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봄 3 : 바람따라 세월따라, 한민족의 서사시......3
봄의 전령, 벗꽃이 피다
발해의 웅지, 해동성국의 명멸
보장왕 대당모반과 대조영 집단의 강제 이주
당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677년 요동성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이동시키는 한편, 보장왕과 고구려 유민을 요동으로 귀환시켰다. 나당전쟁의 패배 이후 요동 지역만이라도 기미지배를 통해 안정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당의 시도는 한꺼번에 위기를 맞이했다. 바로 안동도호부를 위해 유민을 무마해야 할 보장왕이 말갈과 모반을 꾀하였던 것이다. 보장왕은 모반이 사전 발각되어 공주(지금의 사천성 공협)으로 유배되고 이에 관련된 유민은 하남과 농우의 여러 주로 다시 강제 이주되었다.
보장왕을 견제하기 위해 안동도호부에 파견된 남생은 679년 5월 29일 사망하였다. 한편 630년 멸망한 돌궐은 이 부렵부터 당의 지배에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679년 돌궐은 정주를 침입하는 한편 해와 거란을 선동하여 영주를 침략하도록 하였다. 이때 남생의 아들 천헌성이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정양군 토벌대사에 임명되어 출정하였다. 보장왕은 내부적으로 남생의 사망과 돌궐 및 해. 거란의 침략을 계기로 고구려 부흥 운동을 도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말갈은 고구려의 수.당 전쟁에 동원되어 참전하였고, 고구려가 멸망후에는 나당전쟁에 참여하였지만, 고구려 유민과 반당투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고구려 멸망 이후 말갈제부는 해체되었지만 속말말갈은 비교적 온전하게 존재하였다, 보장왕은 속말말갈과 연계하려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어쩌면 남생의 아들 천헌성이 보장왕의 모의를 사전 적발하여 당에 밀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으로 669년 영주로 강제 이주 시점은 고구려 멸망 이후라고만 사서에 막연히 기록되어 있다. 사서의 기록을 종합하면 대조영과 걸사비우가 681년 보장왕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강제 이주되는 과정에서 영주에 거주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삼국 유사> 등의 사서에서 대조영 출신을 '고구려 별종', '고구려에 예속된 속말말갈'이라고 달리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상이한 기록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그가 머무른 곳이 영주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669년이나 681년의 강제 이주에서 고구려 유민의 최종 목적지는 하서.농우 등 당 내륙 지역인 데 반해 대조영과 걸사비우 등은 그 경유지인 영주에 머물렀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영주는 당의 동북방면의 전진기지로서 이곳에는 주로 거란이나 말갈이 거주하였다. 거란의 경우 이진충과 함께 난을 일으킨 손만영은 4대에 걸쳐 영주에 거주하였고, 속말말갈의 경우 수대에 돌지계 집단, 당 초기에는 오소고 부락이 고구려의 압박을 피해 귀속한 이래로 줄곧 영주에 거처하였다. 이들은 유목 또는 반농반렵 생활을 통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기 때문에, 당은 이곳에 집중적으로 기미주를 설치하였다. 이 점에서 고구려 멸망 이후 대부분 당으로 강제 이주되었던 백산말갈도 영주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고구려 유민의 경우는 이와 달랐다. 당이 고구려 유민을 내륙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킨 데는 이들이 농경민이라는 점도 있지만 영주에 집중적으로 배치된다면 말갈까지 규합하여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다면 곧바로 요동 지역까지 파급되어 안동도호부 자체가 붕괴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당은 고구려 유민을 멀리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키되 집단 배치를 피하고 여러 곳에 분산 배치하였다. 물론 영주가 경유지인 만큼 강제 이주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이 잔류하기도 하였지만, 그 규모는 그리 크기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서에 대조영이 두 가지 출신으로 기록된 것은 그가 영주에 거주하게 된 사실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걸사비우의 경우 고구려와 관련이 없는 말갈로만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양자간에는 어느 정도 종족적 차이는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대조영을 고구려 옛 장수라고 한 신라측 기록을 신뢰한다면, 그는 반당투쟁의 실패 이후 속말말갈 지역으로 간 고구려 장수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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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충의 난과 안동도호부
영주에는 거란족과 말갈족, 그리고 고구려인 등이 혼합 집거하였다. 696년 5월 송막도독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문홰를 죽이고 영주를 점령하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흉년이 들어 거란족이 굶주리고 있음에도 조문홰가 진휼을 하지 않고 오히려 거란족 추장들을 노복처럼 멸시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더 근원적인 배경으로 687년 돌궐의 부흥에 따라 당의 북방 기미체제가 전면적으로 붕괴된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당시 당의 측천무후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식병론(병사를 휴식시킴, 감군책)을 주장하는 등 대외정책에서 소극적이었던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진충의 난은 이후 하북 지방을 중심으로 4년간 지속되었다. 이진충의 난이 기미지배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영주에 거주하던 다양한 종족들도 가세하였다. 그리고 그 연장선 상에서 발해가 건국되었다.
