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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갈등의 핵, 유태인' 15

 

'갈등의 핵, 유태인' 15

 

[편집] 제1차 십자군 원정 (1096년~1099년)

예루살렘 전투
예루살렘 전투

 

 

3. 십자군 시대의 유태인

 

고래 싸움에 등터진 유태인

2000년의 부활절을 앞두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 2천 년 역사에서 일어난 지난날 기독교의 과오를 지적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대소 6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 도중 자행된 유태인 살해다. 십자군의 목적이 이슬람교도의 손 안에 잇던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1차 십자군 원정에서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은 무려 4만여 명에 달하는 유태인 및 이슬람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였다고 한다. 애꿋은 유태인들이 고래 싸움에 등 터진 겪이었다.

 

예루살렘은 638년 이래 아랍 사람들의 점령하에 있었다. 11세기 후반 1092년 교황 우르반 2세의 주장에 다라 성지 회복의 기치를 내걸고 전유럽이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각국의 왕과 제후들이 기독교 성지 회복 전쟁에 나섰다.

 

이렇게 하여 십자군 원정이 1096년에 시작, 약 3백 년에 이르는 기간에 걸쳐 간헐적으로 지속된다.  � 십자군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여 각 지역의 대영주들이 주도했으며 60만 대군이었다. 이른바 평민십자군인 농민들로 구성된 십자군은 에루살렘으로 향했다. 각 지역에서 모집된 농노들로 구성된 십자군은 지휘체계나 훈련 정도가 안된 오합지졸이었다. 일단 용감하게 라인가을 건너 진군했으나 병참부대가 뒤따르는 것도 아니어서 금방 식량이 바닥났다. 처음에는 이동로 주변의 영주들이 식량을 조달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식량은 턱없이 부족하였으며 근본적인 문제는 현지조달 방법이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고 군대가 보급 물자를 현지 조달하게되면 약탈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우선 유태인 거주지역이 약탈의 � 대상지역이었으며 병사들에게는 유태인 부락 약탈은 장려 사항이었다. 복종하지 않으면 죽이고 집은 불태웠다. 약탈의 참상이 너무 심하여 지역의 영주들이 교황에게 그 실상을 알렸고 교황은 원정군에 경고까지 했다. 어터리 평민십자군 부대는 발칸 반도 초입에 들어서기도 전에 흩어져 버렸고, 그 뒤를 이은 각 지역의 영주들이 중심이 된 십자군은 그런대로 질서가 잡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지를 회복했다. 예루살렘에서 저지른 만행으로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성전과 함께 한 약탈전쟁

제2차 십자군 원정은 주로 높은 신분의 기사들이 중심이 되어 동원되었으나 막대한 희생만 치르면서 별 성과를 얻지 못했고, 그후 계속된 십자군 원정도 마찬가지로 유명무실해졌다. 1차 십자군 원정만 성공하였으나 그 자치령도 오래 가지 못했다. 전후 6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이처럼 대부분 실패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적인 이상으로 뭉친 십자군이었으나 현실은 기독교권의 교황과 비잔틴 제국간의 종주권 타툼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과 각국의 왕이나 제후,영주들의 욕심에서 비롯된 이중적인 인간의 탐욕이 원인이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기독교 정통을 이유로 희랍 정교를 비하하였고 희랍 정교는 문화적인 수준 미달이라고 로마 교황청을 얕잡아 보았다. 그래서 양 진영의 반목은 십자군 원정시 오히려 격화되었는데, 이탈리아 상업 도시 베네치아가 재정적인 후원을 맡은 제4차 십자군 원정시에는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약탈하였다.

 

종교적인 전통으로는 로마 교황청이 권위가 높았으나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희랍계의 비잔틴이 더 높았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십자군이값진 미술품을 무더기로 약탈해 갔으며 전쟁 비용을 부담했던 베네치아도 투자한 이상으로 거두어 들였다.

 

당시 비잔틴을 점령한 십자군은 이 도시를 철저히 유린했는데 유태인들은 마침 사전에 추방된 상태로 화를 모면하였다.

 

그로부터 약 50년 후 희랍은 비잔틴을 되�았으나 이를 고비로 비잔틴 제국은 사양길에 접어들어 마침내 이슬람권인 터키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결국 동방의 기독교 보루가 기독교인들간의 전쟁으로 인해 약화되고 없어지게 되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가 없다. 이러한 현상은 같은 종교라도 사상과 이념이 다르면 타 종교보다 더 철저한 앙갚음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말로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종교가 권력과 밀착하면 종교적인 유일신적 이론과 편협된 사고와 아집으로 나타나며, 타 신앙에 대한 포용력의 부족으로 명분없는 전쟁과 살륙이 자행된다는 사실이다. 

                                                                           

 

* 십자군 전쟁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