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강남의 봄 7 : 봄을 느끼며 남산순환길을 걷다 본문
강남의 봄 7 : 봄을 느끼며 남산순환길을 걷다
동대입구역 4번 출구를 나와 파출소를 지나면 바로 장충단공원이 나온다.
지난 주 마누라가 모처럼 쉬는 날이라 사우나나 갔다와서 집에서 푹 쉬라고 했지만 갑자기 남산을 가면 어떻게 가느냐며 같이 갈 거냐고 물었다. 나도 좀 쉬고 싶은데 눈치를 보니 나와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절실한 모습이다. 그냥 집에서 푹 쉬라고 했지만 남산길이 좋다며 가서 오장동에서 회냉면이 어떻고 만두가 어떻고 하면서 남산과 종로까지 휘저을 모양이다. 봄이 무르익어 가는 게절이라 집에서 그냥 쉬고 싶은 그럴 마음이 없는 모습이다. 마누라가 안방에서 간판 그리고 꽃단장을 하는 사이 생각했다. 모처럼 쉬는 날인데 혼자된 과부도 아니고 저렇게 가고 싶어하니 내가 같이 가는 게 차라리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도 속이 편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혼자 보내기도 그렇고 할 수 없이 나도 복장을 갈아 입고 준비하여 나섰다. 봄날씨가 뿜어대는 봄향기가 코를 간지러는지 꽃이 만발한 봄을 만끽하고픈 마음인지 어디던지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봄은 확실히 여자들의 계절인가보다.
내가 같이 간다고 하니 마누라는 신이나서 하는 말이 "남산을 돌고 광장시장을 가서 막걸리에 빈대떡도 사먹고 만두도 사고 뭐도 사고......" 하면서 흥분된 상태같다. 이제 나도 나이들면서 마누라를 위해 봉사하는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그렇다고 자신의 처지를 결코 불평하고 싶지는 않다. 힘들게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보상심리랄까?
그래서 등산복, 베낭 등 복장을 차려 입고 간단한 음료수를 준비하여 나섰다. 서울고 앞에서 버스를 타고 남부터미널에서 지하철을 타고 동대입구역에서 내려 인터넷에서 본대로 5번 출구로 나가니 출구가 공사중이라 막혀 있어 4번 출구로 나가니 파출소가 나왔다. 파출소를 지나니 장충단공원이 펼쳐저 있었다.
장춘단 공원
나도 남산순환길은 처음 가는 길이라 인터넷을 검색하여 살펴본 다음 우선 평탄하다는 남쪽 길을 걷기로 했다.
동대입구 4번 출구를 나와 파출소를 지나니 장충단공원이 있다. 점심 시간이라 삼삼오오 사람들이 산책을 하면서 봄의 향취를 만끽하고 있다. 한식과 차를 파는 곳도 있다.
남산을 올라가는 계단 주위에는 각종 꽃들이 지난밤 비에도 떨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모습이 대견하고 청초하다. 건너편에는 한국 최고의 호텔이라는 신라호텔이 보이고 증축과 보수를 하는지 타워와 작업대가 설치되어 있다.
공원 건너편에 보이는 건물은 신라호텔이다. 한창 확장 공사중이었다. 공원의 나무들은 파릇파릇한 새순들이 경쟁적으로 피어나고 있었고 비온 뒤 청명한 하늘은 무척 맑고 깨끗했다. 점심 시간이라 사람들이 삼삼오오 거닐면서 봄의 향기를 만끽하고 있다.
이준 열사 동상이다. 이조 말엽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되어 대한제국의 독립을 주장하며 호소하다가 제국주의자들의 밀약에 따라 거부되고 실패하여 현지에서 지병으로 사망한 인물이다. 아마 울분을 참지 못한 홧병일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어린 시절 배울때는 만국평화회의장에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하며 배를 가르고 순직하였다고 배웠지만 그것은 과장된 언론의 보도 때문이었다.
그 당시 사연을 다시 살펴보자.
당시 고종은 외교적으로도 외국 여러 나라에 밀사를 보내 외교권을 되찿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큰 기대를 걸었다. <어담소장회고록> 등에 따르면 고종은 참정대신 박제순에게 밀사 파견에 대해 미리 상의했는데 박제순이 "일본은 저를 신임하고 있어 발각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고, 훗날 고종이 "박제순을 믿은 것은 짐의 착각이었다"고 토로한 것을 보면 을사늑약 체결자 본인을 믿는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밀사 파견을 결심한 고종은 통감 이토와 머리싸움에 들어갔다. 당초 이토가 밀사로 짐작한 인물은 친러파 이용익이었다. 러일전쟁 때 러시아를 방문했던 이용익은 1906녀 상해로 귀환했다가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했다. 살아 있었다면 밀사가 되었을 테지만 불행히도 그는 1907년 2월 급서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후 일제는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를 주목했다.