이진충의 난은 696년 5월 송막도독 이진충과 귀성주 자사 손만영이 거병하여 영주를 함락하였다. 이진충은 영주에 머물고 있었고, 손만영이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8월에는 평주(지금의 하북성 노룡)의 협석곡에서 당군을 대패시켰다. 게다가 9월에는 돌궐의 묵철가한이 양주(지금의 감숙성 무위)를 침략하여 도독 허흠명을 사로 잡았다. 이로써 당은 동북방면의 지배력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북 방면도 위태롭게 되었다.
9월 당은 건안군왕 무유의를 청변도 행군총관에 임명하여 거란을 토벌하게 하는 동시에 돌궐에게 혼인 및 포로 반환을 조건으로 거란의 배후를 습격토록 밀약을 맺었다. 때마침 이진충이 사망하여 일시적으로 거란의 세력은 약화되었으나 손만영이 이를 수습하여 남하하였고, 당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탓인지 돌궐도 697년 1월 다시 당의 영주와 승주를 침략하였다. 한편 무유의가 이끄는 당의 토벌군은 다시 평주의 동협석곡에서 거란군에게 대패하였다. 다급해진 당은 묵철을 가한에 책봉하고 돌궐의 요구대로 모두 응하기로 약속하고 화친을 맺었다.
697년 6월 유주(지금의 북경)로 진격하려던 손만영은 배후를 걱정하여 돌궐의 묵철가한에게 함께 공격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 제안은 거란의 약점을 노출시켜, 돌궐과 당이 함께 거란군을 공격하는 바람에 크게 격파되었고 손만영도 사망하였다. 이로써 이진충의 난은 일단락되었다.
698년 6월 돌궐은 혼인 문제로 당이 약속를 지키지 않자 8월부터 정주와 조주 등 하북지방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당은 9월 적인걸과 설눌을 각각 하북도 행군부원수와 안동도경략으로 출정시켰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돌궐 주도하에 거란군이 격파된 이후로 거란과 해는 돌궐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돌궐이 하북지방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 무렵 거란 잔당들은 여전히 요동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는데, 대조영과 걸사비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거란 출신 이해고가 이를 토벌하고 개선한 것이 700년 7월이었다.
새벽 하늘과 봄을 알리는 벗꽃
대조영 집단의 동향과 당의 대응
이진충의 난이 요동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영주에 거주하던 대조영과 걸사비우의 동향은 아래와 같다.
'구당서'와 '오대회요'를 보면 이진충의 난이 발발한 후 대조영과 걸사비우가 각각 무리를 이끌고 요동에 일차적으로 정착하였고, 이해고의 토벌을 받아 걸사비우가 폐사하자 대조영이 무리를 규합하여 천문령에서 이해고를 격파하게 된다.
