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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62 : 고려의 역사 30 (후삼국 실록 23) 본문
한국의 역사 262 : 고려의 역사 30 (후삼국 실록 23)
승리의 화신, 유금필 장군(?~941년) : 계속
하지만 유금필의 유배는 고려에 치명타를 안겼다. 견훤은 해군 장수 상애와 상귀 형제를 동원하여 고려 경도 개성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저산도 목장에서 키우고 있던 군마를 대거 약탈해갔다. 또한 대우도(평북 용천)를 습격하여 고려의 후방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왕건이 대관 만세를 시켜 그들을 물리차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때, 유배지에 있던 유금필이 곡도와 포을도의 장정을 모아 군대를 편성하여 백제 해군을 공격하였다.
그 소식을 득고 왕건은 '참소하는 말만 믿고 어진 사람을 내쫓은 것은 나의 불찰이다."라고 하면서 그를 유배에서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전하는 말로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실로 죄없이 귀양을 살게 되었건만, 원한을 갖거나 울분을 토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도울 일만을 생각하였으니, 내가 심히 부끄럽고 후회된다."
이듬해 유금필은 정남대장군에 임명되어 의성부를 지켰는데, 그때 왕건이 급히 사람을 보내 그에게 부탁했다.
"나는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받을까 염려하여 일찍이 대광 능장영과 주렬,궁총회를 파견하여 진수토록 하였는데, 백제 군대가 벌써 혜산진(충난 당진), 탕정(충남 아신 일대) 등지에 이르러 사람과 재물을 약탈한다고 하니 신라 경도까지 침범할까 우려된다. 그대는 마땅히 가서 구원하라."
당시 백제는 충청도 서해안 지역과 경북 지역을 동시에 공격하고 있었는데, 빈 껍데기나 다름없던 경주는 신검이 이끄는 백제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왕건이 그 점을 염려하여 급히 유금필을 경주로 파견하고자 보낸 서찰이었다.
명령을 받은 유금필은 그날로 경주로 달려갔다. 많은 병력을 이끌고 가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기동력이 떨어진다는 판단에 따라 그는 별동대 80명만 선발하여 경주로 향했다. 그만큼 경주는 시각을 다투는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다.
경주 근처에 다다르자, 백제 대군이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유금필이 부하들에게 비장한 얼굴로 소리쳤다.
" 만약 여기서 적을 만나면나는 필연코 살아가지 못할 것인바, 그대들이 나와 함께 죽을 것이니 각자 살 도리를 강구하라."
그러자 휘하 장수들이 대답했다.
'어찌 우리들이 죽으면 죽었지, 장군만을 홀로 죽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병사들의 전의를 확인한 유금필은 불과 80명으로 백제 대군을 뚫고 돌파를 시도했다.
백제군은 유금필이 나타났다는 소리에 겁을 먹고 움추려 들었다, 그만큼 유금필의 명성은 백제군에게 저승사자나 마찬가지로 대단했던 모양이다.
백제 포위망이 혼란한 틈을 타서 유금필은 저지선을 뚫고 경주에 도착했다. 그러자 신라 백성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눈물로 그를 맞이했다. 유금필은 그곳에 7일간 머물면서 신검의 군대와 싸웠는데, 몇 번이나 대승을 거두고, 백제 장군 금달과 환궁 등 7명을 생포하기까지 했다.
승전보를 받은 왕건은 크게 기뻐하며 주위의 신하들에게 수리쳤다.
"우리 유장군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나중에 유금필이 돌아오자 왕건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 같은 공훈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니, 내가 이 일을 마음에서 새겨두고 결코 잊지 않으리다."
그러자 유금필이 말했다.
"국난을 당하여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위기에 직면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신하된 자의 직분이거늘, 성상께서 왜 이 지경까지 하십니까?"
왕건의 지나친 찬사에 대한 따끔한 충언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왕건은 그를 더욱 아끼게 되었다고 한다.
934년 왕건이 운주(충남 홍성)를 정벌하기 위해 친히 전쟁에 나섰는데, 견훤이 그 소식을 듣고 갑사 5천여 명을 선발하여 달려왔다. 견훤이 고려군의 형세가 만만치 않음을 알고 화의를 요청하자, 왕건은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다. 신하들의 중론은 화의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유금필은 이번에도 싸울 것을 주장했다.
왕건이 그의 의견을 존중하여 견훤의 화의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자, 유금필은 기병 수천을 이끌고 백제 군을 공격했다. 그 결과 3천여 명의 머리를 베고, 백제 장군 상달과 최필을 비롯하여 견훤의 여러 측근을 포로로 잡았다.
이 전쟁의 승리로 고려군은 공주 이북이 30여 성을 얻는 쾌거를 올렸고, 백제는 기세가 꺽여 내분에 휩싸이게 된다.
