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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96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1

두바퀴인생 2013. 4. 1. 04:31

 

 

한국의 역사 896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1

 

 

                   

 

 

 

지금부터 기술되는 내용은 김남씨가 지은 <노컷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조선 사회가 긍정적인 면이 없지는 않으나 이 책은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작가 김남씨는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를 졸업하고 <월간세대>에서 중편소설 <어른들만이 사는 거리>로 신인문학상을 받았고 동앙일보 신춘문에에 <겨울의 소리>가 당선된 후 희곡과 드라마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했다. 저서로는 장편소설 <그 곳엔 누가 있을까>, <돛배를 찿아서>등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정독한 후 교과서 또는 방송 등에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거나 외면해 온 조선의 역사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 <노컷 조선왕조실록>을 집필했다고 한다. 

 

작가는 책머리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많은 사람들이 책의 내용을 보고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 소리를 듣고 몹시 당혹스러웠다. 모두 기본적인 역사 교육을 받은 분들이 그런 정도라면 우리 대부부은 우리 역사에 대해 뭔가 상당 부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깊어진다.

 

역사에는 국수주의가 분명히 있어서 자랑을 주로 내세우는 대신 그 반대편에서 부끄러운 과거사를 얘기하면 자기비하라고 매도를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며 따지기 시작하면 할 말이 없다.

 

2005년 10월 미국 상원의원이던 힐러리 클린턴은 한국인에게는 '역사 망각증'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주한미군사령관 버웰 벨 장군에 대한 인준청문회에서였다. 한국인들은 과거를 너무 빨리 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서기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로마에 최후까지 저항하던 저항군이 로마군에게 전멸당한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고 2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사관생도부터 어린아이까지 요새에 오르게 한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마라"를 복창시키고 잇다. 유태인이 학살당한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기념관의 마지막 코너에는 동판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망각은 망국에 이르고 기억은 구원의 비결이다"

 

국수주의의 장점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개인에게든 집단에게든 가장 큰 교훈은 실패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과거에 왜 그런 실패가 발생했나를 엄중히 따지고 반성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잇을 것이다.

 

국가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그동안 우리는 조선왕조에 대해서 너무나 자랑만 일삼아 왔다. 빛나는 역사와 문화, 심지어 임진왜란 같은 국란도 우리가 승리한 전쟁이라고 가르쳐 왔다. 과연 조선은 그런 장미빛의 왕국이었나?

 

한 출판사의 시리즈를 보면 한옥의 조형, 꽃담, 문방사우, 한국의 정자, 조선기와, 분청사기, 장서고가 자물쇠, 단청, 고분, 소재원, 서원건축 등 빛나는 조선 문화릐 예찬으로 방대한 서적을 속속 내놓았다. 그렇다. 그런 것을 우리는 자랑할 권리가 충분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다. 왜 그런 시리즈물에 진정으로 우리가 새겨들어야 하고 반성해야 할 내용은 모두 제외되어 버렸는가. 학문이란 그런 것이란 말인가.

 

당신은 조선을 생각할 때 먼저 생각되는 것이 무엇인가?

 

'커다란 갓을 쓰고 흰 두르마기를 입은 선비의 모습

우아한 한복을 입은 아름다운 우리 여인들의 모습

날아갈 듯 장중한 추녀가 돋보이는 한옥과 평화롭게 들어앉은 마을의 모습

거문고나 가야금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멋진 정자에 모여 앉아 낭랑하게 시조를 읊는 사대부의 모습'

 

그런 것만 떠오른다면 궁중 비사만 다룬 텔레비젼 드라마나 영화에 세뇌되었음이 틀림없다. 세계 최고의 훈민정음, 온돌, 금속활자, 눈부신 각종 기술, 오백 년 역사의 기록, 유네스코에 등재된 장엄한 왕릉들, 그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실 우리나라가 '해 돋는 동쪽의 아름답고 고요한 나라'라는 표현도 별로 적합한 것이 아니다. 우아한 예절과 선비의 나라였다는 것도 착각에 가깝다.

