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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38 (삼성 성장과정1)

두바퀴인생 2010. 1. 17. 01:22

 

 

우면산의 겨울 38 (삼성의 성장 과정1)

 

새벽 

 

15일 이명박 대통령과 30대 그룹 회장들의 회동은 전례 없는 '화답'의 시간이었다.

대기업들은 투자와 고용을 늘리겠다고 밝혔고, 정부는 기업들의 부담을 덜어주겠다고 답했다. 이 대통령은 간담회 말미에 “정부와 개별 기업이 마주앉아 얘기하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도 하지 않는 상호 협력의 모델이자 한국 문화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간담회는 기업인들의 노고에 대한 대통령의 치하로 시작됐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우리 기업인들이 세계 어느 기업인보다 더 열심히 해주셨다”면서 “한국 기업들의 성적이 좋았던 것은 환율 덕분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그보다는 경쟁력을 갖고 도전적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한 데 기인한다”고 말했다. 이후 간담회는 비공개로 1시간 반 동안 진행됐다.

    이대통령, 30대 대기업 오너들과 간담회

 

 

이병철의 창업

 

창업주 고 이병철씨는1938년 3월 1일 대구에서 '삼성상회' 설립하여 청과물.건어물 등을 중국.만주 등지에 수출하는 사업을 전개하여 성공하면서 천부적인 사업 수완을 발휘하였다. 10년 후인 1948년 '삼성물산공사'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전국토가 초토화 되었고 국민들은 피죽으로 연명하고 있을 때인 1953년에는 한국 최초의 설탕제조 업체인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을 설립하여 한국인들에게 설탕을 처음 소개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시중에는 부자 외외에는 살 수 없는 품목으로 품귀현상을 빚을 정도로 판매고를 올리면서 수익을 창출하였다. 현재는 설탕 이외에도 햄.소세지,조미료 등 모든 식품, 사료 및 의약품 등 다양한 제품군을 생산.판매 하고 있다.

 

1954년에는 제일모직공업 (현 제일모직)을 설립하였는데, 삼성의 모태 기업으로 출발했다. 동년 9월 15일 제일모직공업(주)로 설립되어, 1972년 7월 경북 경산공장을 분리해 제일합섬(주)를 설립했다.(현재의 웅진케미칼) 이후 1976년 현재의 제일모직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1970년대 패션사업 진출, 1990년대에는 케미칼 사업, 2000년대에는 전자재료 사업에 진출했다.

 

패션 사업은 직물 사업을 통해 쌓아 온 노하우와 품질, 디자인 경쟁력 등을 결합해 토털 패션기업으로 성장했다. 빈폴, 갤럭시, 로가디스, 엠비오, 후부, 구호 등의 브랜드를 전개 중이다.

 

케미칼 부문은 ABS, PS, Engineering Plastics 등의 합성수지 사업을 시작으로, 현재 고기능 합성수지인 모니터용 난연 ABS와 냉장고용 압출 ABS 수지는 세계 최고 시장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1997년부터 생산을 시작한 인조대리석 사업은 세계 최초 투명 인조대리석을 출시했다.

 

반도체봉지재 EMC로 개발로 시작된 제일모직 전자재료 사업은 2002년 구미에 IT생산 단지를 준공해 2차 전지용 전해액, 전자파폐재인 EMS, LCD용 CR, 반도체용 CMP Slurry 등을 양산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여 가고 있다. 2007년 3월 코스닥 상장기업인 에이스디지텍을 인수하여 LCD패널의 핵심소재인 편광필름 사업을 시작하였고, 이를 통해 미래 신수종사업의 본격적인 확대 및 차세대 경쟁력 향상을 위한 기반을 강화했다.

 

지난 1989년 사업 다각화를 통해 새로운 성장기회를 확보하고자 케미칼 사업에 진출했다. 전남 여수에 케미칼 공장을 설립해 합성수지인 ABS, PS와 기능성수지인 SAN, EPS, EP 등을 생산한 데 이어, 1997년에는 건자재 사업인 인조대리석 사업에 진출, 사업영역을 확장해 왔다. 2000년에는 세계 최초로 친환경 난연 ABS 수지를 개발했다. 모니터용 및 TV용, 냉장고용 수지는 시장 점유율 세계 톱3 안에 들어가는 월드베스트 제품이다.

