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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28 : 조선의 역사 70 (세조실록 14)

두바퀴인생 2012. 3. 18. 04:19

 

 

 

한국의 역사 528 : 조선의 역사 70 (세조실록 14)

 

                                       

 

                                       

                                                                                       

제7대 세조실록(1417~1468년, 재위 1455년 윤6월 ~ 1468년 9월, 13년 3개월)

 

  

 

세조 시대의 평가 2

 

또 다른 네티즌의 글을 참고로 싣는다. 

 

1. 정권 자체의 정당성 결여

 

한 시대의 정치를 종합적으로 평가함에 있어서는 그 시대가 지향하는 이념적인 가치와의 관련성을 반드시 따져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조시대의 정치의 한계점을 살펴보기 위해 당시 지배적인 이념이었던 유교의 시각에서 세조의 정치가 어떠했는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다.

세조는 단종 초 극단적인 의정부 중심의 정치로 인한 왕권의 쇠미와 실추를 시정하기 위하여 계유정난을 일으킨 후 단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즉위하였다. 이에 그의 즉위는 당시에 통용되던 유교적인 가치관에 비추어볼 때 아무런 대의명분이 없는 것이었다. , 조선의 상속법은 부자 상속이지 형제 상속은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양자가 그토록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형제에게 자손이 없을 경우 다른 형제가 상속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상속하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것이다. 하물며 아들이 있는 상황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따라서 세종에서, 문종으로, 문종에서 단종으로 이어지는 것은 국법에 맞는 정통 계승이었으나 단종에서 세조로 이어지는 것은 당시의 유교적인 윤리로 생각할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국왕으로서의 세조의 지위에 상당한 제약을 가하는 것이었다. 즉 극단적인 왕권의 실추 상황에서 즉위한 세조에게 있어 시급한 정치적 과제가 왕권을 안정·강화하고 국왕중심의 정치를 실행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조의 정권 자체가 도덕성을 결한 정권이었던 관계로 그의 권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왕권 강화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유교적 정당성'이라는 문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세조는 유교국가인 조선의 국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 당시 유교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즉 조선의 전통을 숭상하고 불교행사를 거행하는 한편 집현전을 혁파하고 나아가 경연도 중단시켜버렸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자신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유교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유자까지 멀리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전제왕권으로 유명한 세조라 할지라도 자신의 지지기반 없이는 그 권력행사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그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특권'이라는 편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공신으로서 다수의 유자를 책봉하여 이들에게 물적·심적으로 상당한 특권을 부여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권력강화에 대한 어떠한 이념적인 도전이나 비판을 막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때때로 유자들로부터 자신의 정책에 대한 반대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고 오히려 지나친 특권 부여로 인해 훈척들의 권력농단의 길만 열어주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어떤 형태로든 왕으로서 통치를 해 나갈 수는 있었을지 모르나 결코 성군으로 추앙받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는 세조에게 있어서 유교적 정당성 부재라는 외부적 한계와 아울러 스스로 자신의 한계에 대해 인식함에 따른 심리적 열등감까지 부여하게 되었다.

 

2. 지나친 왕권 강화에 따른 폐단

세조는 즉위한 이후 강력한 왕권강화책을 꾀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유교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당시의 유신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기는 어려웠다. 모든 일에 있어서 대의명분을 절대시하는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아무리 선양의 형식을 갖추었다 해도 명분상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권력은 정당성을 갖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조가 왕권을 절대화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왕조가 건국 당시부터 표방한 유교적인 이념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세조가 유교적인 이념을 지양하려면 사회적으로 이미 조선의 지배계층이었던 사대부 세력도 청산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유신들의 지지없이 정국을 운영해 나갈 수는 없었으므로 세조의 왕권 절대화 작업은 처음부터 그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세조의 찬탈은 유학의 명분론에서 보거나 군신의 도리로 볼 때 당시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처사였다. 더욱이 불의로 득위한 세조가 즉위하자 유자의 이상으로 하는 의정부서사제를 폐하고 왕권강화를 위하여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하니 이에 반감이 없을 수 없었다.

