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로마의 역사를 마치며...... 본문
로마인에게 길을 물었다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와 조선의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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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은 많지만 로마의 역사를 중단하게 되었다. 그러나 8년 전 역사를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시작한 로마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밤잠을 설치고 한시도 소홀하지 못하고 그것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역사를 읽어주고 블로그를 찿아주는 애독자를 위해 새벽이면 글을 올리는데, 처음에는 매일 올리다가 너무나 힘들어 나중에는 이틀에 한 번씩 글을 올리면서 나를 족새처럼 8년 동안 조였던 것은 사실이다.
사실 사람들은 역사에 관심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역사를 모르면 똑같은 역사적 오류를 반복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는 있지만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싫어하는 것 같다. 매일 방문자 수도 적지만 댓글도 거의 없다. 오직 임선생님 한 분만 열심히 블로글 방문하여 댓글을 빠짐없이 달아주어 그 열성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러나 대부분 다른 사람들은 역사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까 할 말도 없을 것이다. 방문자가 적든 관심이 적든 나는 스스로 역사를 배우고 공부한다는 일념으로 8년을 지내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로마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나는 희미하게만 알았던 로마의 역사에 대해서 엄청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를 깨우치게 만들었고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처럼 위대한 민족이 지중해를 제패하고 더 나아가 전유럽, 북아프리카, 중동, 발칸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는 것, 그리고 그 제국을 동로마 제국까지 포함하면 2천 년에 가까운 긴 세월을 이어갔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로마 제국은 인류 역사 통해 현재까지 살아있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미국이 지향하는 강대국의 행태는 고대 로마 제국이 걸어갔던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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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로마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마치 대형 드론을 타고 고대 이탈리아 반도는 물론, 시칠리아, 북부 이탈리아, 남부 이탈리아, 알프스 산맥을 넘나들었고, 2차 포에니 전쟁 동안은 한니발과 스키피오 장군을 따라 시칠리아, 에스파냐, 북아프리카를 날아다녔고, 카이사르를 따라 갈리아, 그리스,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는 물론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이란 지역, 그리고 지중해를 넘나들며 이베리아 반도, 지금의 프랑스와 독일 지방인 광활한 갈리아 지역 일대, 브리타니아, 도버 해협, 라인 강과 도나우 강, 루마니아, 헝가리, 체코, 옛 유고슬라비아 등 발칸 반도, 이스탄불, 터키 등지를 날아다니며 로마의 영웅들이 위업을 펼치는 현장을 방문하였다.
고대 로마인들은 위대한 민족이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로마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너무나 많은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었고, 로마인들의 삶, 이상, 꿈, 지혜를 배우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지도층이 보여준 국가 위기시에 맨 먼저 앞장서서 나갔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었다. 조국의 헤택을 받으며 명예롭고 영광스럼게 살아온 지도층들이 조국이 위기를 당하면 앞다투어 전장터로 달려나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그들의 위대한 정신이 로마 제국 역사를 이어가게 만들었고 2천 년 가까운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오늘날 로마 제국의 문명과 문화는 유럽 제국들을 선진국으로 만들었고 유럽을 중심으로 지구상의 모든 문명과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빛나는 정치체제를 만들었고, 로마법, 각종 사회제도, 사회적 규범, 국가 위기시 지도층의 솔선수범 정신, 관용과 포용의 정신, 공명정대한 법제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획기적인 문명을 창조해낸 로마인들이었다.
반도 국가에 불과한 그들이 당시 지중해 최강국이었던 카르타고와 3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벌여 결국 카르타고를 제압하고 명실공히 지중해 최강국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지도층의 국가에 대한 공공심이 강했던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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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로마와 같은 반도 국가이지만 로마가 이룩한 위업을 생각하면 한스럽기만 하다. 우리는 좁은 반도 북방에는 대국 중국이 버티고 있어 대륙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주변 섬을 공도로 만들면서까지 바다를 두려워했고 그래서 바다로도 진출하지를 못했다. 5천 년 역사 내내 반도 안에서만 백성들의 피와 땀을 빨아먹으면서 고난의 역사를 이어왔다.
고조선이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며 장수했으나 결국 중국 한나라에 흡수되었고, 고구려가 웅지를 폈으나 만주 일대와 북경 북방까지가 그 한계였다. 중국 대륙이 마침 혼란기였기에 가능했다. 중국 대륙에 수나라가 들어선 후 고구려 침공 실패로 나라가 조기에 망하고 뒤를 이어 당나라가 들어서자 고구려를 다시 침공했다. 그러나 당나라 침공에 고구려는 처음에는 3차에 걸쳐 선전을 펴며 당군을 물리쳤지만 결국 연개소문 이후 내분으로 혼란스럽던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그후 '해동성국'이라는 발해가 고구려 뒤를 이어 일어섰으나 거란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그 역사는 잠깐이었다.