대조영이 요동에 정착하기까지는 걸걸중상이 주도하였다. 걸걸중상은 거란군에서 사리라는 군 지휘관의 관직을 가지고 있었고 당은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거란의 잔당으로 간주하여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물론 영주에 거주하던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는 이진충의 난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진충은 흉년을 이유로 거병하였기 때문에 거란족을 비롯한 이민족이 잡거하던 영주에서 함께 거병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망국 이후 몇차례의 반당투쟁을 경험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경우 그 가능성이 더욱 높을 것이다.
거란은 이진충의 반란간 696년 9월 안동도호부를 공격하였고, 697년 1월에는 요동도독 고구수에게 격퇴당하였다. 그리고 697년 5월에는 설눌을 따라 출정한 고문 부자가 마미성에서 전사하였다. 이때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이진충의 난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697년 6월 손만영의 사망 이후 거란이 와해되자, 요동 공격에 참여하였던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는 자연히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었고 이 때문에 당은 이들에게 각각 진국공과 허국공으로 임명하여 회유하려 하였던 것이다.
당의 회유책에 걸사비우는 거부한 반면 걸걸중상은 상대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어쨌던 당은 회유책이 성공하지 못하자 거란 출신의 이해고를 파견하여 이들을 토벌케 했다.
이해고는 손만영 사망 이후 당에 항복하였고 당은 그의 인품을 보고 다시 등용하고 장수에 임명하여 토벌군을 이끌도록 한 것이다. 이해고가 거란 잔당 토벌을 끝내고 개선한 것이 700년 7월이었다. 따라서 이해고가 걸사비우를 폐사시키고 천문령 전투에서 대조영에게 패배한 것은 그 이전이 된다. 이에 근거하여 발해의 건국 시기도 이즈음으로 파악된다. 일본측 기록은 698년에 건국된 것으로 나오며, 이해고의 토벌도 698년이며 개선은 700년에 이루어진 것이다.
697년 당은 걸걸중상과 걸사비우에게 회유책을 구사하다가 698년 무렵 이들을 토벌하게 된 것은 안동도호부가 698년 6월 안동도독부로 축소되고 요동도독 고구수가 안동도독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고보원을 충성국왕에 임명하고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을 회유하려던 것은 698년 초반에 계획이 수립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기 당은 돌궐과 당의 혼담이 깨지자 돌궐 토벌을 진행하는 한편 이해고로 하여금 요동 지역의 거란 잔당을 토벌토록 하였다. 이해고는 걸사비우의 말갈집단을 격파하고 걸걸중상의 뒤를 이은 고구려 유민을 지휘하는 대조영을 천문령(길림성 합단령)까지 추격하였으나 대패하고 물러났다. 당은 이해고가 패배하자 설눌로 하여금 이해고를 지원토록 했다.
대조영 집단이 천문령 전투에서 당에게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목단강 유역의 동모산까지 이동하였던 까닭은 설눌의 뒤이은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해고와 설눌은 거란이 돌궐에 복속하여 교통이 두절되었기 때문에 대조영을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고 다시 요동 지역으로 토벌 방향을 돌렸다. 이즈음 거란 추장 이해락이 700년 당에 항복한 후 등용되어, 압록강 일대에서 말갈을 섬멸하고 유관 이북에서 거란을 소탕하였다. 압록강 일대의 말갈족은 대조영 진영의 동모산 일대로 도망하여 발해 건국에 동참하였다고 판단된다.
한강 물빛깔도 봄을 맞이할 듯 따스한 온기가 감돌고 있다.
발해 국호
건국할 당시 스스로 나라의 이름을 대신국(大辰國), 또는 대진국(大震國/大振國)이라 칭하였으나 이후 발해로 바꾸었다. 사료에 따르면 713년에 당나라가 대조영을 발해의 국왕에 책봉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에서는 이 책봉 이후로 진국이 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고 하며, 북한 학계에서는 진국이 스스로 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는데 당나라가 이를 추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건국
669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의 땅을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지배하였다. 고구려 유민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나라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천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 : 고왕)도 그의 아버지 대중상(大仲象)과 함께 요서 지방의 영주(營州)로 옮겼다.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 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화(趙翽)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틈을 타서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이해고의 당나라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 기슭에 진국(震國 혹은 振國)을 세웠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게다가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 유역과 만주 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자, 705년 사신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였다. 더구나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공(渤海郡公)이라는 관직을 수여하였는데, 이로부터 나라 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
대조영이 대발해를 동모산 기슭에서 세울 때의 벗꽃과 무엇이 다를까?