또한 의정부서사제와 육조직계제왕권과 신권의 대립을 의미하는 제도로서 국왕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육조직계제를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반면에 관료들은 자신의 정치·경제적 이해의 측면에서 볼 때 의정부서사제의 시행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의정부서사제와 육조직계제의 대립은 유교적 명분론에 대한 왕권과 신권의 대립임과 아울러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른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 외부적으로 표출된 하나의 양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의정부서사제에서 육조직계제로 전환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양쪽의 어느 하나도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세조는 일방적으로 정책을 전환하였고, 관료들은 그에 대해 커다란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해도 세조의 왕권강화책은 세조 12년까지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이에 보법(保法)직전제(職田制)가 실시되고, 중앙과 지방의 정치·군사제도도 정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왕권강화와 부국강병책을 실행하기 위하여 실시한 직전법과 보법의 여파로 중앙관료는 경제력이 취약해졌고, 일반 양인과 같이 군역을 지게 되었다.

이에 이들은 중앙 정부에 대해 더욱 더 불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세조의 왕권이 강력할 때에는 불만을 표면화하지 못하다가 세조 12년 이후에 세조의 신병으로 왕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고, 한명회 등이 원상으로서 정치를 주도하게 됨에 따라 왕권이 동요하자 서서히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중앙의 관료들도 불만을 가졌지만 지방세력가들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세조 10년경부터 지방세력가는 반자치적(半自治的)인 성격을 가진 유향소(留鄕所-지방 군현의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기관, 수령 다음가는 관청이라 하여 이아(貳衙)라고도 함)를 중심으로 저항하였는데, 토착세력이 강한 충주.청주지방과 함길도 지방의 저항이 특히 심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세조 13 5월에 이시애 난(李施愛 )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이시애는 할아버지 이원경과 아버지 이인화가 검절제사·검교문하부사와 판영흥대도호부사·첨절제사를 역임한 길주지방의 토호(土豪)로서, 세조 4년 경흥진 병마절제사가 되고 이후 행지중구부사와 판회령부사를 역임하면서 함길도의 대표적인 세력가가 되었다. 함길도는 조선의 발흥지이고 북방 야인지역과 접한 관계로 지방관은 그 곳 호족 중에서 임명하여 대대로 다스리게 하였고, 남방민을 이주시켜 방어를 도모하였다.

그런데 세조시대에는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북도 출신의 수령을 점차 줄이고 서울에서 관리를 파견하였는데, 특히 난이 일어나기 직전에 함길도 병마절도사인 강효문(康孝文 ?~1467년, 용인 이씨, 문신, 영정휘 휘하에서 여진정벌)과 그 당여가 불법·탐학을 자행하여 민중의 원성이 높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조 13(1467) 4월 이시애는 동생 이시합, 매부 이명효 등과 함께 '하3도 군병들이 수륙으로 함길도로 진격하고 있다....조정에서 평안도와 황해도 병사를 보내어 설한령으로부터 북도에 들어와 장차 본도 사람을 모두 죽이려 한다'는 말로 민중을 선동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길주에 와 있던 절도사 강효문과 길주목사, 부령부사 등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을 모두 살해하고, 조정에 대해서는 '강효문이 한명회, 신숙주 등의 중신들과 결탁하여 모반하려 했기 때문에 그들을 먼저 죽였다.'고 하면서 거병의 정당함을 주장하였다.

이 후 이시애는 도내 각지의 유향소 토호들과 농민들의 호응을 받으면서 단주 · 북청 · 홍원으로 진격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을 모두 죽였다.

또 스스로 왕명을 받은 절도사라 칭하면서 함흥을 점령하고, 함길도 관찰사 신면(申沔 ?~1467, 영의정 신숙주의 아들)을 죽이고 체찰사 윤자운(尹子雲 1416~1478, 집현전 학사 윤회의 손자, 후에 영의정 역임)을 사로잡는 등 삽시간에 함흥 이북지역을 석권하였다.  

