 광해군의 ‘폐모논의’ 등을 명분으로 삼아 인조반정을 꾀했다. 사진은 이귀 영정.
서울육백년사 홈페이지

 

 

폐위의 명분이 된 외교정책

 

인조반정의 성공과 함께 인목대비(仁穆大妃)는 부활했다. 인조는 반정 성공 직후 덕수궁에 유폐되어 있던 그녀를 찾아뵙고 반정 사실을 알렸다. 그녀는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인조에게 옥새를 넘기고 그의 즉위를 선언했다. 그로써 인조는 선조(宣祖)의 왕통을 잇는 계승자로 자리매김되었다.

 

이윽고 광해군이 끌려와 인목대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광해군에 대한 그녀의 원한은 처절했다. 인목대비는 “10여년 동안 유폐되어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을 기다린 것”이라며 광해군의 목을 베려고 시도했다. 인조와 신하들은 ‘폐출된 임금이지만 신하들이 그에게 형륙(刑戮)을 가할 수는 없다.’고 결사적으로 방어했다.

 

3월14일,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죄악’ 10가지를 제시하고 그를 폐위한다는 교서를 공식적으로 반포했다. 당연히 ‘폐모살제(廢母殺弟)’가 먼저 언급되었다.‘궁궐 공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켜 백성들에게 고통을 준 것’,‘선왕조의 구신(舊臣)들을 모두 쫓아낸 것’,‘뇌물로 인사를 단행하여 혼암(昏暗)한 자들이 조정에 넘치게 한 것’ 등의 ‘악행’들이 차례로 거론되었다.

 

인목대비는 이어 ‘외교 문제’를 언급했다.‘선조는 임진년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잊지 못하여 죽을 때까지 명나라가 위치한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았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심하전역 때는 전군을 오랑캐에게 투항시켰고, 황제가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인 조선을 오랑캐와 금수가 되게 만들었다.’고 성토했다. 한마디로 ‘재조지은을 배신했기 때문에’ 폐위한다는 내용이었다.

 

곧이어 광해군 시절의 대북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었다. 이이첨, 정인홍 등 핵심 인물들은 대부분 처형되거나 조정으로부터 영구히 축출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거사가 성공한 당일, 인조가 도원수(都元帥) 한준겸(韓浚謙)에게 평안감사 박엽(朴燁)과 의주부윤(義州府尹) 정준(鄭遵)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점이다.

 

박엽과 정준은 서쪽 관방(關防)인 의주와 평양에 머물면서, 광해군의 지시대로 명 및 후금과의 외교 교섭을 전담하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처형한 것은, 향후 인조정권의 대외정책이 바뀔 것임을 암시하는 조처였다. 바야흐로 인조반정의 성공과 함께 조선과 명, 조선과 후금의 관계 또한 격렬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