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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99 : 일제강점기 44(만주 한인사회 형성 : 만주의 삼부) 본문
한국의 역사 999 : 일제강점기 44(만주 한인사회 형성 : 만주의 삼부)
만주 한인사회 형성: 만주의 삼부
만주 지역 한인 50만 명, 독립운동의 둥지가 되다
반만년 한국사 가운데 그 무대가 한반도에 국한된 시기는 고려시대부터 1,00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이전까지 한국사의 육상 무대는 만주와 내몽골 일대를 아우르는 대륙이었다. 조선의 쇄국 정책은 한인들의 자발적인 만주 이주로 한계에 봉착하고, 구한말부터 대륙사가 다시 전개되었다.
길림성 졍협문사자료위원회 등에서 편찬한 <길림조선족>은 청나라 장봉대의 <장백회정록>을 인용해 "광해군 때 강홍립의 조선군이 청나라에 투항한 이후부터 조선 사람들이 동북(만주)에서 살게 되었다"라고 전한다.
길림성 환인현의 고구려 오녀산성 근방에도 여관인 고려성의 여주인이 이 무렵 만주에 정착했던 조선인 후예라는 사실을 보면 그 말이 증명되고 있다.
광해군을 쫓아낸 뒤 인조 정권 때 발생한 정묘.병자호란으로 인해 만주로 끌려간 백성은 더 많아졌다. 대략 50만 명 이상 만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은 심양의 납탑 시장에서 매매되었다. <인조실록> 15년(1637) 4월 21일자는 "처음에는 속한가가 포10여 필에 불과했으나 속환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골육의 속환에 다급하여 값이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아 값을 더 비싸게 요구하는 폐단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 측에서 조선 조정에 올린 <심양장계> 는 "요구하는 값이 비씨기 그지없어서 수백, 수천 냥이 되니 희망을 잃고 울부짖는 사람이 도로에 가득찼다"고 전한다. 이때 돈을 주고 속환되지 못한 조선인들은 만주에 정착해 사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 대외교섭 문서집인 <동문휘고> '사신별단'에 따르면 이원진은 1644년 인조 22년 사신으로 가는 도중 만주 봉황성에 속환되지 못한 조선인과 한인 60~70가구가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때 조선 여인 여러 명이 이원진 일행에게 "누구 누구의 딸이고 누구의 누인인데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고 전한다. 또 남자들은 타작을 하거나 풀을 베고 물을 길었으며 혹은 길바닥에 엎드려 진정했는데, 어떤 사람은 온몸에 상처투성이여서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백두산 일대를 자기네 선조들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봉금 지역으로 묶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키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청사고>'살포소열전'에 따르면 청나라는 강희 16년(1677. 조선 숙종 3) 내대신 각라무묵눌 등을 백두산 등지로 보내 청나라 발상지라는 이유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산해관-개원-길림을 잇는 선과 개원-봉황성 부근을 연결하는 선으로 이루어진 'ㅅ'자 모양의 선을 만들고 요소마다 변문을 두어 출입자를 감시했다.
청나라는 백두산 지구를 포함한 압록강.두만강 이북의 500킬로미터 정도를 청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봉금 구역으로 삼았는데, 사실상 이때부터 조선과 청 사이에 본격적인 영토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2년 후인 1679년 숙종 5년 12월 북병사 유비연은 "청나라에서 백두산 형세를 포함한 북방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 의도가 의심스럽다"고 보고했다. 청나라는 중원을 모두 차지한 후 만주는 다른 지역과 달리 봉천(심양)에 성경장군을 두어 다스렸다. 이후 광서제 33년(1907)에야 비로소 중국 내지처럼 성경장군 대신 동삼성 총독을 임명하고 봉천.길림.흑룡강 세 성에는 각각 순무를 두어 다스렸다.
그런 가운데 압록강.두만강 대안 지역은 산삼도 풍부하고 농사도 잘되는 옥토라는 소문이 나면서 조선인들의 월경이 잇따랐다. 청나라는 1680년 숙종 6년 윤8월 강희제가 청나라 사신에게 범월인(국경을 넘은 사람) 문제를 제기토록 조서를 내릴 정도로 이 문제에 민감하게 대응했다. 강희제의 국서를 받은 숙종은 도강한 은성 사람 유원진을 사형시키고 은성첨사 한시호 등을 유배했다.