 

전자재료 사업으로 1996년 반도체 봉지재인 EMC 출시를 시작으로, 편광필름, 확산판, CR 등의 LCD관련 소재와 Paste 등의 PDP소재까지 현재에는 IT산업 전 분야에 진출해 있다. 삼성전자, 삼성SDI 등 IT 관련 Captive user왕의 활발한 교류를 바탕으로 사업의 성장규모가 가속화되고 있다. 2007년 3월, 에이스디지텍을 인수해 LCD패널의 핵심소재인 편광필름 사업을 개시했다.

 

패션 사업에도 진출하였는데,1954년 직물사업을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세계수준의 최고급 복지를 생산해왔으며, 1989년 신사복 사업을 통해 패션 사업에 진출, 캐주얼, 숙녀복, 스포츠웨어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해 모든 라인업을 갖춘 토탈패션기업으로 성장했다. 지속적인 사업구조의 혁신의 일환으로 JIT(Just In Time)시스템을 도입, 상품기획에서 구매, 생산의 리드타임(Lead Time)을 단축해 경영 효율을 극대화했다.

 

패션소재 중 골든텍스 : 1956년 첫 선을 보인 신사복지 대표 브랜드 골든텍스는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인정받으며 일본과 신사복지 시장에서도 높은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란스미어는 2002년 세계최초 170수 '란스미어 220'을 개발한데 이어, 2003년에는 12.2 마이크론 섬도의 최고급 원료를 사용한 수퍼 230수 '란스미어 230'을 개발하는 등 최고의 기술력을 선보였다.

 

1956년에는 호주박람회에서 삼성물산에 참가하였고, 1957년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사원공개 채용 실시하였다.

 

 

1958년 2월 안국화재(현 삼성화재)를 인수하였으며 안국화재는 1962년 11월 안보화재를 인수하여 현재 삼성화재의 기틀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안국화재는 영업소를 신설하고 판매조직을 확충해 1970년에 들어서는 동방해상에 이어 2위의 실적을 거뒀다. 해외시장 진출도 적극적으로 추진해 1978년 5월, 영국 런던에 최초의 해외사무소를 개설했다. 이후 미국과 일본, 인도네시아, 중국, 베트남 등에도 해외사무소를 설치하고 글로벌경영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정부는 1983년 한국자보가 독점 판매하던 자동차보험을 손보사가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도록 했다. 안국화재는 최상의 보상서비스망과 우수인력을 확보하고 자동차보험시장에 발을 들여 놓았으며, 이후 착실한 성장을 거듭하여 1994년에는 자동차보험 시장의 정상에 우뚝섰다. 현재의 본사 사옥인 을지로 사옥도 이 시기에 세워졌다.

 

  

 

1993년 10월, 21세기 세계 최고의 손해보험회사로 진입하기 위해 제2창업을 선언하고 같은해 12월 안국화재에서 삼성화재로 사명을 변경했다. 이후 삼성화재의 실적은 해마다 성장하여 2001년에는 시장점유율 30%를 돌파했고, 동시에 21년 연속 흑자경영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지금까지도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삼성화재 남자배구단은 1995년 창단됐으며 이듬해에는 삼성화재 세계바둑오픈 선수권대회가 창설됐다.

 

  

 

2002년 창립 50주년을 맞은 삼성화재는 "타임캡슐 제막식" 행사를 가졌다. 삼성화재의 반세기 역사를 담은 타임캡슐은 2052년 창립 100주년 기념일에 개봉된다.

 

2002년에는 업계 최초로 자동차보험 대표브랜드 "삼성 애니카(Anycar)"를 발표하고, 브랜드 중심 경영을 개시했다. 고객의 큰 사랑을 받은 "애니카(Anycar)"에 이어 2006년에는 장기보험에 "생활보험 올라이프(Allife)" 슬로건을 도입하고 손보업계에 '생활보험'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전파시켰다.