 

그럼 가장 정직한 표현은 무엇일까? 우리 조선은 대체 어떤 나라였나?

 

진정으로 역사를 들어다보면 대답은 한가지밖에 없다.

 

조선은 한 줌의 양반계급과 대부분 헐벗고 굶주린 땅에서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고 오직 먹고 살기 위해서 허덕였던 백성들이 넘쳐난 땅, 그래서 서로 헐뜯고 싸우고 거짓과 탐욕과 이기심만이 찌꺼기처럼 쌓인 땅.

 

그곳이 우리 조국이며 그런 사람들이 바로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다.

 

조선 오백 년의 역사는 양반과 상놈이 대립한 역사라고 작가 김주영은 그의 대하소설 <객주>에서 지적하고 있다. 사실이다. 조선 오백 년은 노비들의 피눈물 위에 양반 사대부들이 군림해온 세월이었다. 태반의 백성이 상놈이거나 노비로 낙인 찍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한번 상놈이면 자식도 상놈이요 한번 노비이면 자자손손 대대로 노비일수밖에 없었던 나라, 그런 인구가 백성의 태반이었으니 조선의 실체를 정의할 때 상놈의 나라, 그 이상의 적합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통일신라, 고려와 달리 조선왕조 오백 년은 국가의 발전이라는 것이 거의 미미한 상태나 다름없었다. 이 책에서는 그 실패의 DNA, 양반과 상놈이 반목하며 증오하던 오백 년 세월을 좀 솔직히 짚어 보려 한다. 조선왕조의 진면목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결국 오늘과 내일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때의 망령들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우리 사회 곳곳에 깊숙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것을 지금도 수시로 느낀다. 나라 움직이는 것을 보면 놀랍도록 대동소이한 과오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무수히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우려를 염두에 둔 채 그리고 내일을 위한 고언이라는 측면에서 이 글을 썼다는 점을 이해하여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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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역사기술을 시작하며......

 

이제는 날씨도 많이 풀리고 봄이오는 기운이 역력하다. 남쪽에는 꽃들이 만개하고 진해에서는 군항제도 열리고 있다. 우리 동네 뒷 산 몽마르뜨 공원과 서리풀 공원을 지난 주에 둘러보았다. 나무마다 새순이 돋고 꽃망을이 피오오르고 있었다. 영욕의 이 땅에도 봄은 어김없이 오고 있다.

 

자연은 인간에게 참으로 공평하고 평등한 자연의 이치를 보여주는 듯하다.누구든지 자연의 이치와 순리를 비켜갈 수 없으며 그 위대한 힘 앞에 무력한 존재에 불과할 것이다. 탐욕과 굴욕의 역사든, 영광과 위대한 역사든 어느 나라 어떤 누구에게도 나라의 흥망성쇠와 개인의 생로병사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힘 있는 자는 힘 없는 자를 지배하고 자만에 뒤 따르는 추락처럼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흥망성쇠는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한국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우리들이 과거를 살펴보고 현재를 반성하며 대안을 마련함으로써 더 낳은 우리들의 미래를 구축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겸허한 마음으로 역사를 대하고 역사를 모르는 자는 다시 반복의 오류를 범하게 되고 그 탐욕의 질곡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며 자신을 포함한 후손들이 노예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자랑은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들 주변에 공평하고 못하고 정의롭지 못하고 평등하지 못했던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은 우리들 마음 속에 내재하고 있는 탐욕의 삐뚤어진 마음을 다잡기 위함이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이중적이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고 글도 그를듯하게 쓰고 명강의나 명연설이 청중을 감동시키지만 실제 언행은 그렇지 못한 것 또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다른 사람의 과오를 곧잘 손가락질 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의 과오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나 그런 상황에 처하면 대부분 비슷하게 될 수밖에 없으니까.  

