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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핵, 유태인' 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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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핵, 유태인' 7

두바퀴인생 2008. 1. 7. 17:12

 

'갈등의 핵, 유태인' 7



베들레헴 전경

 


베들레헴 시내 모습


 

 

5.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

 

"마사다는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으로 <마사다 비극>과 <코헨의 정신>을 꼽을 수 있다. 

 

우선 '마사다의 비극'을 보자.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소집되어 군문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마사다를 방문하여 "마사다는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라는 맹세를 한다. 이스라엘 신앙의 성지가 '통곡의 벽'이라고 한다면, 마사다는 주변 아랍국가와의 생존을 건 싸움에서 이스라엘을 지키는 '호국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기원후 70년. 로마는 유태민족의 국가인 유대아를 아주 철저하게 파괴했다. 당시 로마는 동맹 도시나 속주,식민지가 로마에 반기를 들거나 배신을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철저하게 응징하였는데, 로마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유대아는 로마에 반기를 들었던 경우였다. 로마는 반기를 들었던 그리스 도시국가 '코린트'와 한니발의 조국 '카르타고'를 철저하게 응징하였는데, 몇 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그 도시를 점령하여 모두 불태우고 건물을 완전히 파괴한 다음 땅에는 소금을 뿌려 풀과 나무가 자라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로마에 반기를 든 유대아의 섬멸하기 위하여 로마군은 엘루살렘을 포위한 후 3년간이나 공격하였는데, 유태인들의 저항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결국 로마군에 점령된 에루살렘은 성인 남자는 모두 처형되고 어린이와 여자들은 노예로 끌로 갔으며 성전은 파괴되는 등 전도시가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때 엘루살렘 근방에 살던 유태인 960명은 여자와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로마군을 피해 사해 근방에 위치한 마사다 요새로 피신했다. 로마 10군단은 이들을 추격하여 마사다를 포위하였다. 마사다는 천연적인 요새로 주변 지형보다 해발고도가 높은 고지대 지형으로 사방이 절벽으로 되어 있어 난공불락의 성채였다. 로마군은 2년 간이나 마사다를 포위 공격을 하였는데, 처음부터 공성이 어려운 지역임을 알고 지구전법으로 고사작전과 공성작전을 병행하였다. 로마군은 포위망을 구축하고 사방에 숙영지를 편성한 후에 마사다 요새와 외부와의 일체의 접촉을 차단한 후에 공격 방안을 검토하였다. 공격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한쪽 면뿐이라 고민끝에 그리스 수학자들을 불러와서 공성 방안을 연구하였다.그 결과 노예 및 병사들을 동원하여 경사면으로 토성을 쌓아 올라가서 정상 부근에 다다르면 불에타지 않는 가죽을 둘러친 공격 전차와 투척기(카타필라),램(공성용 대망치)를 만들어 경사면으로 밀어올려 정상부근에서 성채 내부를 공격하였다.

 

마사다 요새 유태인들은 후일에 발견된 유물로 판정한 결과 '에쎄네' 종파로 알려졌으며 종교적인 열정이 남다른 유태인들이었다. 로마군도 마사다 요새의 유태인들이 골수분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후환을 염려해서라도 마사다는 반드시 공격하여 섬멸해야할 임무가 주어졌다. 마사다 요새내 유태인 지도자는 '엘라자르 벤 야르'로 이들은 저항 2년 째에는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이 떨어졌다. 로마군이 수원을 파버렸기 때문에 우물도 말라버린 것이었다. 이제 투항하느냐 전원 자살하느냐의 마지막 선택만 남았다. 유태교 신앙에서는 자살이 금지되어 있으나 그들은 자살을 선택하였다.

 

뒷날 이들의 최후가 밝혀지는데, 로마군에 종군했던 '팔에비아스 요세프'라는 유태인 사학자에 의해 후세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마사다 공방전의 자초지종과 마지막 광경을 꼼꼼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전했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대부분 살아 남은 전투원 남자들이 가족들을 먼저 죽이고 저희들끼리 서로 찔러 죽였는데 용케도 두 명의 여자와 다섯 명의 어린이들만 집단 자살에서 살아 남았다고 한다. 

 

이 마사다 비극에 대한 후세 유태인들의 견해는 상당 기간 동안 부정적이었다. 웬만한 내용은 탈무드에 남겨 놓아 후세의 교훈으로 삼는데 마사다의 기록은 �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많은 유태인 상류층 내지 지식인들은 마사다 같은 무력에 의한 로마와의 싸움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무모한 저항이 낳은 집단 자살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유태인 지식인들의 이런 견해는 로마군에 대항한 엘루살렘 공성전에서도 드러나는데, 로마는 정치적인 지배에만 저항하지 않으면 그대로 두는 근본적으로 포용하는 식민지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세금만 잘 내고 군사적인 도발만 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두는 정책이었다. 그래서 총독을 두면서도 형식적인 그 민족을 통치하는 왕정을 인정하여 통치하였다. 온건노선의 유태인들은 극렬 분자들의 쓸데없는 모험적인 저항 때문에 오히려 엘루살렘 성전 파괴나 마사다 비극같은 상황을 처래하였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로마의 시민권도 얻도록 노력하고 로마와 적당히 타협하면서 얼마던지 자기들의 정치와 종교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었는데 쓸데없는 짓이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유로 마사다는 근년에까지 잊혀져 왔던게 사실이다. 그러나 1902년대 히브리 작가 '아이작 림단'이 시로써 당시의 이 비극적인 마사다 항전사를 노래하여 이 장편의 시가 유태인 사회에 회자되면서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던 수많은 유랑 유태인들이 새삼 당시의 비극을 되씹고 울었다고 한다.

