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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초순, 매스컴들이 온통 아우성치듯 대선 후보자들의 전략과 그에 따른 움직임에 관한 보도에 몰두하여 대한민국 전체가 아수라장 속에 있는 듯 시끄러운데, 돌연 그 불유쾌한 소음들로부터 뚝 떨어진 복된 나흘을 보냈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는 길목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를 돌아보는 대학생들의 답사여행에 따라나선 데 따른 은총이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을 우리 민족이 배출해낸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분으로 꼽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자연의 경치에 대한 평가가 그러하듯, 위대한 인물에 대한 애정 역시 사람마다 착목하는 곳이 다르다. 내가 다산에 대해서 마음을 깊이 쏟기 시작한 것은 ‘저술가로서 그가 지녔던 외로움의 크기’에 경악한 때부터였다.
천하에 생명을 받아서 땅을 딛고 활동하고 있는 자 중 그 누가 남이 자신을 제대로 알아주기를 원치 않으리요만, 특히 우리같이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는 이들은 그 점에서 남다른 점이 있다. 자신의 뜻과 업적을 누군가 제대로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간절함이 다른 업에 종사하는 이들보다 훨씬 더하다고 자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우연히 다산 정약용 선생의 편지글 중 하나를 읽으면서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그 글은 다산이 유배지에서 고향에 있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 들어 있는 것인데, 내용이 이러했다.
“군자(君子)가 책을 저술해서 세상에 전함은 오직 한 사람의 알아줌을 구하는 것이어서 온 세상 사람들의 꾸짖음이야 피하지 않는다. 만약 내 책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나이가 많으면 너희는 그를 아버지로 섬기고, 너희와 엇비슷한 나이라면 형제의 의를 맺어도 좋을 것이다.”
나는 문자 그대로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그 구절을 되풀이해서 읽었다. 문득 눈물이 고였다. 누군가 자신이 쓴 저서를 알아준다면,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이면 아버지로 섬기고, 엇비슷한 나이의 사람이면 형제의 의를 맺고 지내라고 자식들에게 명했던 다산의 마음이 견디기 힘든 상처처럼 아프게 다가왔다.
‘아! 천하의 글 쓰는 이가 이렇듯 외로워도 되는 건가!’
그런 탄식이 마음 깊은 곳을 때렸다. 다산은 자신을 가리켜 당당하게 ‘군자’라고 지칭하도록 스스로에게 크나큰 자부심을 지녔던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사람의 알아줌’에 그토록 깊이 마음을 쏟았던 것을 보니 책을 쓰는 이들이 업보처럼 지닌 천형(天刑)의 크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듯했다.
과거 절대왕조 시대에 유배살이를 한 지식인은 많았다. 그러나 18년에 걸친 길고 괴로운 유배 생활 중에 수백 권의 뛰어난 저작을 완성해낸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상 다산 홀로 거둔 놀라운 성취였다. 그런데 자신의 전 역량과 존재를 모두 기울여 저작에 몰두하던 그의 마음을 그처럼 무겁게 두드리던 것이 바로 ‘오직 한 사람의 알아줌’이 과연 가능할 것인지의 여부였던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모두 기울이고 심장을 저며서 쓴 책들이기에 누군가가 제대로 알아보아주기를 그토록 간절하게 원한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이해하려고 해도, 다산이 보여준 저술가로서 지닌 외로움의 크기에 놀란 아픔은 쉬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그분의 흔적과 자취가 남아 있는 유적지들을 직접 찾아보고 싶었다.
알고 보니 이번 여름에 다산의 자취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다. 물론 대부분 작가인 나와는 다른 측면의 관심과 애정을 지닌 이들이었다. 그런 그룹 중에서 다산의 학문과 인격과 생애를 세상에 소개하는 데 일생을 바친 분들이 꾸려가는 단체인 다산연구소에서 주최하는 답사여행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들은 다산의 학문과 생애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제시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전범과 희망에 더욱 주목하고 있었다.
그들과 다산의 자취를 찾는 여행은 복되고 아름다웠다. 다산이 태어난 경기도 마현의 생가터, 부인과 합장으로 묻혀 있는 고향의 묘소, 다산이 지녔던 과학 지식이 활용된 수원의 화성, 유배살이했던 전라도 강진땅, 특히 책을 저술했던 강진의 다산초당…. 일일이 돌아보노라니, 다산의 체취와 인품과 인격이 시공을 건너서 손에 잡히는 듯했다. 어떤 인물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가 발을 딛고 숨 쉬며 살았던 장소들을 직접 돌아보는 것이 매우 요긴하고 유용한 방법임을 새삼 느꼈다.
답사 기간 동안, 낮에는 다산의 유적지들을 돌아보고, 밤에는 다산에 대한 책을 읽었다. 그 중에 새롭게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다산은 의학에도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었고 그 분야의 훌륭한 책도 쓴 분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가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동안 마현의 고향집에서는 그의 자식이 병으로 죽어갔다. 그가 머나먼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을 간 초기에 네 살짜리 어린 아들이 마마에 걸려 죽어가면서 아버지 다산을 찾았다는 대목이 특히 마음 시리다. 다산 자신이 그 일을 죽은 아이를 위해서 몸소 쓴 광지(壙誌·무덤 속에 넣던 간단한 일대기)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내가 네 곁에 있었다면 네가 꼭 살 수 있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너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에 보니 너는 ‘아버지가 나에게 돌아와 주셔도 발진이 나고, 아버지가 돌아와 주셔도 마마에 걸릴까’라고 했다고 하더구나. 네가 무얼 헤아리는 바가 있어서 그러한 말을 했겠느냐만, 너는 내가 네 곁에 돌아가면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말을 했을 것인데, 너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 게 참으로 슬픈 일이 되고 말았구나.”
다산의 위대함과 놀라운 학문의 성취는 그토록 처절한 고통 위에 쌓아올려진 것이었다. 답사여행이 끝나던 날, 나는 동행했던 대학생들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국내외 각 대학에 적을 둔 70여 명의 건강한 젊은이들, 다산의 위대한 생애와 정신과 업적이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는 큰 등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송우혜/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