 

힐링의 전도사 김미경씨가 논문 표절 문제로 방송 프로그램에서 낙마했다고 한다. 나도 그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주는 참 괜찮은 여자였고 좋은 프로그램이었다고 생각된다.  또 작가 이외수씨가 혼외 자식 문제로 인한 소송건으로 고초를 겪고 있다는 뉴스를 봤다. 우리는 정상에서 추락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고소하고 한편으로는 짜릿한 쾌감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년이 넘도록 조선의 역사를 매일 기술해왔다. 실은 무척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매일 블로그에 글을 올린다는 것은 어지간한 노력이 아니면 참으로 힘들다. 그래서 다른 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오로지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데 온 시간을 다 소비한 느낌이다. 그래서 내용이 오탈자로 많았고 충실하지 못한 점도 많았던 것 같다. 여러 역사전문가들이 볼 때 별로 시원찮은 역사글이지만 비전문가인 본인의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잘못된 내용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난 일주일간 쉬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봤다. 이제부터는 2~3일에 한 편씩 글을 올리려한다. 자주 찿아주시는 분들께 죄송한 마음이지만 좀 더 자유롭고 여유롭게 글을 울리려 한다. 그래도 변합없이 블로그를 자주 방문해 주시고 역사를 이해하고 느껴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조선 사회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는 시간을 시작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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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왕조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

 

 

당신은 김씨나 이씨가 아니다.

 

 

성씨가 있던 사람은 10% 미만

당신의 성이 무엇인가? 김씨? 이씨? 박씨?

 그리고 족보를 보면 김수로왕이랄지 박혁거세랄지 세종대왕이랄지 그런 왕가나 명문 대감의 몇 대 자손으로 표기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문제가 좀 있다. 미안하지만 절반, 아니 절반 정도가 아니라 우리들 태반은 가짜 성씨, 가짜 족보를 갖고 있다. 타인의 족보를 훔치고 타인의 성을 슬쩍 훔쳐 살아 온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김, 이, 박뿐만아니라 최씨, 정씨를 비롯하여 여타의 성도 모두 마찬가지다.

 

사실 요즘 세상에 그런 것들은 별 상관도 없지만 이런 거북한 이야기부터 펼쳐 볼까 한다. 당신의 성씨도 가짜고 족보도 가짜며 당신은 그런 왕가의 자손이기는 커녕 상놈의 피가 흐르는 천한 신분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떠들어 댄다면 아마 명예훼손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유감천만이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별 수가 없다. 사실은 사실이니까.

 

우선 조선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라도 이런 허물부터 한 꺼풀 벗겨 보고자 한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은 다시 말해 대부분 가짜다. 왜냐하면 조선 시대 백성들은 왕족이나 권문세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성이란 것도 없이 그저 어느 고을에 사는 춘삼이, 막동이, 일남이, 이남이, 돌쇠, 개똥이, 오월이, 사월이 그런식으로 불리고 살앗다.

 

태종 시절에는 조정 대신들도 성이 없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고려 왕씨를 멸족시키는 과정에서 태조는 특별히 공이 많은 상장군 왕우의 두 아들은 노씨로 바꿔주기도 했다.

 

왕씨 이외에 고려에서 득세했던 귀족들 성씨 역시 사멸되었다. 왕씨들은 바다에 끌고 나가 수장시키고 여타 주요 귀족들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요행히 살아남은 왕씨들은 옥씨, 전씨로 성을 바꾸고 살았다고 하지만 아예 성을 쓰지 못했다는 설이 더 정확하다.

