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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05 : 발해의 역사 8 (제2대 무왕 대무예 2 ) 본문
한국의 역사 205 : 발해의 역사 8 (제2대 무왕 대무예 2)
정치 세력 분화와 대당 강경책
반당파 정국 주도와 등주 공격
726년 당이 흑수말갈에 기미주를 설치함으로써 발해에서는 흑수말갈 토벌을 둘러싼 지배층의 의견 대립, 흑수말갈 토벌의 강행, 대문예의 망명 등 긴박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대문예가 726년에 망명한 것이 아니라 730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발해의 등주 공격까지 6년이란 시간 동안 여러번 당에 사신을 보냈다는 점은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발해가 무척 노력하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흑수말갈이 730년 5월과 6월의 연속 입당을 마지막으로 사신 파견이 중지된 점에서 바로 이 시기에 흑수말갈 토벌이 이루어졌고, 이 시기에 대문예가 당으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흑수발갈을 포함하여 말갈 제부족이 당에 사신을 보낸 것을 보면 당과 교섭을 시작한 713년부터 당이 흑수말갈에 기미주를 설치하기 직전인 725년까지 불녈은 12회, 흑수말갈과 월희는 각각 7회, 철리는 10회이지만 726년부터 732년까지는 각각 0-3회 이내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는 발해가 흑수말갈을 토벌한 결과로 추정된다.
이 시기 발해가 당과 빈번한 통교를 한 것은 표면적으로 신속 관계를 유지하면서 흑수말갈과 망명간 대문예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로 분석된다. 그래서 흑수말갈의 토벌 시점은 726년으로 보아야 한다. 727년 4월 당 현종이 발해 무왕에게 칙서를 내려 위로한 이유도 대문에 망명 이외에 달리 방안을 찿을 수 없으며, 신당서 발해전에 대문예가 망명한 지 십년후에 등주를 공격하였다는 기록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726년 발해 무왕은 두 차례나 사신을 당에 보내 대문예의 처벌을 요청하였지만 당은 친당파인 대문예를 적극적으로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당은 대문예를 영남으로 유배보냈다고 통보하였다. 그러나 그 사실이 거짓임이 드러나 발해가 재차 항의하자, 당은 정보유출의 책임을 물어 홍려소경을 문책하고 대문예를 영남으로 유배보냈다.
이런 가운데 당은 728년 흑수부 도독에 임명한 예속리계에게 이헌성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운휘장군 및 흑수경략사를 제수하고 흑수말갈을 유주도독 관할에 두었다. 이는 발해의 흑수말갈 토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의 영향력이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이해 4월에 당에 숙위로 가 있던 무왕의 적자 대도리행이 사망하였다.
당은 무왕의 요구를 타이르면서 은근히 협박을 하였는데, 이는 무력 동원도 불사하겠다는 것과 신라 문무왕의 예를 들어 관직을 삭탈하고 당시 숙위로 당에 있던 김인문을 신라왕에 임명하여 귀국시키려고 했던 것처럼 대문예를 발해왕에 책봉할 수 있다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당은 당시 칙서를 작성한 장구령을 승진시켰는데, 당이 대문예를 보호하는 것은 반역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무왕이 동생을 해치는 것은 무왕 자신에게도 흠이 되므로 이를 막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논리상 열세에 처한 당을 우세로 전환시키고 평화적으로 발해의 충성을 유지시킨 공으로 승진한 것이었다.
발해는 731년 10월까지 계속 당에 사신을 보내 대문예 문제를 일단 외교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대문예의 망명 이후에도 발해 내부에 친당파가 적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당은 흑수말갈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한편 대문예 송환 문제는 미온적으로 대하면서, 형제의 의리라는 명분을 내세워 은근히 국왕 교체를 암시하였다. 무왕의 적자이며 당시 당에 숙위하던 왕위 계승자 대도리행이 사망한 상황에서 대문예가 당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은 무왕의 왕권을 위협하는 불안한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의 압박은 결국 발해로 하여금 대당강경노선으로 치닫게 하였다.
발해가 대당강경노선을 선택하게 된 배경에는 거란과 해가 돌궐과 함께 당을 공격하기 시작한 국제적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당의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푸대접 받은 거란의 가돌우가 730년 5월 이소고를 죽이고 해와 함께 돌궐에 투항하여 당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거란은 730년 6월 영주를 침략하였고, 732년 2월에는 유주 북쪽을 공략하였다. 732년 9월에는 발해가 등주(지금의 산동서 봉래시)를 공격하였다. 발해 수군은 압록강을 내려와 요동 반도 남단에 이르렀다가 묘도열도를 거쳐 등주를 급습하였던 것이다. 발해군이 등주 자사 위준을 죽이자, 불의의 습격을 받은 당은 이듬해 좌령군장군 개복순으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토벌케 하였다. 한편 당은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에서 병사를 징발하여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고, 신라로 하여금 한반도에서 발해 남부를 공격토록 하는 협공작전을 전개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특히 신라군은 출정한 때가 겨울로 마침 10척이 넘는 엄청난 폭설이 내려 병사 태반이 동사하는 등 피해가 속출하자 철수하였던 것이다. 당의 이러한 발해 토벌작전이 벌어지자 무왕은 격노하였는데, 특히 대문예가 당군의 장수가 되어 발해를 공격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반역보다 더한 적군의 장수가 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한 것이었다. 그래서 무왕은 자객을 보내 대문예를 암살하기로 하고 당시 낙양에 기거하던 대문예를 천진교 남쪽에서 찔렀으나 죽이지는 못하고 실패하였다. 733년 윤3월에 발해는 거란과 함께 유관도산 즉 유관의 도산에서 당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바로 마도산 전투이다.
