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675 : 조선의 역사 217 (광해군일기 3) 본문

카테고리 없음

한국의 역사 675 : 조선의 역사 217 (광해군일기 3)

두바퀴인생 2012. 8. 12. 03:58

 

 

 

 

한국의 역사 675 : 조선의 역사 217 (광해군일기 3)

 

 

 

                                            

                                                                                      

                                                                                                                                                                                   

 

제15대 광해군 일기(1575~1641년, 재위: 1608년 2월~1623년 3월, 15년 1개월, 유배기간 18년)

 

 

2. 실리주의자 광해군의 과감한 현실정치(계속)

 

1613년 다시 '칠서의 옥'이 발생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사사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전락시켜 강화에 위리안치(집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했다가 증살(방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그 열기로 죽게 하는 방법)시키는 한편,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들을 삭직시킨다.

 

이후 1615년 능창군 추대사건이 발생해 능창군(인조의 아우)은 물론 이에 연루된 신경희 등이 제거된다. 능창군은 정원군의 셋째 아들로 일찍이 임진왜란 중에 죽은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한 인물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상이 비범하여 광해군과 대북 세력의 경계를 받아오던 인물이었다. 당시 죄수 소명국이란 자가 무고하기를 그가 신경희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 한다고 함에 따라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되고, 이후 살해당할 위험에 처하자 스스로 목숨을 끓었다. 이 사건으로 신경희는 사형당하고 양시우, 김정익, 소문진, 김아강, 오충갑 등은 유배되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신경희의 옥사'라고도 한다.

 

1617년에 이르러서는 폐모론이 대두하여 이항복, 기자헌, 정홍익 등의 폐모 반대론자들을 유배시키고 이듬해인 1618년에 인목대비의 존칭을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킨다.

 

이로써 광해군과 대북파는 왕권을 위협하던 모든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 패륜 행위를 일삼음으로써 오히려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고 말았다.

 

하지만 광해군은 '민생 안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도 하엿다. 광해군은 등극하자마자 1608년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 민간의 세금 구조를 일원화시키고 세무 부담을 줄여주었다. 1611년에는 농지를 조사하고 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점검하는 정책인 '양전'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확대하고 국가 재원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또 임진왜란 당시 궁궐들이 전소하여 월산대군 집에서 국정을 보는 상태였기에 광해군은 궁궐 재건축을 서둘러, 선조 말기에 시역한 창덕궁을 즉위년인 1608년에 준공하고, 1619년 경덕궁(경희궁), 1621년에는 인경궁을 중건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력을 무리하게 동원하는 일이 생기기도 해 민간의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당시 상황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국가 재정이 넉넉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궁궐 건축에 너무 무리한 인력과 재원을 투자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국고의 고갈을 초래하였다.

 

이 무렵 동북아 국제 정세도 급변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여진족 세력이 커져 후금을 건국하자 그에 대비하여 대포를 주조하고 평양감사에 박엽, 만포 첨사에 정충신을 임명하여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명나라의 원병 요청에 따라 강홍립에게 군사 1만을 주어 응하게 하였다. 그러나 부차싸움에서 명나라가 후금에 패하자 강홍립은 적당히 싸우는 체하다가 후금에 투항해 누루하치와 화해를 맺도록 하는 능란한 외교 솜씨를 보이기도 하였다.

 

1619년 3월 강홍립이 투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평양감사 박엽은 강홍립의 가족을 모두 하옥시켰다. 그리고 조정 대신들은 명나라를 배반하고 투항한 강홍립을 역적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가족을 모두 주살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대신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그 가족들을 한양으로 데리고 오도록 해 물품을 하사하고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조처를 취했다.

 

강홍립의 투항은 사실 광해군의 책략이었다. 즉 명나라에 대해서는 겉으로만 협력하는 체하면서 꼬투리를 잡히지 않았고, 후금에 대해서는 명의 강요에 의해서 출병했을 뿐 그들과의 우호를 다지겠다는 양면의 계책을 폈던 것이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이런 계책을 충실히 이행한 인물이었다. 강홍립은 후금에 역류되어 있으면서 게속해서 광해군에게 밀서를 보내고 있었다.

 

이 밀서 덕택으로 조선은 후금의 동정을 낱낱이 파악할 수 있었고, 그렇게 파악된 정보에 따라 대책을 세워 후금의 대대적인 침략을 예상하고 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광해군의 실리 외교론은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1609년 일본과의 송사조약을 체결하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대일외교를 재개하면서, 1617년 오윤겸 등을 화답사로 일본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임진왜란 이후 악화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칠서의 옥'과 '계축옥사'

 

1613년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 그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 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 심전의 서자 심우영, 목사를 지낸 서익의 서자 서양갑, 평난공신 박충갑의 서자 박치의,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얼 허홍인 등 권력가들의 서자 일곱 명이었다.

 

이들은 허균, 이사호, 김장생의 이복동생 김경손 등과 사귀면서 스스로를 '죽림칠현' 또는 '강변칠우'라고 칭하는 무리였다. 이들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서얼의 차별을 없애달라는 상소를 한 바 있는데 이것이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서 당을 조직한다. 이들은 윤리가 필요 없는 집이라는 뜻의 '무륜당'을 짓고 그곳을 근거지로 소금장수, 나무꾼 등으로 행세하며 전국에 출몰하여 화적질을 일삼다가 새재에서 상인들을 죽이고 돈을 약탈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 때 피살된 상인의 노비가 이들의 뒤를 미행하여 근거지를 알아내고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이들은 일망 타진되었다.

 

하지만 이 '칠서의 옥'은 단순한 강도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이첨 등 대북파의 중심 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창대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이첨과 그의 심복 김개, 김창우 등은 포도대장 한희길, 정항 등과 모의하여 이들 서얼 출신 화적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낸다.

 

이러한 자백은 칠서 중에 하나인 박응서가 광해군에게 비밀 상소를 올리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박응서는 이 상소문에서 자신들을 1608년에 명나라 사신을 저격한 바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고 한편으로는 군자금을 비축하고 무사를 모아 사직을 도모하려 하였고, 성사된 뒤에는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인목대비 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이루려 하였다고 했다.

 

이 상소문의 파장은 대단했다. 박응서의 상소 이후 대북 세력은 서양갑을 국문한 끝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 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며 인목대비 또한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모의에 가담하기로 했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된다.

 

이 사건으로 종성판관 정협을 비롯하여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받은 신흠, 박동량 등의 일곱 대신 및 이정구, 김상용, 황신 등의 서인 세력 수십 명을 하옥시켰다. 또한 이 사건의 취조 과정에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양자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능에 무당을 보내어 저주 했던 일이 발각되기도 했다.

 

그래서 김제남은 사사되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하였으며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강화부사 강항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 남인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계축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흔히 '계축옥사'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