  

 

삼성화재는 2005년 6월, 중국(상해)에 세계 보험업계 최초로 현지 단독법인을 설립했다. 중국법인은 이후 2006년 8월 북경지점, 2008년 1월 심천지점을 설립, 중국 전역을 대상으로 한 보험영업 및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삼성화재 을지로 본사 사옥과 나란히 위치한 삼성빌딩은 2006년 11월 "메트로폴 50"이라는 옷을 새로 입었다. "메트로폴 50"은 네온 랜드마크 조형물로 '서울의 기둥', '서울의 중심지'를 의미한다. 기업 홍보차원을 넘어 도시 미관까지 고려하면서 고객과 함께 하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공간인 "메트로폴 50"은 고객과 함께 글로벌 우량기업으로 성장할 삼성화재의 미래를 상징하기도 한다.

 

 

 

1963년 신세계백화점과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을 인수하였다.

주식회사 신세계는 1930년 10월 24일 일본의 미쓰코시 경성점으로서 개업하여, 해방 이후 동화 백화점으로 영업하다가, 1963년에 삼성그룹으로 흡수되어 상호를 신세계백화점으로 바꾸었다. 1967년 국내 최초 바겐세일을 실시하고, 1969년 국내 최초로 신용커드를 발급하였으며, 1991년에 삼성그룹에서 독립을 선언하여 1997년에 공식 분리되었다.

 

2001년 3월에는 (주)신세계백화점에서 (주)신세계로 상호를 변경하고, 현재는 백화점 경영과 함께 대형 할인점 이마트를 전국적으로 확대하며 영업하고 있다. 2002년부터 대구백화점과 업무제휴를 하고 있다. 2006년에는 월마트코리아 주식회사를 인수하였고, 그동안 세입자 주체였던 신세계백화점 미아점을 폐점시켰다. 2007년 대한민국의 유통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국제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로부터 A3(안정적) 신용등급을 획득하였다. 이는 아시아에서 일본의 이세탄, 한큐백화점과 함께 최고 수준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6년 이마트를 비롯한 신세계의 마진율은 29%로, 월마트의 23.1%, 까르푸의 21.4%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신세계는 8개의 백화점 ( 본점, 강남점, 영등포점, 인천점, 죽전점, 광주신세계, 마산점, 센텀시티점 )과 121개의 이마트를 운영하고 있다.

 

한편 관계사로는 백화점과 이마트를 모체로 한 신세계를 중심으로, 신세계건설(유가상장시장), 신세계아이앤씨(유가상장시장), 광주신세계(유가상장시장) 신세계푸드(코스닥)가 상장되어 있고 그 외에 신세계첼시, 조선호텔, 조선호텔베이커리, 신세계인터네셔널, 스타벅스코리아가 있다.

 

삼성생명보험(三星生命保險, Samsung Life Insurance Co.)은 1957년 동방생명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2007년 현재 자산 108조원, 매출 23조원의 생명보험사이다.

 

 

삼성생명 대구사옥

  • 1957년 동방생명주식회사 설립.
  • 1963년 삼성그룹 계열사로 편입.
  • 1966년 보유계약 200억 원 돌파.
  • 1982년 삼성생명공익재단 설립, 여자농구단 창단.
  • 1983년 레슬링단 창단.
  • 1984년 태평로 신 사옥 준공
  • 1986년 동경, 뉴욕 주재사무소 설치.
  • 1989년 삼성생명보험으로 상호변경.
  • 1994년 삼성서울병원 개원, 월 매출액 1조원 돌파.
  • 1997년 태국 합작 생명보험사(사이암 삼성) 설립.
  • 1999년 휴먼센터 개원.
  • 2001년 실버 타운 노블 카운티 개원.
  • 2004년 자산 90조 돌파.
  • 2005년 중국 합작 생명보험사 영업개시.
  • 2006년 MDRT 회원가입수(2649명) 세계1위, 자산 100조 돌파
  • 2007년 창립50주년 기념식 개최.

 

1964년에는 한국비료공업(주)(현 삼성종합화학)를 설립

1966년 5월 24일 삼성이 경남 울산시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 포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이 났다. 뒤늦게 이를 적발한 부산세관은 같은해 6월 1059 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여만 원을 부과하였다. 삼성은 한국비료 공장을 짓기 위해 일본 미쓰이 사로부터 정부의 지급보증 아래 상업차관 4천여만달러까지 들여왔다.