후삼국을 평정한 고려가 들어섰으나 초기에는 거란의 침공을 수차례 잘 막아냈으나 북벌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거란족의 요나라는 중국 대륙으로 진군하여 양자강 이북를 점령하고 송나라와 오랜 기간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대치했다. 그러나 요나라는 여진족이 일으킨 금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그러는 사이 한반도의 고려는 문신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흥청이다가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정권 잡기를 80년이나 지속했다. 무신들의 치세동안 고려는 극심한 질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후 몽고가 일어나서 중국 대륙을 점령하고 원나라를 세우면서 고려를 침공했다. 수차레 침공 끝에 무신 정권이 강화도로 이전하여 대몽항쟁을 벌였으나 대몽항쟁의 주력군이던 삼별초가 무너지면서 몽고에 항복하고 그후 100여 년의 세월 동안 속국으로 지냈다.
몽고가 지배하는 동안 몽고의 부마국이 돠어 고려왕은 몽고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또 몽고 세력을 등에 업고 기황후의 동생 기철을 포함하여 권문세가들이 백성들의 피와 땀을 빨아먹었다. 공민왕의 개혁도 무위로 끝나고 북벌을 주장하던 최영 장군의 이상을 꺽고 이성계에 의한 반란으로 결국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섰다. 당시 무주공산이었던 만주 땅을 정복할 유일한 기회를 상실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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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정하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국경선을 확립했다. 태종이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대마도를 정벌했으나 왜구들은 도망가고 흩어진 섬들에 농토도 없고 실익이 없다 하여 결국 철군하고 말았다. 대마도를 조선땅으로 영유할 절호의 기회를 상실했다.
태종의 치열한 왕권 경쟁에 뒤이어 세종의 황금기를 누렸으나 세조의 왕권 천탈이 뒤이어 일어나더니 그의 후손들에 의해 백성들은 가난에 허덕였지만 왕실과 지도층은 200년 태평성대를 누렸다. 성종의 태평성대를 정점으로 뒤를 이은 연산군의 폭정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나 중종이 들어서고 인종과 명종의 뒤를 이어 선조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다가 1592년 일본군이 조선을 침공한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부산포가 무너지고 이일이 상주에서 도망치고 신립이 기마병 4천 명을 거느리고 탄금대에서 왜군을 맞아 수차례 기마전을 폈으나 대기병 장애물과 신형 조총에 전군이 속절없이 괴멸되면서 신립은 탄금대에 몸을 던졌다. 북방 여진족을 상대로 조선 최고의 장수라고 소문났던 그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신립을 믿고 보냈건만 패전이라는 급보가 전해지자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서둘러 도망길에 올랐다. 북으로 북으로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진동했고 그 와중에 중국으로 망명할 생각까지 한 모양이었다.
이순신의 승전 소식을 들었지만 왜군 배 몇 척 불태운다고 전세가 호전되기는 만무했다고 생각한 선조는 계속된 이순신의 승전보에 난감했을 것이다. 이순신의 승전 소식에 조정 대신들과 백성들의 한호 소리가 선조의 귀에는 거슬렸을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까지 승진시켰으나 일본군의 간계에 속아 부산포 공격을 명령했지만 장거리에 수군이 지치고 정확한 정보가 아니었고 왜군의 간계라는 사실을 눈치챈 이순신은 부산포 공격을 지체했다.
선조의 어명을 거부한 죄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온 이순신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을 때, 후임자 원균이 어명에 따라 앞뒤도 모르고 부산포를 공격하려 갔지만 일본군은 찿을 수가 없었고 수병들은 지친 상태로 되돌아와서 칠전도에 정박하고 있을 때 왜군의 기습으로 거북선을 포함한 전함 대부분이 불타고 원균은 도망치다가 전사했다. 공들여 이룩한 조선 수군이 하루 아침에 연기처럼 사라진 순간이었다.
뒤이어 명량 대첩의 기적을 이룬 이순신은 지리한 휴전 회담이 이루어지는 동안 수군를 재건하고 명군과 같이 정유재란 마지막 즈음 노량해전에서 최후를 마감했다. 선비 출신 중에서 보기드문 세계 최고의 명장이 태어난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적 앞에서는 누구보다도 용감하고 지혜로우며 부하를 자식처럼 사랑하고 정확한 정보, 치밀한 계획, 전술전기의 연마, 신기술의 개발, 엄정한 군법, 고뇌와 명상을 통해 가장 최선의 방법을 생각하고 나설 때와 물러 설 때를 알고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한 명장이었다.