<통감부문서> 1907년 5월 9일자, 통감부 총무장관 진다 스테미가 외무차관에게 보낸 기밀보고서를 보면 "헐버트가 8일 서울을 떠나 고베와 쓰루가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에서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러시아로 갔다가 미국으로 갈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헤이그에서 한국을 위해 무언가를 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보고했다.
위 보고서는 "헐버트가 헤이그에 간다는 것은 소문에 지나지 않지만 혹시 한국 조정의 밀사라 칭하고 각국 위원을 역방하는 일이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덧붙여서 고종의 밀사 파견을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었다. 박제순에게 발설한 내용은 이미 비밀일 수 없었다. <통감부문서> 5월 19일자는 이토가 하야시 곤스케 외무대신에게 보낸 '한국 황제 밀사 헐버트 헤이그평화회의 파견에 관한 건'이란 전신을 싣고 있었다. 이토도 이 전신에서 "한국 황제가 ....러시아.프랑스를 믿고 독립을 회복하려 기획하고 있다. 미국인 헐버트에게 거액의 자금을 주어 파견했다"며 밀사를 헐버트로 단정지었다. 당시 일제는 고종의 카드가 헐버트가 아니라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이라는 것 정도만 일본이 몰랐을 뿐이다. 당시 이상설은 을사늑약 체결 닷새 후인 1905년 11월 22일 고종이 외부대신 박제순을 의정대신으로 승진시키자 격렬한 항의 상소를 올렸다.
왼쪽부터 이상설, 이위종, 이준 열사
이상설은 상소에서 "아! 장차 황실이 쇠해지고 종묘가 무너질 것이며, 조종이 남겨준 유민들은 남의 신하와 종이 될 것입니다"라고 제국의 운명을 정확하게 예견했다. 제국의 운명을 알면서도 이상설은 박제순, 이완용처럼 그 운명에 편승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상설은 1906년 4월 18일 이동녕과 함께 비밀리에 출국해 상해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
통감부 간도 파출소장 사이토는 보고서에서 "전 군부대신 이용익과 주 서울 러시아 공사 파바로프 사이를 왕복한다"는 이상설의 행적에 대해서 조사 보고를 올렸고, 그때 이상설은 이용익을 만나 헤이그 밀사 파견에 대해서 논의한 것으로 추측된다.
헤이그평화회의는 당초 1906년 8월 개최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상설은 여기에 맞춰 출국했다가 회의가 연기되면서 연길현 용정촌으로 가서 서전서숙을 열고 임시로 교장이 되었다고 한다.
용정의 이상설과 서울의 고종을 연결한 통로에 대해서 그간 많은 추측이 있었는데,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은 각종 사료와 일가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고종의 조카인 조남승.조남익 형제라고 보고 있다. 이들이 마련한 자금이 바로 밀사 파견 지금인데, 일제의 '흑룡회' 자료에 따르면 고종이 20만 원을 내탕금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전기.철도를 운영하면서 궁중에 자주 출입하던 미국인 콜브란을 통해 지출했다고 전한다.
또한 고종과 아상설의 연결 역활을 한 곳이 상동교회 부설 상동청년학교였다. 상동교회 뒷방에는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이희영, 이상설, 이준 등 지사들이 무시로 모여 국사를 논하던 곳인데, 이준 열사의 헤이그 밀사 사건의 온상이라고 전한다.
1907년 4월 20일 고종은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 이위종을 평화회의 특사로 내락하고 수결과 국새가 찍힌 백지 위임장 등을 내려주었다. 위임장은 시종 조남익과 내시 안호영의 손을 거쳐 조남승에게 비밀리에 전달되었고 다시 상동청년학원에 극비리에 보내졌다. 상동청년학원 이희영.이시영 형제, 진덕기, 양기탁 등은 이것을 부사로 인준된 이준에게 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준은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이상설과 합류했다. 일본이 헐버트에게 신경을 쏟는 동안 고종은 이상설 카드로 허를 찌른 것이었다.
<통감부문서>를 보면 당시 블라디보스톡 주재 무역 사무관 노무라가 통감부 총무장관에게 보낸 문서 내용은 이상설, 이준, 이범윤에 대한 행동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고 고종의 밀사 파견 행위가 우매한 행위로 어린이들 장난같은 일로 폄하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청일전쟁 후 일제가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다시 돌려준 삼국간섭 같은 기적이 일어나 주기를 바랐지만, 그런 기적은 재연되지 못할 상황으로 국제정세는 변하고 있었다.
고종과 대한제국 지식인들은 미국인 선교사 마틴이 미국 법학자 휘튼의 저서를 번역한 <만국공법>에서 '독립국 유지 이론'을 찿았다. 이 책은 기존의 화이관적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데 큰 역활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국제법이 강대국들의 약소국 침탈을 합리화하는 이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헤이그만국평화회의
이상설, 이위종, 이준 3명의 밀사는 1907년 6월 15일부터 10월 18일까지 열렸던 제2차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권 회복을 역설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었다. 고종과 밀사들은 일본이 빼앗은 한국의 외교권을 되돌려 받는 것이 '평화'라고 생각했지만 강대국들이 생각하는 '평화'는 다른 개념이었다. 열강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약소국을 차지하는 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평화였다. 열강들이 평화회의를 개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식민지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서로 간에 군사충돌을 방지하는 데 있었다. 전통적인 숙적 독일과 프랑스의 충돌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두 나라가 충돌하면 동맹관계의 다른 열강들도 휘말릴 수 있었기에, 이 경우 교전 규칙이라도 미리 만들이 희생을 조금이라도 줄여보자는 것이 평화회의의 개최 목적이었다.