 

1967년 비료공장 준공과 함께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정부관리로 넘어갔다. 그후 정부에서 민간에 불하시 이병철이 다시 인수하였다.1976년 4월 국내 비료회사로는 최초로 기업을 공개했다. 요소비료. 고급수지 원료인 멜라닌, 정밀화학분야인 MA류(메탈아민.다이매틸폼아마이드.클린클로라이드)의 생산.판매와 화학기기장치(열교환기. Balltank) 등을 수주.제작.남품하였다. 1994년 삼성정밀화학(주)로 사명을 변경했다.


사카린 밀수를 현장지휘했다고 밝힌 이맹희(이병철 장남)씨가 1993년 발간한 《회상록 - 묻어둔 이야기》에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적극 감싸고 돈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1965년 말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줬다. 아버지(이병철 회장)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이맹희 씨)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당시 밀수 총액을 요즘으로 치면 2000억 원에 해당했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레스 판과 사카린 원료 등이었다."

 

 

우면산 아침 

 

한국비료공업(주) 창업과정과 사카린 밀수와 연계된 이야기를 소개한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의 성공에 힘입은 이병철은 비료공장 건설을 구상했다. 그것도 세계 최대 아니면 동양 최대의 비료공장이었다. 이미 이승만 정권 말기부터 그런 구상을 해왔으나 워낙 큰 사업이어서 정부의 지원과 허가가 필요했다. 
 
이병철이 비료공장 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결심을 한 것은 1959년 초의 도쿄에서였다. 이른바 도쿄구상인데, 도쿄의 제국호텔에 머물던 이병철은 TV의 신년대담에서 미국 및 영국ㆍ서독ㆍ프랑스ㆍ이탈리아ㆍ캐나다ㆍ호주 등 선진 10개국의 발의로 개발가능성이 있는 후진국에 장기저리로 차관을 제공한다는 말을 들었다.      
 
귀가 번쩍 뜨이는 내용이었다. 세계적인 규모의 비료공장을 짓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던 것이다. 그 내용을 자세히 조사해본 결과 그 돈은 원조자금이 아니라 민간이 공여하는 상업차관이었고, 사업계획만 타당하면 장기저리로 자금을 대여받을 수 있었다. 이병철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기회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1년에 2억 5,000만 달러 규모의 원조자금을 받고 있었는데, 이 중 1억 달러 정도를 비료 수입에 쓰고 있었다. 원조자금으로 구입하는 수입품목 중에서는 최고였던 것이다. 정부도 그걸 알고 1955년부터 충주비료공장을 짓고 있었고, 1958년에는 나주비료공장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두 공장이 모두 정상 가동되다 하더라도 연산 6만 톤 정도밖에 되질 않았다. 당시 한국에서 필요한 비료의 양은 1961년에 30만 톤, 1966년에는 40만 톤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충주와 나주비료공장 같은 곳이 다섯 개 더 있어야 비료의 양을 충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병철은 수출경쟁력을 갖춘 비료공장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려면 세계 굴지의 최신식 대규모 시설이 필요라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 규모를 35만 톤으로 하고 비료 종류는 암모니아가 아닌 한국에 적합한 요소비료와 복합비료로 계획을 잡았다.
 
이병철은 귀국하자마자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했다. 이승만을 방문한 이병철의 용건은 비료공장을 건설하고 싶은데, 정부가 승인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비료공장을 건설하는데 돈이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다. 이병철이 '약 4~5천만 달러'라고 대답하자 이승만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당시 이승만은 단 1달러라도 자신이 직접 결재를 할 정도로 달러를 아껴썼다. 그런데 무려 4~5천만 달러라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병철은 비료공장에 건설될 소요자금은 유럽에서 차관으로 들여올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그제야 이승만은 만족한 표정으로 꼭 성사시키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일단 대통령의 승낙이 떨어졌으므로 이병철은 차관 도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0년 2월 1일, 이병철은 유럽 순방길에 오른다. 그는 주한 서독대사인 헤르츠의 소개로 서독의 에르하르트 경제장관을 만나기로 했다. 당시 서독은 80억 달러의 자금을 보유한 경제부국이었다. 이병철은 서독 관리의 소개로 크루프사의 부사장을 만난다. 크루프는 1801년대에 설립된 제강회사로 당시에는 독일의 대재벌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 때 청국의 주력함이자 아시아 최대의 군함이었던 7,335톤의 정원(定遠)ㆍ치원(治遠)함도 바로 크루프에서 만든 것이었다.
 