발전 과정
고왕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대무예는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정하고,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시키고 만주 북부 일대 전체를 장악하였다. 이러한 발해의 급속한 세력 확대는 주변 나라들을 긴장시켰다. 가령 당나라는 발해 북쪽의 흑수부 말갈(흑수말갈)이 연합하여 대응해 나갔다. 흑수말갈과 당의 연합에 반발한 무왕은 동생 대문예(大門藝)에게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대문예는 내부적인 권력투쟁과 왕과의 의견 차이로 인한 반발로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에 망명하였다. 이 때문에 당과 발해는 대문예의 송환 문제를 둘러싼 외교 분쟁을 수차례 일으켰다. 이러한 와중에 732년 가을 거란족이 사신을 보내와 함께 당나라를 칠 것을 제안하자, 그해 9월 발해는 장군 장문휴(張文休)에게 수군을 이끌게 하여 등주(登州)를 급습하여 순식간에 점령하는 한편, 요서의 마도산(馬都山)에서 대문예가 이끄는 당나라 군과 격돌하였다. 이후 당나라가 신라에 지원을 요청하면서까지 발해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발해의 성장은 거칠 것이 없었다.
737년 무왕이 죽고 대흠무(大欽茂)이 3대 문왕(文王)에 즉위하여 대흥(大興)·보력(寶曆)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문왕도 영토 확장은 계속되어 동북 방면의 말갈 부락을 복속시키고 그곳에 부(府)를 설치하였다.
그 무렵 발해의 고민 또한 커지고 있었다. 우선 면적에 비해 발해의 자연 환경은 너무 거칠었다. 모진 추위와 눈으로 덮히거나 얼어붙은 땅은 농사를 어렵게 하였고, 사냥이나 가축을 기르기가 발해의 산업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함으로써 늘 물자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발해의 두 번째 고민은 여러 종족을 잘 통합하여 국력이 하나로 일치된 나라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넓은 만주 지역에는 여러 종족이 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훗날 여진족 혹은 만주족으로 불리는 말갈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이미 고구려의 지배를 받으면서 어느 정도 고구려인이 된 세력이 있었던 반면, 이때 새롭게 정복된 세력도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은 더욱 컸다.
오랜 고민 끝에 문왕은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내부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우선 756년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 용천부로 옮겼다. 이곳은 만주에 살고 있는 여러 세력의 주된 이동로이자 물자 교류의 중심지였으며, 농사를 짓기에도 한층 수월한 지역이었다. 상경에 자리잡은 뒤에는 농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인구도 크게 늘었다. 그밖에 3성(三省)과 6부(六部) 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지방에도 경부(京府)·주(州)·현(縣)으로 구성된 3단계의 통치체계를 갖추었다. 또 상경을 중심으로 주요 교통로를 마련하고, 국내외 각지를 연결하는 대외 무역에 더 힘을 쏟음으로써 거친 자연 조건이 주는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발해는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었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종래의 대립 관계를 해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동시에 돌궐 및 일본 등과도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신라와 당나라를 견제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발해는 대외적으로 국력을 과시하였고, 762년 당나라는 문왕에게 한 등급 높은 관직인 발해국공(渤海國公)을 수여하였다.
한편 문왕의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로 천도한 적도 있으나, 성왕(成王)대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상경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그것을 모방하여 정비한 도시였다.
793년 문왕이 죽은 이후 대원의(大元義)· 성왕(成王)·강왕(康王)·정왕(定王)·희왕(喜王)·간왕(簡王)이 차례로 짧은 치세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국력은 지도층의 내분으로 일시 약화되었다.