제1차 평화회의는 1899년에 열렸는데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제안해 그해 5월에서 7월까지 헤이그에서 개최되었고 모두 26개국이 참가하였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와 미국, 멕시코, 청나라, 일본, 시암(태국)이었다.
제 1차 평화회의는 군축, 전시국제법, 중재재판소 등 3개 분과로 나누어 진행되었고, 군축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주제였다. 그나마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선언하고 1901년부터 헤이그에 상설중재재판소를 설치한 것이 가시적 성과였다. 또 육상전에 관한 법규와 관례에 대한 조약을 체결해 육군 전투시 규칙을 제정했으며, 1864년 제정한 제네바협정을 해전에서도 적용하기로 했으며 그 외 비행기구에서 폭탄을 떨어드리지 못하게 금지한 정도였다.
그러나 불과 3개월 후 남아공에서 '보어전쟁'이 일어났는데, 남아공과 영국이 남아공 북부 세계 최대 금광단지 트란스발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1900년 3월에는 중국에서 의화단운동이 일어나자 영국,프랑스,독일,미국,일본, 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8개국 군대가 그해 8월 북경을 점령했다. 보아전쟁은 트란스발을 영국이 차지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중국은 열강들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처럼 헤이그에서 울려퍼졌던 평화의 본질은 명확히 드러났고 20세기는 이처럼 약육강식의 치열한 약소국 침탈의 시대였다.
평화회의에 초대받지 못한 대한제국은 회의가 파한 후에도 이 체제에 들어가기 위해 각국 정부 관계자를 만나다니면서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이런 요청에 대해서 각국은 대부분 본국과 상의한 후 답변하겠다는 의례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대한제국을 러시아나 일본의 몫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이미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01년 4월 독일의 주영 대리공사 에카드슈타인은 주영 일본 공사 하야시 다다스에게 "극동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독일.영국.일본의 3국동맹이 필요하다"고 제안했고, 이 제안으로 1902년1월 영일동맹으로 가시화되는데,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 대해 정치.경제적 이익을 갖고 있음'을 인정했다. 이것은 중대한 국면 변화로 이 무렵 외교를 만병통치약으로 여기고 있던 대한제국은 다시 비상한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서울의 하야시 공사가 박제순에게 "영일동맹은 동아시아의 큰 국면으로 봐서 평화를 인전하게 유지하려는 소견에서 비롯된 것이니, 한국 정부도 이를 거울삼아 앞으로 한층 더 양국 간의 친교를 진전시키고 분우를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란다"고 말하자 "외부대신은 지극히 안심한 표정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신중한 태도로 본 공사의 구두진술을 청취했다"고 전한다. 이렇듯 영일동맹의 의미 자체도 모르면서 그저 외교에만 매달렸던 것이 대한제국 고종과 외교력의 실상이었다.
1907년 6월 15일부터 열린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의 직접적인 계기는 러일전쟁이었다. 러일전쟁은 승전국 일본의 피해가 더 컸던 전쟁이었다. <일로전쟁사>에 의하면 약129만 명이 참전했던 러시아는 5만여 명이 전사했지만 108만 명이 참전했던 일본은 8만 4,000여 명이나 전사했다. 이른바 평화회의가 열린 것은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제안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주창으로 열리게 된 것도 두 사람 모두 러일전쟁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성격의 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 독립을 되찿겠다는 고종의 구상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애굿은 열사들의 목숨만 잃고 만 꼴이 되고 말았고 결국은 자신이 왕위에서 강제 퇴위 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고종은 이토가 예상한 헐버트 대신 이상설을 밀사로 보내 이토의 허를 찔렀지만, 이에 잠시 당황했던 이토는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는 구실로 삼는 극단적인 처방을 계획하게 된다. 이토는 고종의 음모가 확실하다면 국면 일변의 행동을 취할 좋은 시기로 생각하고 세권.병권 또는 재판권을 빼앗을 기회로 만들게 된다.
일본은 1906년 2월부터 통감 통치를 실시했지만, 고종이 궁내부를 통해 외국과 이권 계약을 맺는 등 일부 통치권을 계속 행사하면서 혼선이 발생했다. 1906년 이탈리아 광업회사가 갑산광산 채굴권, 1907년 2월에는 프랑스인이 평안북도 구성.신천 등의 광산 채굴권을 신청하는 등 각종 특허와 자원 개발권을 신청했다. 통감부는 그간 대한제국이 체결한 각종 조약 원본과 외교 문서를 의정부 의사국으로 넘겨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궁내부는 '궁중 화재때 모두 소실됐다'며 거절하고 고종의 조카 조남승을 통해 프랑스 주교 뮈텔에게 그것을 맡겨두었다.