조정에서는 구성군 이준을 함길·강원·평안·황해도 4도총사, 호판 조석문(曺錫文 1413~1477, 창녕 조씨, 관찰사 조항의 아들, 후에 영의정 역임)을 부총사, 허종을 함길도절도사, 강순·어유소·남이 등을 대장으로 삼아 3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반군을 진압케 하였다.

처음에는 반란이 기세를 떨치고, 조정내부에서도 반란군이 한명회·신숙주 등 중신들이 자신들과 내응하고 있다고 한 이간책에 말려들어 차질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관군은 먼저 반군의 고립을 도모하고 반란지역 주민들을 회유하여 반군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어 동년(1467) 8월에 홍원·북청·이원 등지의 싸움에서 반군이 대패하고 이시애 형제를 체포·참수함으로써 난을 진압하였다.  

이 난이 진압된 후 조정은 57인의 적개공신(敵愾功臣)을 책봉하였고 지방반란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전국의 유향소를 폐지하고, 함길도를 남북으로 양분하여 통제를 강화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조는 정권 자체의 취약성으로 인해 측근 세력 확보를 목적으로 다수의 공신을 책봉하였으며 이들에게 다양한 특권을 부여하였다. 흔히 강력한 전제군주였다고 알려져 있는 세조조차도 자신의 지지세력 자체를 도외시할 수는 없었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더욱 의존하여 정국을 운영해 나갔던 것이다.

세조는 이들에 대해 반역에 관련된 죄가 아니고서는 끝까지 원훈(元勳)왕권(王權)과 일체로 생각하여 보전해 가고자 하였다. 이에 결국 처벌받지 않는 장기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었으므로 사회 도처에 비리가 만연하게 되었다. 관리들은 기강이 해이해져 뇌물을 주고받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 대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서슴지 않았다. 따라서 사회는 혼란스러워지고 그 속에서 힘없는 백성들의 피해만 늘어갔다.

 

 

3. 긍적적인 평가

 

비록 의롭지 못한 행위로 왕위에 오르고 상왕이 된 자신의 조카의 작위를 격하시킨 뒤 다시 그를 죽여서 큰 도덕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후 스스로 뉘우치고 정사에 몰두하여 재위 14년간 많은 치적을 쌓았으며 조선 초기의 왕권 확립에 공헌이 많았다. 글씨에 뛰어났다는 평도 있다.

 

건국 초기라 아직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던 왕권을 강화했고, 국방을 튼튼히 했으며, 개국공신에게 집중되었던 토지를 환수하는 토지법을 시행함으로써 국가재정을 확충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또 비록 그의 집권을 죽음으로써 막으려 했던 이른바 사육신 문제로 그들의 아지트였던 집현전은 폐지했으나,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법전이라든지 역사서 같은 공익적 편찬 사업을 주도하는 등, 학문을 발전시킨 공적이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 그밖에 호불(護佛)의 군주였다는 평도 있다.

 

세조의 치세 동안 신권이 감히 넘보지 못할 정도로 왕권은 조선 역사상 최고로 강화되었다. 그러나 세조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아닌 강압적인 철권 통치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새로운 인재들을 과감히 발탁하기 보다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측근을 중심으로 측근정치로 나라를 다스렸다. 또 자신을 조금이라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양정이나 남용신처럼 무조건 가차없이 죽여 버리기도 하였다. 홍윤성의 경우 자신의 숙부를 살해하였으므로 세조는 기회를 봐서 그를 처벌하려 하였으나, 공신들의 강한 반대에 부딛쳐 홍윤성의 노비들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투옥시키는 것으로 불문에 붙인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큰 기여를 해준 공신들을 대부분 죽인 할아버지 태종에 반해, 세조는 공신들을 내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대하여 결국 조선의 당파 싸움을 최초로 시작한 훈구파의 형성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토지측량 의상(儀象)을 스스로 제작하기도 해 15세기 천문학 발달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4.부정적 평가