9세기 전반, 간왕의 종부(從夫)이며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大野渤)의 4대손 대인수(大仁秀)가 선왕(宣王)에 즉위하였다. 선왕은 발해를 중흥시켜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당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켰으며, 또 요동 지방에 대한 당의 지배가 약해진 틈을 타서 요하 유역까지 진출하여 그곳에 목저주(木底州)·현토주(玄兎州)를 설치하였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이후 요동 진출을 본격화하여 10세기 초에 거란이 이곳으로 진출하기까지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였다. 선왕의 대외정복을 바탕으로 발해는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으며, 이에 맞추어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다. 지방에는 부 밑에는 여러 개의 현을 두었고, 부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5개의 부에는 경을 두었다. 5경은 당시 발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멸망
선왕이 재위 10년 만인 830년에 죽은 뒤 약 100여 년간에 걸친 발해 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일부 학자는 비슷한 시기에 분화한 백두산의 화산 폭발이 발해의 멸망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916년 거란의 아율아보기(耶律阿保機, 872년 - 926년, 재위 : 907년 - 926년)는 부족을 통일하고 요나라를 세워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그는 중원 지방으로 진출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배후 세력인 발해를 먼저 제거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925년 12월 말, 야율아보기는 군대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하였고, 발해는 요나라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다. 결국 발해는 보름여 만인 926년 1월 15일에 멸망하였다.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는 발해고지(渤海故地)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요나라 황제의 맏아들로 하여금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발해 유민들의 부흥운동은 1116년까지 이어졌으나 모두 실패하였으며, 아울러 한민족은 주된 활동 무대의 일부였던 만주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발해사 쟁점
대조영이 세운 발해는 발해의 영역이 현재의 중국, 러시아, 그리고 북한에 걸쳐 있기 때문에 일본까지 포함하여 현재 정점 역사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자국 중심적인 해석으로 같은 사료를 놓고도 서로 그 해석을 달리한다. 그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발해인이 남긴 사료가 적기 때문이며 현재의 연구자들이 국적이 발해시대 당시의 경쟁적 파트너였던 당, 일본, 신라 등과 연결되는 것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까지 거의 뭍혀 있던 발해 역사가 조선 후기 유득공의 <발해고>를 시작으로 관련 서적이 나오기 시작하였으나 발해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사료가 부족하고 고고학적인 유물도 대부분 사라져 그 근원과 주체, 민족, 문화, 계승국이 모호하다보니 각국이 자국에 유리하게 왜곡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제 시대 일본은 만주 침략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발해사 왜곡, 중국은 동북 공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발해를 단순히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폄하기 위한 왜곡, 러시아는 자신들의 연고권을 주장하기 위해 말갈족이 세운 독립 정권으로 왜곡, 북한은 주체사상을 강화하기 위해 발해사를 왜곡하는 바람에 발해사는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찟기고 조작되고 폄하되어 합의점을 찿지 못하고 현재 쟁점화 되어 있다.
발해사 쟁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대조영의 출자와 건국 주체, 민족 구성, 강역과 지리, 문화가 성격, 발해 인식의 차이 등이다. 이러한 각 요소들은 다시 복잡하게 얽혀 첨예한 국가귀속 문제를 낳고 있다.
발해사의 쟁점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국가.학자별로 계속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주제마다 합일점을 찿기란 쉽지 않다. 특히 국가별 차이가 너무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현 동아시아 정세에 비춰 앞으로도 해결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의 발해사 연구 현황과 방향은 아래와 같다. 연구의 출발은 조선 후기 유득공의 <발해사>를 출발로 지금까지 220년, 광복 후 최초의 논문 발표를 기준한다면 5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여기서 진정한 의미의 발해사 전문가가 등장해 연구 성과를 내기 시작한 것이 1980년대라면, 연구 기간은 아직도 30년이 되지 않는다.