935년 그는 나주 회복전에도 나섰다. 나주는 929년에 백제에 빼앗긴 이래 수복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동안 왕건은 견서, 권직, 인일 등 여러 장수를 보내 나주 회복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하였다. 그래서 다시 신하들에게 장수를 천거토록 했는데, 처음에는 홍유와 박술희가 자청하였으나 왕건은 받아들이지 않고, 공훤과 제궁 등이 유금필을 천거하자 이렇게 말했다.
"나 역시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자에 그가 신라의 길이 막혔을 때 그가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 나는 그의 노고를 생각하고 다시 명령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금필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아뢰었다.
"저는 이미 늙었으나 이번 일은 국가 대사인데, 어찌 있는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그 소리에 왕건이 기꺼워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대가 이 명령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칭송을 뒤로하고 그는 나주로 떠났다. 그리고 나주 공략에 성공하여 뱃길을 열고 상당 부분 나주를 안정시키고 돌아왔다.
나주 공략에 대한 기록은 찿을 수가 없다. 그러나 훗날 신검의 반정에 유페되어 있던 견훤이 금산사에서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한 사실에서 나주 공략은 유금필이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일대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승리의 화신이요, 고려군의 수호신이었다. 전쟁에 나가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고, 어떤 싸움에도 물러난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백제군은 그의 모습만 보여도 지레 겁을 먹고 꽁무니를 뺄 정도였다. <고려사>는 그런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유금필은 장령으로서의 전략을 가졌으며, 병사들에게는 늘 신망의 대상이었다. 출정할 때마다 명령을 받으면 즉각 출동하였고, 집에 들리지도 않았다. 개선할 때면 태조 왕건은 반드시 마중을 나가 위로해 주었으며, 시종일관 다른 장수들이 받지 못하는 총애와 대우를 해주었다."
그는 941년 에 죽었으며, 시호는 충절이다. 성종 13년에는 태사 벼슬을 추증하였고,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에게는 긍, 관유, 경 등의 아들이 있었고, 태조의 제9비 동양원부 유씨는 그의 딸이다.
유금필 장군, 왕건, 그리고 고려
어쩌면 왕건은 고려 건국과 통일에 유금필이 없었다면 가능하였을까? 의문을 가져본다.
아마 왕건이 유금필을 만나지 못했다면 견훤에게 연전연패하여 안동, 공주, 홍성, 나주 수복은 불가능하였을지도 모른다. 이 네 전장은 고려의 한반도 통일에 결정적인 승기를 잡은 전투였다. 그리고 견훤이 개성을 급습한 전투인 상애, 상귀 형제를 통한 해상전투에서도 유금필이 아니었다면 고려는 혼란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전투에서, 가장 위기시에 유금필은 항상 가장 먼저 앞장서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장수였다.
고대 로마와 카르타고가 벌인 '포에니 전쟁'에서 명장 한니발에 버금가는 장수이며, 조선 시대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버금가는 장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전술. 전략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그는 백제군을 가는 곳마다 격파하였고 견훤의 전술. 전략을 능가하는 전술의 대가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다른 장수들이 주저하거나 방안을 찿지 못하는 일을 능히 해결하는 장수였고, 어쩌면 그의 기지와 충성심은 왕건에게는 분에 넘치는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운을 잘 타고난 왕건의 고려 개국은 반정으로 폭정을 일삼던 궁예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것 만이 성공은 아니었다. 왕건의 반정에 불만을 품고 초야로 내려가 야인으로 살고 있던 유금필을 찿아 삼고초려한 왕건은 사람보는 눈은 정확했던 모양이다. 왕건은 유금필이 있었기에 백제의 견훤을 누르고 탄탄한 고려를 탄생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역사에서 한 인물이 이토록 결정적인 역활을 한 예는 드물다. 그는 병사들에게 존경과 흠모를 받는 위대한 장수였고 몸을 사리지 않는 사람이었으며 청렴하여 사치를 몰랐고 나이를 핑계대고 안일을 몰랐다. 그는 출세를 위해서 전장터에 나가지 않았으며 왕의 명령에는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군인이었다. 그는 백제군의 고려 후방에 대한 해상기습 공격시 고려 조정의 장수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즈음, 오로지 국가를 위해 안위를 항상 걱정하다 적의 공격 소식을 듣고 유배지인 백령도에서 어선을 모아 선단을 꾸리고 세력을 만들어 왕의 명령 없이도 스스로 적을 찿아 공격전투를 벌인 사람이기도 하다.
이러한 그의 장수다운 모습에서 군인의 참모습을 보게 되며 오늘날 출세와 진급에만 연연하는, 그리고 밥그릇 싸움질에 정신없는 군을 생각할 때 씁슬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그래서 특히 군인은 전쟁사를 포함하여 역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많은 공부를 해야하며 그래서 과거를 돌아보고 위대한 장수와 인물들과 대화하며 교감하고, 어지러운 세상의 오늘을 살피고 변화무쌍한 미래인 내일을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을 길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군인은 의롭게 살다 의롭게 죽는 강직한 품성의 충성심이 넘치는 지혜로운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도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직 군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진데,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삶의 지혜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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