이병철은 단도직입적으로 30만 톤 비료공장을 건설하고 싶으니, 차관을 얻고 싶다고 말했다. 크루프의 부사장은 뜻밖에도 쾌히 승낙했다. 이미 에르하르트 장관으로부터 자세한 내용을 들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서독의 방침은 80억 달러의 외환 중 3억 달러 정도는 개발도상국에 원조로 재공하는데, 이미 인도에도 차관을 제공했다는 것이었다. 부사장은 주거래 은행의 지불보증만 보내주면 곧바로 자금을 집행하겠다고 말했다. 이병철은 사업계획서를 보내주기로 하고, 다음 방문지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탈리아 몬테카티니 재벌 계열의 비료회사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몬테카티니는 유럽 각지에 화학ㆍ비료ㆍ발전ㆍ소광산 등 100여 개의 사업체를 거느린 재벌회사였다. 몬테카티니 비료회사는 1930년대 세계 최초로 질소암모니아비료 공법을 개발한 바 있는데, 바로 그 공법으로 처음 공장을 세운 곳이 바로 흥남질소비료공장이었다. 그는 자신들이 개발한 기술을 당시에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는데, 한국의 흥남질소비료공장이 그걸 받아주었다면 마땅히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서독과 이탈리아와의 협상은 난항은 커녕 너무나 쉽게 끝났다. 차관교섭이 수월하게 풀려 이병철은 며칠 간 이탈리아 관광을 했다. 그때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에서 4ㆍ19혁명이 발발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는 것이었다.
 
귀국한 이병철은 세상이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비료차관 교섭은 4ㆍ19 후 이른바 부정축재처리문제로 암초에 부딪히게 된다. 당시 여론은 이른바 부정축재자들을 처벌하라고 아우성이었다. 삼성의 직원과 이병철도 모두 부정축재자로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병철도 부장검사에게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탈세가 조사의 대상이었다. 이병철은 자신이 탈세를 했다고 강변하고, 직원들은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고 주장을 했다. 서로 죄를 덮어쓰려는 것이었다. 그 후 몇 달 간 조사가 진행되었고, 결국 삼성은 6개 업체에 50억여 환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이병철은 자신이 그동안 추진해오던 비료 프로젝트 서류 일체를 김영선 재무장관에게 맡겼다. 
 
며칠 후 이병철은 비통한 심정으로 일본으로 외유를 떠났다. 1년여 동안의 긴 외유가 시작된 것이었다.
 
비료공장 건설 문제가 다시 거론된 것은 5ㆍ16이 지나고 나서였다. 혁명정부는 공장건설을 통해 국가경제를 발전시키고, 국민소득을 높이기 위해 외자도입을 추진하게 된다. 외자도입에 이병철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외자도입에 따른 공장건설 시 기업인들은 각자 하고 싶은 업종을 선택했다. 이병철과 삼호의 정재호, 조선견직의 김지태는 비료를, 남궁연은 정유, 동양그룹의 이양구, 대한산업의 설경동은 제철, 구인회는 케이블, 금성방직의 김성곤과 대한제분의 이한원은 전기 등을 선택했다. 이것은 정부와 재계의 합의였다.
 
이 합의에 따라 이병철은 정재호ㆍ김지태와 함께 울산비료공동투자체를 구성하고, 다시 일본과 유럽을 방문했다. 차관문제를 다시 협의하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일본의 고베제강, 후지전기, 신미쓰비시조선, 미국의 비트로 인터내셔널, 서독의 크루프 등이 투자계획서를 보내왔다. 그 중 고베제강에서 보내온 것이 가장 유리했다. 
 
이병철은 외자 5,500만 달러를 유치하고, 내자 50억 환을 투자해 연산 30만 톤 규모의 비료공장 건설에 의욕을 불태웠다. 그러나 연간 수출액 1억 달러가 고작인 당시 정부는 결국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는 비료공장 건설을 포기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병철은 또 한번 상심했다.
 