발해 유적이 산재한 중국.러시아에 대한 현장 접근의 어려움, 발해사에 대한 무관심, 용이하지 않았던 자료수집 등 제반 문제를 생각하면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는 대단하지만, 발해사에 대한 이해 관계를 지니고 있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 역시 발해에 대한 관심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은 채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발해사 연구는 새로운 도약을 위해 뒤를 돌아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큰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방안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첯째, 고고학적인 연구 결과의 적극적인 수용과 연구의 공간적인 시야를 점차 확대할 필요가 있다.
둘째, 일정한 정도의 발해 고고학 전공자가 필요하다.
셋째, 인접 학문과 공동연구 및 학문 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통섭의 연구자세가 필요하다.
넷째, 발해사 연구의 개방화와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다섯째, 현재 활발하게 전개되는 발해사 연구 결과가 자라나는 세대의 국사 교과서나 한국사 개설서에 신속하면서도 정확하게 반영될 필요가 있다.
여섯째, 발해사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발해사 연구와 전망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 학계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지도사관으로 받아들이면서 북한 역사학의 기초를 다졌다. 1950년대 후반에 북한에서 일어난 시대 구분 논쟁은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한 역사 해석의 시도였다. 이 결과 북한 학계는 발해사를 중세사로 편입했지만, 발해사를 제대로 서술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1962년 발표된 박시형의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부터이다. 이 논문은 한말 계몽사가들 이후에 단절된 발해사 연구 전통을 다시 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며 발해 관련 사료를 면밀히 검토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음을 밝혔다. 이후 북한의 발해사 연구는 박시형이 제시한 발해의 고구려 승계에 대한 보완적 역활에 불과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북한은 김일성 혁명사상이라는 이른바 '주체사상'에 의한 사상통제가 강화되면서 우리 역사를 주체적인 입장에서 고조선.고구려.발해에 관한 연구가 들어 있었다. 그래서 통일신라를 부정하고, 고구려-발해를 중심으로 하는 인식의 틀을 형성 발전시켰다. 결국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밝히는 데 중점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편향성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주체사상이 확고한 자리를 구축해 가면서 정치적 견해에 입각해 연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한의 학자들은 발해의 주민 구성에서 고구려 유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고구려 멸망 후 원고구려 고토에 일부 정치 집단들이 있었고, 684(5)년에 동모산에서 진국을 성립했으며, 698년에는 황제국인 발해국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발해 문화의 고구려 계승성만 강조한다든지, 발해 강역과 관련된 논증, 각 부분사에서 발해 위치의 지나친 격상 또는 자의적 해석 등에서 우리 학계와 많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중국의 발해사 연구 동향과 목적
중국 학계의 발해사 연구는 1919년 시작된 이래 1,240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그중에서는 단연 고고학 분야가 가장 많고 발해사 귀속과 성격에 관한 연구가 뒤를 이었다. 그 중요한 연구 성과는 1980~1990년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은 고고조사를 바탕으로 커다란 연구 성과를 거두었지만,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가가 아닌 말갈족의 역사로 규정하고 있다.
중국 학계에서 발해사 연구가 활성화된 게기는 건국 이후 논의하기 시작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성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발해사 입장에서 보면, 이 두시기에 종족과 국가 성격에 관한 성과가 두드러지는데, 그 이유는 중원과 다양한 형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소수민족들에 대해서 그들이 건립한 정치체를 '지방정권' 또는 '할거정권'이라고 인식하면서, 역사상의 각 민족관계를 '중앙과 지방'이라는 구도 속에서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발해사를 포함한 소수민족 역사에 대한 근본이론으로, 1949년 논의가 시작된 이후 198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확립되었다. 이것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후, 중국의 각 민족들이 스스로를 다민족국가 중국의 일원임을 인정하도록 하고, 과거에 대한족주의자들이 주장했던 한족만 중국인이라는 의견을 부정하기 위한 현실적인 필요에 따른 것이다. 최근 보도되는 중국 언론을 통해 보면, 중국 학계는 '하상주단대공정', '중국고대문명탐원공정', '요하문명론'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통해서 만주지역에 출현하는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문화에 대해 대대적입 발굴과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고, 2007년 4월부터 제3차 '진국문물조사사업'을 전개하여 현재는 현지 조사단계를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 학계는 고대사만이 아니라 소수민족 역사를 영토적 관념에서 그 뿌리를 두고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는 동북공정으로 이어졌다. 이것의 인식틀은 단순히 각 왕조에의 영토만이 아니라 그 역사마져도 중국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논리로, 한국 고대사의 정체성을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대형 프로젝트의 이론적 배경에는 '통일된 다민족국가' 또는 '중화대가정주의라는 기치를 내걸고 대국화를 도모하고 있는 패권주의의 대표적인 실제가 되고 있다.
