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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5월 (군번줄 공방) 본문
우면산의 5월 (군번줄 공방)
군번줄 공방
30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때아닌 ‘군번줄’ 공방이 벌어졌다.
육군참모총장 출신인 자유선진당 이진삼 의원은 이날 오후 국회 국방위에 천안함 사태의 원인을 ‘군의 안일한 안보의식’으로 지적하며 이상의 합참의장과 김성찬 해군참모총장에게 “군번줄을 목에 걸었느냐”고 물었다.
당황한 두 사람이 “안 맸다”고 대답하자 이 의원은 뒤에 앉아있던 장성들에게도 “군번줄 맨 사람 손을 들어보라”고 추궁했다.
그러나 장성들도 군번줄을 대부분 매고있지 않자 이 의원은 “당신들이 전사했을 때 누가 죽었는지 어떻게 알겠나. 또 부상을 당했을 땐 혈액형을 알아야 수혈을 할 것 아니냐”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나는 군번줄을 한 번도 안 맨 적이 없다. 간부들부터 자세를 가다듬어라”며 말했다.
이에 김태영 국방부 장관이 “군번줄은 전시에 꼭 가져가는 것이지 평상시에 국회에 질의 답변하러 오는 장성들이 착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 의원은 “정신이 나갔구만. 저러니까 국민들이 국방장관 보고 뭐라하는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의원은 또 군 장성들이 ‘천안함 46용사’ 영결식에서 행한 거수경례 자세를 지적하며 “경례 자세가 그게 뭐야. 내가 흉내내 볼까. 이렇게 딱 못해? ”라며 직접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육군참모총장 출신인 자유선진당 이진삼 의원은 이날 오후 국회 국방위에 천안함 사태의 원인을 ‘군의 안일한 안보의식’으로 지적하며 이상의 합참의장과 김성찬 해군참모총장에게 “군번줄을 목에 걸었느냐”고 물었다.
당황한 두 사람이 “안 맸다”고 대답하자 이 의원은 뒤에 앉아있던 장성들에게도 “군번줄 맨 사람 손을 들어보라”고 추궁했다.
그러나 장성들도 군번줄을 대부분 매고있지 않자 이 의원은 “당신들이 전사했을 때 누가 죽었는지 어떻게 알겠나. 또 부상을 당했을 땐 혈액형을 알아야 수혈을 할 것 아니냐”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나는 군번줄을 한 번도 안 맨 적이 없다. 간부들부터 자세를 가다듬어라”며 말했다.
이에 김태영 국방부 장관이 “군번줄은 전시에 꼭 가져가는 것이지 평상시에 국회에 질의 답변하러 오는 장성들이 착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 의원은 “정신이 나갔구만. 저러니까 국민들이 국방장관 보고 뭐라하는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의원은 또 군 장성들이 ‘천안함 46용사’ 영결식에서 행한 거수경례 자세를 지적하며 “경례 자세가 그게 뭐야. 내가 흉내내 볼까. 이렇게 딱 못해? ”라며 직접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이진삼 의원은 육군참모총장 시절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다. 군시절 별명은 '이하사'
그는 군에서 현직에 있을 때도 애피소드도 많았던 사람이었으며 그의 전략전술은 오로지 진지구축이었다. 현대전이 진지전이 아니라는 사실은 최근 전쟁에서도 잘 알려주고 있지만 그는 완벽한 진지구축이 전승의 비결이라는 지론이었다. 총장 재직시 전군에 진지구축 명령이 하달되어 장병들이 수개월 동안 교대로 거의 산에서 살다시피 한 적이 있었다. 그당시가 92~94년 사이므로 아마 지금 40대 초.중반 나이의 남자들 중 육군에 근무했던 사람이라면 대개 다 경험하였을 것이다.
진지구축이 그 당시에는 사단장 목이 달린 총장 지시사항이라 모든 것에 우선이었으며 진지 검열단이 도착하는 날은 전사단이 비상상태였다. 전 사단은 검열단이 도착하면 군악대를 동원하고 전 참모/지휘관들이 사단 사령부에 도열하여 환영을 하였다. 대접도 융슝하여 최고의 대우를 받았고 평가가 잘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인맥을 총동원하여 다방면에서 은근히 압력을 행사하곤 하였다. 다음날 사단에서 진지공사 현황 브리핑을 듣고 전방의 가장 잘 된 거점 1개소, 종심이나 후방지역의 진지 중 검열관이 임의로 1개소를 선정하여 검열하였다. 대부분 전방 거점은 전 장병들이 구슬땀을 흘리면서 노력한 결과 대부분 잘 구축되어 있었으나 종심진지나 후방진지는 대부분 병력투입 여력이 모자라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각 사단은 검열관이 임의로 선정하는 종심이나 후방 거점에서 대부분 비교가 되었다. 이러한 거점은 유사시 투입되는 거점이기 때문에 사단에서 비교적 관심이 적은 거점이었다. 검열에서 지적사항이 많으면 담당 거점 부대장은 사단으로부터 질책을 받았고 개인적인 근무평가 점수도 잘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개인신상에 불이익이 가지 않도록 사소한 지적사항은 현지에서 부대장에게 위임하고 특이한 차이점만 평가하였다. 모두가 고생한 거점공사였으며 장병 모두가 엄청난 고생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대별 평가는 토토리 키재기 평가가 될 수 밖에 없었고 부대별 임무가 다르기 똑같이 비교하여 때문에 공정한 평가도 어려웠다. 그래서 군별, 동종임무의 사단별/여단별로 구분하여 비교평가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년말이면 군별로 우수부대 표창을 비롯하여 총장 개인표창을 사단별로 거의 5명 이상씩 주었다.
