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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갈등의 핵, 유태인' 10

 

'갈등의 핵, 유태인' 10

 



베들레헴 전경

 


베들레헴 시내 모습


                  

 

4. 왕국의로 성장사

 

다윗왕의 미니제국

사울왕의 뒤를 이은 인물이 유명한 '다윗'왕이다. '사울'이 농부인 반면에 '다윗'은 목동이었다. '다윗'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숙적과의 전장터였다. 거인 적장인 '골리앗'을 돌 한 방으로 녹아웃시킨 것이 계기가 되었다. 군사적인 재능을 만천하에 과시한 다윗은 사울왕의 딸과 결혼하기에 이르고 사울이 죽은 후에 왕위를 이어받는다. 다윗 치하의 유태인 왕국은 건국 이래 최대의 전성기를 맞는다. 다윗은 적들과의 싸움에서 항상 승리하였으며, 제국의 넓이는 지금의 이스라엘의 5배 가까운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아카바만에 이르는 대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세가지 업적을 남겼는데, �째, 엘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것이고, 둘째, 야회 하느님과의 '계약의 궤(모세 십계명을 새긴 두개의 석판)'를 엘루살렘 중앙 지역의 성소에 간직했다. 셋째, 유태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많은 시편을 직접 지어 후세에 전했다.

 

이상의 세가지 가운데 엘루살렘은 현재 이스라엘 수도이며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성지로 남아있으며 그의 아름다운 시편도 구약에 실려 있는데 계약의 궤는 없다. 뒷날 다윗의 아들 솔로몬왕이 이 궤를 보존하기 위해서 거대한 신전을 지어 보관하였는데 유다왕국이 바빌론에 의해 멸망할 당시(기원전 586년) 이 궤가 없어졌다. 이 계약의 궤의 실종은 아직도 유태인 역사상 가장 풀기 어려운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너그러운 호사가 솔로몬왕

다윗의 강력한 제국이 정착할 즈음 유태민족은 유목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정착되어 갔다.다윗의 군 통솔력은 워낙 출중하여 주변의 여타 종족들이 두려워 했다.이민족의 구경침범도 거의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솔로몬 시대에 와서는 이민족의 국경 침범이 빈번했다.

 

다윗이 정복자적인 이미지의 통치자였다면 솔로몬은 유명한 '솔로몬의 판정'에서 말해주듯 아버지가 전해준 많은 유산을 유지하면서 지낸 관리형 통치자였다. 이민족과 군사적인 해결보다는 외교와 평화교섭으로 다스렸으며 다윗이 정복한 영토를 내치와 국민의 일체감이 더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였으며 다윗이 공성이라면 솔로몬은 수성에 치중했다. 

 

솔로몬은 지역 족장 중심의 정치체제를 보다 효율적인 중앙 통치의 테두리 속에 넣은 강력한 연방 형식의 체제로 서서히 바꾸어 나가면서 지방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켜 나갔다. 이런 목적으로 중앙에 상비군을 두고 세금 징수도 강력하게 집행하였으며 농경사회를 산업사회로 전환시키면서 물산을 장려하고 지역간 교역을 신장시켜 재정을 튼튼히 하려 했다.

 

솔로몬은 엘루살렘에 거대한 신전을 지으면서 막대한 재력을 투자했다. 이 거대하고 호사스런 신전은 바빌론 침공시 파괴되었지만 화려한 궁전도 지어 주변국 사신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런 솔로몬의 호사스런 생활은 윤리적인면에서 병들어 간다.율법의 윤리 체계에서 벗어나면 언제나 재앙의 씨앗이 자랐던 것이다. 솔로몬도 이 경우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일부 다처제도가 허용되던 그 시절, 매사에 호사스런 솔로몬은 타종족 출신의 첩들을 수없이 많이 거느리고 있으면서 그들의 자유스런 신앙 생활을 막지 않았다. 그래서 첩들의 거처에는 첩들이 섬기는 우상들이 자리를 잡았으며 유태인 재사장들이 이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또한 각종 과중한 세금 징수와 노역 동원 등의 불만이 증가되면서 지방 호족들이 중앙 정부를 바라보는 눈이 곱지만은 않았다.

 

결국 솔로몬이 죽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지만(기원전 931년) 북쪽의 지족들이 말을 듣지 않고 시정 개혁을 요구한다. 이러한 내용은 열왕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지족들이 왕에게 개혁을 요구하였으나 르호보암왕은 정면으로 그들의 요구를 거절한다. 그래서 다윗과 솔로몬이 유지했던 유태인 왕국이 솔로몬 사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왕국으로 분열하게 된다. 로호보암은 유다왕국의 왕으로만 남게 되고 불평자들의 대표였던 여로보암이란 인물이 북쪽 이스라엘 왕으로 갈라서게 된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