그후 다시 한번 기회가 왔다. 1963년 10월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정희로부터 비료공장 건설을 다시 한번 추진해달라는 권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병철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벌써 두 번이나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는 부총리 장기영을 통해 비료공장 건설을 종용했다. 장기영도 의욕을 갖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병철이 선뜻 결심하지 않았다. 조령모개식의 정부방침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장기영은 이병철에게 전화를 걸어오더니, 나중에는 집으로 여러 차례 찾아왔다. "행정 상의 문제는 모두 내가 뒷받침할 테니 비료공장을 빨리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결국 행정허가, 대외차관, 자금 등의 문제를 정부가 적극지원한다는 방침 아래 비료공장 건설이 결정됐다. 이병철의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병철은 차관교섭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정부가 삼성에 대규모 비료공장 건설을 일임했다'는 공문도 지참했다. 평소 교분이 두터웠던 일본 미쓰이 물산의 미즈쇼 사장, 야마다 제철의 이나야마 사장, 고베 제강의 가이지마 사장 등을 만나 문제를 의논했다. 야마다 제철의 이나냐마 사장이 특히 적극적이었다. "우리가 최대한 협조할 테니 맡겨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접촉은 금세 소문이 났다. 일본 바료업계는 벌집 쑤신 듯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한국은 일본 비료업계의 큰 시장인데다 장차 해외에서 경쟁상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의 비료공장은 18만 톤이 최대규모였고, 나머지는 겨우 5만~6만 톤 사이였다. 이병철이 30만 톤 급 비료공장을 세운다는  사실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비료업계를 대표하는 사람이 찾아오기도 했다. '공장건설을 취소하면 앞으로 한국에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장기적으로 공급하겠'는 제의도 있었다. 물론 이병철은 그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지만 일본 비료업계는 30만 톤 급 비료공장을 건설하면 그때부터는 경쟁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향히 일본 재계는 호의적이었다. 야마다 제철의 이나야마 사장의 중재로 결국 미쓰이 물산이 비료공장 건설에 따른 플랜트 설비와 자금을 대기로 최종 합의됐다. 비료 생산량 연간 33만 톤, 외자는 4,200만 달러로 2년 거치 8년 상환이었고, 연리는 5.5%였다. 
 
연평균 생산량 33만 톤은 세계 최대 수준이었다. 당시 국내의 비료 1톤은 86~90달러 수준이었는데, 이병철의 한국비료는 톤당 56달러 수준으로 비료공급이 가능했다. 한 마디로 고용창출이 되면서도 싼 값에 비료를 공급할 수 있는 효과가 생긴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드디어 한국비료 울산공장은 건설에 들어갔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국비료 공장이 80%쯤 건설되고 있던 1966년 9월 16일, 이른바 한비 밀수사건이 터진 것이다. 문제의 발단은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OTSA라는 약품이 정부의 허가 없이 시중에 유출되어 판매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OTSA는 이탈리아의 몬테카티니사가 개발한 특수약품으로 질소비료 공정 중 하나인 탄산가스의 흡수재생공정에 쓰이는 물질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사카린의 원료인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당시 사카린은 식료품을 만드는 공업재료로 단맛을 내는 물질이다. 당시에는 설탕 값이 비싸 사카린으로 단맛을 내곤 했다. 빵에도 사카린이 들어갔고 주스에도 사카린을 넣어 단맛을 내는 생활필수품이었다. 이 물건이 보세창고에 보관 중이다가 누군가에 의해 6톤 분량, 5만 달러 상당액이 시중에 유출되었던 것이다. 
 
신문은 이 물징의 시중 유통배경을 추적했고, 삼성이 외국에서 밀수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신문은 한국 제1의 재벌이 사카린을 밀수했다고 대서특필했다. 수사가 진행되었고, 결국 그 배경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밀수 배경은 일본 미쓰이 물산 측에서 제공한 4,200만 달러의 차관이었다. 당시 4,200만 달러의 차관은 전액 현찰이 아니라 공장에 필요한 기계류로 반입될 예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미쓰이 측은 기계를 사주는 데 대한 감사의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제시했다. 뜻밖의 공돈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100만 달러를 정상적으로 들여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병철은 이 돈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했다.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의 자서전에는 이 돈이 박정희에게 보고 되었고, 박정희는 현금으로 돈을 가져올 수 없으니 100만 달러어치 물건으로 들여와 그걸 처분해서 3분의 1은 정치자금, 3분의 1은 부족한 건설자금, 3분의 1은 한국비료의 운영자금으로 쓰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문제의 100만 달러는 이맹희의 주선으로 OTSA,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리스 강판 등으로 밀수입된 것이다. 만일 이맹희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대통령 그 자신도 밀수의 가담자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전모가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이병철은 이 사건으로 급기야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게 된다.
 