일본의 발해사 연구 쟁점과 목적
일본에는 <속일본기>를 비롯하여 발해 관련 역사서와 목간, 문집, 금석문 사료, 유적 등 발해사 연구에 중요한 1차 사료가 많이 보유되어 있는 나라다. 특히 일본의 기록 자료는 중국이나 한국의 역사서에서 보이지 않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외교 관련 기록에서는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 여부도 규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근대 역사학이 태동한 19세기 후반 일본 학계에서는 자국사와 관련하여 조선사, 즉 한국사도 정리하였으며, 20세기 전반에는 처음으로 발해사를 일본사의 범주에 넣었다. 또한 1945년 이전의 만주 점령 시기에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연구 성과는 지금도 그 가치가 유효하다. 19050-1960년대에는 연구가 다소 주춤하다가, 1970년대 이후에는 다수의 전후 세대 연구자들이 등장하면서 발해사에 대한 이해가 다양화되었으며 대체로 한국사의 범주에 두었다.
일본 학계의 발해사 연구는 동아시아 책봉체제론이나 국제적 계기론에 입각하여 주료 교류와 교섭에 주력하였다. 발해 건국 집단을 속말말갈로 파악하고 소수의 고구려인과 대다수의 말갈 제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보았다. 또한 양자의 교류를 둘러싼 많은 해양민족이 오래 전부터 행해져 왔음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다하비성'에 보이는 말갈국의 정체성에 대한 결정적인 근거는 바로 삼국사기에도 나타나 있는데, 중국 측의 말갈 만주 존재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한국 학계 일각에서 주장하는 범칭설의 주요한 자료가 된다. 일본 학계의 동북학 연구에서도 드러나듯이 '아무르강 유역-사할린-훗카이도와 일본 동북지역'을 잇는 광범위한 교류가 밝혀지고 있으며, 당시 일본에서는 아무르강 유역의 여러 집단을 말갈로 인식한 점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러시아의 발해 연구 동향과 쟁점
러시아는 이미 19세기에 비추린(1777-1853)이라는 탁월한 동양학자나 나타나 발해에 대한 문헌 자료의 내용을 일부 파악하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에서 발해에 관한 역사 연구는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오랜 전통을 이어왔다. 또한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는 성터, 절터, 주거 유적, 고분 등 발해와 관련된 수많은 유적이 널리 분포하고 있으며, 이미 1950년대부터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러시아에는 역사학 자료와 고고학 자료를 통해 발해를 연구할 수 있는 객관적 여건이 형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덕분에 러시아는 발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역사학적인 측면과 고고학적인 측면 모두에서 많은 학문적 업적을 쌓아왔다.
오늘날 러시아의 발해 연구자들은 발해를 말갈이 건국한 것으로, 다민족 국가인 것으로, 발해의 동쪽 영역은 연해주 남부지역으로 한정되는 것으로, 발해 문화의 성격은 독자성과 다원성을 띠는 것으로, 발해는 말갈계의 독립 주권국가였던 것으로 파악한다.
발해의 영역을 중앙과 지방으로 구분하여 물질문명의 차이를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 발해의 강역을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해 설정해 보고자 하는 시도, 발해의 생업.경제, 구체적인 유구와 유물 등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발해 문화에 대한 전체적인 시기 구분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이다.