앞에서는 이토에게 순응하는 척하면서 뒤에선 다른 태도를 보이는 고종을 일제는 통감 통치의 가장 큰 장애물로 인식하고 고종을 끌어내리기로 결정했다. 참정대신 이완용, 법부대신 조중응, 농산공부대신 송병준, 군부대신 이병무 등이 포진한 친일 내각의 군주는 이미 고종이 아니리 이토였다.
장춘단 공원에는 차와 음식을 파는 한옥식당이 있다. 깔끔하고 조용하고 운치나는 곳이기도 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차를 테이커 아웃할 수 있다고 간판에 서 있다.
계단은 잘 정비되어 있었고 경사는 그리 급하지 않은 편이다. 올라가며 마누라와 도란도란 이러 저런 이야기를 하며 올라가다보니 팔각정이 나오고 팔각정에는 아줌마들이 놀러왔는지 몇 명이 모여 앉아서 시끄럽게 수다를 떨고 있다. 호젓한 남산길에 때아닌 소음이다. 내가 불평했더니만 마누라 말인즉 여자들은 저렇게 말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고 했다.
그래 누군가 쓴 글을 본 기억이 난다. 여자는 말을 하는 것이 결론보다 과정을 이야기한다. 남자는 겨론을 빨리 듣고 싶어한다. 지루한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 여자에게 비위를 잘 맞추는 남자라고 했다. 남자 앞에서 뜻모를 이야기를 마구 쏟아내는 여자를 구박하지 말고 끝까지 잘 들어주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때로는 칭찬도 해주고 아 그래? 그래서? 하면서 맞장구를 쳐주고 경청하는 것이 그 여자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햇다. 술도 먹지 않고 나돌아 다니지도 않는 여자들의 유일한 돌파구는 친구들과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노내는 것이 유일한 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을 가다보면 대낮에 커피 전문점이나 음식점, 찿집은 여자들이 모여 앉아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잇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닌 듯하다. 할일 없이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잇는 것을 보고 통상 남자들은 시간과 돈만 낭비한다고 비난하지만 그것을 이해 못하는 남자는 여자한테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춘단공원 안내판
동국대 정문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 Dongguk University)는 1906년에 설립한 4년제 사립 대학으로 교훈은 섭심, 신실, 자애, 도세이다. 대한제국 시기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전국의 사찰을 총괄하기 위해 창건되었던 원흥사(元興寺)가 1904년 사사관리서의 폐지에 따라 기능을 잃자, 1906년 불교연구회(佛敎硏究會)가 주체가 되어 설립한 '명진학교'(明進學校)로 개교하였다. 1910년 불교사범학교, 1914년 불교고등학교, 1915년 중앙학림(中央學林)으로 개칭하였으며, 1922년 3·1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되었다.
1922년 전국의 불교사찰에서 재산을 출자하여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을 설립하고, 1928년 불교전수학교로 다시 개교하여 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승격하였다. 1940년 혜화(惠化)전문학교로 개칭하였다가 1946년 동국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1953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였다. 동시에 대학원이 설치되었다.
또 1978년 경주시에 분교를 설치하였다. 1982년 문리과 대학을 문과대학과 이과대학으로 개편하여 문이과의 균형잡힌 분과 학문 체제를 구축하였다. 1983년 경주 한방병원을 개원하였으며, 1991년 의과대학부속 경주병원을 개원하였다. 2005년 일산 동국대병원 및 한방병원을 개원하였다. 2006년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하였으며 이 자리에서 미당 서정주 시인이 서거 전 미리 써 모교에 헌정한 '동국백주년 기념축시'를 공개했다. 현재 경기도 일산, 분당, 경상북도 경주 등에 양한방 대학부속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동국대학교는 서울특별시 중구와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에 위치하며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東國大學校 慶州分校, Dongguk University at Gyeongju는 경상북도 경주시 석장동에 위치한다.