 

성종 시절에 이름을 보면 효양, 자질금, 말동, 합이, 내은산, 자근, 양중, 철근 등이 나오는데 모두 한자 이름이다. 성은 없어도 이름은 한자로 지은 겨우도 많았던 듯하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전체 백성들 중에 성을 가진 사람들은 특수 사대부층에 불과했으니 그 숫자야말로 아주 미미했다. 기본적으로 좁은 곳에서 서로 사는 것이 뻔할 터인데 네가 어째서 우리와 같은 가문이냐고 추궁하면 변명할 길이 없었던 탓으로 대부분의 백성들은 성씨가 없었다.

 

병자호란 직후 왕이 내린 유공자 전지를 봐도 장군의 이름이 막동이로 되어 있는 등 직접 뒤적여본 그 유지에는 성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풍양 조씨의 시조로 알려진 '조맹'도 처음에는 이름이 그냥 '바위'였다. 그러다가 고려가 건국되면서 '조'라는 성을 하사받고 이름도 그에 맞게 '맹'이라 고쳤다.

 

조선왕조 초기에는 대략 인구의 10% 미만 정도만 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앙족과 고위 관리들, 공개적으로 족보를 가진 가문의 숫자다. 그러다가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늘어났다. 조선 중엽까지 조금씩 늘어나다가 임진왜란이 한번 휩쓸고 간 뒤부터는 성이 부쩍 늘어난 것인데 정치건 제도건 엉망이 되면서 돈만 내면 벼슬을 주는 '공명첩'이라는 제도까지 생겼다. 결국 돈이 있으면 양반, 없으면 상놈을 벗어날 수 없는 그런 등식을 오히려 국난을 당한 조정에서 자구지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논 팔고 집 팔아서 성을 얻는 자가 많아졌다. 당시 나라에서 3년마다 호적을 정리했는데 그때마다 성을 가진 인구들이 부쩍 늘어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점점 성씨를 취득한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나라가 망할 즈음 일제 치하에서 1909년 '민적법'이라는 것이 생기고 그때에는 전국적으로 한사람 빼놓지 않고 모두 성을 얻었다. 성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가짜 성을 만들었다. 당시 인기가 많았던 성씨가 김씨고 그 다음이 이, 박, 최, 정씨순이다. 그래 통계에서 우리나라 인구의 21%가 김씨로 약 1,000만 명, 이씨가 680만 명으로 15% 정도, 박씨가 390만 명 정도, 최 210만 명, 정씨 200만, 강, 조, 윤, 장씨는 90만 내외다.

 

새로운 성을 만들었던 사람을 제외하고 대부분 이미 있는 다른 사람 성씨 속에 은근설쩍 끼워넣었다. 김씨와 이씨가 많은 것은 조선이 이씨 왕조였고, 조선 말 세도정치로 60년 동안 정권을 장악한 안동 김씨가 나라를 쥐락펴락 하던 권문세가였으니 이왕이면 그런 성씨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양심이 찔리고 마음이 약해서 전주 이씨나 안동 김씨로 올리지 못하고 올려도 별 상관이 없는 김해 김씨가 가장 인기였다고 한다. 이미 옛날에 몰락한 신라왕조의 성씨니 쓴다 한들 누가 뭐라 할 것인가. 

 

본향으로 가장 많은 김해 김씨가 410만 정도, 그 다음 밀양 박씨가 300만 정도로 모두 몰락한 옛 왕조의 성씨다. 그다음은 전주 이씨 270만, 경주 김씨 170만, 경주 이씨 140만 정도의 순서가 된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안동 김씨 집안의 노비 3백 명도 한말에 일사분란하게 그 주인댁과 같은 안동 김씨가 되었다고 한다.

 

자손들이 번창하면 일정 기간이 지나면 같은 성씨의 인구가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토종 성씨들을 보면  증가 숫자가 늘어나지 않거나 오히려 줄어든 경우도 많고 한 마을에 집성촌을 이루는 경우는 양반 한 사람이 살았는데, 성씨를 갖게 허락되자 마을 전체가 그 양반 성씨를 따라 성을 바꾸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오늘날 0씨 집성촌이라는 마을은 대부분은 그런 경우가 많다.

