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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26 : 신라의 역사 25 (제17대 내물왕 2)

두바퀴인생 2011. 1. 14. 11:36

 

 

 

한국의 역사 126 : 신라의 역사 25 (제17대 내물왕 2)

 

 

2. 계속되는 각축전과 내물왕의 수난

석씨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내물왕은 일단 민심을 달래는 데 매달렸다. 재위 2년(357년)에 각 지역에 특사를 보내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을 위문하도록 하고 그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도록 했다. 또한 효성이 깊고 우애가 돈독한 관리들을 천거토록 하여 그들의 직급을 올려주기도 하였다. 재위 3년에는 시조묘에 제사를 올리고 절차에 따라 즉위식을 치렀다.

 

그러나 내물왕의 치세는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가장 골칫거리는 역시 왜군이었다. 왜군은 재위 9년(364년) 4월에 대병을 이끌고 신라 땅에 상륙하여 금성을 공략하였다. 왜군의 기세를 쉽게 물리칠 수 없다고 판단한 내물왕은 고심 끝에 속임수를 써서 적을 무찔렀는데, 이것이 이른바 '속임수 계책'이엇다.

 

내물왕은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허수아비에 병기를 들게 하여 토함산에 나열해 놓았다. 그리고 정예병 1천 명을 부현 동쪽 벌판에 매복시켜 두고 왜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왜군은 병력이 많은 것을 믿고 무조건 토함산으로 진격하였는데, 그 길목인 부현에서 신라 복병을 만나 크게 혼쭐이 났다. 혼비백산한 왜군이 급히 퇴각하자, 내물왕은 군대를 대거 동원하여 그 뒤를 후렸다. 결국 왜군은 엄청난 병력 손실을 입고 돌아갔다.

 

이 사건 이후, 왜와 신라의 관계는 한층 악화되었다. 그러나 왜는 크게 패한 뒤라 쉽게 다시 침략하지 못했다. 그간 신라는 백제와 화친을 유지하며 국력을 다져 나갔다. 368년에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내물왕에게 선물했다.

 

당시 신라는 366년에 닥친 홍수의 후유증으로 크게 곤란을 겪고 있었는데, 이때의 홍수로 산이 크게 열 군데나 무너져 민가의 피해가 대단하였다. 그런차에 백제 왕이 선물을 보내오자, 내물왕은 백제의 성의를 흔쾌히 받아들었다.

 

그러나 이때 근초고왕이 신라에 선물한 것은 다른 의도가 있었다. 당시 백제는 왜와 국교를 맺으려 했는데, 화친 관계에 있던 신라가 마음에 결렸다. 그래서 신라를 달래기 위해 내물왕에게 선물을 안겼던 것이다.

 

이렇듯 신라와 백제의 관계는 미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던 중 ,373년에 양국 관계를 냉각시키는 중대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백제의 독산 성주가 백성 3백 명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신라는 한 해 전에 발생한 가믐과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고 유랑자가 늘어나 불안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물왕은 주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독산 성주와 그 백성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6부에 나누어 살도록 했다. 이에 근초고왕이 이 일로 불같이 화를 내면서 신라에 항의 서한을 보내왔다.

 

"두 나라가 화목하게 형제처럼 지내기로 약속했는데, 지금 대왕께서 우리나라에서 도망간 백성들을 받아들이니, 이는 회친하자는 뜻과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번 일은 대왕께 기대하는 바가 아니니, 속히 우리 백성들을 돌려보내기 바라오."

 

그러자 내물왕도 사신 편에 답신을 보냈다.

 

"백성이란 항시 같은 마음을 갖는 게 아닙니다. 왕이 그들을 생각해 주면 오고 힘들게 하면 가나니, 백성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니겠소. 대왕께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주지 않은 것은 반성하지 않고, 과인을 책망함이 어찌 이토록 심할 수 있소이까?"

 

이 사건으로 백제와 신라는 한동안 옥신각신하였고, 관계도 소원해 졌다.

 

그 무렵,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다. 중국 북방에는 모용 선비가 쇠락하고 있었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영토 확장을 꾀하였다. 결국 두 나라가 세력을 다투는 양상으로 치닫고, 369년 9월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병력 2만을 동원하여 백제의 치양성을 공격하면서 양국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이후 고국원왕과 근초고왕 사이에 국가의 자존심을 건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다. 급기야 371년에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병력 3만을 이끌고 평양성을 급습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큰 성과를 거두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백제와 고구려는 돌이킬 수 없는 원수지간이 되고 말았다.