개교 | 197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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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사립 |
총장 | 이계영 |
국가 | ![]() |
위치 | 경상북도 경주시 |
웹 사이트 |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홈페이지 |
서울캠퍼스는 12개 대학원(일반대학원, 영상대학원, 경영전문대학원, 불교대학원, 행정대학원, 경찰사법대학원, 교육대학원, 언론정보대학원, 문화예술대학원, 국제정보대학원, 법무대학원, 약학대학원), 11개 단과대학(불교대학, 문과대학, 이과대학, 법과대학, 사회과학대학, 경영대학, 바이오시스템대학, 공과대학, 사범대학, 예술대학, 약학대학) 1개 전공(연계전공)으로 구성되어있다. (2013년 기준) 부속기관에 대학스포츠실, 동국미디어센터, 박물관, 건강증진센터 등이 있으며, 교책연구기관으로 불교학술원, 문화학술원, 생명과학연구원, 나노정보과학기술원, 영상문화콘텐츠연구원 등이 있다. 일반연구기관으로는 동서사상연구소, 번역학연구소, 사행문화연구소, 자연과학연구원, 통계ㆍ기술연구소, 비교법문화연구원, 사회과학연구원, 북한학연구소, 생태환경연구센터, 경찰ㆍ범죄연구소, 커뮤니케이션연구소, 푸드시스템연구소, 인구와사회연구소, 동국정경연구소, 경영연구원, 황사ㆍ사막화방지연구소, Lotus기능성식품소재연구소, 불교가공식품연구소, 푸드시스템연구소, Green Chemistry환경의학연구소, 생태계서비스연구소, 산업기술연구원, 기능성콜로이드소재센터, 정보융합기술원, 교육연구원, 전통사찰음식연구소, 대외교류연구원, 불교미술문화재조형연구소, 문화기술(CT)연구소, 동서미술문화연구소, 의약품개발종합연구소, 약학연구소, 스토리텔링연구소, 지식정보보호연구소 등이 있다. 이밖에 국제화추진단 국제교류팀은 미국ㆍ캐나다ㆍ영국ㆍ유럽ㆍ일본ㆍ호주ㆍ인도 등 여러 나라와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경주캠퍼스는 6개 대학원(일반대학원, 교육대학원, 의학전문대학원, 불교문화대학원, 사회과학대학원, 경영대학원), 9개 단과대학(불교문화대학, 인문과학대학, 과학기술대학, 에너지환경대학, 사회대학, 경영관광대학, 사범교육대학, 한의과대학, 의과대학), 1개 학부(자유전공학부)로 구성되어 있다. (2013년 기준)
동국대학교는 1906년 불교교육만을 전담하는 명진학교로 개교하여 1918년에는 '불교중앙학림'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1930년에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운영하다가 1940년에는 혜화전문학교, 1946년에는 동국대학교로 승격했다.
광복 전부터 국문과에서 교편을 잡은 무애 양주동 선생은 동국대내에서 전설적 인물이었다. 1946년 9월 20일 혜화전문학교가 동국대학으로 승격될 때 교명으로 제시된 안 중에 '고려', '동국', '조선'이 들어 있었다.
최종 결정 과정에서 논란이 많았지만 이 중 ‘햇빛 밝은 동쪽의 아침 나라’라는 뜻을 담은 ‘동국’이라는 교명이 채택된 과정에 명강의로 인기가 높았던 양주동 교수의 의견이 반영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동국대학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3대 사학으로, 1970년대 후반까지 연세대, 고려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1970년대 부터 1980년대까지 교세가 다소 위축되었으나 "무관심이나 패배 의식에 젖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아래 2011년부터 ‘제2 건학’ 운동이 동문을 중심으로 생겨나면서 총동창회, 모교, 재단, 종단이라는 4개의 수레바퀴, 즉 4륜동진(四輪同進)의 길에 나서 옛 명성을 되찾는 데 힘을 모으자는 다짐을 하고 있다.
동국대학교는 언론사 대학평가에서 수도권 주요대학 중 유일하게 3년 연속 순위가 상승하며, 다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3대 사학으로 발돋움 하고 있다. 특히 국제화 부문은 전국대학 3위를 차지하며, 세계적인 대학으로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동국대 정문을 지나면 바로 계단이 시작된다. 이 계단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남산순환도로가 나온다. 올라가다 계단 죄측에 주시경 선생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신라호텔이 웅장한 모습이 눈에 드어온다. 주변의 수목은 5월의 신록을 준비하기 위해 바쁘고 지난밤 비와 바람에 떨어지지 않은 각종 꽃들이 아침 햋살에 유난히 아름답게 웃고 있다,
신라호텔의 웅장한 모습, 자본주의의 상징이며 삼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호텔신라은 삼성그룹 계열의 호텔로 호텔, 면세 등의 사업을 하고있다. 1973년 2월 삼성그룹 내 호텔사업부 창설을 필두로 하여 서울, 제주에 호텔을 건립하고 2006년부터 중국 쑤저우 신라호텔을 위탁 운영을 시작했다. 개관 이후 각종 정상회담이 열리고 있다.
지점
- 서울신라호텔
- 서울신라호텔은 Leading Hotels of the World의 회원사로 1979년 3월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서울신라호텔 전관 개관. ZAGAT 100대 호텔 선정. 남산 중턱인 서울시 중구 장충동 2가에 위치. 본관(지상 23층, 지하3층), 영빈관, 면세점, 주차타워로 구성되어 있다. 2006년 본관 리뉴얼 오픈. 스위트룸 25개 실 포함하여 463실의 객실과 6개의 식음료장, 13개의 연회장, 컨퍼런스센터, 피트니스 클럽, 실내외수영장, 스파, 사우나, 명품아케이드 등의 부대 시설이 있음. 인테리어 디자이너 '피터 리미디우스(Peter Remedios)'의 연출로 나무와 돌 등의 자연친화적 소재를 사용하고 자연채광을 최대 활용한 인테리어를 선보임. 서울신라호텔이 가나화랑과 함께 조성한 1만 2천여 평의 야외 조각공원은 국내외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40여 명 현대 작가들의 조각 작품 70여 점이 전시. Travel&Leisure 500대 호텔 선정. 국내 호텔 중에서는 유일하게 미국과 러시아, 일본, 중국의 수반들이 모두 다녀간 호텔로 기록.