각 부대는 모든 훈련을 중지하고 담당 거점이 있는 산으로 올라가 방카, 날개진지, 교통호 높이/폭, 사대, 지가.배수로, 암거, 수류탄 처치공, 치중시설, 진입로, 위장, 후송시설, 탄약고, 우물, 전차 기동로 구축에 전국토의 산이란 산은 모두 파헤쳐졌고 시멘트, 모래, 자갈, 물, 블럭, 목재, 합판, 도쟈, 굴삭기, 담프차가 산으로 올라갔다. 진지구축을 위해 수많은 페타이어가 전.후방 진지가 있는 산으로 운반되어 진지구축에 사용되었다. 진지가 있는 산 후사면을 폭파 절토하여 헬기장을 만들고 거점 종심진지도 장병들이 투입되어 구축/보강되었다. 평소 진지구축에 소홀하던 부대들이 장기간 산에서 진지공사로 장병들의 수염이 자라 모두 산적꼴이 되었다. 후방의 향토사단 등 모든 사단들이 진지구축에 열을 올리면서 지역 기업체로부터 자금/물자지원도 엄청나게 받았고 해안 철책/교통호/진지, 해안포 진지도 대대적으로 구축되었다. 그는 년초 시무식 때 "년말에 가장 불량한 사단장 1명은 보직해임시키겠다"고 천명하고 강력하게 추진하였던 결과 군내 사고는 대폭 줄었으며 년말에 보직해임된 사단장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각부대 거점에 올라가보면 눈에 잘 보이는 오피(관측소) 근방에만 반질반질하게 구축되어 있고 측.후방이나 사각지대, 종심진지는 낙옆속에 파뭍혀 잘 보이지도 않는다. 우면산 진지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안보가 허물어지듯 그 때 구축한 진지들이 허물어 지고 있었다.
우면산 등산길 근방 진지 모습 (등산길 옆이나 오피 근방에 비교적 잘 구축된 진지)
당시 진지총장은 별이 넷이나 되지만 하는 짓이 하사급이 하는 것 같아 '이하사'란 별명을 들었다. 본인이 알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장성들도 이하사 앞에서는 전전긍긍하였다. 매사에 하는 짓이 엉뚱하기도 하였고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며 당당하였으며 항상 누구든지 그 앞에서는 기선을 제압 당하였다. 그는 장군이든, 장교든 장병들을 만날 때마다 상대의 기선을 잡는 방법이 군번줄을 검사하거나 경례자세가 불량하다며 트집을 잡으면 일단 기선이 제압된 상대는 할 말도 못하고 욕만 먹고 나오기가 대부분이었다. 고집도 세고 완고한 성격에 성질이 불같으며 삐치기도 잘 하였으나 윗 사람에게는 절대 충성하는 출세형이었다. 그래서 총장이 되었고 지금은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군번줄을 확인하고 국방부 장관과 장성들을 부하다루듯이 발언을 하고 있다. 과연 하사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모습이 대견할 뿐이다.
사병 출신의 네티즌들은 고소하다며 난리를 치고 있으나 일부는 '너무하지 않는가'라며 비난도 하고 있다. 모두가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니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군생활을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할 뿐만아니라 각종 규정을 철저히 지키면서 상급자의 지시사항을 준수하고 하급 병사들을 친동생처럼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면서 자신에게 긍정적인 시간으로 활용한 사람은 군에 대해서도 긍정적이며 심성이 고우며 사려가 깊을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도 비교적 성공적인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군생활을 부정적인 생각으로 열외를 밥먹듯이 하고 매사에 요령만 피우거나 하급 병사들에 대하여 보일러실, 건물 옥상, 화장실, 보초 근무간에 구타, 얼차려, 욕설, 성적 학대 등으로 못살게 굴던 인간성이 야비하고 바탕이 바르지 못한 병사들은 대부분 군생활을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군생활은 한 번 지적 받으면 계속 지적받게 되는바, 상기와 같은 잘못된 행위로 간부들에게 적발되면 얼차려를 받거나 영창, 전출, 군법회의 회부 등으로 군에 대하여 부정적이며 간부들에 대하여 배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고 국방에 대한 사고가 평생 부정적이며 건전하지 못한 사고를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며 사회생활도 실패하는 비율이 높다고 한다. 본인들이 어떻게 군 생활을 했는지 찬찬히 잘 생각해 보시고 현재의 자신을 되돌아보시기 바란다.
나도 들은 이야기지만, 그의 어머님이 3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쌀 '삼백석' 이상 거두는 부자가 되어 잘 살아라는 뜻으로 삼형제 이름을 지었는데, 이진삼, 이진백, 이진석이라고 지었다고 한다.ㅋㅋ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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