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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칼럼, 국민 상위시대

두바퀴인생 2007. 12. 30. 23:51

 

[김대중칼럼] 국민 상위시대

조선일보|기사입력 2007-12-30 19:47 |최종수정2007-12-30 22:47 기사원문보기
김대중·고문
우리는 12·19 대통령선거의 결과를 놓고 여러가지 해석과 평가를 내놓을 수 있다. 노무현-김대중 10년의 좌파정권을 심판하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되찾겠다는 우파의 손을 들어준 선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를 살려 먹고사는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라는 국민의 요구가 쇄도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86세대의 어쭙잖은 ‘개혁’논리에 식상한 유권자들이 실용(實用)의 매력에 눈돌린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국민들의 심판의 목소리가, 욕구와 주문의 분출이 이처럼 크고 거세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기껏 정권교체를 허락한다 해도 지지율이 미미해서 견제세력에 내몰리는 소수대통령의 신세가 되는 것 아닌가 걱정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당선자는 전국 3576개 읍·면·동 중 2799곳에서 이겼다. 특히 어느 특정인의 독점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던 서울에서 당선자는 한곳의 예외도 없이 전체를 싹쓸었다.

우리는 이번 선거에서 중대한 변화를 목도하고 있다. 이것은 그냥 선거가 아니다. 대통령 뽑고 정권 갈아주는 그런 정치적 행사가 아니다. 국민들이 무엇엔가 목말라 있다는 의사표시다. 어느 외국특파원이 보았듯이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믿고 싶은 것이며,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긴 시간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이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삶의 질(質)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동안 삶다운 삶을 누려본 적이 있는가를 묻고 있다. 사람들은 그동안 나라를 세우고 만들어가는 건국의 어려움도 겪었고, 맨땅에 공장 짓고 물건 만들어 세계에 내다파는 산업화의 고단함도 이겨냈다. 독재와 싸워 민주주의를 세우는 민주화의 길도 걸었고 그 극복의 보람을 좌파세력에게 안겨 주기도 했다.

그 긴 과정에서 지도자의 리더십에 의존하며 그들을 따르고 또 그들에게 권력을 보상해준 국민들이었다. 이제 국민이 보상받고 보답받을 차례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이명박씨가 대선에서 무엇으로 이겼는가? 그는 그 증거를 당선일성(一聲)으로 내보였다. ‘국민을 섬기겠습니다’가 그것이다. 국민은 바로 그것을 본 것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국민의 삶의 양(量)을 늘리고 질(質)을 높여주는 것―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삶의 양과 질은 곧 안전이 보장된 국토적 환경에서 질 좋은 교육을 받고 안정된 일자리와 주거를 보장받는 것, 기업이 자유롭게 경쟁하며 활동하는 것, 그리고 보다 나은 의료혜택과 문화를 향유하며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지난 성탄절 기간, 서울 시청앞과 청계천, 광화문 일대의 밤거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크리스마스 장식 등 볼거리와 먹거리가 마련된 호텔의 로비와 식당골목들은 대목 때 시장바닥처럼 붐볐다. 일찍이 보지 못했던 놀라운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즐기기 위해 밖으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휴가철이나 연휴가 아닌데도 주말의 아파트는 텅 비고 대신 고속도로는 넘쳐난다. 이런 광경들은 국민들이 삶의 질뿐 아니라 삶의 방식에 목말라 있음을 보여준다. 지도자가, 정치인들이 이런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면 국민의 불만은 언제든지 폭발할 것이며 국민들은 지도자에게 가차없이 옐로카드를 던질 것이다.

한 시대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국민이 지도자에게 이끌려 다니는 지도자 상위(上位)개념은 이제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앞으로는 국민이 지도자를 이끌고 다니는 국민상위시대로 접어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진국형(型) 정치다.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국민’을 내세운다. 국민은 더이상 속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런 ‘쇼 정치’는 끝났다. 한나라당이 그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낌새는 아직 없다. 다만 이명박씨가 그것을 깨닫고 있는 것 같다. 패배한 신당이나 이회창그룹 쪽은 여전히 꿈속에서 헤매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민노당이 왜 그들이 외면당했는가를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

2007년의 한국정치와 2008년의 정치는 분명히 궤를 달리할 것이다. 그것은 여당·야당, 또는 한나라당·신당 따위의 차원을 넘어서는 변화를 의미한다. 12·19대선은 국민과 정치지도자(또는 정치세력)와의 관계에서 위치의 역전(逆轉)을 긋는 분수령을 이룰 것이다.

[김대중·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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