- 제주신라호텔
- 1990년 7월 제주 서귀포시에 제주신라호텔, 1998년 증축동 개관. 프랑스의 OGAWA&FERRE 사에서 인테리어. 429개 객실 및 한식 포함 6개의 식당과 바, 8개의 연회장, 카지노, 스파 등으로 이루어짐. 2008년 제주호텔 GAO, TPO 서비스 국내 최초 시행. 제주신라호텔의 로비와 복도 곳곳에는 살바도르 달리의 스페이스비너스를 포함한 약 400여 점 이상의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장식되어 있음.
- 신라면세점 서울점
- 1986년 7월, 신라면세점 서울점 개점. 지하 1층, 지상 2층의 단독건물로 이루어짐.
- 신라면세점 제주점
- 제주시 연동에 1989년 개점. 지하 1층, 지상 2층의 단독건물로 300여 종류의 브랜드를 취급하고 있음. 1990년에 제주 면세점 신라호텔로 이전한 후 2000년 제주 면세점 신제주시로 확장 이전.
- 신라면세점 인천공항점
- 2008년 5월 인천공항점 여객터미널 매장 전장 개점, 6월 신규 탑승동 정식매장 전장 개점. 6,935㎡ 규모 인천공항 내 최대 매장. COSMETICS, PERFUMES, BOUTIQUE, WATCH, LEATHER, SHOES, SPORTS & CASUAL, C.JEWELRY, SUNGLASSES, KOREAN BRANDS 등의 품목을 취급하고 있음.
- 신라면세점 대구/청주공항, 김포공항점
- 대구공항점은 대구국제공항 2층에 위치한 단독매장이며, 청주공항점은 충북 청원군 청주국제공항에 위치한 단독매장임. 국제선 운항시간에 맞추어 영업. 2010년 대구공항, 청주공항, 그리고 2011년 김포공항에 7번째 면세점 오픈과 500여 종의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영업장 현황 요약
- 호텔사업
- 서울신라호텔 객실 463개, 연회장 13개, 식당 6개 27.7천평
- 제주신라호텔 객실 429개, 연회장 8개, 식당 7개 30.8천평
- 면세유통사업
- 신라면세점 서울점 283개 브랜드 1.2천평
- 신라면세점 제주점 143개 브랜드 0.6천평
- 신라면세점 인천공항점 235개 브랜드 2.1천평
- 신라면세점 김포공항점 영업면적 400.2㎡
- 생활레저사업
- VANTT
- 서초레포츠센터
수상실적
- 2006년 신라면세점 한국유통대상 대통령상 수상
- 2008년 LHW 연차총회에서 아시아호텔 최초 Gold Award 수상
- 2008년 2008 GAZZETTE 誌 서울 최고 호텔
- 2008년 INSTITUTIONAL INVESTOR 誌 세계 100대 호텔
- 2008년 LHW 리더스클럽 골든어워드 - 아시아최초
- 2008년 日JALPAK 선정 최우수 호텔
- 2009년 미국 Zagt 誌 선정, 국내 최고 호텔 선정
- 2009년 TTG Travel Award 서울 최고 시티호텔 - 국내유일
- 2009년 INSTITUTIONAL INVESTOR 誌 세계 100대 호텔
- 2010년 미국 Institutional Investr 誌 선정, 서울지역 1위
한복 출입금지 논란
2011년 4월 한복 디자이너 이혜순이 서울 신라호텔 1층 뷔페 레스토랑 파크뷰에 한복을 입고 입장하려 하자 직원이 “위험한 옷”이라면서 출입을 거부하여 신라호텔에 대한 거센 비판이 제기됐다. 이혜순은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쌍화점》 등에서 출연자들의 한복을 만든 디자이너였는데 당시 신라호텔은 한복과 트레이닝복 차림을 한 고객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신라호텔 홈페이지는 항의글로 서버가 폭주했다. 신라호텔측은 공식적으로 사과문을 올리는 한편 이부진 사장이 이혜순에게 직접 사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소식은 외신으로까지 퍼져나갔다. AFP통신은 "한국의 최고급 호텔에서 자국의 전통의상을 입지 못하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고 보도했고 이 보도를 인용한 다른 국가들의 언론들도 보도했다. 신라호텔은 2004년 일본 자위대 창설 기념행사에서 기모노 출입을 허용한 일이 알려지면서 누리꾼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논란 이후 신라호텔측의 정책 수정으로 뷔페식당의 한복 입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계단옆에 곱게 핀 법꽃
"꽃보다 마누라가 더 예쁘다."고 하니 기분이 무척 좋은 모양이다.ㅎㅎㅎ
올라가는 계단옆에 핀 꽃을 지나가다 한컷, 마누라 표정이 한껏 상기되어 있다. 지난 밤에 비가 온 뒤라 수목이나 하늘이 맑고 깨끗하기만 하다. 날씨도 너무나 좋고 멀리 북한산까지 보일 정도이다. 꾸불꾸불 계단을 올라 10분~15분 정도 올라가면 남산 순환도로가 나타난다.