 

조선은 수양대군 개인의 사욕으로 형성된 사회악인 공신집단들을 정리하고 정상적인 법치체계를 새롭게 형성하는데 수백년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그과정에서 제대로 외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수없는 피해를 봐야했고, 다시는 세종 시대에 만들어진 문화적이고 과학적이며 애민정신으로 점철된 세종 시대의 진취적 기상과 원칙을 갖추지 못한 체 소모적인 당파논쟁으로 무너지는 길을 걸어야 했다.

 

우리는 흔히 역사는 결국 진보한다고 하지만, 계유정란을 보면 간혹 한 개인의 무모한 행동이 역사를 얼마나 퇴보시키고 망칠 수 있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다소 나아졌지만 그래도 김종서보다는 한명회나 수양대군 같은 자들이 더 대접받고 영웅화되는 우리시대도 아직 갈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변으로 조카를 축출하고 상왕이 된 자신의 조카의 작위를 격하시킨 뒤 다시 그를 유배보낸 후 죽여서 큰 도덕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에 의해 등용된 사림파에 의해 오랫동안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 '공주의 남자'란 드라마에서 조선판 로미오와 쥬리엣에 버금가는 애틋한 남.여간의 사랑을 그리면서 시청자들을 끌어 모았고 인기리에 방영되어 주인공들이 일약 유명 배우로 발둗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작가는 김종서를 억울한 죽음을 당한 김승규의 아버지를 충신으로 그렸지만, 반대로 수양의 입장에서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고명대신들이 어린 단종을 등에 업고 '황표정사'를 빌미로 자신들의 측근들을 조정의 주요에 포진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면서 권력을 독식하고 있었다는 점과 그로인해 점차 세력이 증대된 고명대신들이 수양의 경쟁자인 안평대군과 힘을 합쳐 수양을 견제내지 유사시에는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바라보는 수양의 입장은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안평대군이 등극하는 날 자신은 제거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절박감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고명대신들에 의해 왕권이 농단되다가 결국에는 이씨 왕조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가중되었을 것이다. 

  

세조는 불만층을 영입하여 자신의 세력으로 키워 그들을 이용하여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권을 이을 수 있었지만, 한명회 등를 포함한 정난공신들은 세조를 이용하여 쿠테타에 성공함으로써 권력을 독식하며 자손대대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 조선 사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만 잡으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사회로 변질되어 갔던 것이다.

 

조선은 세조 이후 정난공신을 포함한 훈구세력들이 강력해지면서 세력이 왕권을 능가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사림파를 등용한 성종 시대를 거치면서 조선은 붕당정치가 형성되었고 훈구파를 몰락시키고 등장한 사림파도 결국 4색당파로 나뉘어지면서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모함을 포함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쓰러뜨리기에 혈안이 되었고 반대를 위한 반대가 성행되면서 나라의 안위는 당론에 따라 무시되었다.

 

그래서 서로 죽고 죽이는 여러 사화를 통해 당파싸움이 극을 이루면서 조선 조정을 이끌어갈 수 많은 우수한 인재들이 사라져갔다. 개혁성이 강한 강력한 왕이 등장하면 은밀히 독약으로 사망케 하고 무능한 어린 왕족을 찿아 즉위시킴으로써 신권 우위의 조선은 유교의 공리공론과 허레허식이 가득찬 사회로 유신들에 의해서 극도로 부패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당하여 백성과 국토는 불과 피의 바다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외척들이 등장하면서 조정과 관료사회는 부패의 늪에 빠지면서 망국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5. 태종과의 비교

태종조에는 정도전 등의 개국공신 세력들이 왕실보다 오히려 높은 곳에 있으면서 왕실을 조정하려고 한 경향이 있었고, 1,2차 오아자의 난을 통해 왕권에 도전하는 공신세력과 형제들을 모두 숙청하엿다. 그리고 재위 기간 내내 처남이던 민씨 일족을 처단함으로써 왕권에 조금이라도 도전 의지가 보이는 신하들은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철저하게 숙청하였던 사람이 태종이었고 강력한 왕권을 형성하여 아들 세종에게 물려줌으로써 세계사에 보기드문 성군이 되었고 문화창달을 이루어 태평성대를 이룰 수가 있었다.

