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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갈등의 핵, 유태인' 4

 

'갈등의 핵, 유태인' 4




베들레헴 전경

 


베들레헴 시내 모습



 

 

작은 강대국 : 신생 이스라엘 발자취

 

1. 타오르는 '시오니즘'의 불꽃

 

'모세'와 견주는 '헤르츨'

오늘날 이스라엘을 낳은 주요 인물을  꼭 한사람만 든다면 '테오도르 헤르츨'을 꼽는다. '모세'에 버금가는 '이스라엘 건국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시오니즘'이라는 유태국가 건립운동에 불을 당겨 이스라엘 건국이라는 꿈을 현실로 열매맺게 한 사람이며 '이스라엘의 국부'이다.

 

'시오니즘(Zionism)'은 '시온(zion)'이란 예루살렘 내의 한 지역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여기에 '이즘(ism)'을 붙였는데, 단순히 '시온으로 돌아간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엘루살렘 귀환을 뜻하므로 당연히 '고토(故土)'의 유대인 국가 건설을 의미하는 것이다. 2천년 동안 세계 도처에 흩어져 살아온 유태인들은 이미 아득한 옛날 그야말로 케케묵은 고서속에서나 존재했던 유태인 국가 건설이란 희망을 꿈속에서도 잊어왔을 정도였다. 그것을 구체적인 건국 목표로 되살린 것이 '시오니즘'이요, 그런 목표를 추구한 사람들을 '시오니스트'라고 부른다.

 

길고도 험한 우여곡절 끝에 1948년에 유태인 국가인 이스라엘이 탄생했다. 실로 2천 년만의 민족국가 부활이다. 2천 년전에 사라진 나라가 2천 년만에 다시 그 땅에 되살아 났다면 출애급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리고 홍해가 두 갈래로 갈라져 건너던 기적처럼 그때의 기적이 또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지구상 역사에서 나라를 잃은 대부분의 민족은 백년도 못가서 흔적없이 동화되거나 사라져 버렸지만, 유태인들은 어디서나 자손들에게 '토라'를 통해서 유태교와 민족의 역사를 가르치고 '탈무드'를 통해서 민족의 문화와 관습을 몸에 배게 했으며 '시오니즘'으로 건국 이념을 불태웠던 것이다.

 

이 기적의 불을 당긴 헤르츨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유태계 언론인으로 비교적 사회적 속박을 덜 받으며 자랐다는 점이다. 19세기 중반 부다페스트는 유럽에서 드물게 유태인들의 자유가 그런대로 허용된 곳이었다. 그는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신문기자로 활동적인 그의 성격에 적합하여 '비엔나'로 옮겨 한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 헤르츨에게 인생의 큰 전환점을 가져온 사건이 바로 프랑스에서 터진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독일과 프랑스가 동맹을 맺기 위하여 화해무드가 조성되고 있던 차중에 터진 사건으로, 독일 대사관 무관이 프랑스군 기밀을 빼낸 사건이었다. 당시 유태인이며 프랑스군 대위였던 '드레퓌스'가 기밀을 팔아 넘겼다는 누명을 쓰고 구속되자 계몽주의 사상이 싹트고 인권존중의 분위기가 고조되던 시기에 일개 개인에게 국한될 수 있는 이 사건은 국제적인 인종차별 사건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유태인에 대한 새로운 탄압으로 부각된 사건을 본 헤르츨은 자극을 받고 이 사건을 직접 취재하기 위하여 특파원을 자청하여 파리로 갔다. 현지로 간 헤르츨은 사태가 심각함을 느끼고 큰 충격을 받았다. 파리 시민들은 연일 유태인 규탄 데모를 전개하면서 유태인 추방을 외쳤고 일부 과격한 시민들은 유태인 상점을 파괴하는 등 분위기가 살벌했다. 그의 눈에는 파리 시민들이 모두 미쳐보였으며 역사 속에 점철되어온 유태인 박해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이다. 이때 헤르츨은 이제라도 유태인들끼리 살아 갈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그가 쓴 책이 <유태인 국가>라는 얇은 책인데, 그는 자기가 만나는 사람마다 이 책을 나누어주고 유태인 국가 건립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처럼 유태인 피를 타고난 누구나 자기 민족의 유구한 역사의식을 '토라'와 '탈무드'를 통해서 체득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계 시오니스트 총회

신문사를 사직한 헤르츨은 유럽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유태인 밀집 지역이 있는 곳이면 어디던지 �아가서 이스라엘 국가 건립 운동인 시오니즘 확산에 전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그가 주동이 되어 1897년 유태인 국가 건립을 최종 목표로 한 세계 시오니스트 총회가 스위스 바젤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 � 회의에 19개국에서 204명의 유태인 대표들이 참석했다. 헤르츨의 열변은 참석한 대표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그는 열띤 어조로 이 총회가 유태인 국가 창설의 �걸음이라 선언하고 앞으로 50년 안에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유태국가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 넘겨 주자고 역설했다. 참석자들은 감격하여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로부터 50년 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두 번째 회의는 1년 뒤에 열렸으며 참가 인원이 394명으로 늘어났다. 그로부터 이 회의는 매년 빠지지 않고 열렸다. 이 운동이 구체화되면서 유럽 각지의 유태인사회 대표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정치인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줄기차게 호소하였다.

 

결국 이 회의는 전세계 유태인 사회의 구심점이 되었고 본격적인 이스라엘 독립 운동의 핵심 추진제 역활을 하게 되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터키 지배하에 있었는데, 헤르츨을 비롯한 유태인 대표들은 터키 정부와 접촉은 물론 터키와 가까운 독일 카이저에게도 백방으로 자신들의 뜻을 알렸다. 한편 전세계 유태인들로부터 모금된 막대한 추진 자금이 시오니스트 총회 사무실로 도착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다섯 번째 회의에서 영국이 신생 유대국가의 땅으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우간다'를 제안하였다 한다. 이 제안으로 회원들이 격렬한 찬반 토론을 거친후에 헤르츨의 의사에 따라 대표로 구성된 사찰단이 우간다 현지를 답사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이 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회의는 그후 격년제로 열리게 되었는데 마지막 '바젤' 회의는 1946년에 열렸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에는 신생국가의 수도인 '텔아비브'에서 열렸다가 현재는 '엘루살렘'에서 개최되고 있으며 아직도 이 회의는 해외 유태민족 단합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헤르츨은 신생 유태국가 건립을 보지 못하고 1904년 44세 나이로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후 팔레스타인 지역은 제1차 세계대전 후 패전국인 터키에서 영국의 손으로 넘어갔다. 전세계 유대인들의 끈질긴 공작과 활동으로 우여곡절 끝에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 건립을 허용한다는 이른바, '벨포어 선언(Belfour Declaration)'을 선포하게 된다. 젊은 나이에 죽은 헤르츨은 그의 유언에 비엔나에 있는 그의 아버지 무덤 곁에 묻어 달라하였으나 이스라엘 건국 후 그의 유해는 이스라엘로 옮겨졌다. 현재 그의 묘역은 이스라엘 국립묘지격인 '마운트 헤르츨'로 명명되고 있다.

                                                                                                 -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