734년 돌궐의 비가가한이 죽자 급속히 봉괴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곧 734년 12월 거란과 해가 당에 복속하였던 것이다. 한편 신라가 734년초에 단독으로 발해를 공격하려고 시도하였고, 당은 735년에 신라에게 패강 이남의 영유권을 인정해 주고 발해를 견제케 했다. 이처럼 국제정세가 발해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발해 무왕은 대당강경정책을 포기하게 되었다.
무왕의 대당강경정책이 발해 내부에 미친 영향은 흑수발갈의 토벌을 강행함으로써 대외적으로 말갈제부의 이탈을 방지하였고. 대문예의 소환을 집요하게 당에 요구함으로써 내부적으로는 친당파를 대부분 숙청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현주 천도
발해는 대외적으로 긴박했던 시기에 동모산에서 현주(나중에 중경)로 천도하였다.
대조영이 처음 건국한 곳은 동모산이었다. 동모산은 현재 중국 길림성 돈화시의 성산자산성으로 비정된다. 그런데 선산자산성은 수도를 방어하는 산성이기 때문에, 별도로 거주공간으로 평지성이 수반되었다. 성산자산성과 결합된 평지성은 종래 오동성(산성에서 북동쪽으로 15킬로미터 거리)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영승유적(산성에서 북동쪽으로 5킬로미터 떨어진 목단강 너머)이 주목되고 있다. 이처럼 산성과 평지성이 결합된 형태는 고구려식 방어체계의 특징이었다. 발해의 첯도읍지를 의미하는 구국은 바로 동모산 즉 성산자산성과 인근의 평지성인 영승유적을 포함한 일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698년 구국에서 건국한 발해는 756년 무렵 상경으로 천도하기 이전에 한 차례 현주로 천도하였던 것이다. 구당서에 의하면 천보 이전에 발해가 현주로 천도한 것으로 나온다. 천보는 742-756년 사이 문왕(737-793) 전반기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천보 이전은 개원(713-741) 연간으로 무왕에서 문왕 초기까지 해당된다. 이 가운데 무왕대는 발해가 주변으로 활발하게 영역을 확장하던 시기였다. 이에 자극받은 흑수말갈과 당의 결탁은 흑수말갈을 둘러싼 발해와 당의 갈등을 거쳐 732년 9월 발해의 등주 공격으로 확대되었다. 이와 같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감안할 때, 당시 발해의 수도 규모가 협소한 구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시기를 전후하여 현주로 천도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현주 즉 중경은 현재 길림성 화룡시 서고성에 비정된다. 남쪽으로는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이 서북쪽에서 동남방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곳 두도 평야의 서쪽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해란강 유역의 평야 중에서 가장 큰 두도 평야는 불규칙한 타원형으로 동서 길이 약 30킬로미터, 남북 너비 약 10킬로미터이며 그 주위에는 구릉들이 둘러싸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은 토질이나 기후, 교통 및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사람이 거주하기에 일대에서 가장 적합한 곳이다. 발해가 수도를 협소한 구국에서 중경으로 천도한 데에는 이러한 입지 조건이 기본적으로 고려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 두만강에 이른다는 사실은 바다 건너 일본과도 통교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발해가 일본에 처음 사신을 파견한 것은 727년이었다. 이는 당과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당과 가까운 신라를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던 것이다. 이때 보낸 국서에서는 '제번을 총괄하며, 고구려의 영역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간직했다.'라고 하여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의식을 적극적으로 표방하고 있다. 여기에서 발해의 계승국에 대한 증거나 나오고 있으나 중국 등 주변국에서는 이러한 점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발해의 건국집단이 고구려 계승의식을 갖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대문예가 흑수말갈 토벌을 반대할 때 제시한 근거는 강성했던 고구려가 당의 일격으로 멸망했기 때문에 고구려보다 약소한 발해의 경우도 당과 대적해서는 불가하다는 논리였다. 여기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지만 이직 세력이 미약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대문예의 논리의 문제점은 고구려가 강성하지 못해서 멸망한 것이 아니라 연개소문의 자식들간의 권력 투쟁으로 남생이 당으로 도망하여 고구려 정벌에 앞장섰기 때문에 요동 일대의 고구려 성들이 스스로 문을 열고 남생에게 항복하였고 분열된 군사력으로 당군에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고구려는 자체 권력 투쟁으로 인한 내분으로 멸망의 길을 가게 된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당으로 망명하여 고구려의 남생처럼 똑같이 발해 토벌에 앞장서서 공격하였던 인물이다. 그러나 무왕의 단호한 저항으로 실패하였던 것이다. 대문예의 논리는 내부적으로는 왕위 계승권에 대한 욕심이 내재되어 있었고 흑수말갈 토벌에 스스로 앞장서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무왕의 분노를 자극하였던 것이다.
무왕은 대문예와 달리 더 적극적으로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방하고 있다. 이는 위기상황하에서 발해 지배층을 통합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무왕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대문예와 같은 미약한 의식을 극복하고 더욱 적극적인 자의식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또 말갈제부의 이탈을 방지하고 말갈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말갈이 고구려에 복속했듯이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에도 복속하여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중경 천도를 즈음하여 반당파가 친당파를 누르고 정국을 주도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개입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