 

백제의 독산 성주가 백성들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한 사건은 이런 경황 중에 발생하였다. 백제는 신라의 처신이 못마땅하였지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당시 백제의 근초고왕이 병환으로 병상에 누어 있는 처지였는데, 고구려가 이런 사실을 알고 375년 백제의 북쪽 요새인 수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근초고왕은 그런 와중에 생을 마감하였고, 이어 왕위에 오른 근구수왕이 377년에 평양성을 재차 공격하였다. 이 전쟁으로 고구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고구려의 역습을 받은 백제의 피해도 대단하였다.  따라서 양국은 이 전쟁 이후 함부로 군대를 동원하지 못했다.

 

그러나 양국의 전쟁은 끝난 게 아니었다. 양국은 국력이 회복되면 언제라도 다시 침입할 수 있었고 서로 창날을 겨누고 있었다. 그래서 백제는 가야를 통해 왜와 동맹을 맺었고, 고구려도 신라와 관계를 강화하고자 했다. 신라 역시 독산 성주 사건으로 백제와 등을 진 데다가 왜의 침입에 대항할  양으로 고구려와 화친을 맺어 둘 필요가 있어 급속히 고구려와 가까워 졌다. 이에 따라 국제 관계는 백제-가야-왜 삼국 연합과 고구려가 대결하고, 신라는 양쪽 눈치를 보는 형태를 취하였다.

 

그런 까닭에 쉽게 서로에 대해 침략을 감행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391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호방한 성격의 광개토왕은 즉위 하자마자 과감한 영토확장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때 백제는 진사왕과 아신왕이 정권 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내정이 불안한 상태였다. 광개토왕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갈군을 동원하여 백제의 적현성을 급습하여 무너뜨렸다. 그러나 백제는 내정의 불안으로 적절히 대처할 수가 없었다.

 

그 무렵, 왜는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전쟁 준비에 매진하고 있었다. 왜의 침입이 예상되자 내물왕은 불안에 떨고 있었는데, 마침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와서 신라를 도와주겠다며 동맹을 요구했고, 신라는 고구려의 제의를 수용하는 의미로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신라의 협조 의지를 확인한 광개토왕은 392년 7월 병력 4만을 이끌고 백제의 대륙기지를 공격하였고, 순식간에 열 개의 성을함락시켰다. 또 10월에는 백제의 북방 요새인 관미성을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시켜 버렸다.

 

그러나 백제는 여전히 내정이 불안한 탓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고, 그러다가 392년 11월 아신왕이 진사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백제의 정권 다툼은 종식되었다. 이후 아신왕은 광개토왕에게 잃은 땅을 회복하기 위해 반격을 개시하였고, 때를 같이하여 왜는 대병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해 왔다.

 

왜군이 신라 땅에 진주한 것은 내물왕 재위 38년인 393년 5월이었다. 대군을 이끌고 온 왜는 불과 며칠 만에 신라 전역을 장악하고 금성을 포위하였다. 내물왕은 병력의 열세를 감안하여 철저하게 성문을 닫고 수성전으로 버티었다. 내물왕의 작전은 주효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왜군은 피로에 지쳤고 군량도 떨어졌다. 그래서 왜군은 바다로 퇴각할 기세를 보였다. 그 사실을 눈치챈 내물왕은 급히 정예 기병 2백을 내보내 적의 퇴로의 관문을 지키도록 했다. 그리고 퇴각하는 적을 보병 1천을 보내 뒤를 후리도록 했다.

 

왜군은 독산 길을 이용하여 바다의 함선으로 빠져 나가려 했는데, 이미 신라군이 독산의 퇴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 지리에 어두운 왜군은 그 사실을 모르고 무조건 바다 쪽으로 몰려가다 신라의 기병과 보병의 협공에 말려 대패했다.

 

신라는 가까스로 왜군을 몰아내기는 했지만, 금성을 제외한 전 지역이 왜군에 짓밟힌 만큼 그 피해는 대단했다. 그 때문에 신라는 복구 작업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395년 8월 갑자기 말갈이 북쪽 변경을 노략질 하였다. 다행히 실직벌(강원 삼척)에서 말갈군을 대파한 덕분에 말갈의 재침은 없었다.

