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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한국탈출,갈채와 탄식

 

 

[취재일기] '1020 한국 탈출' 갈채와 탄식


 
[중앙일보 이상언] 부러움과 안타까움. 지난달 10일간 미국 명문대에서 한국 유학생을 만날 때마다 교차된 감정이다. 그들의 열정과 도전 정신, 그리고 그런 것들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미국 교육 제도가 부러웠다. 동시에 한국의 교육 현실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했다.

하버드.예일.스탠퍼드.프린스턴대 등에서 한국 학생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았다. 식당.휴게실 등 곳곳에서 한국어가 들려왔다. 취재를 한 11개 명문대 유학생을 합하니 3200명을 넘었다. 서울대의 올해 신입생 수보다 100명이 많았고, 중국.인도와 더불어 3위권에 드는 숫자다. 인구 비례로 따지면 한국은 우수한 학생을 미국에 가장 많이 보내는 나라였다.

10, 20대 인재들이 한국을 탈출한 이유는 분명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교사 위주의 주입식, 달달 외우는 암기식, 창의력을 말살하는 교육에 질렸다"고 했다. 컬럼비아대에서 만난 J씨는 "서울대를 나와도 영어 하나 변변히 할 수 없지 않으냐"고 부실한 한국 교육을 비판했다.

경제 성장과 국제화도 탈출을 가속화하는 이유였다. 적지 않은 유학생은 해외에 근무하는 부모를 따라 미국 생활을 경험했다. 그들은 "한국 교육에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그들은 문화.인종적 차이를 극복하며 일류가 돼가고 있었다. 하버드.예일.스탠퍼드대 입학처 관계자들은 공통적으로 "성적보다는 특출한 소질이나 리더십을 가졌는지가 더욱 중요하다"며 "한국 학생들은 훌륭하다"고 말했다. 강의록을 외우는 게 아니라 원리를 이해하고 자기 의견과 주장을 세우는 미국식 공부를 하는 것이 "행복하다"는 그들이 믿음직스러웠다.

'1020 한국 탈출'시리즈가 연재되는 동안 "시원하게 한국 교육의 문제를 짚어줬다"는 격려가 쏟아졌다. "한국의 명문대를 키워야 한다"(신선우씨), "교육의 획일성에서 벗어나야 한다"(조용호씨)고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는 독자도 있었다. 선진국들처럼 정부가 교육에 대한 간섭을 줄이고 최소한 학생 선발은 대학에 맡겨 대학의 경쟁력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려대 박유성 입학처장은 "미국처럼 정부가 대학에 학생 선발 자율권을 주면 우리도 바보가 아닌 이상 성적으로만 뽑지 않는다"며 "정부의 대학 규제 철폐는 해외 대학과의 경쟁에서 필수조건"이라고 말했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 사람들을 기죽이려는 것이냐" "유학을 부추긴다"는 등의 항의도 있었다. 둘 다 오해다. 취재 중 만난 학생의 절반가량은 국내 기업체가 세운 장학재단에서 장학금을 받고 있었다. 그중에는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도 있었다.

취재팀이 진정 바라는 것은 "한국에도 세계적 명문대가 많이 생겨 성실하고, 자신감 넘치고, 똑똑한 우리 젊은이들이 한국을 앞다퉈 '탈출'하지 않는 세상"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최근 "한국 교육은 인재를 천재로 만들지 못한다"며 "(선진국 교육을) 따라하면 된다"고 말했다. 국제경쟁력을 갖춘 휴대전화.반도체 산업도 처음엔 선진국 베끼기로 출발했다. 교육도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