신록이 우거져가는 계단길
계단 양 옆에는 수목들이 새싹을 피우면서 봄을 열심히 맞이하고 있다. 인간으로 치면 청소년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어린 모습은 무엇이던지 아름답고 순수하고 깨끗하며 귀엽고 사랑스럽다.
계단 중간쯤에 서 바라본 신라호텔
지구상의 만물이 이처럼 처음 태어날 때는 때묻지 않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태어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남산의 수목은 서울의 탁한 오염된 공기를 마시며 시들고 병들어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낙엽이 일찍 찌그러지거나 떨어져 버린다. 그래서 열매도 제대로 맺지 못하고 생육이 정상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나도 한 컷......
올라가다가 나도 폼 한번 잡았다. 이런 좋은 날은 영원히 마누라한테 기억에 남을지 모르겠다. 이런 좋은 날을 기억하는 것은 지금은 몰라도 내가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마누라 혼자서 이 길을 걸으면서 혼자 눈물을 흘리며 지난날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곁에 있을 때는 잘 모르나 떠나고 나면 정들었던 사람은 특히 그리운 법이다. 다른 나라 여성들이 한국에 시집와서 살다가 고향을 찿아가면 가족 모두가 그렇게 반가워한다. 동물도 마찬가지고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들이 가족들과 같이 지낼 때는 잘 모른다. 그러나 한 두사람 내 곁은 떠나면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주변에 나를 아는 사람들이 살아도 그런 사람은 나에게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곁에 살아 있을 때 잘하라는 어른들의 가르침이 기억이 난다.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은 남산도 한번 구경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하직하셨다. 농촌에서 어렵게 자식을들 키우느라 힘들게 일생을 보낸 분들이고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오늘 이렇게 남산이라도 구경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내 자식들이나 손주들도 세월이 지나면 점점 우리 부부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제사도 모르고 조산 숭배도 모르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왔다간 흔적을 남기고 싶지도 않다. 묘지도 필요없고 납골당도 필요없이 그냥 화장하여 고향 낙동강이나 한강에 뿌려주기를 바랄뿐이다. 우리 부모님도 돌아가신 후 내가 화장하여 고향 뒷산과 당시 근무지였던 강원도 현리 내린천 얖 야산 양지바른 곳에 뿌렸다. 우리 인생은 어차피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남산순환도로가 나타났다. 올라가면 북쪽 길로, 우측으로 가면 남쪽 길로 가게 된다.
북쪽순환도로는 국립극장을 경유하여 돌아가는 길인데 구배가 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은 처음이라 쉬운 우선 남쪽 순환길을 걷도록 했다. 햋빛은 찬란하였고 산책길에는 하얀 벗꽃잎이 지난 밤 비와 바람에 떨어져 눈처럼 흩어져 있다. 봄바람은 살랑살랑 불어오고 공기는 향기로운 꽃내음과 연초록 냄새가 섞여 코끝을 홀리고 있다. 한쪽 도로폭은 쿠션이 있어 걷기에도 좋다. 마누라는 연신 기분이 좋다며 "이 행복을 어쩔거냐"며 즐거워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은 처음이다. 같이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되며 점수 좀 따는 날로 생각된다.
처음이라 평탄하고 내려가는 길인 남쪽 길로 걷기로 했다
지구상의 만물이 이처럼 처음 태어날 때는 때묻지 않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태어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남산의 수목은 서울의 탁한 오염된 공기를 마시며 시들고 병들어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낙엽이 일찍 찌그러지거나 떨어져 버린다. 그래서 열매도 제대로 맺지 못하고 생육이 정상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태어날 때는 곱고 연하며 순박하고 예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차 부모를 닮아간다고 한다. 처녀시절에는 예쁜 아가씨가 결혼하여 나이가 들면서 점차 어머니를 닮아 간다고 한다. 세월의 모진 풍파속에서 고난의 시간을 보내다보면 얼굴이 점차 변하고 사악해지며 탐욕스러워진다고 했다.
처녀시절에는 예의바르고 메너좋던 여자가 결혼 후에는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총각들이 여성을 고를 때 그녀의 어머니를 보라고 했다. 요즘은 각종 성형으로 얼굴이 다 예쁘고 구분이 어려울 정도이다. 그래서 눈에 콩까지가 씌인 총각들이 겉만 보고 선택했다가는 평생 고생할지도 모른다.
