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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49 : 신라의 역사 48 (신라의 대당 전쟁 3)

두바퀴인생 2011. 2. 7. 02:39

 

 

 

한국의 역사 149 : 신라의 역사 48 (신라의 대당 전쟁 3)

 

신라의 대당전쟁 3
- 20만 대군을 격파한 매초성 전투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중국의 영토로 만들려는 당제국의 계획에 맞서,  670년 3월 부터 7년간에 걸친 대격전을 치루게 된다. 
 이 7년간의 전쟁중에서도 특히 675년 9월에서부터 676년 11월까지 14개월동안은 절정을 이루었다.


신라는 676년
9월(음력) 천성전투에서 설인귀가 이끄는 당의 수군을 격파하는등,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특히 당나라의 남하전략이 임진강전선에서 막힌데 이어, 해상과 수로를 통한 수송로 확보계획마저 천성전투의 패배로 차단되자 매초성에 주둔하고 있던 20만의 대군은 사실상 고립상태에 이르게 된다.

 

매초성 전투에 대한 논란

 그런데 매초성 전투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너무 짧다.

삼국사기는 "문무왕 13년(675년)9월 29일 당나라 장수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초성에 주둔했는데 우리의 군사가 공격해 쫓아버리고 전마(戰馬) 3만380필을 얻었으며 그 밖에 노획한 병기도 이만큼 됐다."는 간략한 내용만을 전하고 있다. 획득한 군수물자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사망자수도 참여한 장군의 이름도 나와있지 않다.

개인적으로 매초성 전투는 많은 부분이 축소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을 증명할만한 역사사료는 전무한 편이어서 입증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고증작업과는 무관하게 매초성 전투는 신라가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거둔 승리중 최대의 승전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최근 중국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 매초성 전투를 과연 신라의 승리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주장의 핵심은 전투의 중요성에 비해 동원된 신라군의 병력 수나 지휘관, 전투의 상세한 경과 등이 기록에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나당전투에서는 전사자의 수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는데 비해 유독 매초성 전투만은 전사자 수가 전혀 언급되어있지 않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바이겐싱 섬서 사범대 교수는 극단적으로 '매초성 전투에서 신라의 승리라고 할 만한 사건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 매초성 전투에서 이근행이 참패했다면 중국 측 기록에 처벌 기록이 있어야 하지만, 이근행이 676년 적석도 경량대사로 임명돼 토번 토벌전에 종사할 뿐 처벌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또 바이 교수는 "결국 매초성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는 증거는 없으며 이근행은 중국 조정의 명령에 따라 자주적으로 철수했거나 아니면 전투가 벌어졌어도 피해 규모가 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대만 학계에서도 나당 전쟁에서 당군이 물러난 것은 당의 군사력이 토번의 팽창 방어에 집중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견해가 있다. 결론적으로 토번 등 더 위급한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당군이 이동 배치된 것일 뿐 신라에 군사적으로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국권 학자들의 주장이다.

국내 학계에서도 675년 9월에 벌어진 천성 전투에 주목하며, 매초성 전투가 중요하긴 하지만 천성전투의 승리로 인해 부수적으로 얻은 승리 정도로 평가하려는 견해가 있다.

 

비록 매초성 기록이 축소되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증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매초성 전투를 회의적으로 보는 중국권 학계의 주장이나 일부 국내학계의 주장을 반박할만한 근거는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우선 매초성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의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견해에 대해서 되짚어 보자. 당시 신라가 노획한 전마만 3만필이 넘는다. 그것이 그리 크지 않는 피해란 말인가? 현대로 생각하자면 경전차 3만대를 노획한 거와 같은 규모이다. 이 세상의 어떤 군대가 그런 엄청난 물량의 군수물자를, 적에게 그냥 넘겨 준단 말인가? 또 고대의 정서상, 전마는 일반 보병 병력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될 수 있다.

보병 병력 3만명을 희생해서라도 전마를 살릴 수 있다면 차라리 그것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3만필의 전마와 3만 여 기의 병장기를 버려두고 후퇴해야 되었던 상황....  물론 철군 전략상, 신라군의 추격 속도를 늦추기 위해 고의적으로 병장기를 버려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 하더라도 매초성으로 추정되는 경기도 양주 일대와, 당나라군의 철군 주무대가 되었을 항포구 사이의 간격이 너무 조밀하다.