 

 

마을이 통째로 같은 성씨

우리나라 같이 김, 이 두 성씨가 차지하는 비율이 전국민의 30%가 넘는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나라 밖에 없다. 일본이나 중국, 미국은 각자 성씨가 다양하고 독립적이며 각자 독자적으로 만들어 종류도 수만 가지다. 일본은 1만 가지 이상, 중국은 2만 3천 개 이상이다.  미국 역시 성씨가 수만 개지만 자유롭고 창의적인 것은 일본과 거의 비슷하다. 대부분 성경이나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에서 따 왔는데 가장 흔한 '존'은 '하나님은 고귀하다'라는 뜻이고 '로버트'는 '밝은 명성', '조지'는 '농부', '프랭크'는 '자유', '유진'은 '고상한', '리처드'는 '강력하고 힘 센 사람' 그런 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였다. 새로운 성씨를 만들거나 받는다는 것은 상놈이라는 증표이며 상놈이 아니라는 걸 나타내려고, 그 한을 풀어보려고 천신만고 끝에 성을 허락받았는데 어떻게 그 증표인 새 성을 가질 것인가. 그래서 어치피 성을 가질바에는 양반 성씨로 바꾸거나 끼워넣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는 상놈의 자식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두려웠을까? 새로 집을 짓기보다는 꼭 남이 살던 집에 들어가려 한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왜 그렇게 성씨 하나 용감하게 독립해 나가지 못했을까? 

 

그것은 창씨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던 조선의 폐쇄성과 권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무력하고 나약한 조선 상놈들의 한이 결국 이런 가짜 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대가 바뀐 오늘날까지도 조상을 자랑하고 족보를 내세우며 양반행세를 하려고 하고 한자께나 쓰고 자신의 가문을 들먹이는 자들은 대부분 늦게 양반이 된 상놈 출신으로 보면 된다.

 

그래서 현재 우리 성씨는 모두 합해 봐야 286개 언저리에 불과하다. 그것도 1960년대에는 258성이었는데 외국인들이 귀화하여 창씨를 하면서 좀 더 늘어난 것이다. 2008년 귀화한 '로버트 할리'는 '부산 영도 하씨'를 만들었고, 관광공사 사장인 '이참 씨'는 '독일 이씨'를 만들었다. 귀화 인구가 많아 지면서 성씨가 앞으로 더 늘어나겠지만 아무리 해 봐도 일본이나 미국처럼 수만 개가 된다는 것응 애초에 불가능할 것이다. 그나마 이 정도도 상당히 많아진 것이다.

 

고구려는 해, 을, 예, 손, 목, 우, 주, 마, 찬, 동, 연, 일지 등 10여 종에 불과했고 백제도 여, 사, 연, 협, 진, 국, 목 등 8대 성씨였다. 신라는 6대성이 이, 최, 정, 손, 배, 설이고 외래 성으로 장, 요가 있었다. 김, 박씨는 왕족의 성씨지만 김씨는 진흥왕 이후로 쓰이기 시작했다. 김씨, 박씨는 오히려 숫자가 가장 적었다. 박혁거세, 김알지 등의 이름도 수백 년 지난 뒤에 후손들이 성씨를 붙여준 것이지 처음에는 성씨 없이 혁거세, 알지 등으로 불렀다.

 

통일신라가 되면서 고구려, 백제 성씨는 사멸되고 고려 시대가 되면서 대부분 중국 성씨를 모방한 새 성씨가 생겨났다. 물론 지배계층만 성씨를 가졌다. 이때 특징은 각 지역별로 쓸 수 있는 성씨가 규제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토성이라 하는데 예를 들면 당시 인구 5천 정도였 전주의 토성은 이, 최, 정, 손, 배 설이다. 김씨는 아예 들어 있지도 않다.