 

이렇듯 누차에 걸친 전쟁으로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던 중,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가믐이 닥쳤다. 397년 7월에 하슬라(강릉) 지역에 큰 가믐이 들더니, 메뚜기 떼가 극성을 부렸다. 이 때문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내물왕은 죄수들을 방면하고 1년간 세금을 면제하는 등 특단의 조치를 내려 겨우 난국을 타개했다.

 

그러나 399년 7월에 또 한 번 메뚜기 떼가 나타나 하늘을 메우고 들판을 뒤덮었다. 이로 인해 훙년이 계속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또 왜군이 침공해 왔다.

 

신라는 흉년으로 나라 안이 어수선하고 민심도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하에서 왜군을 상대하여 싸우자니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신라 전역이 왜군의 발아래 짓밟혀 초토화되었고, 금성도 거의 함락 직전에 있었다. 내물황은 급히 고구려에 서신을 보내 원군을 요청하였다. 다행히 광개토왕이 원군 5만을 보내왔다.

 

금성 함락에 혈안이 되어 있던 왜군은 고구려의 5만 병력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왜군은 신라군과 접전을 벌인 탓에 많이 지쳐 있었고 고구려군을 상대로 싸울 여력이 없었다.

 

밀물처럼 물려든 고구려군은 순식간에 신라 땅에서 왜군을 몰아내고, 가야로 몸을 피했던 왜군을 쫓아 가야 땅까지 쳐들어가 왜군을 내쫓았다.

 

고구려군은 거의 싸우지도 않고 왜군을 물리쳤으며 내물왕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고구려에 조공을 맹세했다.

 

당시 내물왕은 일흔이 가까운 나이였는데, 그 연로한 몸으로 광개토왕의 사신에게 무릎을 끓고 고구려의 속국이 되겠다고 맹세했으니, 눈물을 흘리면서 슬프게 울었다는 이야기다.

 

이 사건 이후, 내물왕은 건강을 잃고 몸져누운 듯하다. 이듬해인 401년 7월에 고구려에 인질로 갔던 실성이 돌아왔는데, 내물왕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고 보인다. 당시 내물왕의 장남 눌지가 어린 소년이었기 때문에 실성이 왕위를 이을 적임자로 지목되고 있었다.

 

내물왕은 실성이 돌아온 지 7개월 만인 402년 5월에 생을 마감했다. 칭호는 전 왕들과 마찬가지로 이사금을 사용했으며, 능은 첨성대 서남쪽에 마련되었다. 마림간이란 칭호는 내물왕 대부터 사용되긴 했으나, 정식 칭호로 사용된 것은 눌지왕 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내물왕의 부인은 보반부인 김씨이다. 누구의 딸인지는 분명치 않다. 보반부인 소생으로 눌지왕(제19대), 복호,미사흔 등 세 아들이 있다.

 

복호는 내물왕의 차남이며 실성왕 재위 11년(412년)에 고구려의 요구로 그를 인질로 보냈다. 그의 형 눌지는 417년에 실성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는데, 눌지왕은 아우들이 타국에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을 몹시 고통수러워했다. 그래서 복호를 귀환시킬 생각으로 적임자를 물색하였는데, 신하들이 입을 모아 삽량주 간을 맡고 있던 박제상을 천거했다. 이에 눌지왕은 박제상을 불러 복호를 데려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재상이 고구려에 가서 장수왕에게 복호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자, 장수왕은 그의 논리와 설득에 옳다고 판단하여 418년 정월에 복호를 귀환시켰다.

 

미사흔은 내물왕의 삼남으로 실성왕 즉위 원년에 왜의 요구에 따라 그를 인질로 보냈다. 큰 형 눌지가 실성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자 그를 귀환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적임자를 찿았는데, 복호를 대려왔던 박제상이 자청하고 나섰다.

 

박재상은 모반을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왜에 망명한 것처럼 꾸민 뒤에 왜왕에게 신라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왜를 침략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 무렵, 눌지왕은 재상의 계책을 돕기 위해 재상과 미사흔의 가족을 모두 감옥에 가두었다. 그래서 왜왕은 제상의 말을 믿고 미사흔과 제상을 향도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려 했다. 왜인들을 안심시킨 제상의 도움으로 418년 가을 미사흔은 배를 타고 도망쳐 신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미사흔에 대한 기록은 없고 눌지왕 17년(433년) 5월에 사망하여 서불한에 추증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쁀이다.