 

그러나 세조는 계유정난을 일으켜 고명대신들인 김종서나 황보인, 안평대군 등을 처단함고 왕위를 이엇으나 윤리.도덕적인 결함으로 공신들을 우대하고 강력한 공포정치와 측근정치를 강구함으로써 공신세력의 비대화를 가져왔고 강력한 세력집단으로 성장하여 아들 예종, 성종을 거치면서 훈구파들이 득세하여 권력을 농단함은 물론 반대파를 양성한다면서 사림파를 등용하여 훈구파를 몰아내기는 하엿으나 사림파 역시 세력이 비대해지면서 ㅅ파당을 조성하게 되어 사색당파로 분리되어 서로 권력을 잡기위한 싸움질로 국가의 안위보다 당론이 우선시되는 신권우위의 정국이 계속되면서 왕은 허수아비요 유신들은 대를 이어 권력을 독식하며 부귀영화를 누리고 비리와 부패가 심해지면서 탐관들의 백성들에 대한 가렴주구는 날로 심해져 갔다.그러다가 나중에는 외척들이 등장하여 사림을 대신하여 국가 권력을 농단함으로써 조선은 치명적인 사회적 역동성과 유동성을 상실함으로써 망국의 길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정도전의 신권 우위론은 한마디로 무능한 왕이나 폭군같은 왕이 등장하면 나라를 망치기 쉽기 때문에 육조직계제보다 의정부사서제를 제도화함으로써 왕권을 제한하고 신하들이 조정을 이끌어 나간다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하나 결국은 신하들이 권력을 독식하며 부귀영화를 자손대대로 누리겠다는 탐욕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권우위 이론은 훈구파, 사림파, 사색당파, 당론 우선,파벌조성, 권력독식, 외척등장,무능한 왕 옹립 등으로 국가 발전보다는 가문의 부귀영화를 우선시하는 족벌, 파벌 권력집단을 형성하게 만들었고 오로지 정권창출과 권력 잡기에 골몰하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의 정치권의 모습을 만들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태종은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며 조선이 국가 발전을 이룰 기틀을 이루었으나, 반면 세조는 국가 발전의 내리막길을 조성한 최초의 장본인이라는 점이며, 그 여파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신권우위의 정국이 조성되면서 망국의 길을 열게 되었다는 점에서 비교가 될수 있다.

 

태종이 정변을 일으키기 직전에는 정도전 등의 개국공신 등 신하들이 왕권의 위에 있으면서 강력한 신권을 넘어 왕실을 조정하려고 한 경향이 있었고, 문종 때에는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김종서나 황보인 등의 대신들이 정권을 천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신권(臣權)이 강화되어가는 시점에서 왕족들과 일부 훈신들은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에 왕권의 강화를 표명하고 나선 것이 태종 이방원과 수양대군 세조가 나타났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세조는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 왕권의 행사가 왕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의 원인이 어린 단종과 고명대신인 김종서와 황보인, 그리고 안평대군의 모호한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의 해결은 점진적인 개혁책으로서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또 그들이 그것을 허용하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왕이 왕다움을 행사하는 것을 되찾기 위한 것은 바로 이들에 대한 단호한 결단만이 가능할것이라고 하여 `계유정난'을 통해 이룩해 내었던 것이다.