러시아는 중국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참고하고 있는데, 한국의 연구 결과도 러시아 연구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번역.출간하여 활용할 수 있게 해야 될 것이다. 또 러시아의 자료도 체계적으로 수집, 번역, 발간하여 한국의 연구자들이 활용이 가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현재 공동 발국 조사가 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발국조사를 실시하여 발해의 물질문화에 관한 자료도 체계적으로 축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발해와 말갈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말갈과 상호 연계성 문제를 역사학적인 측면과 함께 고고학적인 측면에서도 깊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발해 역사는 나라마다 각기 다른 목적으로 가지고 변질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들이 발굴하는 내용을 비밀에 붙이고 공개하고 있지 않는 실정이며 그들의 목적을 위해 발해 역사를 고구려 역사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지방 정권화를 시도하고 있다. 북한은 정통성과 주체사상적으로 정통성과 독립성을 주장하기 위해 발해사를 편향적으로 주장하고 있으며, 일본은 대륙 침략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국에 유리한 대로는 만주사를 독립적으로 변질시켰고 대륙 정책 변경에 따라 한국사까지도 왜곡시키는 등 침략적 야욕에 따라 역사를 왜곡.호도하여 왔다. 러시아는 만주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기 위해 발해사를 이용하여 말갈족이 세운 자주독립국으로 강조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발해사는 한국.중국.북한.일본.러시아 등 5개국이 공동으로 발굴.조사되어야 하며 공동으로 발해사 연구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역사가 승자의 역라지만 공정한 역사 이해와 수립. 기록은 동북아의 안정과 공동번영을 위해서도 열린 자세로 협력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는한 발해사는 여전히 자국에 유리한대로 이기적이고 편향적인 왜곡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아! 대조영이 고구려가 멸망당한 후 각고의 노력 끝에 재기를 도모하였고 천불령 전투에서 당나라의 이해고 군대를 무찌르고 나라를 세우니 발해라! 그들이 동모신 기슭에서 새로운 창업을 이루었을 때 얼마나 감회가 새로웠을까! 장구한 고구려의 웅대한 역사를 가슴 속에 되새기며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제부족을 아우르며 집을 짓고 군대를 양성하며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인 결과 대발해라는 고구려의 계승국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대조영이 죽고 그의 후손들은 당의 지속적인 압박에 시달리며 나라를 존속하였으나 수도를 수차례 옮기는 등 내부적으로는 권력투쟁이 계속되면서 분열이 초래되었고 무왕과 선왕의 치세에도 불구하고 발해는 그 존속기간이 200여 년을 넘기면서 체제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으니 반대로 성장을 거듭한 거란족의 갑작스런 침공에 일주일만에 허무하게도 수도가 점령되면서 멸망하였으니 대조영의 위대한 꿈도 이처럼 역사속으로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고려 이후 우리 민족은 발해를 잊고 살았고 기억조차 희미하게 흐려져갔다. 이제 발해사의 쟁점이 주변국사이에서 서로 첨예하게 자국에 유리하게 해석되고 왜곡됨으로써 우리는 대발해의 역사를 우리 스스로 빼앗길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힘이 없슴이며 우리가 소홀히 알고 지냈던 과거속에서 발해는 우리의 품을 떠나 부평초처럼 동북아 일대를 떠돌아다니며 정처를 찿지 못하고 있다. 우리들의 책임이 막중함에도 우리들이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들의 민족 역사가 찟기고 난도질 당하여 아련한 추억속에서나마 남아 있게 될지 모른다.
우리가 통일이 되어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경제적 부흥을 이루고 더불어 모두가 잘 살아가는 선진국이 된다면 우리는 대발해의 찬란했던 화려한 역사를 되찿아 올 날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과 통일을 위한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문화 등 제 측면에서 남과 북이 함께 협력하고 공존하면서 스스로 휴전선을 허물고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 당면과제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과 우리 후손들에게 주어진 몫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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