무려 20만명의 병력을 일시에 철군시키는 일이 불가능한 이상, 신라가 공격을 시작하였다면 어떠한 경우라도 대규모 접전은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또 병장기는 의도적으로 버려두었다고 해도 3만필에 이르는 전마까지 포기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같은 패배를 당하였다면 과연 이근행에 대한 처벌 기록은 왜 없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답은 간단하다. 즉 토번 토벌전에 종사하였다는 그 자체가 문책성 인사조치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만약 이근행에 정당한 대우를 받았다면 중앙 정계에서 활동해야 되는 것이 합당하지 않았겠는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그리고 척박하기 그지없는 변방 토번(현재 티벳지역)에 투입되었다는 것을 결코 지나쳐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왜  매초성 전투에 참전하였던 신라 장수 이름이 단 한명도 거론되지 않느냐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의 이름이 유일하게 나온다. 그는 당과 벌인 석성전투에서 패전에 책임을 지고 관직을 박탈당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잃어버린 역사의 실마리가 나올 수 있다. 즉 그는 관직이 없었기 때문에 이름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관직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차후 나당간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공식적으로는 거론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비록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하였다고 하더라도, 형식적으로는 상하관계의 조공행위가 유지되는 이상 구태어 당나라가 패배를 자인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수나라때 처럼 패전 장수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패배를 자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여러 전투에서는 당나라의 수급을 벤 숫자가 정확하게 나와 있는데, 유독 이 전투에 대해서만 전사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는가란 마지막 의문이 남는다.  그러나 평양주둔군과 옛 백제지역군은 혼성군이었는데 비해 매초성에 주둔해 있는 당군은 순수 당나라 출신 정예군이었다.  어차피 묻어버리기로 한 역사의 현장에서 굳이 사망자를 언급하여 중국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있었겠는가? 

요약하자면 매초성 전투는 예상을 뛰어넘는 승리였을 뿐더러, 다른 지역의 전투와는 성격이 다른 전투였기 때문에  역사속에 살아있는 체로 묻히는 비운을 맞았던 것이다.


                                                           

 

매초성 전투

상대는 20만명에 이르는 대 병력,  그러나 신라로서는 앞으로 얼마만큼이나 당나라의 더 전쟁을 치뤄야 할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효율적인 작전을 구사해야만 돼었다.

더구나 당군이 매초성안에 있는 이상, 숫적으로도 열세인 신라가 선제공격을 통하여 해법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당군이 먼저 군사행동을 시작하여 대대적으로 공격에 나선다면 자칫 한강전선마저 붕괴될 수 있었기 때문에 공격시기를 기다릴 수 만도 없는 상황이다.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어렵고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수는 더욱 없는 675년의 음력 9월 늦가을, 임진강 전선은 그렇게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천성전투에서의 승리로 인해 해법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육로와 해로를 통한 군수물자의 보급의 모두 차단된 상태에서, 20만이나 대는 대군이 좁은 매초성에서 겨울을 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그들은 어떤 식으로던 그 성을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신라로서는 유리한 소식이 몇가지 더 들려왔다. 당의 남서쪽에서는 티벳이  북쪽에서는 돌궐이 그리고 동쪽에서는 대조영이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나라는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 중 다수를 철군 시킬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여기에 20만에 이르는 주력군이 매초성에 갇혀 집단 아사의 위기에 몰렸다는 소식은 더욱 철군을 서두르게 하였을 것이다.

이제 기회는 왔다. 바로 9월 29일이다.  김원술을 비롯한 수많은 역전의 용사들은,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어떠한 명예나 대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도, 또다른 한편으로는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유지해야 되는 문무대왕의 고충을 잘 이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매초성 전투에 참가한 대부분의 용사들은, 문무대왕이 태자 법민의 자격으로 백제 원정에 참여하였던 660년부터 15년간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전우들이기에 그의 심정과 고민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화랑 용사들이라면, 명예나 영웅심 그리고 보상 따위을 바라지 않는다. 그곳이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이고, 그곳에서 그들이 행하는 일이 우리의 생존과 역사를 지키는 일이라면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매초성에 주둔해 있던 당군이 철군을 위해 성문을 열고 나와 우왕좌왕 할 때가 기회였다. 한참 철군 준비로 부산한 당군에게 있어 맹렬하게 공격해 오는 신라군을 막기엔, 아무리 숫적인 우외에 있다고 해도 불가능 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수만 필의 전마와 수만 여기의 병장기를 챙길 여유조차 없었다.

 결국 20만에 이르던 당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전투가 끝났을 때는 신라군조차 믿을 수 없는 결과가 펼쳐지고 말았다.
 

하지만 끝내 이날의 승리는 온전하게 기록되지 못하였다. 다른 전투였다면, 말갈이나 거란무리 혹은 백제무리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외교적 논리로 풀 수 있었지만, 매초성에 주둔해 있던 20만 대군은 당의 주력군이지 않은가?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는 1차적으로 돌궐이나 일본같은 적대 세력을 견제할 수 있을 뿐더러, 2차적으로는 신라인 모두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거둘 수 있었다. 비록 외교문서를 작성할 때 굴욕감과 자존감을 참아야 하는 인내가 필요하지만, 고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 정도의 외교적 절차는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이다.

적의 수급을 베는 일은 승전 후 논공행상을 위해서이다. 이 매초성 전투에서 당군의 수급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은 다만 논공행상이 이루어 지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지, 그것만으로 매초성 전투를 평가절하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매초성 전투는 수많은 신라의 장군들과 9군의 군대가, 명예는 물론 마땅히 받아야 할 포상까지도 포기하면서 걷은 승리였기에, 오히려 가장 명예로운 전투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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