급기야 청나라는 두 나라의 국경을 확정하자고 주장해 1712년 숙종 38년 "서쪽은 압록이고 동은 토문이다"라는 내용의 백두산 정계비를 백두산에 세웠다. 그럼에도 조선인들의 도강은 끊이지 않았다. <통문관지> '영조 38년(1762)' 조에 따르면 평안도 관찰사 정홍순이 "강계부 백성 박후찬 등 10인이 월경해서 사냥을 하다가 4명은 체포되었고, 나머지는 달아났다"고 보고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조선은 이때만 해도 청나라를 의식해 월경 문제에 강경하게 대처했다. 하지만 월경이 백성들에게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안 조선의 지방관들 사이에선 이 문제를 관대하게 처리하는 경향이 강했다. 또 고종 4년(1867)에는 청나라 성경장군 아문에서 "조선인 민간인 하명경 등이 사사로이 월경해서 봉천부 왕청문 밖 육도하 등지를 개간했다"고 항의할 정도로 도강 및 개간이 빈번했다. 또 고종 6년(1869)에는 "청나라 예부에서 붕황문 남쪽부터 왕청문 북쪽까지 찿아낸 개간지가 9만 6,000여 하루갈이"라고 전한다. '하루갈이'란 성인 장정 한 명이 하루에 경작할 수 있는 땅을 말하니 무려 9만 6,000여 명의 장정이 농사지을 수 있는 농지를 개간했다는 뜻이다.
조선인들이 개간한 농지가 수백만 '향'에 달한다는 기록도 있는데, 청나라 양빈이 지은 <변기략>은 "만주의 영고탑 지역은 '무'로 계산하지 않고 '향'으로 계산하는데, 하루 동안 씨를 뿌릴 수 있는 땅이 '향'으로서 절강의 4무에 해당한다'고 전한다.
1869년 고종 6년과 1870년 한반도 북부에 대흉년이 들면서 만주 지역을 개간하는 조선 백성은 크게 늘어났다. 그러면서 만주 지역이 조선 영토라는 자각도 생겨났다. 1883년 고종 20년 청나라가 함경도 경원부 등지에 곰문을 보내 "9월 안에 토문 이북과 이서 지방의 조선 사람들을 모두 쇄환하라"고 요구하자 조선인들은 거꾸로 백두산정계비를 직접 답사한 후 종성 부사 이정래에게 자신들이 개간한 토지가 정계비에 명시된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조선 영토라고 주장했다. 때마침 경원부에 있던 서북경략사 어윤중은 "종성 사람 김우식에게 조사시킨 결과 조선 백성들의 주장이 맞다"고 거듭 확인했다..
그래서 대한제국은 1903년 고종 40년 간도시찰관 이범윤을 북간도 관리로 삼고 서간도를 평안북도에, 동간도(북간도)를 함경도에 편입해 상주시켰다. 이렇게 해서 간도 백성들은 대한제국에 세금을 납부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는 1909년 9월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을 맺어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고 말았다. 청.일 두 나라의 야합과 별도로 만주 지역의 유이민은 계속 늘어갔다. 간도 총영사가 작성한 <재만 조선인 개황>은 청일전쟁 직전인 1894년 6만 5,000여 명이었던 재만 조선인이 1910년에는 10만 9,000여 명으로 증가했다고 전한다. 우시마루 등이 작성한 <최근 간도사정>은 망국 직후인 1911년에는 12만 6,000여 명으로 급증했다고 전해준다.
이런 현상에 대해 <최근 간도사정>은 "동양첛기주식회사와 일본인의 토지 매수로 지가가 앙등하고 이들이 소작료를 인상해 소작 한인의 종전과 같은 수익이 없어진 점"을 들어 일제의 학정이 한 원인임을 시인했다. 또 "한일합방에 불만을 가진 자와 일본 관헌의 간섭을 피함과 아울러 만주의 지가가 저렴한 점"을 들었다. 망국 후 일제의 학정으로 생계 수단을 잃은 빈농은 생계를 위해, 일부 선각자는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또 북간도(동간도)의 이주 한인이 1921년에 30만 7,806명, 1924년에 55만 7,506명이라고 전한다. 이주 한인들은 마적들의 습격에 대비해 집단 마을을 형성했다.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작성한 <국경지방시찰복명서>는 만주에서는 각 지역 자치제를 실시했는데 그 명칭을 '사 '또는 '향'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사'라는 명칭은 1911년 4월 집단 망명자들이 유하현 삼보원 추가가에 민단자치조직인 '경학사'를 조직한 것이 만주로 퍼진 것이다.
1920년 50만 명에 달했던 만주 지역 한인들은 만주를 독립운동 근거지로 만든 토양이었다. 이 토양에서 참의부.정의부.신민부라는 만주의 삼부(三府)가 꽃을 피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