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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60 : 신라의 역사 59 (제39대 소성왕) 본문
한국의 역사 160 : 신라의 역사 59 (제39대 소성왕)
제39대 소성왕
소성왕(昭聖王, ? ~ 800년, 재위: 798년 ~ 800년)은 신라의 제39대 왕이다.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준옹(俊邕)이다. 소성왕(昭成王)이라고도 한다. 원성왕의 장손이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장남인 인겸(仁謙, 惠忠太子)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聖穆太后) 김씨이다.
생애
아버지가 태자로 죽었으므로 궁중에서 자라서 789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 후 대아찬이 되고 시중 등을 거쳐 이듬해 병부령이 되었다.
795년 태자로 책봉되어 왕위에 올랐다. 당의 덕종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 검교대위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재위 2년 만에 죽어 이후로 신라 왕위 쟁탈전의 원인이 되었다.
가계
- 아버지 : 혜충태자 김인겸(惠忠太子 仁謙)
- 어머니 : 성목태후 김씨(聖穆太后)
- 왕비 : 계화부인 김씨(桂花夫人 金氏) - 대아찬 숙명(叔明)의 딸
참고
신라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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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대 소성왕 실록
( ? ~ 800년, 재위기간 : 서기 799년 정월~ 800년 6월, 1년 5개월)
1. 소성왕의 짧은 치세
소성왕은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아들이며, 성목왕후 김시 소생으로 이름은 준웅이다. 원성왕이 아들 인겸을 태자에 책봉하였으나 791년에 사망하였고, 다시 아들 험평을 태자에 책봉하였으나 그 역시 794년에 사망했다. 두 아들이 죽고 셋째 아들이 남아 있었으나, 원성왕은 장손 준옹을 태자로 책봉했다.
혜공왕 말기에 이찬 지정이 친위혁명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이 반혁명을 일으켜 지정과 싸웠다. 경신은 이때 양상을 도와 지정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다. 그 덕분에 그는 김양상(선덕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 상대등이 되었고, 선덕왕이 죽자 측근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준옹은 원래 태자의 아들로서 궁중에서 자랐고, 78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대아찬 직위를 받았으며, 790년에는 파진찬에 재수되었다. 그리고 791년에 전 시중 이찬 제공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제압하여 공을 세우고 시중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병으로 1년 6개월 만에 시중에서 물러났다가 792년에 병부령이 되고, 79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798년 12월 말에 원성왕이 죽자, 이듬해인 799년 정월에 왕위에 올랐다.
원성왕 재위 5년인 789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왔다는 것은 이미 그가 이때 성년의 나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에 왕위에 올랐으니, 그는 30대 였을 것이다.
30대라면 혈기 왕성할 때지만, 그는 지병을 앓고 있는 몸이었으므로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년 5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그 때문에 재위 기간이 너무 짧아 그는 주목할 만한 업적을 거의 남기지 못했다. 기껏해야 즉위년 3월에 청주의 노거현을 국학생의 녹읍으로 정한 정도이다. 이는 당시 국학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장학금 형태로 녹읍이 지급되었다는 뜻이다.
그의 치세 기간 동안 특이한 기록 몇 가지는 아래와 같다.
즉위년 5월에 우두주에서 도독이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였다.
"소와 같은 이상한 짐승이 나타났습니다. 그 짐승은 몸체는 길고 크며, 꼬리 길이가 석 자쯤 되고, 털은 없고 코가 길었는데, 현성천에서 나타나 오식양 쪽으로 갔습니다."
얼핏 듣기에 코끼리를 지칭하는 것 같은데, 당시 신라 땅에 코끼리가 유입됐는지는 의문이다.
또 즉위년 7월에는 길이가 아홉 자나 되는 인삼을 캤다는기록이 있는데, 아홉 자면 거의 3미터에 달한다. 이는 매우 기이하게 여겨져 당나라에 바치게 하였는데, 당나라 덕종은 그것이 인삼이 아니라 하여 받지 않았다고 한다.
소성왕은 한 명의 부인에게서 아들 둘과 딸 하나를 얻었다. 부인은 계화왕후 김씨로서 대아찬 숙명의 딸이었다. 그녀는 아들 청명과 체명, 딸 장화를 낳았다.
청명은 소성왕이 죽은 뒤에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애장왕이다.
체명은 809년에 숙부 언승(헌덕왕)과 그의 조카 제륭이 반란을 일으키자, 애장왕을 호위하다가 애장왕과 함께 반군에게 살해되었다.
장화는 숙부인 수종(제42대 흥덕왕)과 결혼하였고, 수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후가 되었다. 하지만 흥덕왕이 즉위하던 해에 사망하여 정목왕후에 추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