조선의 임금들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에 보은하며 아침 저녁으로 명 황제를 향해 절을 올리고 예를 다하며 대국으로 섬겼다. 선조에 뒤이은 광해군이 대북파 주도로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반대파 숙청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게 되자 결국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밀려나고 인조가 들어섰다.그는 능력도 없고 시기심만 가득찬 인물이라 지도자의 재목감이 아니었다.
인조의 즉위로 후금은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를 징벌, 모문룡의 활동 지원, 인조의 배금친명 정책에 불만을 품고 정묘년에 침공했으나 강홍립의 중재로 화의를 맺고 물러났다. 다시 병자년에 재침하였는데, 정묘호란 10년 만에 다시 침공한 것이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0여 일을 버티다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치욕스런 항복을 했다. 후금은 조선을 번국으로 삼고 군사적, 경제적 부담과 공녀 차출을 강제하게 된다.
이후 조선은 숙종 이후 당쟁으로 피의 숙청이 되풀이 되고 영정조의 개혁도 무위로 끝나고 세도정권이 들어서면서 허약한 왕손을 왕으로 옹립하여 권력을 남용하며 호의호식하였다. 그러나 가난에 시달리던 백성들에 의해 민란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나라는 마지막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철종 사후 흥선군의 2남 고종이 욍위에 오르면서 고종과 민비, 흥선군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지면서 서로 외국군을 끌여들여 싸움질을 벌이다가 일제에 강제 합병당하여 멸망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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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반도의 역사 대략 보기다. 우리는 대륙으로 진출도 못했고 해양으로 진출도 못했다. 오로지 한반도 안에서 백성들의 피와 땀을 빨아먹으면서 권력을 유지했고 그 권력도 서로 빼앗기 위해 치열한 싸움질이 그칠날이 없었다. 대룩 진출을 못한다면 해양으로라도 진출했어야 했다. 그러나 대형 선박을 만들기에 적당한 나무가 없었고 향해술도 발전할 수가 없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근본적으로 중국 문명과 문화의 유입으로 깨우친 한반도라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과학 문명의 발전을 기대할 수가 없는 사회적 구조였다. 오로지 성현들의 글을 읽고 공부하여 양반이 지배하는 낙원같은 유교 사회를 이루고자 한 것이 정도전의 유교 이상사회였다. 기술자를 무시하고 불루칼라를 천시하며 무신을 업신여기는 시회, 이런 사회가 어찌 대륙이나 해양으로 진출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날 경제대국을 이룩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은 한 지도자의 결단 때문이었다. 그런 경제개발이 없었다면 지금도 우리는 동남아나 아프리카 같은 나라의 국민들처럼 50년 이상 뒤처진 가난한 나라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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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이 지중해의 강대국에서 세계적인 강대국이 된 것은 주변국들이 비슷비슷한 나라들이 대부분이었고, 동방의 파르티아나 페르시아 같은 강대국과 적절히 대치하면서 국경선을 이루어 방패막이로 이용하였고, 반면 서방과 북방, 그리고 남방은 야만족을 정복하여 영토를 넓히고 국력을 신장시켰기 때문이었다. 로마인은 로마 제국의 수많은 거대한 공공시설이 모두 노예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리스인의 기술과 과학을 적절히 이용했다.
그리고 사회의 역동성, 즉 계층간 이동 가능한 사다리가 활성화 되어 있었고, 가진자와 성공한 개인, 지도층의 공공심이 강하였고, 선거로 지도자를 뽑는 제도를 시행했고, 정치적으로 능력이 의심되는 폭군이나 무능력한 지도자는 언잰가는 누군가에 의해 목숨을 잃는 사회, 국가 위기시에 지도층이 앞장서서 전쟁터로 나가는 풍조, 원로원이라는 인재풀을 이용한 다양한 지도자의 양산, 청원 및 재판 제도 활성화, 모든 것을 법에 따르는 생활 태도 등 로마인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오랜 세월을 너무나 숨가쁘게 달려왔다. 어느듯 머리도 희긋희긋 서리가 내려있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로마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가장 큰 즐거움과 행복을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독수리 타법이지만 지루하지도 않았고 역사를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마치 '여명의 눈동자' 같은 대하 소설을 읽는 것처럼 밤을 세워도 지치지 않았다. 이런 역사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고 현재를 둘러보고 미래로 가는 길을 제대로 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생각이 같으면 그 사회는 그런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오류를 배우고 그런 오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고 가야하지만 인간의 탐욕으로 항상 오류가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 인간 사회인지도 모른다. 우주에 음양이 있듯이 인간 사회도 음양이 있기 마련,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이어가는 지도 모른다.
자신을 되돌아보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과연 가족과 이 사회, 이 나라를 위해 나는 어떤 생각과 행동으로 살아갈 것인가가 중요할 것이다. 사익보다 공익을 항상 생각하고, 나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가정보다 이 사회를 먼저 생각하고, 지역보다 이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