 

'엘리 코헨'의 삶과 죽음

이스라엘 건국 이래 어려운 고비마다 많은 숨은 희생자들이 있었다. 한국은 국정원, 미국은 CIA가 있듯이 이스라엘에도 '모사드'하는 첩보기관이 있다. 모사드는 세계적인 정보망과 헌신적인 첩보원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동전쟁 때 이들의 활약에 의해 위태로운 고비를 넘긴 일이 비일비재했다. 코헨은 모사드에 속해 있던 첩보원이었다. '용 키푸르' 전쟁은 이집트의 기습으로 시작되어 초전에 이스라엘이 고전하면서 많은 피해와 전선이 붕괴되었다.그러나 이스라엘은 결국 승리했다. 

 

1967년 6월 어느날 모사드는 심상치 않은 정보를 입수했다. 리비아의 가다피가 배후에 있는 아랍 과격파의 행동대원들이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 암살을 계획 추진 중에 있다는 정보였다. 이집트는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말살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때에 때맞춰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의 평화공존 권유가 있던 시기였다.

 

그런 시기여서 모사드가 입수한 정보는 대단히 귀중한 것이었다. 모사드는 사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정보력을 총동원하여 암살 대원의 명단까지 밝혀내는 등 이 비밀 암살 음모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모로코의 핫산왕의 주선으로 모사드 고위 관계자와 사다트 고위 보좌관이 비밀리에 만나서 그 암살 계획의 전모가 전달되었다.

 

이집트 정보 당국은 즉시 카이로에 잡복 중인 암살단을 일망 타진하였으며 그 암살 계획은 사실이었다. 이집트 당국의 대 이스라엘 화해 움직임에는 모사드의 역활이 컸다. 1977년 1월. 사다트를 태운 대통령 전용기가 텔아비브 공항에 착륙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평화회담이 열리고 화해의 물꼬가 트이는 순간이었다.

 

코헨의 이야기다.

코헨은 시리아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카이로에서 성장했다. 그는 이집트에 살면서 시오니즘 유태인 지하조직에 가담해서 비밀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1956년 시나이 전쟁 때에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4년 동안 지내면서 히브리어도 배웠고 결혼도 했다. 텔아비브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는 듯 했으나 이 기간동안 모사드의 정보원이 되었는데 물론 가족에게는 비밀이었다.

 

4년 동안 모사드에서 첩보훈련을 받은 후 아르헨티나 '부웨이노스아이레스'로 가서 '카말 아민 타베트'라는 부유한 상인으로 행세했다. 그는 그곳에서 아랍 여인과 위장 결혼도 하고 시리아 거주민 사회 사람들과 폭넓은 친교를 맺으면서 시리아 대사관 사람들과도 친숙하게 지내게 된다. 젊고 유능하며 매사에 열심인 아랍 사람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1961년 그는 아르헨티나 생활을 청산하고 모국에 정착하는 형식으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이사했다.

 

이 시절부터 그는 본격적인 스파이 활동에 들어간다. 아주 빠른 시일 안에 시리아 행정부, 군부 실세들과 교분을 쌓고 크고 좋은 집에서 엘리트 인사들을 초청하여 파티도 열고, 자산단체에도 빠짐없이 얼굴을 내미는 등 시리아 조야 인사들과 안면을 넓혀갔다.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권과의 대립이 첨예화 되면서 이와 관련된 비밀이 자연스럼게 그의 손을 거쳐 모사드로 흘러 들어갔다.

 

시리아군 관계 정보뿐만 아니라 시리아와 동맹 관계에 있는 요르단,이집트의 비밀 정보까지 아주 귀중한 일급 정보만을 보냈다. 시리아의 전략 요충지인 골란 고원의 군 장비 및 배치 상황을 상세히 알려 1968년 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의 최대 골치거리였던 골란 고원의 점령에 결정적인 역활을 하였다. 주요 군사시설에 '유칼립스트'라는 나무를 심게하여 이스라엘 포병의 사격 표적을 제공토록하였으며 난공불락이라고 하던 골란 고원의 철벽 방위망이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손에 넘어가게 만들었다.

 

전후 시리아는 그를 체포하여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하였는데, 처형 광경은 텔레비젼에 실려 전중동 지역에 방영되었으며 이스라엘의 그의 부인 '나다스 코헨'과 세 자녀도 지켜보고 있었다. 부인은 남편과 신혼초 1년을 같이 산 외에 잠깐씩 귀국하던 남편과 사이에 세 자녀를 둔 것이었다. 돈을 많이 벌어야 노후를 안락하게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남편의 말만 믿고 있다가 어느 날 적국인 시리아에서 교수형에 처해지는 남편을 본 것이다. 그녀의 가슴이 어떠했을까?

 

조국 수호를 위해 몸 바친 남편의 시체라도 �아와 조국 땅에 묻게 하는게 가족들의 소원이나 아직 시체가 송환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코헨은 현재 이스라엘의 영웅이다. 그의 이름을 딴 거리,공원 그리고 시냐고그까지 생겼다.

 

이스라엘 모사드가 세계 최고의 정보력을 자랑하게 된 것도 코헨과 같은 정보원이 있었기 가능했다. 모사드의 정보력은 이제 세계가 알아주는 정보망이다. 전세계에 산재해 있는 유태인과 유태인 조직은 바로 모사드의 정보원 역활을 하며 각국의 고위층에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코헨과 같은 이런 희생이 오늘날 이스라엘을 지탱하고 있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