 

이후 전주의 토성 손, 배, 설씨의 변화를 보면, 이, 최, 정씨와 비슷하게 인구가 늘어나야 정상인데 이씨는 지금 전국 600만, 최씨는 180만, 정씨 170만 언저리인 반면 손씨는 36만, 배씨는 32만, 설씨는 30만 내외다.

 

한 사람이 자손을 퍼뜨리고 오백 년 정도가 지났을 때 동일한 본관을 유지할 수 있는 숫자는 몇 백에서 많아야 천 명 근처가 된다. 토성도 아닌 김, 이, 박씨는 수백 만으로 늘어났는데 정작 토성은 제자리걸음 상태다. 이상하지 않는가?

 

우리 시골에 집성촌이 많은 것도 사실 이런 것과 무관하지는 않다, 17,8세기 이후 한 마을이 의견을 모아 통째로 같은 성씨가 된 경우도 많다.  그 마을에 낙향한 가난한 양반이 한 집 살고 있으면 그 고을의 성 없던 하천배들이 뭘 좀 걷어 바치고 부탁하여 같은 성씨로 입문한 경우가 많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평생 성씨도 없던 쌍놈들이 이름 번듯하게 갖게 된 것이 지금으로부터 겨우 일이백 년 전이다. 무더기로 김, 이, 박씨가 되었다는 추정이 충분하다.

 

성씨를 새로 만들던 일제 민적법 시행 당시 순사들이 각 집을 돌면서 원하는 대로 성씨 신청을 받았다. 가끔 한자의 획을 잘못 써서 희귀한 성씨가 나오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서서평(본명 일리제 셰핑)이라는 미국인 여성 선교사가 1912년 조선에 들어와 전라도 일대를 돌면서 병자를 돌보고 가난한 사람들을 가르치다가 그녀 역시 병으로 이 땅에서 죽었는데, 그녀의 평전에는 '여행기에 만난 500명 중 이름이 있는 사람은 명 명뿐이었고 여인들은 돼지 할머니,  큰 년, 작은 년 등으로 불리고 있어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 주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양반의 상징, 족보를 베끼다.

이런 엉터리 성씨와 함께 조선의 폐쇄성을 전적으로 입증하는 또 하나의 실체가 족보라는 것이다. 지금은 집집마다 족보가 없는 집이없지만 그것을 보면 우리 국민은 하나같이 왕가의 후손이고 명문가의 자손이다. 그러나 솔직히 족보에 나와 있는 어른들 중 5, 6대 이상은 자신의 선조일 가능성이 적다. 남의 족보를 빌려가 위는 베끼고 아랫부분에 현재의 자기 가족들을 집어넣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일제 때 이런 가짜 족보를 만들어 주고 한 재산 모았던 브로커들이 많았는데, 쌀 다섯 말이 기본이었다고 한다. 창녀의 자식, 비렁뱅이, 도적의 자식도 자수성가하여 훌륭히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박수갈채와 감동은 오히려 그런 곳에서 더 나온다.

 

우리나라 최초로 제대로 된 족보는 1476년 안동 권씨의 '성화보'인데 조선 초기에 족보를 가진 가문은 불과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족보 위변조는 상놈들뿐만 아니라 양반도 가세해서 상당히 조직적으로 벌어졌는데 일제 치하에서가 아니라 영조 때부터 이미 그런 기록이 보인다.

 

<영조실록> 40년 10월 19일 기록에 의하면, 사헌부에서 각지 관헌들의 뒷조사를 하다가 역관 김경희라는 자가 사사로이 활자를 주조한 다음 사람들의 보첩(족보)을 많이 모아 놓고 시골에서 군역을 면하려는 무리들으 유인하여 그들의 이름을 보첩에 기록하고 책장을 바꾸어 주는 것으로 생활하고 있다며 엄중히 조사하여 중히 다스리도록 임금 영조에게 건의하는 대목이 나온다.