밤새 바람와 비로 꽃잎들이 눈처럼 떨어져 길바닥에 흩어져 있다. 밝은 햇살, 그늘, 푹신한 도로, 청명한 하늘, 향기로운 바람......
평일 점심시간대라 맑은 날씨라 삼삼오오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입이 시종 다물어지지 않는 마누라, 기분이 무척 좋은 표정이다. 무척 행복하단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과 맑은 공기, 우거진 신록, 봄꽃들...... 모두가 환상이다. 천국이 따로 있냐.
중간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시가지
멀리 북악과 북한산이 보인다. 정말 청명한 날씨다.
남쪽 순환도로가 뻗어있는 방향, 남산 케이블카 출발점 방향이다.
충무로 방향 전경
중간 전망대에서 한 컷, 마누라 입이 거의 다물어지지 않는다. 행복하다면 좋코......
내친김에 나도 한컷......
내친김에 다시 한컷......멀리 남산타워가 보인다.
다시 출발, 내려가는 길, 햇살이 너무나 따사롭다.
꽃가루가 뿌려진 남산길을 걷다보니 꼭 천국가는 길같다.우측 길은 큐션이 있는 길이다.
내리막길, 발걸음이 저절로 간다. 기분이 좋으면 힘들거나 피로를 모르는게 사람이다.
사무실이 가까운 직장인들도 점심시간에 이렇게 삼삼오오 남산길을 걷고 있다.
남산 타워가 보이고 아래 건물은 남산터널 기계실이다
도로옆 계곡, 물소리가 졸졸졸 들린다.
계곡에는 급류 방지턱이 설치되어 있고, 산사태를 예방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마누라는 또 신이나서 잘도 걷는다. 다리 아프다고는 한마디로 안한다.
도로옆 잡초 군락
도로옆 잘 가꾸어진 꽃밭
꽃밭에서 마누라 한컷......
노란꽃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며 고개 내밀고 다시 한컷......
하늘에 때아닌 호빵이 떠있다.
계곡사이로 보이는 남산타워
목멱산방, 음식점이다. 남산을 옛날에는 목멱산이라 불렀다.가격은 비교적 저렴했다.
남산을 내려와서 남산골한옥마을로 찿아가면서 에니메이션센타를 지나갔는데. 그곳이 일제시대 조선총독부터라 했다.
에니메이션 기념조형물과 한컷......
남산골한옥마을 입구 전경
어린이들이 단체로 구경온 모양이다.
마을 내부 전경
임시공연장도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한옥이 별로 없다.
마을 내부에는 국악당도 있다.
대표적인 한옥 몇 채를 둘러보고 있다.
한옥 안채와 사랑채
한옥 골목길
전통한복체험장
한옥 내부 전경
장독대
부엌 내부
우물, 장독대, 김치저장고
창고 내부
한옥 안채
정자와 연못
마을 광장,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았다.
퇴계로-을지로-청계천-종로 방향을 한참을 걸어 걸어서 광장시장을 찿아갔다.
오장동 회냉면은 포기하고 바로 광장시장 먹자골목을 직행
광징시장 먹자골목은 삶의 현장이다. 생동감이 넘치고 먹거리도 넘친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많다. 먹자골목 중앙 사거리에서 파는 빈대떡이 유명하다
이 집은 직접 콩을 갈아서 즉석에서 빈대떡을 만든다. 빈대떡 한 개는 먹고 두개는 딸 준다고 사가지고 가기로 했다.
회도 한 접시 먹고 소주도 한 병 뚝닥......
제가 불로그에 올린 것처럼 이 글을 보시는 분들께서도 시간을 내서 연인이나 친구, 가족과 같이 서울 성곽이나 남산순환도로를 걷고 광장시장을 찿아가서 먹자골목에서 행복을 느끼시기 바란다.
마누라는 빈대떡을 먹고 만두를 사고 수수떡 같은 호떡을 사고 양발도 사서 동대문운동장을 거쳐 동대입구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남부터미널 역에서 내려 생맥주도 한 잔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가 훌쩍 지나갔고 마누라를 즐겁게 해준 덕에 고맙다는 인사도 받고 피곤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행복이 멀리 있는 게 아님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멀쩡하게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이러한 조금만한 행복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더 이상 바랄게 없을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다. 돈이 많다고 꼭 행복한 것도 아니오 출세했다고 좋아만 할 게 아니다. 가족이 다같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신이 주신 행복일 것이다. 하루하루가 힘들고 고난의 길을 가고 있지만 욕심을 줄이고 과욕을 버리고 현재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행복할 것이다. 상대적 박탈감에 불행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불행이다. 행복은 바로 당신의 마음 속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광장시장에서 빈대떡을 굽는 아줌마는 아무리 씻어도 몸에서 빈대떡 냄새가 난다고 한다. 자동차 정비업소 사장님은 몸에서 기름냄새가 난다고 한다. 모두가 정치의 무능과 자본주의 병폐 속에 개선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힘들고 어렵게 살아간다. 직업의 귀천을 떠나서 내 한 몸 건강한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