준공식까지 마치고, 도쿄 제국호텔에서 협력해 준 일본인들에게 축하파티까지 열었던 한국비료는 10년간 이병철이 쏟았던 열정도 아랑곳없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이병철은 결국 이 사건으로 다시 한버 외유와 오랜 칩거생활에 들어갔다.
 
이 한국비료는 1994년 결국 삼성에 돌아가게 된다. 정부의 한국비료 민영화 방침에 따라 공개입찰을 한 결과 최저 내정가 1,300억 원보다 1,000억 원이 더 많은 2,300억 원을 제시해 입찰에서 승리, 결국 27년 만에 다시 회사를 찾아간 것이다.'

 

 

야외 카페 

 

국회 오물투척사건(國會汚物投拓事件)은 1966년 9월 22일 한국비료(주)가 사카린을 밀수한 일로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 중 당시 국회의원 김두한이 국무위원들에게 미리 준비한 인분을 투척한 사건이다.

 

한국비료주식회사의 사카린 밀수 사건은 국내 굴지의 재벌인 삼성 재벌의 한국비료주식회사가 건설 자재를 가장해서 사카린을 밀수했다는 것이 1966년 9월 15일 경향신문을 통해 폭로되면서 언론계와 정치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1966년 5월에 발생한 이 사건은 6월 초에 벌과금 추징으로 일단락되었으나, 일단 이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그 여파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확산되었다. 특히 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가져온 데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밀수'를 '5대 사회악'의 하나로 규정해 놓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삼성 재벌 소유의 중앙매스콤과 경쟁 관계에 있던 여타 언론들이 이 사건을 호재로 삼아 연일 대서특필하며 국민의 눈과 귀를 자극했다는 점 등이 작용하였다.

 

또한 이 사건이 극도로 증폭된 것은 9월 22일 국회 본회의에서 김두한 의원이 국무총리를 비롯한 일부 각료들에게 오물을 투척한 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이다.

 

이날 이틀째 속개된 삼성 재벌 밀수사건에 관한 대정부 질문에서 김두한 의원은 질문 도중 탑골공원 화장실에서 퍼 온 오물통을 열어 국무위원 석에 앉아 있던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등 수 명의 각료들을 향해 던졌다.

 

사건 당일 이병철 한국비료 사장(삼성그룹회장)은 사카린 밀수사건과 관련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언론 및 학원사업에서 손뗄 것을 선언하였다. 그후 이병철 사장은 헌납 교섭을 맡았던 장기영 부총리가 해임되자 개각 1주일 만인 1967년 10월 11일 한국비료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했다. 이 사건은 삼성의 위기였으나 이병철의 지혜로운 판단과 결심으로 극복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사카린(saccharin)은 대표적인 단맛을 내는 인공첨가물(감미료)의 일종으로, 한국에서는 나트륨염으로 식품공전에 올라와 있다. 식품공전에 의하면 사카린나트륨염(식품공전 표기 : 삭카린나트륨)은 용성 사카린으로 불리며, 분자식 \mathrm{C_7H_4O_3NSNa\cdot2H_2O} , 분자량 241.21이며 무색에서 백색의 결정 또는 백색의 결정성분말로서 맛은 매우 달아 10,000배의 수용액에서도 단맛이 있다고 한다. 식품공전에 의해 정해진 허용기준은 다음과 같다.

  • 김치․절임식품 : 1.0g/kg 이하. 다만, 김치류는 0.2g/kg 이하
  • 음료류(발효음료류 제외) : 0.2g/kg 이하(다만, 5배이상 희석하여 사용하는 것은 1.0g/kg 이하)
  • 어육가공품 : 0.1g/kg 이하
  • 영양보충용제품, 특수의료용도등식품, 체중조절용 조제식품 및 시리얼류 : 1.2g/kg 이하
  • 뻥튀기 : 0.5g/kg이하

과거 발암성 문제(실험동물에서 유방암 발생 결과)로 여러 국가에서 사용이 금지되다가 현재는 다시 허용되어 합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계속) -서초동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