 

 

6. 맺는말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있어서 많은 수의 국왕 중에서 오늘날 언급되는 통치자의 수는 얼마 되지 않으며 각각에 대해 일반에 알려져 있는 사실 또한 제한되어 있다. 세조 역시 그에 해당하는 경우로서 우리는 단순히 '세조'라 하면 조카를 죽인 비정한 숙부 내지 정변을 통해 정당성 없는 정권을 획득한 비윤리적·비도덕적 지배자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치 제반의 제도를 정비함과 아울러 민생안정(民生安定)을 위해 노력하였고  또 한편으로 자신의 왕권 강화에 힘씀에 따라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이로 인해 세조는 능률적인 측면에서는 훌륭한 임금으로 생각되어져 왔다.

그러나 우리는 세조의 정치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이것만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 즉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세조의 정치를 평가하려면 세조의 정치적 업적과 함께 그 시대가 지향하는 이념적인 가치와의 관련성을 따져보아야 하는 것이다.

사실 근래,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고 능률, 효율만이 강조됨에 따라 최근에 이르러서는 세조의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보다는 그 업적의 문제에 치우쳐 세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대적 가치라는 측면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특히 정치라는 것은 효율만 강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난 몇 십 년간의 군부독재가 오늘날까지 다소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사실은 능률만을 따지는 우리들의 오류인 것이다. 또 문민정권 이후 강력한 지도력을 상실하고 지역과 파당을 우선시한 역대 정권도 국가 발전보다는 자신들의 권리추구에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하다보니 나라의 발전은 도외시되었고 국방과 안보는 땅에 떨어졌다. 말바꾸기를 아침저녁으로 하며 표리부동한 언행을 일삼고 국민들을 우롱하며 재벌과 결탁하여 낙하산 인사로 각종 비리와 부패가 만연해졌고 척족들의 부귀영화를 도모한다면 그러한 지도자는 세조와 공신들의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세조의 업적이라는 측면과 아울러 당시의 지배적인 가치관인 유교적 시각에서 세조가 지닐 수밖에 없었던 한계점을 살펴보았다. 결국 세조는 앞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측면에서의 효율적 극대화는 이룰 수 있었으나 당시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었던 통치를 행한 것이다.

이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던 부정적인 평가를 하던  부정적인 평가를 하던 그것은 각자가 판단하기 나름이다. 다만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객관성을 견지하는 한편, 현대의 시각의 시대적 가치도 함께 고려하며 세조의 정치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보다 직접적으로 현실에 적용하여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는 한편 유익했던 점은 살려나가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5. <세조실록> 편찬 경위 

  

<세조실록>은 총 48권으로 본문 47권과 부록 1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부록에 종묘와 제례에 쓰는 음악 악보를 수록한 점이 특징이다. 이 책의 정식 명칭은 '세조혜장대왕실록'이며, 1455년 윤6월부터 1468년 9월까지 13년 3개월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술하고 있다.

 

<세조실록> 편ㅌ찬 작업은 1469년 예종 1년 4월에 시작하여 1471년 성종 2년에 완료되었다. 이 작업은 이미 그 이전부터 에비 작업을 거친 상태여서 시작한 지 며칠 안 된 4월 초에 1권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 이른바 '민수의 사옥'이 일어나는 바람에 실록 편찬은 큰 여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시건의 발단은 사초를 거둘 때 사간의 이름을 기록하게 한 것이세 비롯되었다. 대간에서는 사초에 서명을 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서명을 할 경우 소신껏 쓸 수 없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사관들은 왕명에 따라 서명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민수는 사관 시절에 대신들에 대한 비판을 많이 가했던 것이 마음에 걸려 사초를 몇 군데 뜯어 고쳤다. 이것이 발각되자 예종은 민수를 제주에 관노로 보내고 서명을 반대하던 사관 두 사람은 사형에 처하였다. 그 사건이 있은 후에도 실록 편찬은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예종이 죽고 성종이 욍위를 계승했다. 그리고 2년 만인 1471년 12월 15일에 완성되어 성종이 찬진을 마쳤다.

 

이 편찬 작업에 참여한 주요 인물로는 영관사에 신숙주와 한명회, 감수에 강희맹과 양성자 등이었고, 나머지 58명이 실무를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