 

김경희는 역관, 즉 중국어 통역관으로 신분은 양반도 아니고 상놈도 아니 중인계급이다. 이런 자가 각 관부나 사찰등에서만 갖출수 있는 인쇄시설을 마련해놓고 더구나 양반들의 조보를 다수 모아 가짜 족보 장사를 한것인데 그런 일은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김경희가 한 일은 어떤 가문의 족보를 인쇄한 다음 그 사이사이에 돈을 낸 상민들의 가족을 끼워 넣어주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려면 족보를 빌려준 양반이 있을 것이고 그러한 고객을 모집하려면 관헌을 포함하여 비호세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규모가 상당했으리라 짐작된다. 

 

상놈들이 족보를 갖게되면 우선 무슨 혜택이 있나?

 

가장 큰 것이 군역 면제다. 병역에서 빠지려는 자들의 꼼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당시 양반들과 관원, 성균관이나 지방의 향교, 서원 등의 유생들은 군역에 제외되었다. 당시의 관례는 족보를 신분증명서로 제시하고 양반임을 주장하면 당연히 군역에서 명제될 수 있었다. 상민들과 천민들이 거짓으로 족보를 만드는 족보 위변조 폐단과 관련하여 조정의 사헌부에서 각지 관헌들의 비행을 조사하다가 발각된 경우도 있고 백성들이 신문고를 울려 고발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족보 위변조가 단속만으로 쉽게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이 비단 병역 면제만을 노리고 족보를 위변조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천대받는 상놈 신분에서 족보를 지닌 어엿한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해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본능일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목적의 숫자가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위변조가 계속되자 도처에서 분란이 일어나고 도저히 중단시킬 형편이 되지 않자 18세기 말부터는 일부 변칙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용인해 주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족보에 '별보'니 '별파'니 하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 가문의 족보에 엉뚱하게 끼어드는 무리가 늘어나자 아예 금품을 맏고 그것을 양성화시켜 주되 정식으로 족보에 삽입시켜 주는 대신 족보 외에 별도의 추가 족보를 만들어 '별보'라고 호칭한 것이다. 우리 가문이기는 하지만 이 족보에 들어 있는 사람은 다소 의심쩍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 국립중앙도서관에 수집되어 있는 족보가 약 7천 질이나 되고 족보 연구소의 공개 자료를 보면 '가락'이라는 이름의 종친회만도 각 지역별로 50개나 된다, 경주 김씨 가문의 족보는 무려 107질, 안동 김씨 50여 질, 전주 이씨도 100여 질이나 된다.

 

모든 성씨가 많게는 100개 이상으로, 적어도 수십 개의 지파로 나뉘어 종친회를 구성하고 있다. 그야말로 전 국민은 전통 양반의 후예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그 결과 20세기 들어서는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족보를 가진 양반이 되었는데 호적에 적힌 본적과 성씨를 근거로 그런 족보에 들어갔음은 물론이다. 그중에는 해당 가문과 상의도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제작한 족보도 부지기수다.

 

해방 후 선거가 실시되면서 자기 가문의 위세를 숫자로 자랑해야 하는 시대가 되자 그 진위를 가려야 한다는 주장은 6.25 전쟁 과정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북 피란민들이 늘어나면서 성공한 재력가를 영입해서 자신들의 문중에 편입시켜 주는 사례도 많았다. 그에 대한 답례로 사업가는 막대한 문중 장학금을 기탁한 경우도 있다.

 

결국 조선 중기 이후부터 말기에 걸쳐 상놈의 신분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전 국민은 양반이 되었으니 이런 역사의 코미디가 어디 있을까.

 

다 합쳐 봐야 200여 개밖에 없는 성씨, 그리고 지금은 전 인구가 가지고 있는 족보, 이것이야말로 조선의 폐쇄성과 허구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상징하는 것이며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오늘을 보면 조선의 역사는 가식과 허세의 거대한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